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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종살이

갈라디아 길희성............... 조회 수 1933 추천 수 0 2008.05.16 11: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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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5:1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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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우리는 작년도 교회살림 결산을 마쳤고 금년도 새로운 교회운영과 사업을 위한 예산을 통과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목사님도 안 계시고 엉성한 조직밖에 없는 교회치고는 많은 일들을 해냈다고 자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교회 창립 10주년을 계기로 하여 기념강좌를 열고 법인 설립기금 모금 운동을 벌려서 1억 2000만원 정도의 약정을 받았고, 그 가운데서 이미 작년에 8400만원이나 들어왔습니다. 작년 헌금 총액 1억 3000만원을 합해 보면 2억 1400만원이나 되는 적지 않은 돈을 우리처럼 적은 수의 교인들이 한 셈입니다. 헌금이 우리들의 헌신의 전부가 아니고 헌금 액수가 우리들의 신앙의 척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신앙이 없이는 헌금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앙이 있어도 헌금을 못하는 경우는 있지만 신앙이 없이 헌금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 같이 모두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순전히 자발적으로 헌금을 내는 교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다른 교회를 다녀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십일조다 건축헌금이다 부흥회다 하면서 교인들이 음으로 양으로 상당한 헌금의 압력을 받는 것이 사실이며, 특히 장로나 집사처럼 직분을 맡는 경우에는 목사님이나 교인들의 눈을 의식해서 마지못해 헌금을 아니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처럼 일년 내내 헌금 내라는 소리 한 번 하는 사람이 없는 교회에서 작년과 같이 교회 재정이 운영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할만한 일이고 자긍심을 가질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아마도 별의 별 대답이 다 나오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새길교회에 다닌다고 한 마디로 답해 버리기에는 무언가 흡족하지 못하고 허전한 느낌이 들 것이며 변명 아니면 어떤 사족이라도 좀 달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일 들 것입니다. 이 사족을 어떻게 다느냐는 교우들 각자가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우리 모두 그 평범한 질문이 다소 곤혹스럽게 느껴지고 대답이 쉽지 않고 일정하지도 않아 이랬다 저랬다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여느 교회 같으면 무슨 교회, 어느 교단, 어느 목사님 하면 끝날 일을 장황하게, 혹은 구질구질하게 설명 혹은 변명 아닌 변명으로 많은 말을 늘어놓아야 합니다. 우리 새길교회에 다니면서 치러야 할 조그마한 대가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 주로 두 가지로 대답합니다. 상대방이 설명을 해 주어서 좀 알아들을 것 같은 경우라면 '아주 자유로운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면서 교회의 특징에 관해서 약간의 설명을 더합니다. 목사님도 없고 장로 집사도 없고 교파도 없는 특이한 교회라는 식의 주로 부정적인 묘사를 많이 합니다 - 말하자면 신문에 한 번 났던 대로 그야말로 세 가지가 없는 특이한 '삼무(三無) 교회'라는 식이지요. 그러면 그런 교회도 다 있느냐 하는 놀라움이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해서 더 물어 보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부류의 사람일 것 같으면,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난 엉터리 교회에 다녀요"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더 이상 말을 주고받을 생각이 별로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 교회를 이해할 것 같지도 않고, 또 굳이 설명하려면 간단히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귀찮아서 대답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실 속으로는 우리 교회가 엉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 일류 교회요 좋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엉터리 교회라는 '못된' 자만심이 있으며, 은근히 속으로는 묘한 '쾌감'마저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의 두 가지 대답이 모두 약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으며, 나 자신이 약간의 떨떠름한 마음을 항시 가지고 대답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이라기보다는 때로는 자신감이 결여된 대답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새길교회 교우들과 이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함께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 인 우리 교회가 정말 무엇이 좋고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유로운 교회인 우리 새길교회가 정말 엉터리 교회가 아닌가, 양자 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떨쳐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교회 한답시고 엉터리 교회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교회생활 해도 되는 것일까? 자유를 핑계 삼아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자유로운 교회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나일론 교인들을 용납하고 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과연 신앙생활이란 것이 엄격한 훈련과 규율 없이도 가능한가, 과연 교회가 탄탄한 조직과 제도 없이도 가능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 교회를 초창기부터 괴롭혀 왔던 문제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한 때 우리 교회는 목사님을 모시고 제도화를 시도해 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책임을 맡았던 몇몇 교회의 리더들도 짐이 너무 무겁다고 여겨지고, 또 감당할 자신도 없기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제도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더 정직하고 책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아직도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난 문제라고 생각되기에 오늘 저는 새해 살림을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일종의 을 무릅쓰고 거론하기로 하였습니다. 문제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평신도 교회가 자유로운 교회라면 평신도들이 책임도 져야하는 교회라는 말인데, 책임은 안 지고 자유만 누리다 보면 결국 우리 교회는 엉터리 교회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반성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겠지만, 요즈음 IMF 시대를 맞아 사회 각계 각층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이 때, 우리 교회도 다시 한 번 뼈아픈 자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되기에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해에 좀 더 새로운 각오로 신앙생활에 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아침에 봉독한 바울 사도의 말씀은 바로 우리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잘 알다시피 유태인 가운데서도 정통 유태인임을 자부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려는 경건한 바리새파 가운데서도 바리새인이었으며, 당시에 유명한 율법학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떳떳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척 노력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또 알아도 잘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이나 불의한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를 유대교 율법 전통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해석해서 훼손시키고 파괴하려는 막된놈이요 벌받아 마땅한 죄수라고 생각하여 무식꾼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을 핍박하는 데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십자가에서 극형을 당한 예수는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은 죄인이었으며, 그가 유대 민족을 구하는 메시아라고 믿고 따라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처구니없는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종교는 곧 객관적인 제도와 율법이었고, 신앙은 바로 이러한 제도와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연히 이렇게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 의인들, 모범생들의 편에 서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으로 향하던 길 위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곧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깨닫고서는 그의 삶과 가치관이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 자신이 가르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으로 참회하는 죄인들을 더 사랑하는 하나님이시며, 잘난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 효자보다는 탕자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는 잘났다고 외칠 의인도 없고 저주받을 죄인도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되었고, 오직 율법에 충실함으로써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종전의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며, 누구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은총 없이는 온전히 설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인간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복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메시지를 온 힘을 다해 전파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해방의 복음에 빚을 진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아 보려고 온 몸을 던져 복음을 전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복음은 그에게 엄청난 해방감과 자유를 안겨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지키느라 온갖 노력을 경주하면서도 속으로는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온갖 더러운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던 자신의 이중성과 위선에 절망해야 했던 그는 율법의 중압감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앞에서 마음놓고 솔직해질 수 있었습니다. 율법의 가식과 가면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고 통하지도 않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그는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음놓고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이상이 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인간 이상이 되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온갖 가식과 위선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확신하면서 다만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솔직하고 인간다운 사람이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해한 복음이었고, 그는 이 복음의 진리에서 말할 수 없는 큰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갈라디아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종교는 멍에가 아니라 자유이며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율법의 종교, 제도의 종교, 규율과 강제의 종교, 위선의 종교, 가식의 종교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지 구속이 아니며,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아들이 되는 것이지 폭군과도 같은 존재 앞에서 설설 기는 비굴한 종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번 백번 생각해봐도 참으로 놀라운 진리이며, 오늘날 21세기를 목전에 둔 바로 이 시점에서도 아직도 종교라는 제도의 굴레와 멍에를 지고 고생하는 세계의 무수한 사람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놀라운 해방의 메시지라고 생각됩니다. 2,000년 전에 바울 사도가 도달했던 높은 정신적 수준에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인류가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저는 흥분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진리를 만끽했던 바울에게 한 가지 고민스러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시는 은총의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죄를 계속 지어도 된다는 말입니까?(로마 5-20-6:4). 마음대로 방종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의 죽음에 동참한 존재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빚을 탕감 받은 자가 계속해서 빚을 지어서는 안되고, 빚을 지지 않기 위해 허리띠 졸라매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듯,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의 종이 되십시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얻은 소중한 자유를 죄를 짓는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고 값있게 사용하라고 합니다. 무엇이 값있게 사용하는 것입니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또 하나의 종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강압과 두려움에 근거한 종살이가 아니라 자유와 사랑에 근거한 종살이 입니다. 은총 이전의 율법의 종살이가 아니라, 복음의 힘에 의해 사랑으로 서로의 종이 되는 종살이 입니다. 은총의 감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종살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율법의 종살이보다 더 고되고 힘들지도 모르지만 다만 기쁨으로 자취한 종살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밝히는 말 가운데서 자기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여러분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마태 5:17∼20). 사실, 바리사이들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습니까? 그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런 노력도 해보지 않고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해서 한 마디로 매도해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유의 기쁨을 맛보려면 바울 사도처럼 율법의 종살이를 호되게 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지키려는 가혹하고 고된 훈련이 없이는 은총의 복음은 공허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은총이 얼마나 달콤한가는 죄가 얼마나 무섭고 율법이 얼마나 혹독한가를 알아야 깨닫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은총은 결코 죄와 율법 이전의 방종이어서는 안됩니다. 은총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으로서, 율법을 넘어서는 초 율법이지, 결코 하 율법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대체로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제도 교회에서 나고 자라서 교회의 억압과 부조리, 율법주의적 교회에 크게 실망한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아예 제도 교회의 생활을 해보지도 못한 사람으로 교인으로서 이른바 훈련이라는 것을 별로 받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이렇다 할만한 노력도 별로 해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두 부류 모두 나름대로 가지는 신앙생활의 위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앞의 부류의 신자들, 즉 제도 교회를 떠났거나 박차고 나온 사람들의 위험은 제도 교회에서 풀려난 것은 좋으나 새로운 멍에를 질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도 교회에서 해야 했던 헌신과 책임은 회피하고 자유만 누리려는 위험입니다. 그런가 하면 후자, 즉 이전의 교회 생활을 별로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대로의 위험이 있습니다. 은총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모르고 당연시 여깁니다. 죄가 얼마나 무섭고 율법의 멍에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은총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제대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사실 다른 교회를 다녀 보지 못하고 처음부터 우리 교회를 다닌 사람은 기독교가 다 이런 줄 알지도 모릅니다. 모든 교회가 다 우리 교회 같은 줄 알기 쉽습니다. 율법의 훈련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은총과 자유가 자칫하면 율법 이하의 삶을 방치하고 정당화시키는 일이 되기 쉬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제도 교회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힘쓰고 말씀 공부에 힘쓰고, 열심히 교우들을 심방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십일조 내려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하는 일들이 무어가 나쁩니까? 그러한 노력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무조건 그런 것들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자유를 표방하는 우리 새길교회 사람들의 의는 바리사이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되어야지, 율법주의자들의 의보다 못한 의가 되어선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제도교회 목사와 장로들의 헌신을 능가하는 헌신이 되어야지 그들보다 못한 헌신을 하면서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가 얼마나 힘든 직업이며, 집사나 장로 노릇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평신도 교회란 한 마디로 각자가 다 목사요 장로가 되는 교회입니다. 그러한 책임 의식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평신도 교회는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자유로운 교회가 엉터리 교회로 되기 안성맞춤입니다. 자유롭다는 교회가 우리들의 나태와 방종의 구실만 제공하기 십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생활도 게을리 하고, 말씀공부도 등한히 하고, 자기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봉사도 하지 않으며, 선교와 봉사는 밤낮 하는 사람 몇 명만 하고,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운영위원회에 빠지는 것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리고 헌금도 정성과 자기희생 없이 하면서 평신도 교회를 한다고 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위선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새길이라면, 차라리 새길보다는 헌 길, 옛 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건물을 안 가진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만, 저는 가끔 생각해 봅니다. 안 가진 것입니까 아니면 못 가진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꼭 교회를 마련해야만 한다면 과연 우리 교회에 그런 능력이 있을까요? 할 수 있는 데 안 하는 것 하고 능력이 없어서 안 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전자는 자유이고 후자는 구속이요 제약입니다. 우리의 자유, 우리의 의는 후자보다는 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이고,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길입니다. 또 헌금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산의 40% 이상을 선교와 봉사에 쓴다고 자랑합니다만, 보기에 따라서는 목사님 봉급 주는 대신 그것으로 선교 봉사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일반 교회처럼 전담 목회자를 모셨다면, 과연 우리 교회가 목사, 전도사, 성가대 지휘 반주자에게 사례하고도 선교봉사에 40%를 쓸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어야만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이며, 우리의 자유가 책임 있는 자유가 되어서 엉터리 교회라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새길교회가 자유로운 교회라는 이름 아래 우리 모두가 책임 있는 교인으로서의 의무, 주인된 평신도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도 신앙생활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고 정당화시켜주는 교회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야말로 쉽게 예수 믿고 쉽게 신앙생활 하는 구실을 마련해 주는 교회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우리 교우들 가운데는 열심을 내어 주님의 사업에 참여하기보다는 주인 의식 없이 방관자적 자세로 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의 경우는 이해가 되지만, 오래 다녀도 그렇다면, 확실히 우리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 얼마 내는 것 정도로 신앙생활을 다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책무를 다 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올해에는 반드시 모두가 각 부서에 들어가서 부서 활동을, 각 부장은 한 달에 한 번씩 부서 모임을 가지고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점검하도록 합시다. 특히 선교, 봉사, 친교의 일에 앞장서기를 바랍니다. 이 세 분야는 특히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부서입니다. 책임 있는 평신도 교회가 되려면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반 교회들보다도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을 내서 말씀공부도 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일하는 정신과 방향과 목적이 율법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복음의 자유, 은총의 기쁨 가운데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새길교회가 추구하는 근본 정신이며 방향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한 번 어떻게 하는 것이 바리사이의 의보다 한 걸음 더 나간 의이며, 어떤 것이 율법의 완성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바울 사도는 사랑이라고 대답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에서 모든 율법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가르침이었습니다(마태 7:12, 22: 37-40).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의 종이 되라고 합니다. 종살이의 멍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발적인 종살이이며 다른 하나는 강압적인 종살이입니다. 멍에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메야할 멍에가 있고 메서는 안 될 멍에가 있습니다. 강압적인 율법의 종살이는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종살이이지만, 사랑의 멍에, 사랑으로 자취하는 종살이는 기독교인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의 빚, 자발적인 종의 멍에, 자발적 봉사와 헌신, 자기 희생과 절제의 멍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메야 할 멍에요 져야할 빚입니다. 은총의 감격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굴레, 더 많은 봉사와 선교를 위한 규율과 훈련, 자기 희생과 헌금, 이런 것들은 자유를 표방하는 우리 교회로 하여금 엉터리 교회라는 비난을 받지 않게 하고 자유 가운데 책임을 다하는 교회, 보다 성숙한 자유를 구사하는 교회로 만들 것입니다. IMF 한파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모두 움츠려졌고 사회는 더욱 불안하고 냉랭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은 그럴수록 더 많아집니다. 얼어붙은 사회를 사랑으로 녹이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제도와 율법에 얽매인 교회가 아니라 제도와 율법을 완성하는 교회,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보이는 교회, 사랑으로 종살이를 자취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자유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자유를 방종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시오" 이것이 새로운 한 해를 우리들에게 은총으로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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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 에배소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 창조와 구속에서. 엡1:10  김남준 목사  2008-03-10 2078
630 에배소서 교회의 모든 필요와 유일한 寶庫이신 그리스도 엡1:23  김남준 목사  2008-02-10 2044
629 에배소서 옛 사람을 벗고 엡4:21-24  이주향 자매  2008-01-13 2216
628 에배소서 가족 엡5:21-22  민영진 목사  2008-01-13 2023
627 에배소서 세월의 신령한 평가 엡5:15-17  강종수 목사  2007-12-30 2322
626 에배소서 평화의 다리, 예수님 엡2:13-17  한완상 형제  2007-12-05 2360
625 에배소서 BC의 나와 AD의 나 엡2:11-22  강종수 목사  2007-10-28 2230
624 에배소서 죽은 자와 산 자 file 엡2:1-2, 8  강종수 목사  2007-06-03 2135
623 에배소서 가족의 성공 [1] 엡6:1-4  강종수 목사  2007-05-06 2520
622 에배소서 1:17-18 이중 구조의 세상 file 엡1:17-18  강종수 목사  2006-12-10 1975
621 갈라디아 근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갈3:28  최만자 자매  2008-11-30 1445
620 갈라디아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갈5:24  조용기 목사  2008-10-22 2063
619 갈라디아 아! 십자가 갈2:20  조용기 목사  2008-09-23 1960
618 갈라디아 자유로움의 세계로! 갈4:21-5:1  정용섭 목사  2008-09-18 1794
617 갈라디아 성령의 인도 갈5:16-18  강종수 목사  2008-09-14 1915
616 갈라디아 심고 거두세요 갈6:7-8  강종수 목사  2008-09-06 1971
615 갈라디아 하나님 아버지 갈4:1-7  권진관 형제  2008-05-28 1911
» 갈라디아 자유의 종살이 갈5:1  길희성 형제  2008-05-16 1933
613 갈라디아 정상적인 기독교인의 삶 갈2:20  강종수 목사  2007-12-02 2285
612 갈라디아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갈3:28  한완상 형제  2007-11-2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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