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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살후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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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인선 교수 |
참고 : | . |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 데살로니가후서 1장 -
데살로니가후서라! 우리는 전혀 새로운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라, 이미 들어가서 거닐었던 땅을 다시 찾은 것이다. 전서와 동일한 세 사람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과 전서의 언어와 구조를 아주 면밀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 (50년 초에) 전서를 써서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아마 몇 주 이내) 또 데살로니가를 두 번째 방문하기 전(행 20:1-2) 여전히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에 후서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세 가지 주요 화두를 다룬다: (1) 데살로니가교회가 경험하고 있던 격렬한 박해(1:3-12); (2) 주의 날에 관한 오해(2:1-12); 그리고 (3) 회중 가운데 어떤 사람들의 분란을 일으키는 행동(3:6-15).
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 성실성을 강하게 변호했는데(2:1-12), 후서에서 그것을 반복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독자들이 바울의 말을 받아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전서에서 간략하게 다룬 바 있는 게으름의 문제는 바울이 바라는 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더 악화된 것 같다(살후 3:6-15). 또 전서를 받은 이후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 주의 강림에 관하여 새로운 오해가 생긴 것으로 보이며, 그들 가운데 주의 날이 이미 임했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후서에서 특히 주의 강림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이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노력한다(살후 2:1-12). 동시에 데살로니가에서 한동안 잠잠하던 박해가 다시 일어났든지 혹은 박해가 더 강화되었든지 간에 바울은 신자들에게 궁극적인 승리와 상급과 공의를 확신시킨다(살후 1:3-12).
1. 인사(1:1-2): 전서와 같이 후서도 세 사람 곧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의 이름으로 보낸다. 전서와 후서 전체를 통하여 1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를 일관성이 있게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인사에서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포함시키는 것은 단순히 격식을 차리는 것 이상의 실질적인 역할이 있음을 시사한다. 세 선교사 모두 데살로니가 회중에게 주는 격려와 교훈과 명령에 나란히 선다.
동시에, 바울이 맨 앞에 나오는 이름의 순서와 때때로 “내가”(살전 2:18; 3:5; 5:27; 살후 2:5; 3:17)를 사용하는 것은 바울이 거의 확실하게 편지들의 초안을 잡거나 편지들을 불러준 사람이었음을 나타낸다. 디모데는 전서 또는 전서와 후서를 전달하였을 것이다(살전 3:2, 5 참조). 실루아노는 바울이 불러 준 것을 받아쓴 사람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나 확인할 수는 없다.
후서의 인사는 두 가지 작은 차이 외에 전서와 동일하다. 첫째 차이는 “아버지”에 “우리”를 첨가한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은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개념을 반영하는 것이다(롬 8:14-23; 갈 3:26; 4:4-7 참조). 다른 차이는 2절에서 은혜와 평강의 근원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명시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2. 감사(1:3-4): 편지학적 관점에서 1:3-12는 편지의 “감사”부분을 형성한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기도할 뿐 아니라 칭찬하고 교훈하기도 한다. 수사학적 관점에서 1:3-12는 ‘엑소디움’(exordium) 즉 서론 역할을 하는데, 두 가지 기본적인 목적을 이룬다: 독자 곧 데살로니가인들의 호의를 얻고 편지에서 말하려는 것을 듣고자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며(3-4절에서의 칭찬과 확언), 또 편지의 주요 테마들을 밝히는 것이다(5-10절에서의 “주의 날”이라는 중심 화두의 제기). 문법적으로, 헬라어 원문에서 3-10절은 (1-2절 및 11-12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문장이다. 내용상으로, 3-10절은 두 문단 곧 3-4절과 5-10절로 나눌 수 있다.
3a절의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하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동일한 문장이 아래 2:13에서 반복되는데(유카리스테인 오페일로멘 토 데오 판토테 페리 휘몬) 우리 성경에서는 두 곳에서 약간 강도가 다른 번역으로 나타난다. 혹자는 “우리가 ...할지니”(1:3) 또는 “우리가 마땅히 ...할 것은”(2:13)이라는 표현에서 감사가 기쁨이 아니라 의무로 보인다고 생각하고 이는 바울의 사상이 아니므로 데살로니가후서가 바울의 저작일 리 없다는 주장을 위한 하나의 빌미로 삼으려 하나,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를 고려하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바울은 3b절에서 두 가지 감사의 이유를 말하는데(‘믿음의 성장’과 ‘사랑의 풍성함’), 이 두 가지는 바로 바울이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살전 3:10, 12)이라고 말했던 것이 아닌가! 데살로니가후서 1:3a에 어떤 책임 관념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의무로 인한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인들이 경험한 성장에 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고마움으로 인한 것이니, 이 고마움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데살로니가인들의 성장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 이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4절에서 바울은 두 가지 감사의 이유를 더 말한다: 데살로니가인들은 모든 박해와 환난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믿었다(신뢰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바울에게 있어 어려운 조건 아래서도 그리스도인의 헌신을 저버리지 않고 인내하는 모범적인 모델이었다.
3. 교훈과 격려(1:5-10): 5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라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이는”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 나타나지는 않으나 구문상 함의되어 있다. “이는”은 바울이 방금 3-4절에서 감사의 이유로 언급한 네 가지를 가리킬 수 있는데, 이 네 가지는 동시에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의 증거 곧 ‘하나님의 판단이 옳다는 증거’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이 박해의 와중에서 인내하고 신뢰할 뿐 아니라 실제로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표지로 해석한다. 하나님을 믿는 데살로니가인들은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세력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킨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고,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이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데살로니가인들이 증명한 믿음의 더욱 자람과 사랑의 풍성함과 인내와 믿음은 그들이 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박해와 환난을 받은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살전 2:12 참조).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박해와 환난은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임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6절에서 바울은 5a절로부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사상을 다시 집어들고 발전시킨다(우리 말 성경은 7절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언급하나 헬라어 원문에서는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공의롭다”는 말이 6절에 나온다). 이 심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부정적인 측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환난을 받게 한 자들에게 환난으로 갚으시는 것이고(6절), 긍정적인 측면은 환난을 받는 자들에게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다(7a절).
부정적인 측면은 8-9절에서 더 논의된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속한다(8절). 이 두 표현을 연관지어 생각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단순히 무지한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배척하는(“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롬 1:18-23, 25, 28 참조). 이러한 자들에게는 받을 “형벌”이 있다. 형벌의 내용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것인데 곧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에서 “떠나는” 것이다(9절). 멸망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며(살전 4:17)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롬 8:17-18, 30; 고후 4:17; 빌 3:21) 구원과 정반대이다.
7a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심판의 긍정적인 측면은 10절에서 간단히 설명된다. 복음을 순종하지 않은 자들(8절)과 대조적으로 “믿는 자들”은 주님 자신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의 거룩한 백성들 면전에서 영광을 받게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또한 주님을 찬탄하거나 예배한다는 의미에서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 10절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말하는 요점을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직접 적용한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믿는 사람들의 무리에 바울의 증거를 믿은 데살로니가인들도 포함된다. 현재 환난을 경험하고 있는 그들에게 이 말은 위로가 되고 다시 확신을 준다. 동시에 계속 견디어 내라는 권면이 숨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바울이 말하는 이 모든 것은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7b절) 곧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10절)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언급한 주 예수의 “강림”(4:15)이나 “주의 날”(5:2)과 동일한 사건이다. “나타나실(때)”이라는 말은 사실 아포칼립시스(“계시”)라는 명사를 번역한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파루시아 대신 이 말을 사용한 것은 현재는 감추어져 있거나 가리워 있다는 뉘앙스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현재도 실로 주님이시지만 아직 모든 피조물이 그 사실을 인정하거나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실로 하나님의 백성을 적극적으로 박해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수의 주 되심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계시”될 그날이 확실히 오고 있으며, 바울이 6-10절에서 묘사한 결과들을 동반할 것이다.
4. 기도의 보고(1:11-12): 이는 실제의 기도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내용으로 기도한다는 것에 관한 보고이다. 여기서 바울은 5-10절의 몇몇 주요 테마들을 반복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그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는 내용(11절)과 목적(12절)을 알려준다.
첫째 간구는 하나님이 그들을 그의 부름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둘째 간구는 그들의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게 해달라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주 예수의 이름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호성의 요소가 있으며(“너희 가운데서,” “그 안에서”), 시간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 때 오는 한 가지 결과는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현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주와 그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면 차례로 그를 따르는 자들이 영광을 받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기인한다. 신자에게 있어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모든 것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달려 있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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