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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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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권진관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오늘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시 한편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원래 전문적인 시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나찌 하에서 순교당한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요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그 분은 39세라고 하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1945년 4월 9일,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독일 나찌에 의해서 교수형을 당한 순교자였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히틀러의 나찌정권이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고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고 저항하다가 1943년 4월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4년 9월경 나찌정부는 그가 있던 감옥에서 더 감시가 삼엄한 감옥으로 이송시켰습니다. 그 감옥은 알브레히트 街에 있는 감옥이라고 하는데 그가 이곳에 이송된 후로는 가족들도 면회가 되지 않았고 서신왕래도 거의 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이송된 후 그는 여러차례 다른 곳으로 옮겨지다가, 다음해 1945년 4월 9일 동료죄수들을 위하여 마지막 예배를 인도한 후 곧바로 끌려가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이 시는 그가 삼엄한 알브레히트가의 감옥으로 이송되기 바로 직전인 1944년 7월 18일에 쓰여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태연하게, 명랑하게, 확고하게,
영주가 자기의 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감방에서 내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하네.
나는 누구인가?
자유롭게, 다정하게, 분명하게,
명령하는 것이 마치 나인 것처럼,
간수들과 내가 대화한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하네.
나는 누구인가?
침착하게, 미소하며, 자랑스럽게,
승리에 익숙한 자와 같이,
불행한 나날들을 내가 쉽게 견뎌내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나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람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이 불안하게, 그리워하다 병들고,
목을 졸린 사람처럼 숨쉬려고 몸부림치고,
색과 꽃과 새소리를 갈구하고,
부드러운 말과 친근함을 그리워하고,
사소한 모욕에도 노하여 몸을 떨고,
큰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다 절망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창작하는데 지쳐서 허탈해 하고,
의기소침하여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하려 한다.
나는 누구인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일까?
양자가 동시에 나일까?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약자일까?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이 고독한 질문들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떠한 자이건,
아, 하나님이여,
당신은 나를 아시옵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그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때는 나찌가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너무나 무자비해서 인간은 악마일 뿐이라고 선언해야 할 당시에 본회퍼는 그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본다는게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것입니다. 나찌에 참여해서 유대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을 무참하게 죽인 그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질문을 덮어두지 않고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에이 모르겠다. 국가 지상주의 시대에서는 국가가 시키는대로 하면되지, 나 자신은 지금 없다"고 하면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자신을 잊어버린 사람만이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사람들을 유고의 세르비아 사람들이 인종청소로 죽였습니다마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한 폭력과 살육과 같은 비이성적인 일은 틀림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고 그러한 질문 자체를 잊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극단적인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정의이며, 가장 성급하게 내린 정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접어놓고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닌가, 오는날 우리 사회속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옷사건, 공직자 부패, 코소보 인종청소사건 등 등의 문제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나는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힘겨운 씨름을 했습니다. 남들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자신인가? 아니면, 자신의 진짜 내면적인 모습이 바로 자신인가? 남들이 평가하는 당당한 본회퍼가 진짜 자신의 모습인가? 아니면 조그만 일에도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친절한 말이나 친근한 대접을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가 바로 자신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 둘다인가? 본회퍼는 그 어느것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미완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어떤 자이건, 아 하나님, 당신은 나를 아시옵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국가가 지배하기 보다는 맘몬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하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모습, 겉으로 나타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가로 그 질문을 대체해 버리고 있습니다. 어떤 직책이냐로 자신의 가치가 평가되고 자신의 됨됨이가 결정됩니다. 목사인가, 교사인가, 장로인가, 집사인가, 박사인가, 교수인가, 사장인가, 이사인가, 과장인가, 노동자인가, 실직자인가, 아니면 장관인가, 요즘 말이 많은 검사인가? 이러한 외형적인 직책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판단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맘몬의 관점에서 자아가 판단되는 시대입니다.
직책이 높으면 자신이 높아 보이고, 직책이 낮으면 괜히 열등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생각합니다. 부인들의 경우, 남편이 무엇하는 사람이냐로 계급이 갈라집니다. 얼마전 옷사건으로 난리가 났습니다마는 그 사건은 오늘날 외형적인 직책으로 사람이 판단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추한 모습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 내면적인 궁극적인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질문할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은채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스스로에 대해 공허해질 때에서야 겨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질문해 보려고 합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정의를 내려왔습니다. 파스칼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고, 데카르트는 코기토 에르고 섬(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고,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질은 리비도, 즉 성욕이라고 했고, 마르크스는 인간이란 다름아닌 사회관계의 총계라고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는 여러 방식 중에서 저는 관계적인 방식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즉 시간의 관점에서 나를 보면, 나의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볼 수 있고, 나는 또한 나보다 어려운 이웃의 민중과의 관계 속에서 누구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나아가서는 생태적 위기 속에서, 나와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예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찬이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과거, 나와 민중, 나와 우주와의 관계가 모두 중요하지만, 예수와의 관계가 그 속에서 중심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와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말은 제자입니다. 제자라는 말 대신에 친구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친구하고 하겠다고 한적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친구이기 이전에 예수의 제자입니다. 우리가 누구냐고 물을 때 그 대답은 제자라는 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직업과 직책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하나의 직책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가를 대답하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제자라는 직분입니다.
제자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관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나와 예수와의 관계를 말해야 합니다. 나와 예수와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나를 규정하게 되면 나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 죄악적인 측면, 약한 면, 본회퍼가 고백했듯이 새장에 갇혀있는 새처럼 두려워 떠는 그러한 존재로서, 또 좋은 소리에 솔깃하고, 조그만 불편에 화를 내는 그러한 죄인, 허약한 존재로서만 나를 규정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것, 즉 나의 사회적 직책, 직업, 나의 돈, 명예, 권력, 외형적인 모습 등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때 그 대답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바로 부활신앙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시니 나를 규정할 때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와 대화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이끄시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그러한 신앙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그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하는 제자가 바로 우리들의 자아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그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는 신약성서로부터 두 구절을 뽑았습니다. 하나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바울선생의 말씀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울선생은 예수의 원래의 취지를 너무나도 잘 파악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13:1-3의 말씀에서 이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바울 선생은 여기에서 방언의 능력과 예언의 능력과 지식과 믿음, 구제를 말하면서, 이 모든 것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방언의 능력을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뽐내고 강한 믿음을 앞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모든 능력과 행동을 진정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사랑없이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교만이요, 위선이요, 자신을 내세우는 일이 됩니다. 사랑없는 지식은 타인에게 오히려 해가 됩니다. 사기꾼이나 도적들도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지식이 악한 것이 됩니다.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자기 중심적이 되고, 자기 절대화가 됩니다.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사랑없이 있는 믿음은 그것이 아무리 강해서 산을 옮길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악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저는 이렇게 정의해 보고자 합니다. 사랑이란 "궁극적인 보살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몸소 보였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본문을 보면 결국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인 보살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그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한복음 19:25-27).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임종하실 그 상황에서도 어머니를 보살폈습니다. 이것을 궁극적인 보살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유대사회에서는 여자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버지에 의지해 살다가 결혼한 후에는 남편을 의지해 살았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요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없었던 것을 보면, 요셉은 이미 죽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마리아는 아들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아픔과 죽음보다는 어머니를 더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제자를 보며, "이제부터는 이 분이 바로 너의 어머니이시다"고 말씀하는 예수에게서 우리는 궁극적인 보살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것은 그 제자가 비록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모셨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예수 시대에도 모든 것이 가족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중심주의를 뛰어넘는 궁극적인 사랑의 사건이 예수와 그의 제자와 마리아 사이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를 돌아다 보면, 가족이 아니면 아무 관심을 쏟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이 아니면 무조건 무관심해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가족도 자기의 직계 자식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는 소가족 중심이기 때문에, 우리의 늙은 부모님을 모시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는 그 순간에도 늙고 연약한 어머니를 돌보았던 것입니다.
예수 말씀 가운데 부모나 형제마저도 미워하라는 말씀(눅 14:26)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제자직의 수행을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하면 가족중심주의마저 버리고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부인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가족주의, 우리 가족만 잘되면 된다는 가족이기주의의 문제점을 바로 본 것입니다. 가족이기주의와 제자의 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궁극적인 보살핌을 베풀라는 것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뛰어넘어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 바로 제자의 도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족을 뛰어넘어 모든 인류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에 눈앞에서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된 어머니 마리아에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보살핌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까지 그분을 보살폈던 것입니다. 여기에 가족주의를 뛰어넘지만, 그러나 그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된 어머니를 보살피는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넓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대자대비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나의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예수와 관계없이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허무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이기적인 존재요, 약한 존재요, 공명심이 많은 존재, 맘몬의 노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가 보여주었던 그 모범을 조금이나마 따르기 위해서 순간순간 새롭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가능성은 우리와 살아있는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홀로 있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앞으로도 우리곁에 함께 하실 예수와 함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다같이 함께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만이 나를 온전히 압니다. 그리스도여 나를 받아 주소서. 나의 삶 속에 살아 계셔서 나와 함께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하시니 나의 진정한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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