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약1:12-15 |
---|---|
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지난주는 온통 신창원 주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창원 바람이 휘몰아쳤습니다. 몇 년 동안 그의 이름이 회자되면서 한국사람 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그의 절도행각이 종지부를 찍으면서 사태는 오히려 새로운 국면을 맞는 것 같습니다. 한 도둑놈을 놓고 온 나라가 이렇게 떠들썩하는 것은 아마도 대한민국 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불과 얼마 전 고관 집들을 털어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라든지, 혹은 좀 더 시간을 거슬려 올라가서 이른바 대도 조세형의 절도 행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의 집 장롱을 자기 호주머니 뒤지듯 하고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위기마다 도망치는 그 신출귀몰의 재주가 우선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런 도둑들은 언제 어느 사회에나 있기 마련이며, 지금도 그런 도둑질을 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조세형이나 신창원의 경우 그토록 세인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이상야릇한 형태로 우리 사회의 도덕적 부조리를 비웃고 왜곡된 사회현실을 고발하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신창원 사건은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 그 자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생긴 말인지는 모르지만, 작은 도둑은 잡아들이고 큰 도둑은 활개치고 다닌다는 냉소적인 말이 우리 사회에서 상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굳이 친일행각을 하다가 해방 후에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들을 들먹일 필요는 없다해도, 최근 2∼30년간에 우리가 경험한 것만 해도 그러한 도덕적 회의와 냉소주의를 낳기에 충분합니다. 5.16쿠데타의 주역이 지금도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가 하면, 역사를 후퇴시키고 온 국민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 준 5공의 주역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으니 누가 이 사회에 정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무언가 바뀌겠지 했던 기대는 또 다시 배신과 실망만을 낳게 되었으니, 바보가 아니면 누가 정의를 믿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있듯이 정의를 집행하는 공안 당국에 대한 불신이 극도에 달해서 돈 없고 힘없는 자만 억울한 세상이라는 말을 신창원이 아니라 그보다 더 흉악한 강도가 했다 한들 누가 아니라고 항변하겠습니까? 인터넷에는 신창원을 동정하는 글들이 심심지 않게 떠서 우리 사회를 당혹케 하고 있으며, 이번에 신창원을 잡고도 가장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경찰은 그가 강도 짓뿐만 아니라 부녀자를 강간했다는 근거도 희박한 얘기를 흘려 그에게 쏠린 동정심을 희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고작 중학교 중퇴의 학력에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것이라고는 도둑질과 감옥에 갔다가 탈옥하여 도피행각을 벌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신창원의 일기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끄덕이다 못해 감탄하며, 감탄하다 못해 감동마저 받는 세상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막힌 세상이 되었습니다.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한 우리 공권력을 골탕 먹인 신창원의 행각에서 사람들은 일종의 쾌감 내지 대리만족마저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세태를 한 마디로 정곡을 찔러 표현한 말이 최근 어느 잡지 광고에 실린 '신창열와 임창원'이라는 두 이름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름들!
신창원이 무슨 동기로 일기를 남겼는지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분명히 그는 이 세상을 향해서, 이 사회를 향해서 무언가를 절실히 말하고자 했던 것만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굳이 자기에게 불리한 일기장을 왜 남기려 했겠습니까? 도둑은 어디까지나 도둑이지 의적이란 없다지만, 도둑일수록 한에 맺힌 사연이 많으며 할 말이 많은 법입니다. 아마도 신창원은 자신의 절도 행각이 오래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세상에 의해 경청될 챤스가 많아질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이며, 이러한 계산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제관료로서 출세가도를 거침없이 달려왔으며, 경제위기와 정권교체기에도 교묘한 줄타기를 통해 커리어의 정점에 이른 듯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가 하룻밤 사이에 수의를 입고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또 다시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 한없이 불쌍해 보였고 보고 있는 나 자신이 민망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남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모든 것을 성취한 듯한 저 부부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짓을 했을까? 답은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이 아니겠습니까?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는 야고보서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노자 도덕경에는 사람이 만족을 모르면 위태롭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부단히 욕심의 유혹을 받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 모두의 현실입니다. 없는 사람은 없어서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은 있어서 더 욕심을 부리며 유혹을 받습니다. 젊은 사람은 젊어서 야망의 유혹을 받고 늙은이는 노욕을 부립니다.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죄를 잉태하는 욕심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괴롭히고 있으며, 언제라도 우리 인생을 파멸로 이끌 태세로 기회만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기 자기 욕심에 이끌려 꾐에 빠지기 때문이다"라고 야고보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도덕적인 사람과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단순하고도 결정적인 기준은 바로 이 욕망의 유혹을 이기느냐 아니면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넘어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고 유혹은 누구든지 받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식욕, 성욕, 물질의 욕망, 권력욕, 명예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그 욕망을 제어하느냐 못하느냐 만이 차이일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속에는 알게 모르게 온갖 욕망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이 욕망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패가망신하며 파멸의 길로 치닫고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이 자연인의 욕망, 그대로 방치하면 끝없이 타오르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이 욕망의 불길을 그대로 둔 채 제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제 아무리 선행을 가장해도 결국 욕망은 그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고 우리를 끝내 사망으로 이끕니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른바 제 2건국이라는 표어를 내걸었을 때, 그것을 믿은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평생 현실 정치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현 정부의 수장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동안 야당 하느라 굶을 대로 굶었던 사람들이 과연 부패의 사슬을 끊고서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인간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나이브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정치의 기회를 살려 그런 대로 정치 B학점 정도만이라도 받으려고 노력하면 될 것이지, 무슨 자기들이 성인들이라고, 무슨 도덕적 우월성이 있다고 제2건국을 운운합니까? 파렴치한 도덕적 교만이고 나쁘게 말해서는 자신의 권력 야욕과 부도덕성을 가리려는 위장술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았는데 무슨 새로운 정치, 깨끗한 정부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애당초 기대한 것 자체가 잘 못일 것입니다. 김영삼씨의 집권으로 3김 시대는 끝나는가 했더니 요즈음은 김대중 정권이 중간도 마치기 전에 벌써부터 후 3김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면 정치와 정권만 그렇습니까? 요즈음 저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에 대한 희망, 자신감을 점점 더 상실해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사람도 다 지나고 보니 한 자리 차지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시민운동 하다가 권력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모든 시민운동이 순수하게 봐지지 않고, 비판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교수들이나 언론인들의 권력 지향적 성향을 보면 점점 더 냉소적이 됩니다. 누가 하나 언론에 뜨면, 저 놈 또 무엇을 노리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드니 큰 일이고, 설사 본인은 가만히 있어도 조금만 이용가치가 있으면 권력의 마수가 유혹의 촉수를 뻗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정치학 하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사람을 권력욕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못 마땅했는데, 요즈음은 그들이 이해가 갑니다. 순수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자기 욕망, 자기 이익을 실현하고자 혈안입니다. 가장 안 그럴 것 같은 대학사회만 봐도 그렇습니다. 대학교수치고서 자기 입으로 보직을 좋아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정작 캠퍼스에서 일고 있는 캠퍼스 정치는 진짜 정치를 뺨치는 보직 싸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모두가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자기 영역 지키기는 데는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대학교수들은 비행기 납치범보다도 더 지독하다고 하겠습니까? 결국 사람은 대동소이하고 다 그렇고 그런 존재들인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기 안에 있는 탐욕은 그대로 둔 채 무슨 사회정의를 외치고 무슨 시민운동을 한다고 야단들입니까? 무슨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수유리 화계사에 현각 스님이라는 미국 스님이 있습니다. 그의 삶의 고백은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예일대학 학생 시절 극렬한 학생 데모에 앞장섰다가 평화를 모르고 분노뿐인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서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서 세상을 바꾸는 일보다는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자신을 바꾸는 출가승려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치가 도덕의 탈을 쓸 때 오히려 가장 위험합니다. 차라리 적나라한 정치 야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인정하는 차원에서 힘의 상호 견제와 협상을 통해서 상대적인 선을 이루어 가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 정치윤리, 사회윤리를 말하는 사람들의 통찰입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는 지킬 수도 없는 허황된 도덕주의적 기만보다는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는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상대적인 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워낙 도덕적 명분주의가 강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도덕적 명분을 내세우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에 도덕적 허무주의를 낳고 있습니다. 모두가 도덕을 빙자하지만 아무도 도덕을 믿지 않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독재정권일수록 민주를 가장하고, 권위주의 정부일수록 국민의 뜻을 내세우고, 모두가 애국지사요 자기가 하는 일은 모두 도덕적 명분이 있으며, 자기만은 순수하다고 외쳐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결국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이 가장 근본 문제입니다. 정권이 수백 번 교체되고, 제도를 아무리 뜯어 고치고, 혁명에 혁명을 거듭해도,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이 욕망의 덩어리를 순화시키지 못하면, 우리가 외치는 모든 도덕적 구호는 공허한 메아리요 우리가 내세우는 온갖 도덕적 명분은 사기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고 헌신하는 것도 좋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나부터 바꾸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 한, 다 그 놈이 그놈이요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부질없는 욕망의 사슬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욕망의 제물이 되지 않고 우리 인생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 까요? 세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감사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는 항시 불만이며,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부질없는 욕망, 과도한 욕심이 싹틀 리가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자기가 잘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사회의 은혜, 이웃의 은혜로 이만큼 내가 산다는 생각을 하니 교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만한 것도 고마운 일인데 분수를 모르는 욕망이 나올 리 없습니다. 사실 감사는 모든 덕의 근원입니다. 감사로부터 책임의식도 나옵니다. 사회에 대한 가진 자의 책임의식이 따릅니다.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는 뻔뻔함도 없을 것이고, 죄를 짓고도 회개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 뻔뻔스러움은 없을 것입니다. 게으름이 있을 수 없고, 열심히 일해서 은혜를 갚는 보은의 삶만이 있을 것입니다. 큰 소리 치는 자가 아니라 항시 빚진 자로서 사는 겸손한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도, 부모에 대한 효도도 다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옵니다. 부질없는 욕망, 허황된 욕심이 우리를 사로잡으려 할 때, 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십시다. 욕망의 유혹을 물리치는 첩경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데살로니카 전서의 말씀에 있습니다.
둘째, 남의 고통에 대한 자각, 특히 나보다 못한 자, 나보다 누리지 못하는 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고통이 없다 해도 남의 고통을 생각하면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됩니다. 위만 쳐다보는 사람은 항시 부족감이 있고 항시 불만이지만, 아래를 보는 자, 세상에 팽배한 고통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항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의 소리에 민감한 자들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에게 인생의 고통과 아픔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기아로 죽어 가는 북한과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서려는 코소보 난민들의 고통을 생각할 때, 더 많이 가지겠다, 더 많이 누리겠다는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무딘 사람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남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윤리는 남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심지어 동물들의 고통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인간성이라면,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동료 인간들의 고통이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성이란 자기 고통뿐만 아니라 남의 고통도 견디기 어려워하는 착한 마음입니다. 남의 고통에 민감한 진정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은 가진 것 위에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보다는 가진 것을 나누는 일, 남의 고통을 보살펴 주고 섬기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살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인생의 의미는 소유와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소유를 위해서, 성취를 위해서 미친 듯이 질주하는 것은 인생의 참 의미와 보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소유하느냐, 무엇을 성취하였느냐가 성공적 삶과 행복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 어떤 자세로 살았느냐가 우리 신앙인들이 보는 인생의 척도입니다. 무엇(what) 보다는 어떻게(how)가 인생에서 더 중요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은 대체로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더 중히 여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소유와 성취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다가 결국 쓰러지고 맙니다. 행복의 척도, 그리고 구원의 척도는 양보다는 질에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늘 상기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능력에 따라 많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적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도 있고 적은 것을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소유를 모으고 어떻게 일을 성취하느냐 이지 얼마나 많이 모으고 얼마나 크게 성취했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심판하실 때, 너는 얼마나 많이 재산을 모았느냐,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는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행위란 하나님 앞에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 우리의 마음, 우리의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의 인간성 그 자체입니다. 부자가 바친 많은 돈보다 가난한 과부의 동전 한 잎이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이런 것을 뜻합니다.
우리 안에 끝없이 솟아나는 욕정과 욕망을 이기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일보다 자기를 정복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은 모든 성인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 강단에서 온갖 좋은 얘기를 다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날마다 고민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이며, 이 강단에 서는 일이 그렇게도 두려운 것은 내 마음이 이러한 탐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주간 내내 소유와 성취를 위하여 살다가도 이렇게 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오는 것은 행여 존재보다는 소유와 행위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살지나 않았는지, 보다는 에 더 의미를 두는 전도된 삶을 살지나 않았는지 우리 삶을 되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도 이미 가진 것 외에 더 많이 가지기를 구하는 탐욕의 기도가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더 큰 일을 하도록 힘을 달라고 구할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탐욕으로부터 구해달라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소유하되 소유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일을 하되 순수하고 사심 없는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주님께서도 우리가 마땅히 구하여야 할 것으로 가르쳐 주셨지만, 일용할 것 이상으로 몇 년 먹을 양식, 아니 평생 먹을 것을 쌓아두고서 그리고도 더 많이 가지려고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아닐 것이며,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한다 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기도의 제목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의존하여 자기 욕심을 더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욕심을 덜고 덜어서 무욕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욕심과 욕망을 줄이고 무욕의 인간이 되면, 인생에 재미도 없고 발전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욕심의 충족을 재미로 알고 살면 그럴 것이며, 경쟁이 치열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심을 버리고 살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반드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을 성취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은사와 능력에 따라 소유하고 마땅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과 공명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마음으로 소유하느냐, 어떠한 마음으로 일하느냐 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일은 죽음의 역사만을 창출하고, 남을 위한 사랑의 삶은 생명의 역사를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순수한 마음으로 일을 하면 일에 힘이 더 나며, 사심 없이 하는 일이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혀 하는 일보다 오히려 성공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가장 고귀하고 가장 힘찬 일은 오히려 순수한 영혼의 힘에서 솟아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철저히 비우면 비울수록, 그리하여 자기 행동의 근원과 동기를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의 뜻에 맞추면 맞출수록 오히려 우리들의 행동에는 자신감과 평안함이 있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자기 힘만 믿고 행동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도 제대로 발휘 못하지만, 자기를 비우고, 자기 힘을 빼고 하나님의 힘에 자신을 맡기고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무한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지녔던 힘의 비결이었습니다. 약함 속에서 진정한 힘이 나온다고 바울도 말하고 있으며, 그의 삶 또한 그러한 힘에 넘치는 역동적인 삶이었습니다.
무욕은 결코 무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욕의 사람은 모든 것을 소리 없이, 힘 안들이고 하는 최고의 능력을 얻게 되는 법입니다. 도가에서는 이런 것을 무위(無爲)라 합니다. 무위는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함이 없는 함, 즉 인위적 욕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최고의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이러한 무욕과 무위의 도통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는 삶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한 사람이었습니까? 오히려 자신을 위한 모든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진력하실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무욕의 인간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욕과 무위의 사람은 욕망의 충족에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보다도 더 큰 기쁨을 누립니다. 양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오히려 불행하지만, 질적 행복, 자그마한 것에서조차 행복을 터득하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행복의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동분서주하는 사람에게는 늘 불안과 초조가 따르지만, 자기로부터 해방된 자, 하나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자에게는 순수한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그의 눈은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들꽃을 볼 수 있으며,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그의 것입니다.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자라도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기쁨을 얻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주님의 말씀은 이러한 진리를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시련을 참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련을 이겨낸 사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 욕심에 이끌려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욕심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고 무욕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