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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13: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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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으려는 邪敎들의 행진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최근 어느 세계적인 시사주간지는 이것을 사교로 달리는 러시아우어(rush hour for cult)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같은 사교는 자살과 타살을 부채질하기에 심각한 비극을 낳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성격만 띠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정치적인 기능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인류의 삶에 끼치는 악영향은 큽니다.
종교적인 것으로는 지난 3월 미국에서 일어난 신도들의 질서정연한 자살 사건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혜성이 가장 밝게 타오르는 지난 3월 말, 지구 상공에는 우주전차가 낮게 날아올 것을 확신한 39명의 確信徒는 페노바르비탈 수면제를 다량 복용한 뒤 모두 같은 신발을 신고, 여행 가방을 침대 옆에 정연하게 세워둔 뒤, 침상에 반듯이 누워 보라색 보자기를 덮고 자는 듯 죽었습니다. 이 정연한 죽음은 그들의 신앙과 인식이 얼마나 확실했던가를 너무나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얼마 전 유럽의 신도들의 집단 자살, 그리고 몇 년전 텍사스에서 있었던 사교들의 집단 자살과 함께, 지나친 독단적 확신이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구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 유럽에는 1300여개의 이같은 확신도 또는 광신도들의 사교 집단들이 21세기를 앞두고 창궐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치적 성격을 띤 확신도 집단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따지고 보면 20세기는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했던 여러 확신도 체제들의 각축 시기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1917년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계급 없는 지상낙원이 반드시 온다고 믿는 확신도들이었습니다. 이 체제의 등장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확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또 죽음을 강요하였던가요. 1930년에 나치집단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확실하게 믿는 신앙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까? 지금도 神政정치를 앞세우고 있는 회교권에서는 정치적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확신도 집단은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꽉 닫혀진 세계관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지나친 확신, 복잡한 현대사회 문제에 대한 지나치게 간단명료한 만병통치식 치유, 처방, 반대 세력에 대한 초전박살 의지, 외적에 대한 항복 대신 자살을 선호하는 광기 등의 모습으로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인류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닫혀진 세계의 닫혀진 사고와 행동에 대해 성서는 어떤 깨우침과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까? 예수의 삶과 사도바울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그 유명한 사랑 章과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값진 교훈의 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스승 사도바울은 우리 인간의 인식과 믿음은 부분적이고 유치하며, 희미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하나님과 진리를 완벽하게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벽하게 알고 계시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깨우쳐줍니다.
첫째, 우리의 지식과 예언은 부분적입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의 앎과 예언은 틀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은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의 코끼리 그림 그리기와 같습니다. 자기가 만져보는 부분만을 알뿐입니다. 총체적이고 완전한 인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거나 행사하려는 인간과 집단이 있다면 이것은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자기를 올려놓는 어리석은 짓과 같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모든 지적전체주의(知的全體主義)나 종교적 독단주의를 크리스천들이 배격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진리임으로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짖으며 깃발을 흔드는 소리에 우리는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점에서 크리스천들이 히틀러나 스탈린을 예찬할 수 없고, 사교적인 신흥종교 집단을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안다고 주장하는 때 우리는 악마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절대권력자들이 가장 즐겨하는 짓이 바로 남의 비밀들을 즐겨 듣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이 부분적으로 안다고 강조하셨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독단에서 벗어나게 하고, 확신주의의 유혹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일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여기 어린아이와 같다함은 순진하고 맑고 밝다는 뜻이 아니라, 유치하다는 뜻입니다. Childlikeness가 아니라 childishness를 말합니다. 이런 뜻에서 사도바울은 프로이드의 큰 스승일지도 모릅니다. 유치하게 생각하고 믿는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를 뜻합니다.
하나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을 말합니다. 유아는 빨고 배설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며, 그 쾌락을 느끼기 위해 질서를 파괴하는 생각과 행동을 거침없이 합니다.
또 하나의 뜻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길 도덕적, 사회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인식과 믿음과 행동이 이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완벽하다고 자랑하면서 남을 무시하는 확신도들의 자세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인식과 믿음은 거울처럼 희미합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은 거울을 만들어내는 특산지였습니다. 그 때 거울은 오늘날의 거울과 달리 동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며, 지금과 같이 우리의 모습을 뚜렷하게 반영시켜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울 영상은 희미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 거울처럼 희미하게 하나님의 모습과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도 두 갈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랍비들이 민수기 12장 8절의 말씀처럼,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희미한 거울을 통해 보지만, 모세만은 밝은 거울을 통해 볼 수 있었다고 자주 얘기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서와 같이 희미한 반영처럼 알아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뜻은 더 깊은 것입니다. 거울처럼 희미하다는 것은 거울의 본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거울의 본디 역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그것은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입장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 남의 입장에 서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거울은 나로 하여금 남이 되게 합니다. 남의 시각에서 나를 봄으로써 나의 부족한 것을 깨닫고 그것을 고쳐가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향상의 뜻이 없으면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울을 보지 않습니다. 아니, 거울을 볼 수 없습니다. 동물과 사람간의 차이는 바로 이 거울 사용 능력에 달려 있기도 합니다. 특히 거울은 사랑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자기 모습을 살펴보게 합니다. 남을 사랑할수록 거울은 더 잘 사용하게 됩니다. 거울을 사용한다 함은 누구를 사랑한다 함과도 통합니다.
그런데 거울처럼 희미하게 안다는 것은 제대로 남의 입장에 서지 못함을 뜻합니다. 바로 위에서 지적한 자기 중심적 단계, 곧 유치한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했듯이 우리의 인식, 우리의 사랑은 이와 같이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이비종교 교주가 아닌 이상 어찌 감히 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인식, 우리의 믿음, 우리의 예언, 우리의 소망 모두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보다 온전하고 보다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어느 누구 보다 더 힘쓰고 애썼습니다. 누구보다 더 아픈 대가를 치르면서 그 완전함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는 온전한 사랑 자체이신 분이 오신다면 부분적인 것, 어린아이 같은 것, 희미한 것은 모두 사라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지금은 거울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는 어른처럼 생각하게 되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보듯 훤하게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총체적 인식의 상태를 푯대 삼아 오늘도 그는 꾸준히 달려간다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 속에는 그가 이미 완전한 믿음과 총체적 인식에 이르렀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히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빌리보서 3:12-14).
사도바울은 총체적 진리 파악에 이르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서만 가능한 것으로 믿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뛰어나기에 진리를 독점할 수 있다고 하는 신흥교주들의 주장과 아주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그 푯대를 자기 손안에 쥐고 마구 흔들면서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구원에 이르리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바로 이점이 이번 천국문 교주 Applewhite나 옴진리교의 아사하라와 다른 점입니다. 푯대를 향해 달리는 것도 은총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크리스천의 입장과 자세는 명백합니다.
크리스천이 진리를 독점했다고 확신한다면 그는 크리스천이 아닐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자기의 지식이 완벽하다고 외친다면 그는 크리스천이 아닐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자기 예언이야말로 틀림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사도바울의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자기 믿음이야말로 온전한 것이라고 선포한다면 그는 크리스천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고 주장한다면, 그는 알게 모르게 자기 자신을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사람들을 죽게 하고 죽이게 합니다. 그것도 신앙과 종교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시나 스스로 자기를 낮추신 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지식의 한계를 잘 이해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진리를 당장 이해할 수 없음을 깨우쳐주시면서 진리의 성령이 임할 때는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진리의 전모를 밝힐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요한복음 16:12).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독점하였다고 자신만만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영웅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처럼 무모하게 처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나약한 인간의 고뇌를 잘 드러내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신 것을 보십시오. 주님의 모습은 고뇌하고 불안해하고 아파하는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까? 왜 주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쾌하게 지나시지 않았을까요? 왜 제자들보다 더 여유 있게 코를 고시면서 주무시지 않았을까요?
겟세마네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확신에 찬 나머지 "하나님 걱정 마십시오. 이 아들이 얼마나 용기 있는지 본때를 한 번 보여주겠습니다. 로마정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만큼 제가 용기 있게 대응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하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은 오히려 할 수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들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시지 않았던가요? 마치 하나님 뜻에 대해 100% 확신이 없는 듯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三國志의 영웅 관운장과 퍽 대조적입니다. 자기 팔에 깊이 박혀있는 화살촉을 칼로 후려내는 아픔을 조금도 표현하지 않고 태연하게 바둑을 둔 관운장의 의젓한 모습과 피땀 흘리신 예수의 초라한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신흥교주가 될 자격이 아예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이같이 나약하고 인간적인 하나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성숙한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사도바울은 이같은 연약한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생각하면서 세상에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주님의 그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비록 우리는 지금 로마시대의 거울처럼 희미하게 알고,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 희미하고 부분적인 거울 영상 속에서 사도바울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향해 열심히 달리면서 한가지 확신을 자신 있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이 사랑에서 우리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완전한 확신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믿음, 소망, 사랑 이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완벽한 인식과 믿음, 사랑 없는 온전한 소망과 예언을 소리 높여 외치는 소리에 우리는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온갖 유혹이 커지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사도바울의 이 메시지를 다시 한 번 깊이 되씹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누가 감히 이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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