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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살후2: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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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인선 교수 |
참고 : | . |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 데살로니가후서 2장 -
데살로니가후서 2장은 내용상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1-12; 13-14; 15; 16-17절), 1-12절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는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여기서 그의 가르침의 구조는 일견 분명하다(1-2절[일반적인 화두와 특정한 관심]; 3-4절[바울의 강조적인 반응]; 5-12절[불법의 사람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 그러나 이 문절에는 바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말들이 많다. 그러기에 우리는 알 길이 없는 것을 추측하는 데 몰두하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분명하고 확실한 교훈을 파악하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함께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1.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1-12절): 바울은 그리스도의 강림이라는 일반적인 화두와 주의 강림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소문으로 인하여 데살로니가인들이 혼란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특정한 관심을 표명한 후에(1-2절), 불법의 사람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혼란에 빠지지 말아야 할 근거를 제시하고(3-4절), 나머지 부분에서 이 사탄의 사주를 받는 인물에 대하여 더 설명을 한다(5-12절).
1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하는 말 가운데 첫째 요소는 데살로니가전서 5:1-11에서 다룬 것과 동일하고, 둘째 요소는 데살로니가전서 4:17에서 묘사한 것과 동일하다. 2절에서 바울이 표명하는 특정한 관심은 데살로니가인들 가운데 이미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주장으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떻게 이런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오해가 생기게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여하튼 바울의 가르침이 오해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 틀림없다. 아니 데살로니가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3절 이하에서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답변하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오해의 경로에 있지 않고 주의 날이 이미 이르렀다는 오해의 내용에 있었다.
바울은 오해를 자기에게 돌리는 것과(15절 참조) 오해의 내용을 강조해서 부인한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3a절: “누구라도 결단코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사역]). 주의 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의 날이 오기 전에 먼저 일어나야 할 일들이 있는데 그 일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일어날 일들은 배도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이 출현하는 것이다. “배도”(아포스타시아)라는 말은 정치적 배도나 종교적 배도를 가리킬 수 있으나 여기서는 후자를 더 강조하면서 이 두 가지 요소를 결합하는 것 같다.
불법의 사람은 곧 배도를 이끄는 지도자일 터인데, 3b-4절은 일련의 평행 어귀로 이 존재를 묘사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불법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이다. 불법(아노미아)은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죄로 가득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러기에 그는 멸망의 아들 곧 멸망을 당하게 되어 있는 아들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할 뿐 아니라 또한 신이라고 불리거나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 위에 자신을 높인다(단 11:36-37 참조). 이 오만하고 대담한 자기 높임의 결과와 절정은 한 분 참되신 하나님의 능력과 자리를 찬탈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나오스) 곧 성전의 가장 거룩한 부분인 성소 자체 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는 것이다. 더욱이 주 예수 자신과 같이 이 불법의 사람은 자신의 “나타남”(아폴칼뤼-챁토, 3, 6, 8절) 또는 “강림”(파루시아, 9절: 우리 성경에는 앞의 말과 똑같이 “나타남”으로 번역하나 구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이 있을 것이니, 이는 진품을 모방하는 꼴이다. 불법의 사람은 다름 아닌 ‘라이벌’ 메시야 또는 적그리스도, 아니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가짜 그리스도이다(요일 2:18 참조).
하나님의 “성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기 어렵다. 예루살렘 성전, 예루살렘에 재건된 성전, 교회, 또는 하늘의 성전 등이 제시되었으나, 아마도 바울은 이 언어를 은유적으로 또 모형론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바울은 성전에 앉아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모티프를 사용하여 불법의 사람 곧 악이 하나님께 대하여 대적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안전하다(I.H. Marshall). 이렇게 4절에 관하여 불확실성이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울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데살로니가인들이 안다는 것을 당연시하고(5절),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6-8절에서 바울은 적절한 때까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억제하는 또는 막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만 암시적으로 말할 뿐이어서 그 결과 6-8a절은 바울의 모든 글에서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억제하는 것이 무엇인지(6절, “막는 것”) 또는 누구인지(7절, “막는 자”)에 대하여 황제로 인격화된 로마 제국, 7절에서 인격화된 법과 질서의 원리, 유대인 국가, 사탄 또는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세력과 사람, 하나님과 그의 능력 또는 성령, 그리스도인 선교사들 특히 바울 자신에 의한 복음의 선포,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까지 악을 억제하는 어떤 천사 등의 다양한 제안이 있으나, 불행하게도 이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을 설득하거나 난점이 없는 제안은 없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하여 일찍이 어거스틴이 고백한 것처럼 바울이 말하는 막는 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바울이 말하는 기본적인 내용은 분명하다: 불법의 비밀 즉 은밀한 능력이 이미 활동하고 있다(7a절); 그러나 좀 억제되거나 눌리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6, 7b절); 그러나 어떤 미래의 시간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거나(8a절) 그의 “강림”이 있을 것이다(9절); 그 때에 주님 자신의 강림의 장엄하심과 훨씬 더 큰 능력으로 불법의 사람은 전복되고 멸망을 받을 것이다(8b절).
억제하는 또는 통제하는 영향력이 제거되면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날 것이다(7b-8절). 즉, 그의 ‘강림’(파루시아)이 있을 것이다(9절). 우리말 성경은 9절에서 “악한 자의 나타남”이라고 번역하는데, 헬라어 원문에 “악한 자”라는 말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속격의 관계대명사(“...의” 나타남)가 있는데, 문맥상 8절의 불법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인물을 가리킬 인상을 주는 “악한 자”라는 말 대신 불법한 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이 불법한 자는 이제 더 이상 은밀하게 활동하지 않는다(7a절). “사탄의 활동”을 따라 일하는 그는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자신을 공개적으로 나타낸다(9-10a절). 이는 진짜 그리스도 곧 주 예수의 참된 강림을 악하게 패러디하는 것이다. “거짓”이라는 말은 불법한 자의 행동 특성을 묘사하고, “불의의 모든 속임”이라는 말은 그 결과를 나타낸다. 즉, 불법한 자는 결국 거짓된 것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멸망하게 되어 있는 사람”이며(3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전복시키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멸망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8b절). “강림하여 나타나심”이라는 어귀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의미가 있는 에피파네이아(“출현”)와 파루시아(“강림”)라는 두 개의 명사로 되어 있는데(직역하면, “강림의 출현하심으로”) 예수 오심의 “갑작스러움” 또는 “예기치 못함”과 불법한 자의 거짓 모방과 비교하여 예수 오심의 “압도적인 위대하심과 영광”을 시사한다. 불법한 자의 활동이 아무리 거창해 보여도 결국 예수께서 이기신다! 결국 예수께서 이기신다! 우리는 불법의 사람의 정체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추측에서 벗어나 결국 이기시는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한다.
불법한 자의 거짓 표적과 능력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영향을 행사하여 그들을 속인다. 멸망하는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그들이 진리를 사랑함으로 구원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10절). 즉, 그들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선택의 결과이다. 그들은 진리를 믿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불의를 좋아했다(12a절). 10절을 뒤집어 보면 구원을 받은 자는 거짓 능력에 속임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함의한다. 이는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계속하여 거짓 능력과 기적에 속임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권면을 내포한다.
11-12b절은 이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를 논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즉, 불법한 자의 거짓 파루시아)을 믿게 하심은 ... 심판을 받게 하심이라.” 여기서 기본적인 사상은 로마서 1:18-32(특히 23-28절)에 표현된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의 행동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의 행동에 대한 원인이 아니라 응답이라는 것이다.
2. 바울의 감사(13-14절): 바울은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불법의 사람을 따르는 자들의 운명과 한 분 참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운명과 대조한다(원문에는 13절 초두에 ‘그러나’가 나온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얻은 구원을 인하여 감사하는데, 바울의 주요 목표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구원에 관하여 재확신을 주는 것이다. 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들을 택하셨다(신 26:18 참조).
이 구원은 두 가지 수단에 의해서 효과적인 것이 되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 곧 복음을 믿음. 이는 전도자를 통하여 복음으로 부르시는 가운데 일어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의 목표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된다(살전 2:12; 롬 8:29-30; 살전 5:9 참조). 여기서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곧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얼마나 멋지게 어우러지는가!
3. 전통을 지키라는 권면과 격려(15절): 바울의 감사는 권면의 기초가 된다(“그러므로”). “굳건하게 서라”는 말은 2절의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전통(파라도시스)은 복음의 기본적인 메시지에 관한 전통을 가리킨다.
4. 바울의 기도(16-17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 우리에게 두 가지 선물 곧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셨다. “영원한 위로”는 이 세대의 환난과 앞으로 올 심판보다 오래 갈 위로이며, 우리가 완전히 영생을 경험할 때까지 우리를 붙들어 줄 위로이다. “좋은 소망”은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이 이 말을 사용한 것처럼 개인 자신의 행위에 근거한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랑에 근거한 소망이요 따라서 미래에 관한 진정한 낙관론의 견고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일과 말”은 인간 행동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어귀이다(골 3:17 참조). 우리가 여기서 바울이 미래에 불법의 사람의 올 것에 대하여 논의한 것을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에 기초하여 현재에 위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로 끝낸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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