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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5: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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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
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훈련을 받습니다. 저는 군에서 받는 훈련 중에 가장 힘든 훈련이 유격훈련이었습니다. 처음 유격 훈련을 받을 때 조교들이 시키는 대로 다 하니까 밥을 먹는데 손을 올려 숟가락 질 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국가에서 사람을 인간 이하 취급하며 고된 훈련을 시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훌륭한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만들기 위해 때때로 고된 훈련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군인이라고 다 유격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군인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 유격훈련을 받는 것처럼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 뜨려 훈련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죽음의 웅덩이에 떨어뜨리기도 했고 노예로 팔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기도 했으며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미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예언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애굽에 가게 만들어 인생 밑바닥을 통과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창 15:13-14)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 때 가서 애굽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민족 지도자로 세우기 전에 밑바닥 훈련을 시켰습니다. 화려한 애굽의 왕자로서 훈련을 받던 그가 하루아침에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의 목동으로 40년 동안 인생 밑바닥 훈련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17여년 동안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되어 인생 밑바닥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요나도 욥도, 다니엘도, 예레미야도, 룻도, 에스도도 인생 밑바닥 훈련을 통과시켜 하나님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한 시대 쓰셨습니다. 오늘 나오는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밑바닥을 바울을 훈련시키는 장소로 사용하십니다. 바울은 억울하게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은 인생의 밑바닥입니다. 대부분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장소, 비참한 장소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입니다. 대제사장의 신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당시 최고 학부인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의 계획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행 21:11을 다시 보십시오.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을 합니다.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 21:11)"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바울은 자신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20장 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행 20:23)" 하나님께서는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는데 바울을 사용하기 위해 바울을 인생의 밑바닥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훈련의 과정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인생 밑바닥, 감옥에 집어넣고 어떤 훈련을 시켰을까요?
1.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1-5)
1)바울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오늘 성경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감옥에 2년 있는 동안 역사의 장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식민지 이스라엘의 로마 총독이었던 벨릭스가 소환되고 신임 총독 베스도가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부임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화려한 취임식을 했겠습니까? 바울은 이 화려한 취임식 소식을 감옥에서 초라하게 들었을 것입니다. 취임을 한 후 하루 쉬고 다음날 그가 다스릴 땅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 때 과거 대제사장 뿐 아니라 현직 대 제사장 유대인의 권력자들이 신임 총독 베스도를 맞이합니다. 총독 취임 후 처음 만나는 최고 권력가들의 화려한 만남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들은 만나자 말자 무엇을 요구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신임 총독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에 보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법으로는 되지 않으니까 사람을 매복했다가 테러를 통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총독이 바뀌었고 세월이 2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죽이려고 합니다. 사람은 한 번 찍어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행이 바울은 베스도가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되어 있으니 도망갈 염려가 없고 자신이 곧 가이사랴에 갈 것이기 때문에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내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는 화려한 세상 권력자의 등극과 그들의 노리갯감처럼 취급받는 초라할 대로 초라해진 바울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로마의 권력자는 정치적 권력을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자랑합니다. 바울은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문명 앞에 십자가는 참으로 초라할 수 있었습니다. 나무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신 역시 지극히 초라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바울도 예수님만 믿지 않았다면 그 화려한 자리에 초청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한 마리 짐승처럼 얼마나 초라합니까?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는데 감옥에 갇혀 그 사람을 죽일까 살릴까 논란을 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합니까? 지금 바울은 젊을 때가 아닙니다. 노년의 때입니다. 아이의 초라함은 어머니의 주의를 끌고, 노숙자의 초라함은 구제하는 사람들의 동정을 이끌어 내고, 청년의 초라함은 젊은 처녀의 주의를 끌어 동정을 살 수 있지만 노인의 초라함은 그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합니다. 노년에 감옥에 갇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월을 기다리는 바울의 모습이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초라하겠습니까? 바울을 심문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베스도 총독의 정치적 권력에 비하면 바울의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초라할 뿐입니다. 새 총독과 어깨를 같이하고 바울의 생명을 좌지 우지할 정도의 화려한 종교적 권력을 가지고 는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권력자들 앞에 바울의 종교적 힘은 얼마나 초라합니까? 그들의 노리개 감처럼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다니며 세 번째 심문을 받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2)우리도 때로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인생의 밑바닥에서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초라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집도 화려한 큰 집을 좋아합니다. 차도 큰 차를 타고 교회도 크고 화려한 교회를 다녀야 합니다. 초라한 지하 교회를 다니는 것은 견디지 못할 일입니다. 초라하면 열등의식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한 시대 지도자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빈곤에 처할 줄도 알고 부요함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배고파 보지 못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용하기 위해 화려하게 살고 싶었던 그를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뜨려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동이 되어 보아야 무수히 많은 백성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려하게 달과 별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삶을 살고 싶어했던 요셉을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뜨려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수히 많은 억울한 사람들, 초라한 사람들을 다스려야 할 총리가 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감옥에 집어 넣기도 했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혀가게도 하였고 극한 파탄의 상황으로 몰아 넣기도 하며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호세아나 욥과 같은 사람은 완전히 가정이 파탄에 처하게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질 때 초라함으로 쓰러져서는 안됩니다. 초라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화려해 지기 위해 변절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초라함이 필요하다면 당당하게 그 초라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때 분명한 가치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 초라한 것이고 무엇이 진정 화려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훈련받아야 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초라한 훈련을 받는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겪게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초라한 환경이지만 바울은 결코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결코 비굴하게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 앞에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법정에서도 당당하였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고소한 것처럼 율법을 어긴 것도 없고 성전을 더럽히지도 않았고 정치적 혁명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보내고자 하는 베스도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치 않았으며 만약 죄가 있다면 죽는 것도 사양치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초라하지 않습니다. 자부심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을 초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믿는 복음이 초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바울이 믿고 전하고 있는 복음이야 말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살릴 수 없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감옥에 갇히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8)"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초라한 현장에 들어 가 있다고 해도 우리의 삶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가난해도 작은 차를 타도, 작은 교회를 다니고, 작은 집에 살도 초라함없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는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삶이 어떤 삶일지라도 예수님에 비하면 결코 초라한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얼마나 초라하게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까? 태어날 곳이 없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했던 제자들이 배신하였습니다. 수제자라고 하는 사람은 저주까지 했습니다. 십자가에 무참하게 짓밟혀 돌아가셨습니다. 무덤이 없어 남의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초라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초라함과 수치를 이미 다 십자가에서 당하고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어떤 인생의 바닥에서도 초라해 질 수가 없습니다. 초라함의 늪을 지날 때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연약함을 인정하며 초라함의 훈련을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있을 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라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인생은 초라하게 끝이 납니다. 중환자실에 가보십시오. 죽음의 현장에 가보십시오. 얼마나 초라합니까? 예수 믿고 사는 삶이 초라하지 않는 삶이고 인생의 마지막이 복스러운 죽음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떤 경우일지라도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결코 초라한 삶이 아닙니다.
2. 억울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6-12)
1)바울은 억울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총독 베스도가 가이샤라에 가서 다시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무죄가 입증된 재판입니다. 바울은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재판만 세 번(22:30;24:1-22) 받는 셈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죄가 있어 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녀 사냥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반공법 집시법 국가 보완법을 다 같다 붙이면서 사형수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변사를 동원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에게 위압감을 주며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바울은 가이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선처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대항하여 보복한 것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사실을 증언합니다. 율법을 거스린 것이 없고 성전을 더럽힌 적도 없고 가리사에게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베스도는 바울에게 무죄 선언을 한 후 즉시 석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반감이 두려워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신도 바울이 죽일 만한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25). 그런데도 다시 아그립바 왕에게 다시 심문하도록 합니다(23). 지금 2년 동안 죄가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천부장도 그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총독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전임 총독 벨릭스도 무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2년 동안 풀어 주지 않고 퇴임해 버렸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제 새 총독이 왔습니다. 새 총독도 바울이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풀어 주지 않고 유대 지도자들을 환심을 사기 위해 감옥에 결박해 놓고 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우리가 몰라서 억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면 억울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속에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금 2년 동안 갇혀 있는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풀려났으면 어떻게 될까요? 2년이 지났는데도 자객을 통해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지친 사람입니다. 오히려 감옥에서 자유를 누리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재충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옥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면 하나님의 말씀 바울 서신을 기록하길 원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옥중 서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우리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억울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억울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억울하면 힘있는 사람들은 복수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체념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억울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다 의탁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억울해 합니다. 목회하면서 감옥 갇힌 사람을 여러차례 면회해 보았는데 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왜 내가 이렇게 잡혀 나만 고생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보다 죄를 지은 사람도 많은데 왜 나만 잡혀 이 고생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질병에 걸려 죽음을 앞에 놓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만큼 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억울해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가면 누구나 억울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이 억울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억울할 때 내가 그 억울함을 풀려고 덤벼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니다. 오늘날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원리는 "맞지만 말고 너도 때려라."라는 것입니다.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히 10:30)"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억울함이 있습니까? 잠 못 이루는 억울한 일을 당하실 때가 있습니까? 분노로 얼굴을 붉혀야만 하는 억울함을 당하신 분 있습니까? 직장 상관에게, 때로는 시어머니에게, 시집 식구들에게, 배우자에게, 교인들에게, 목회자에게, 경쟁자에게, 동역자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였습니까? 어떤 억울한 일도 우리 하나님이 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한 일들을 만이 당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위선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0장에 보면 이중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바울은 멀리 떨어져서 편지를 쓸 때는 아주 담대한 것 같지만 가까이 와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겁쟁이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면하면 비굴하고 떠나 있으면 용맹하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술수와 타산적 이해, 세속적인 관심을 위주로 선교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연약하고 무력한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형편없는 설교자라고 했습니다. 편지는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바울은 억울해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계궤와 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엡6:11-18) 사람과 문제를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육체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권위를 통해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잃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억울함을 많이 당했습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는데 그것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심지어는 장인이 아내를 주었다가 다시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억울함을 사람에게 풀지 안았습니다. 하나님께 토했습니다. 요셉이 당한 억울함 만큼 큰 억울함을 당하였습니까? 승진이나 인정받는 것이나 우리의 미래가 사람에게 달여 있지 않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억울한 감정을 안겨 준 사람에게 달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억울하다고 편법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란 책을 보면 큰 공장에서 18륜 디젤 트럭을 수리하는 기계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일터에서 오랫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술자리 참석 안는다고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답니다. 그러나 그는 참고 견디었답니다. 회사 내 최고의 기계공이었고, 근면하고 성실하여, 매번 최고의 성과 기록하였답니다. 그러나 7년 동안 승진이나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봉급 인상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관리자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인이었고 하나님이 억울함을 풀어 주실 줄 알았기 때문에 묵묵히 참고 견디었답니다. 어느날 회사 사장이 자신을 불렀답니다. 말단 직원인 그는 사장을 만나본 적이 없었답니다. 사장은 그를 만나자 은퇴할 때가 되어 회사를 대신 맡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답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하여 "자네에게 회사를 맡기고 싶네"라고 말했답니다. 기계공은 깜짝 놀라 황급히 대답했답니다. "저도 그러길 바라지만 제게는 회사를 인수할 돈이 없습니다." 사장은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군 자네는 돈이 필요 없네 내게 돈이 있으니까 나는 회사를 맡아 줄 사람을 찾고 있네 내가 시작한 일을 계속할 믿을 만한 사람 말일세. 나는 이 회사를 자네에게 주고 싶네 " 실화입니다. 허무 맹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풀어 주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나라를 위해 골리앗을 무너뜨렸는데 아무 잘못도 없이 도피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이지 않습니다. 비록 사울이 부당한 행동을 하였지만 그의 지위와 권위를 존중해 주었습니다.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그 지위와 권위를 존중해 주었습니다. 덩달아 무례하게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이사랴의 법정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으로 믿고 그 권위에 대하여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생에 사울이 찾아 왔을 때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억울함 훈련을 통과한 다윗에게 넘치는 복으로 억울함을 풀어 주었습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갔지만 결국 하나님이 풀어 주시고 총리로 삼아 주었습니다. 억울함을 푸는 열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져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 주겠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의 길만 막을 뿐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비난하고 수군댈 때 억울하다고 편법으로 상황을 바로 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부당함이 있을 지라도 앞에 하나님께 모두 맡기고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울함의 시험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결국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시험이 클수록 보상도 큰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귀신들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귀신의 왕이라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억울한 일을 묵묵히 참으로 우리를 구속하고 용서하고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어떤 억울함도 그 억울함을 다 하나님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억울함을 밝히려 하지말고 그것을 훈련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억울함을 밝히려 하면 할수록 훈련이 끝나기까지 더 인생은 밑바닥으로 떨어집니다.
3. 지루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13-27)
1)바울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지루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13절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수일이 지났습니다. 아그립바왕과 그의 누이 버니게가 신임 총독을 축하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야곱을 죽인 헤롯의 아들입니다. 버니게는 아그립바 2세의 한 살 아래 누이이자 벨릭스 전(前) 총독의 처인 드루실라(24:24)의 언니입니다.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촌인 헤롯과 첫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48년에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고 있었답니다. 그가 왔을 때 할 말도 많았을 것입니다. 처리할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바울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신임 총독은 아그립바 왕에게 사건 개요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치적 종교적으로 사형시킬 만한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송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19) 황제의 판결을 원해서 황제에게 보내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바울을 부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당시 둘은 근친 상간 관계가 있었다고 소문이 나있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사람같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앞에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2년 동안 계속적으로 반복된 감옥 생활입니다. 말이 2년이지 아침에 일어나 저녁 자기 전까지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지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권력자들이 불러 물어 보는 것은 똑같은 것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네 번째입니다. 2년 동안 감옥 생활도 지루한데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해서 심문합니다.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바울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이 지루함의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2)우리도 때로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인생의 밑바닥에서 지루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잘 참지 못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얼굴은 못생겨도 지루함은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돈이 없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지루함은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신호등 앞에서도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전철 안에서도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지루한 것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닥치는 대로 먹거나 약물을 복용하고, 술을 마시며,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 현대 문화에 익숙해진 신앙인도 지루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 편법을 쓰던지 포기하던지 합니다.
그러나 지루함은 존재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성장과 훈련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지루함을 통해 인내의 훈련, 기다림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지루한 기다림 없이 아이가 태어날 수 없고 지루한 기다림 없이 나무가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훈련의 과정없이 외국어를 잘 할 수 없고 훌륭한 군인이 태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루함은 창조와 성장을 위한 고통입니다. 은혜는 지루함을 견뎌내는 사람의 몫입니다. 씨앗은 지루한 것같지만 모르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지루함을 견뎌야 성장하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지루함을 느낄 때 사람들은 시간을 가장 잘 의식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지루함 때문에 편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감옥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노년에 감옥에 있는 동안 다 바울을 떠났습니다. 언제 감옥에서 풀려날지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 때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딤후 4:17)"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 떠난다 하여도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지루함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바심을 낸다고 하나님의 시간표가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임신하면 일정한 기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초조해 한다고 도움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 대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지루하게 보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사탄을 신경죄약에 걸리게 만드는 비결은 인생의 밑바닥에서도 좋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 지루함 속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마음의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고 정신이 똑바르지 않으면 고난은 더 오래 지속되는 것입니다. 기다림에는 인내심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기다려야 할 바에는 과정을 즐기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궁금해 하며 몸부림 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가장 좋은 시간에 상황은 바뀌어 집니다. 2년 전과 똑같은 것같지만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대상이 다릅니다. 우리는 잘 몰라 지루한 것같지만 하나님의 우리 인생의 깊은 곳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은 큰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정한 때가 오면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합 2:3)" 하박국 선지자의 선언처럼 정녕 응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17년을 지루하게 기다림의 훈련을 받은 다윗은 시31:15절에서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7년 동안 왕위에 오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이라는 지루한 시간을 기다림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이라는 기다림을 훈련을 받았습니다. 지루하다고 아브라함처럼 그릇된 길로 가 이스마엘을 낳고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37:7)"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애 3:25)"라고 말씀합니다. 노아는 비오기까지 120년을 기다리며 방주를 지었습니다. 지루함에 지쳤다면 노아는 그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루함을 극복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 하나님이 선을 베풀어 주시고, 형통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지루해 하지 않고 기다리면 웃음의 날이 오고 인생 역전의 날이 옵니다.
하나님은 먼저 상황을 바꾸시길 보다는 지루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바꾸시길 원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지루한 인생의 밑바닥 훈련을 통해 복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훈련시키기 원하십니다. "태양은 매일 떠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밥을 매일 먹고 매일 쉬어도 지루하지 않듯 태양이 매일 떠올라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심장이 매일 뛰고 매일 잠을 자도 지루하지 않듯 태양을 있게 하신 이를 매일 만나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늘 새로움으로 만족을 추구하지만 결국 참으로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것이고 지루하지 않는 반복된 예배는 생명을 낳고, 안식을 누리게하고 거룩한 행복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행전 1:4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지루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초라함도 억울함도 지루함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초라함을 극복하고 억울할 때 주님께 맡기며 지루할 때 소망을 가지고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인생 밑바닥에서 통과시키며 이 세 가지 훈련을 시킵니다.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 억울함을 극복하는 훈련, 지루함을 극복하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을 잘 마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합당한 그릇으로 로마에까지 가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설교 중에서-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 때 가서 애굽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민족 지도자로 세우기 전에 밑바닥 훈련을 시켰습니다. 화려한 애굽의 왕자로서 훈련을 받던 그가 하루아침에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의 목동으로 40년 동안 인생 밑바닥 훈련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17여년 동안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되어 인생 밑바닥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요나도 욥도, 다니엘도, 예레미야도, 룻도, 에스도도 인생 밑바닥 훈련을 통과시켜 하나님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한 시대 쓰셨습니다. 오늘 나오는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밑바닥을 바울을 훈련시키는 장소로 사용하십니다. 바울은 억울하게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은 인생의 밑바닥입니다. 대부분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장소, 비참한 장소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입니다. 대제사장의 신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당시 최고 학부인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의 계획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행 21:11을 다시 보십시오.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을 합니다.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 21:11)"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바울은 자신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20장 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행 20:23)" 하나님께서는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는데 바울을 사용하기 위해 바울을 인생의 밑바닥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훈련의 과정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인생 밑바닥, 감옥에 집어넣고 어떤 훈련을 시켰을까요?
1.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1-5)
1)바울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오늘 성경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감옥에 2년 있는 동안 역사의 장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식민지 이스라엘의 로마 총독이었던 벨릭스가 소환되고 신임 총독 베스도가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부임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화려한 취임식을 했겠습니까? 바울은 이 화려한 취임식 소식을 감옥에서 초라하게 들었을 것입니다. 취임을 한 후 하루 쉬고 다음날 그가 다스릴 땅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 때 과거 대제사장 뿐 아니라 현직 대 제사장 유대인의 권력자들이 신임 총독 베스도를 맞이합니다. 총독 취임 후 처음 만나는 최고 권력가들의 화려한 만남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들은 만나자 말자 무엇을 요구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신임 총독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에 보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법으로는 되지 않으니까 사람을 매복했다가 테러를 통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총독이 바뀌었고 세월이 2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죽이려고 합니다. 사람은 한 번 찍어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행이 바울은 베스도가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되어 있으니 도망갈 염려가 없고 자신이 곧 가이사랴에 갈 것이기 때문에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내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는 화려한 세상 권력자의 등극과 그들의 노리갯감처럼 취급받는 초라할 대로 초라해진 바울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로마의 권력자는 정치적 권력을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자랑합니다. 바울은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문명 앞에 십자가는 참으로 초라할 수 있었습니다. 나무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신 역시 지극히 초라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바울도 예수님만 믿지 않았다면 그 화려한 자리에 초청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한 마리 짐승처럼 얼마나 초라합니까?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는데 감옥에 갇혀 그 사람을 죽일까 살릴까 논란을 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합니까? 지금 바울은 젊을 때가 아닙니다. 노년의 때입니다. 아이의 초라함은 어머니의 주의를 끌고, 노숙자의 초라함은 구제하는 사람들의 동정을 이끌어 내고, 청년의 초라함은 젊은 처녀의 주의를 끌어 동정을 살 수 있지만 노인의 초라함은 그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합니다. 노년에 감옥에 갇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월을 기다리는 바울의 모습이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초라하겠습니까? 바울을 심문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베스도 총독의 정치적 권력에 비하면 바울의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초라할 뿐입니다. 새 총독과 어깨를 같이하고 바울의 생명을 좌지 우지할 정도의 화려한 종교적 권력을 가지고 는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권력자들 앞에 바울의 종교적 힘은 얼마나 초라합니까? 그들의 노리개 감처럼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다니며 세 번째 심문을 받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2)우리도 때로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인생의 밑바닥에서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초라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집도 화려한 큰 집을 좋아합니다. 차도 큰 차를 타고 교회도 크고 화려한 교회를 다녀야 합니다. 초라한 지하 교회를 다니는 것은 견디지 못할 일입니다. 초라하면 열등의식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한 시대 지도자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빈곤에 처할 줄도 알고 부요함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배고파 보지 못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용하기 위해 화려하게 살고 싶었던 그를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뜨려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동이 되어 보아야 무수히 많은 백성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려하게 달과 별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삶을 살고 싶어했던 요셉을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뜨려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수히 많은 억울한 사람들, 초라한 사람들을 다스려야 할 총리가 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감옥에 집어 넣기도 했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혀가게도 하였고 극한 파탄의 상황으로 몰아 넣기도 하며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호세아나 욥과 같은 사람은 완전히 가정이 파탄에 처하게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질 때 초라함으로 쓰러져서는 안됩니다. 초라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화려해 지기 위해 변절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초라함이 필요하다면 당당하게 그 초라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때 분명한 가치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 초라한 것이고 무엇이 진정 화려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훈련받아야 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초라한 훈련을 받는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겪게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초라한 환경이지만 바울은 결코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결코 비굴하게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 앞에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법정에서도 당당하였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고소한 것처럼 율법을 어긴 것도 없고 성전을 더럽히지도 않았고 정치적 혁명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보내고자 하는 베스도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치 않았으며 만약 죄가 있다면 죽는 것도 사양치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초라하지 않습니다. 자부심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을 초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믿는 복음이 초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바울이 믿고 전하고 있는 복음이야 말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살릴 수 없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감옥에 갇히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8)"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초라한 현장에 들어 가 있다고 해도 우리의 삶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가난해도 작은 차를 타도, 작은 교회를 다니고, 작은 집에 살도 초라함없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는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삶이 어떤 삶일지라도 예수님에 비하면 결코 초라한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얼마나 초라하게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까? 태어날 곳이 없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했던 제자들이 배신하였습니다. 수제자라고 하는 사람은 저주까지 했습니다. 십자가에 무참하게 짓밟혀 돌아가셨습니다. 무덤이 없어 남의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초라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초라함과 수치를 이미 다 십자가에서 당하고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어떤 인생의 바닥에서도 초라해 질 수가 없습니다. 초라함의 늪을 지날 때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연약함을 인정하며 초라함의 훈련을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있을 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라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인생은 초라하게 끝이 납니다. 중환자실에 가보십시오. 죽음의 현장에 가보십시오. 얼마나 초라합니까? 예수 믿고 사는 삶이 초라하지 않는 삶이고 인생의 마지막이 복스러운 죽음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떤 경우일지라도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결코 초라한 삶이 아닙니다.
2. 억울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6-12)
1)바울은 억울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총독 베스도가 가이샤라에 가서 다시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무죄가 입증된 재판입니다. 바울은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재판만 세 번(22:30;24:1-22) 받는 셈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죄가 있어 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녀 사냥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반공법 집시법 국가 보완법을 다 같다 붙이면서 사형수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변사를 동원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에게 위압감을 주며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바울은 가이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선처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대항하여 보복한 것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사실을 증언합니다. 율법을 거스린 것이 없고 성전을 더럽힌 적도 없고 가리사에게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베스도는 바울에게 무죄 선언을 한 후 즉시 석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반감이 두려워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신도 바울이 죽일 만한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25). 그런데도 다시 아그립바 왕에게 다시 심문하도록 합니다(23). 지금 2년 동안 죄가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천부장도 그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총독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전임 총독 벨릭스도 무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2년 동안 풀어 주지 않고 퇴임해 버렸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제 새 총독이 왔습니다. 새 총독도 바울이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풀어 주지 않고 유대 지도자들을 환심을 사기 위해 감옥에 결박해 놓고 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우리가 몰라서 억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면 억울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속에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금 2년 동안 갇혀 있는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풀려났으면 어떻게 될까요? 2년이 지났는데도 자객을 통해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지친 사람입니다. 오히려 감옥에서 자유를 누리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재충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옥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면 하나님의 말씀 바울 서신을 기록하길 원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옥중 서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우리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억울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억울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억울하면 힘있는 사람들은 복수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체념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억울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다 의탁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억울해 합니다. 목회하면서 감옥 갇힌 사람을 여러차례 면회해 보았는데 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왜 내가 이렇게 잡혀 나만 고생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보다 죄를 지은 사람도 많은데 왜 나만 잡혀 이 고생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질병에 걸려 죽음을 앞에 놓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만큼 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억울해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가면 누구나 억울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이 억울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억울할 때 내가 그 억울함을 풀려고 덤벼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니다. 오늘날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원리는 "맞지만 말고 너도 때려라."라는 것입니다.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히 10:30)"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억울함이 있습니까? 잠 못 이루는 억울한 일을 당하실 때가 있습니까? 분노로 얼굴을 붉혀야만 하는 억울함을 당하신 분 있습니까? 직장 상관에게, 때로는 시어머니에게, 시집 식구들에게, 배우자에게, 교인들에게, 목회자에게, 경쟁자에게, 동역자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였습니까? 어떤 억울한 일도 우리 하나님이 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한 일들을 만이 당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위선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0장에 보면 이중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바울은 멀리 떨어져서 편지를 쓸 때는 아주 담대한 것 같지만 가까이 와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겁쟁이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면하면 비굴하고 떠나 있으면 용맹하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술수와 타산적 이해, 세속적인 관심을 위주로 선교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연약하고 무력한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형편없는 설교자라고 했습니다. 편지는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바울은 억울해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계궤와 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엡6:11-18) 사람과 문제를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육체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권위를 통해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잃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억울함을 많이 당했습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는데 그것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심지어는 장인이 아내를 주었다가 다시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억울함을 사람에게 풀지 안았습니다. 하나님께 토했습니다. 요셉이 당한 억울함 만큼 큰 억울함을 당하였습니까? 승진이나 인정받는 것이나 우리의 미래가 사람에게 달여 있지 않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억울한 감정을 안겨 준 사람에게 달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억울하다고 편법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일해야 합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란 책을 보면 큰 공장에서 18륜 디젤 트럭을 수리하는 기계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일터에서 오랫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술자리 참석 안는다고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답니다. 그러나 그는 참고 견디었답니다. 회사 내 최고의 기계공이었고, 근면하고 성실하여, 매번 최고의 성과 기록하였답니다. 그러나 7년 동안 승진이나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봉급 인상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관리자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인이었고 하나님이 억울함을 풀어 주실 줄 알았기 때문에 묵묵히 참고 견디었답니다. 어느날 회사 사장이 자신을 불렀답니다. 말단 직원인 그는 사장을 만나본 적이 없었답니다. 사장은 그를 만나자 은퇴할 때가 되어 회사를 대신 맡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답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하여 "자네에게 회사를 맡기고 싶네"라고 말했답니다. 기계공은 깜짝 놀라 황급히 대답했답니다. "저도 그러길 바라지만 제게는 회사를 인수할 돈이 없습니다." 사장은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군 자네는 돈이 필요 없네 내게 돈이 있으니까 나는 회사를 맡아 줄 사람을 찾고 있네 내가 시작한 일을 계속할 믿을 만한 사람 말일세. 나는 이 회사를 자네에게 주고 싶네 " 실화입니다. 허무 맹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풀어 주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나라를 위해 골리앗을 무너뜨렸는데 아무 잘못도 없이 도피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이지 않습니다. 비록 사울이 부당한 행동을 하였지만 그의 지위와 권위를 존중해 주었습니다.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그 지위와 권위를 존중해 주었습니다. 덩달아 무례하게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이사랴의 법정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으로 믿고 그 권위에 대하여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생에 사울이 찾아 왔을 때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억울함 훈련을 통과한 다윗에게 넘치는 복으로 억울함을 풀어 주었습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갔지만 결국 하나님이 풀어 주시고 총리로 삼아 주었습니다. 억울함을 푸는 열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져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 주겠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의 길만 막을 뿐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비난하고 수군댈 때 억울하다고 편법으로 상황을 바로 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부당함이 있을 지라도 앞에 하나님께 모두 맡기고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울함의 시험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결국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시험이 클수록 보상도 큰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귀신들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귀신의 왕이라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억울한 일을 묵묵히 참으로 우리를 구속하고 용서하고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어떤 억울함도 그 억울함을 다 하나님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억울함을 밝히려 하지말고 그것을 훈련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억울함을 밝히려 하면 할수록 훈련이 끝나기까지 더 인생은 밑바닥으로 떨어집니다.
3. 지루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13-27)
1)바울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지루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13절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수일이 지났습니다. 아그립바왕과 그의 누이 버니게가 신임 총독을 축하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야곱을 죽인 헤롯의 아들입니다. 버니게는 아그립바 2세의 한 살 아래 누이이자 벨릭스 전(前) 총독의 처인 드루실라(24:24)의 언니입니다.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촌인 헤롯과 첫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48년에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고 있었답니다. 그가 왔을 때 할 말도 많았을 것입니다. 처리할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바울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신임 총독은 아그립바 왕에게 사건 개요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치적 종교적으로 사형시킬 만한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송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19) 황제의 판결을 원해서 황제에게 보내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바울을 부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당시 둘은 근친 상간 관계가 있었다고 소문이 나있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사람같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앞에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2년 동안 계속적으로 반복된 감옥 생활입니다. 말이 2년이지 아침에 일어나 저녁 자기 전까지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지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권력자들이 불러 물어 보는 것은 똑같은 것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네 번째입니다. 2년 동안 감옥 생활도 지루한데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해서 심문합니다.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바울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이 지루함의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2)우리도 때로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인생의 밑바닥에서 지루함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잘 참지 못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얼굴은 못생겨도 지루함은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돈이 없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지루함은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신호등 앞에서도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전철 안에서도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지루한 것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닥치는 대로 먹거나 약물을 복용하고, 술을 마시며,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 현대 문화에 익숙해진 신앙인도 지루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 편법을 쓰던지 포기하던지 합니다.
그러나 지루함은 존재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성장과 훈련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지루함을 통해 인내의 훈련, 기다림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지루한 기다림 없이 아이가 태어날 수 없고 지루한 기다림 없이 나무가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훈련의 과정없이 외국어를 잘 할 수 없고 훌륭한 군인이 태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루함은 창조와 성장을 위한 고통입니다. 은혜는 지루함을 견뎌내는 사람의 몫입니다. 씨앗은 지루한 것같지만 모르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지루함을 견뎌야 성장하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지루함을 느낄 때 사람들은 시간을 가장 잘 의식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지루함 때문에 편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감옥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노년에 감옥에 있는 동안 다 바울을 떠났습니다. 언제 감옥에서 풀려날지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 때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딤후 4:17)"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 떠난다 하여도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지루함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바심을 낸다고 하나님의 시간표가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임신하면 일정한 기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초조해 한다고 도움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 대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지루하게 보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사탄을 신경죄약에 걸리게 만드는 비결은 인생의 밑바닥에서도 좋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 지루함 속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마음의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고 정신이 똑바르지 않으면 고난은 더 오래 지속되는 것입니다. 기다림에는 인내심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기다려야 할 바에는 과정을 즐기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궁금해 하며 몸부림 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가장 좋은 시간에 상황은 바뀌어 집니다. 2년 전과 똑같은 것같지만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대상이 다릅니다. 우리는 잘 몰라 지루한 것같지만 하나님의 우리 인생의 깊은 곳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은 큰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정한 때가 오면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합 2:3)" 하박국 선지자의 선언처럼 정녕 응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17년을 지루하게 기다림의 훈련을 받은 다윗은 시31:15절에서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7년 동안 왕위에 오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이라는 지루한 시간을 기다림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이라는 기다림을 훈련을 받았습니다. 지루하다고 아브라함처럼 그릇된 길로 가 이스마엘을 낳고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37:7)"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애 3:25)"라고 말씀합니다. 노아는 비오기까지 120년을 기다리며 방주를 지었습니다. 지루함에 지쳤다면 노아는 그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루함을 극복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 하나님이 선을 베풀어 주시고, 형통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지루해 하지 않고 기다리면 웃음의 날이 오고 인생 역전의 날이 옵니다.
하나님은 먼저 상황을 바꾸시길 보다는 지루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바꾸시길 원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지루한 인생의 밑바닥 훈련을 통해 복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훈련시키기 원하십니다. "태양은 매일 떠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밥을 매일 먹고 매일 쉬어도 지루하지 않듯 태양이 매일 떠올라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심장이 매일 뛰고 매일 잠을 자도 지루하지 않듯 태양을 있게 하신 이를 매일 만나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늘 새로움으로 만족을 추구하지만 결국 참으로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것이고 지루하지 않는 반복된 예배는 생명을 낳고, 안식을 누리게하고 거룩한 행복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행전 1:4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지루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초라함도 억울함도 지루함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초라함을 극복하고 억울할 때 주님께 맡기며 지루할 때 소망을 가지고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인생 밑바닥에서 통과시키며 이 세 가지 훈련을 시킵니다. 초라함을 극복하는 훈련, 억울함을 극복하는 훈련, 지루함을 극복하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을 잘 마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합당한 그릇으로 로마에까지 가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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