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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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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아프간 사태 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들을 비난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Godpeople.com 게시판에 올린 글입니다.
아프간 선교사 들의 명예를 위해서,........)
아프간 선교사와 욥의 친구들!!!
“피납의 고통을 겪은 봉사자들을 죄인시하며 정죄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동시에 영웅시 하려는 자세도 바람직하지 않다.”(국민일보:07/9.8일자)
이 말은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러한 성명은 문득 ‘역설적으로’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의 첫번째 충고(욥4;6,7)가
생각나게 한다.
선교 봉사를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가서 영웅이 되어서 돌아 와야지’라고 생각하며
선교봉사를 떠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두려움의 고통 속에서 봉사를 떠난다.
두려움의 고통 속에서도 오직 예수 때문에 그 고통 속에 뛰어 드는 것이다.
필자는, 너무도 작아서 말하기 창피하지만,
봉사라고 해보니까 봉사가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반신을 쓸 수 없는 할아버지에게 봉사하다가 만난 천주교 신자들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이렇게 봉사하니까 기쁨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은 봉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한국 전쟁 때 부상하여 고통당하시는 분을 일주일에 한번 씩 찾아뵈올 때,
그분의 허리, 무릎의 통증을 멈추게 해 달라고 3년 동안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할아버지를 찾아뵈올 때마다 이분의 고통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줄여달라고 손을 잡고 기도하고
그 집 대문을 닫고 나올 때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매번 참담한 기분이 되어 하늘을 처다 보며 ‘나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믿음이(약5;15) 없어서 이렇습니까?’
방문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마다 대부분 이럴진데, 너무 가슴이 아파서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예수 때문에 하는데(고전15;58,빌3;12∼14,골3;17,고전10:31), 봉사해서 기쁘냐는 질문은 적절한 질문인 것 같지 않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내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 쥐꼬리만큼 하면서도
봉사하는 것이 이러한데 험한 전쟁터에 나가서 죽음의 극한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는 선교봉사를 나가는 분들은 약간의 선교봉사에 대한 지식만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통 속에 몸을 던지는 것은 예수 때문(골3;17,고전10:31)이지 영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영웅 대접 받기를 원하지도 아니한 사람들에 대해서 “영웅시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라고
충고하는 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들이 영웅이 되기 위해서
그곳에 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오히려 그것으로 그들을 비난하게 만드는 빌미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몇몇 교회 교인들과 이야기해 보아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며,
“화려하게”, “놀러가는 자세로”, “들떠서”,좀 좋게 말해서“젊음의 치기로” 라고 그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진실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분당 샘물교회 단기 선교(단기선교는 장기선교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이동원 목사)팀이
비난받을 짖을 한 건가?
아니면 이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욥의 친구인가?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욥6;15).
“ 우리가 서로 짐을 나누어져야(갈6;2)할 때인데 왜 이 성경 구절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예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전14:1,살전5:20)”하신 성경 말씀에 따라 일주일에 한번하는(요즘은 게을러져서 자주 빠져 먹지만)
노방전도에서 나는 늘 예언(?)한다.
‘야! 학생은 정말 인상(인물)좋다. 하나님께서 큰 복을 예비해 두었구나’.
예수 잘 믿으면 그 복 다 찾아 먹겠구나. 라고 예언(?)한다.
이와 같이 아프간에서 고초를 겪고 온 선교사들의 얼굴을 TV에서 보고 예언(?)한다.
‘야! 정말 인물 좋구나, 하나님께서 큰 재능과 복을 주셨구나,
더욱 정진하여 예수 잘 믿으면 큰 복이 예비 되어있구나(롬2;7).
이제 아프간에서 단기선교로 큰 경험을 하였으니 그 경험을 살려 이 마지막 때(딤후3;1,2)에
장기 선교사로 중국과 아프리카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우리의 주 예수그리스도(마25;40)를 위해서
크게 일할 사람(빌2;13)들이구나.
하늘에는 생명의 면류관(눅8;15,약1;12)이 예비되어 있구나.’ 라고 예언(?)한다.
나는 정말 개떡 같은 사람이지만 믿음에서만은 욥의 친구들과 같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이 샘물교회 아프간 선교사들을 욥처럼 사단의 손에 붙이지는 않았는지(욥1;12,2;6)?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혹시 욥의 친구가 되어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자.’
요즘 내가 출석하는(아직 미등록이지만) 분당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은
아프간 선교사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 이런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겠느냐?,,,,,,”.
유명한 과학자인 막스플랑크(양자물리학의 창시자)는 “우리는 자연의 신비를 풀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우리가 풀려고 하는 자연의 한부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 역사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 대답하실 때 욥에게 무척 미안해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많은 신비의 말씀(욥38;4∼41)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이 말씀들은
먼 훗날 주후 2000년 후 과학의 발달로 이 말씀들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계신다.
그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내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42;8)
신영록/ 건축구조기술사
화가 나서 Godpeople.com 게시판에 올린 글입니다.
아프간 선교사 들의 명예를 위해서,........)
아프간 선교사와 욥의 친구들!!!
“피납의 고통을 겪은 봉사자들을 죄인시하며 정죄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동시에 영웅시 하려는 자세도 바람직하지 않다.”(국민일보:07/9.8일자)
이 말은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러한 성명은 문득 ‘역설적으로’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의 첫번째 충고(욥4;6,7)가
생각나게 한다.
선교 봉사를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가서 영웅이 되어서 돌아 와야지’라고 생각하며
선교봉사를 떠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두려움의 고통 속에서 봉사를 떠난다.
두려움의 고통 속에서도 오직 예수 때문에 그 고통 속에 뛰어 드는 것이다.
필자는, 너무도 작아서 말하기 창피하지만,
봉사라고 해보니까 봉사가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반신을 쓸 수 없는 할아버지에게 봉사하다가 만난 천주교 신자들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이렇게 봉사하니까 기쁨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은 봉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한국 전쟁 때 부상하여 고통당하시는 분을 일주일에 한번 씩 찾아뵈올 때,
그분의 허리, 무릎의 통증을 멈추게 해 달라고 3년 동안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할아버지를 찾아뵈올 때마다 이분의 고통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줄여달라고 손을 잡고 기도하고
그 집 대문을 닫고 나올 때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매번 참담한 기분이 되어 하늘을 처다 보며 ‘나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믿음이(약5;15) 없어서 이렇습니까?’
방문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마다 대부분 이럴진데, 너무 가슴이 아파서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예수 때문에 하는데(고전15;58,빌3;12∼14,골3;17,고전10:31), 봉사해서 기쁘냐는 질문은 적절한 질문인 것 같지 않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내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 쥐꼬리만큼 하면서도
봉사하는 것이 이러한데 험한 전쟁터에 나가서 죽음의 극한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는 선교봉사를 나가는 분들은 약간의 선교봉사에 대한 지식만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통 속에 몸을 던지는 것은 예수 때문(골3;17,고전10:31)이지 영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영웅 대접 받기를 원하지도 아니한 사람들에 대해서 “영웅시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라고
충고하는 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들이 영웅이 되기 위해서
그곳에 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오히려 그것으로 그들을 비난하게 만드는 빌미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몇몇 교회 교인들과 이야기해 보아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며,
“화려하게”, “놀러가는 자세로”, “들떠서”,좀 좋게 말해서“젊음의 치기로” 라고 그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진실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분당 샘물교회 단기 선교(단기선교는 장기선교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이동원 목사)팀이
비난받을 짖을 한 건가?
아니면 이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욥의 친구인가?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욥6;15).
“ 우리가 서로 짐을 나누어져야(갈6;2)할 때인데 왜 이 성경 구절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예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전14:1,살전5:20)”하신 성경 말씀에 따라 일주일에 한번하는(요즘은 게을러져서 자주 빠져 먹지만)
노방전도에서 나는 늘 예언(?)한다.
‘야! 학생은 정말 인상(인물)좋다. 하나님께서 큰 복을 예비해 두었구나’.
예수 잘 믿으면 그 복 다 찾아 먹겠구나. 라고 예언(?)한다.
이와 같이 아프간에서 고초를 겪고 온 선교사들의 얼굴을 TV에서 보고 예언(?)한다.
‘야! 정말 인물 좋구나, 하나님께서 큰 재능과 복을 주셨구나,
더욱 정진하여 예수 잘 믿으면 큰 복이 예비 되어있구나(롬2;7).
이제 아프간에서 단기선교로 큰 경험을 하였으니 그 경험을 살려 이 마지막 때(딤후3;1,2)에
장기 선교사로 중국과 아프리카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우리의 주 예수그리스도(마25;40)를 위해서
크게 일할 사람(빌2;13)들이구나.
하늘에는 생명의 면류관(눅8;15,약1;12)이 예비되어 있구나.’ 라고 예언(?)한다.
나는 정말 개떡 같은 사람이지만 믿음에서만은 욥의 친구들과 같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이 샘물교회 아프간 선교사들을 욥처럼 사단의 손에 붙이지는 않았는지(욥1;12,2;6)?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혹시 욥의 친구가 되어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자.’
요즘 내가 출석하는(아직 미등록이지만) 분당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은
아프간 선교사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 이런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겠느냐?,,,,,,”.
유명한 과학자인 막스플랑크(양자물리학의 창시자)는 “우리는 자연의 신비를 풀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우리가 풀려고 하는 자연의 한부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 역사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 대답하실 때 욥에게 무척 미안해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많은 신비의 말씀(욥38;4∼41)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이 말씀들은
먼 훗날 주후 2000년 후 과학의 발달로 이 말씀들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계신다.
그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내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42;8)
신영록/ 건축구조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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