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엡1:7-10 |
---|---|
설교자 : | 박동현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신약의 다른 서신서와는 달리 에베소서는 기독교인들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을 길게 찬양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3절에서 14절까지 열두 절이 그것인데, 그 가운데 둘째 부분이 오늘 설교본문입니다. 설교본문인 7∼10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중간에 한 번도 끊어짐이 없이 죽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 부분을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 건조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헬라 본문을 따라 본문의 짜임새와 흐름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중심 문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속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구속함'이라는 말을 7절에서는 '죄 용서'라는 표현으로 풀이하고, 그렇게 구속함 곧 죄 용서함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라고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른 것이라 합니다. 본문의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이 베푸신 풍성한 은혜에 대해 설명합니다.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베푸신 은혜의 내용은 하나님이 당신 뜻의 비밀을 알려 주신 것인데, 이는 때가 이르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정하신 좋은 뜻을 따른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래 전에 계획하신 바 그 비밀이, 때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의 내용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신 것이라 합니다. 따라서 10절은 미래형 문장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현재완료형이나 과거형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낫습니다. 곧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서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신 것입니다"로 하면 좋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신 데서 똑똑히 드러났는데, 그 비밀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통일하신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통일의 비밀을 알리심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의 통일'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들어보려고 합니다.
우리말 본문 10절에서 '통일시키다'로 옮긴 헬라 낱말의 뜻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낱말은 '중심 부분, 주요 부분'을 뜻하는 명사에서 비롯된 동사입니다. 이는 본디 "무엇을 '중심 부분, 주요 부분'에 맞춘다"는 뜻을 지닙니다. 글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는 이 동사를 본문에서는 '한데 묶다'는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달리는 이 낱말이 '머리'를 뜻하는 헬라 낱말과도 관련되고, 22절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함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만물을 한데 묶는다는 뜻도 '통일하다'라는 동사의 뜻 가운데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10절은 결국 그 동안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나누어지고 갈라진 만물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한데 묶으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온 누리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현실적으로 회복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효과가 사람을 포함하여 온 누리에 미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그저 한 사람 한 사람만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이어지고 한데 어우러지게 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에 담긴 가르침이 여러 가지 입니다만 이 시간에는 우리 겨레의 해방과 통일을 생각하게 되는 팔월을 보내면서 네 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본문 말씀은 우리 겨레의 통일도 온 누리의 통일이라는 큰 틀 안에서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통일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겨레가 남북으로 나누어진 가슴 아픈 현실을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이 가르치는 통일의 우주적인 성격에 비추어보면, 남북 사이뿐만 아니라, 동쪽과 서쪽,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자본가, 위 세대와 아래 세대, 본국인과 외국인, 그 밖에도 이런 저런 계층들이, 더 나아가서는 사람과 짐승, 사람과 식물, 사람과 다른 피조 세계가 서로 갈라지고 나누어진 채 살아왔다는 점까지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시간적으로도 우리 겨레가 남북으로 나누어진 채 살아온 지난 반 백년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오랫동안 우리는 동포들 사이에 이어지는 끈끈한 마음으로 하나되어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앞으로 남북을 가로막는 휴전선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걷어 치워주신다 하더라도 그저 자기 욕심을 좇아 자기 이익만 꾀하는 우리들의 못된 본성이 달라지지 않는 한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온 누리를 다 지으시고 그 아름다움에 흐뭇해하시던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온 누리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큰 뜻 안에서 통일을 생각하게 하는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편협한 민족 통일 지상주의에 빠질 수 없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배달겨레의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세계에 드러내고 일등 국민으로 행세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 우리를 괴롭히던 민족들보다 더 센 힘을 지니고서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신명기 28장 12∼13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겨레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주기는 하여도 꾸지는 않도록' 해주시고, '머리가 되게 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오직 위에만 있게 하고, 아래에 있게 하지는 않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민족을 세계의 일등 국민으로 만들어 주십사 하는 기도를 공공연히 드립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 첫머리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실 때 하신 약속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브람을 통해 이 세상 모든 족속이 복을 받기 위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기도만 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 겨레를 통하여 온 누리가 복을 받게 해달라고, 이 민족이 통일되어 우리보다 약하고 어려운 나라들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통일은 온 누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계기요 과정이어야 하지, 다른 나라, 다른 겨레 위에 홀로 우뚝 서기 위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온 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인 것이 온전한 구원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통일도 바로 이러한 만물의 통일을 향한 것이어야 함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오늘 남한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겨레의 통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온 누리의 통일이 구원의 비밀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통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통일을 말하는 속셈은 한결같지 아니합니다. 남북의 대부분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고 굳게 하기 위해 통일문제를 제 좋도록 이리 저리 다루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한의 경제인들 가운데는 기업의 이윤,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라는 면에서 통일을 바란다는 인상을 풍기는 사람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심지어 종교계 지도자들 가운데도 겨레가 참되이 하나 되도록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떨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통일 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없지 아니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나는, 무엇 때문에 통일을 바라는지, 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에게 분명히 물어보아야 합니다.
겨레가 남북으로 나누어져 산 지가 반백 년이 지나다보니, 통일에 대한 생각도 상당히 달라지고 있는 듯 합니다. 1945년 해방의 기쁨과 6.25 전쟁을 겪은 이른바 분단 일 세대의 경우와는 달리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분단은 그리 실감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분단 삼 세대라 할 수 있을 이들은 분단이 기존 질서로 상당히 굳어진 때에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통일이 낯선 질서일 수 있습니다. 기껏해야, 한 민족이 나누어져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기에 통일되면 좋겠다는 정도로 인식할는지 모릅니다. 오히려 통일되기보다는 분단된 상태로 그냥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여러 기관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절반 이상의 청소년들이 통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청소년들만 그렇겠습니까? 기성세대 가운데서도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가 통일 직전의 서독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바를 돌이켜 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89년 여름부터 동독 사람들이 물밀 듯 서독 쪽으로 넘어올 때, 서독 사회가 겉으로는 동포들을 환영한다고 하였지만, 적지 않은 서독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드러나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속으로는 그냥 분단된 상태에서 그 동안 자기들이 누리고 있던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혜택, 이른바 수준 높은 질의 삶을 계속 누리고 싶어하는 듯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이 이 세상 모든 것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겨레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겨레의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구원을 결코 온전하다 할 수 없습니다.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통일은 구원의 비밀에 속함을 잊지 마십시다.
셋째로, 통일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이루신 통일을 우리는 잘 지켜야 합니다. 이 점에서 본문은 에베소서 4장 3절과 비슷합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라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인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 놓으신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미 온 누리를 하나로 묶으셨고, 통일하셨기에,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나로 묶인 온 누리를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통일에 힘쓴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이루어 놓으신 온 누리의 통일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남한 교회에서 겨레의 통일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 드려 왔고, 특히 80년대부터는 나라 안팎의 많은 교회기관에서 여러 가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남북통일을 위해 힘써 왔으며, 그 성과가 어느 정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갈라진 겨레를 다시 하나되게 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늘 생각하시듯이 우리 민족의 통일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미 이루신 모든 피조물들의 통일을 우리가 잘못해서 깨뜨리고 지키지 못한 잘못을 깊이 돌이켜보고 뉘우치면서, 앞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배달겨레가 다시 하나되는 기회를 주실 때, 그 기회를 헛되게 하지 않도록 단단히 각오하고 준비하고 스스로를 다지며 훈련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일 문제를 두고서 기도 드리는 내용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주로 하나님께서 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을 간구했다면, 이제 우리는 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미 온 누리에 베푸신 통일, 우리가 깨뜨린 통일을 다시 회복하고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십사고 간절히 매달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우신 은혜로 휴전선을 없이 하시고 남북의 동포들이 자유로이 다시 만날 날을 주셨을 때, 그 기회를 다시는 그르치지 않는 우리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우리가 그러한 회복과 보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면 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가르침으로서, 그런 회복과 보존의 일을 하는 방식도 본문이 가르쳐줍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 겨레의 통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앞서 본문의 흐름을 살펴 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의 뜻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깨어진 민족 통일을 회복하여 보존하는 길은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깨어진 통일을 회복하여 보존한다 함이 실제로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전민족 복음화, 곧 기회 있는 대로 남북한 가릴 것 없이 안 믿는 동포들을 예수 믿게 만들면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답을 우리는 에베소서 2장 14∼1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사람과 이방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는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오로지 그만이 우리의 평화이시라"로 번역할 수 있을 만큼 주어인 예수 그리스도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물론 에베소서 2장 14∼16절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한데 묶으신 방법을 잘 보여줍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버리심으로써 서로 갈라져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으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새 사람으로 지으셔서 서로 평화스럽게 함께 살며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배달겨레의 깨어진 통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온 누리의 통일이라는 큰 틀 안에서 회복하여 보존하고자 한다면, 우리도 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자신을 버림으로써만이 원수 되었던 두 쪽이 다시 하나로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둘 사이에 놓였던 담을 허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기에 내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깊이 깨달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을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지음 받은 '새사람'이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남한의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겨레의 통일을 회복하고 보존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길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막힌 담을 허는 길입니다. 우리 자신을 주어서 상대방과 하나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온 누리의 통일을 되찾고 지키는 길입니다. 이 길은 체제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통일을 이루고자하는 길하고는 다릅니다. 그런 것도 필요할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우리는 짐으로써 이기려고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겨레에게 통일 회복의 길을 열어주실 때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일은 우리 가진 바를 아낌없이 내어놓아서 그 동안 쌓인 불신과 오해와 편견을 하나씩 없애 가는 일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하나도 양보하지 않고 그저 상대방이 내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통일을 회복하고 보존하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렇게 내 것을 내어놓고, 나를 버리는 것을 우리는 지금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그것이 적어도 에베소서의 흐름에서 깨닫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을 위해 힘쓰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북한 동포들을 다시 만났을 때 우리가 누리고 있던 편리한 생활을 조금이라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우리 삶의 질이 떨어지더라도 갈라졌던 동포들과 함께 사는 것을 더 기꺼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각오를 할 수 있는 기독교인들이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나 됩니까?
'그리스도 안의 통일' - 여러분, 통일은 우리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피조물들이 서로 나누어지고 갈라졌던 것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신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그 주어진 통일을 우리는 이 한반도에서 우리의 현실로 드러내 보일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갈라진 사람과 사람 사이, 모든 피조물들 사이를 이어 하나로 묶으신 그 분의 본을 따라, 이제 우리도 우리를 버리고 내어놓음으로써 겨레의 염원인 통일을 제대로 이룰 뿐 아니라 온 누리를 하나로 묶으신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우리들이 되도록 굳게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