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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인 삶

베드로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076 추천 수 0 2008.09.18 14: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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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벧전4: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03.9.28 

오늘 본문 안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는 인연이 없습니다." 이 말 자체로만은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와 닿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육체적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게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인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설명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마 여기서는 세례 받은 사람이 자기의 신앙으로 인해서 겪게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6절)는 구절은 무슨 뜻일까요? 살아있는 동안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두 번째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굳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예수님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을 만인구원론과 연결시킬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말씀이니까 모르는 채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7절에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그 종말이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초기 공동체의 종말 이해에 오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종말과는 다른 어떤 사태를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난해 구절을 이 자리에서 일일이 주석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체 패러그래프의 주제를 파악하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찾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종말


이 단락에서의 키워드는 '종말'입니다.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을 때 늘 이 '종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독특한 역사 이해라 할 수 있는, 또한 유대인들의 묵시사상에 영향을 받은  '종말'이 모든 신약성서를 관통하는 핵심개념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그런 종말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오늘의 설교는 '종말론적인 윤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종말'을 직간접적으로 지시하거나 암시하는 용어들이 나옵니다. 2절에 "그러니 이제 여러분은 지상의 남은 생애를 인간의 욕정을 따라 살지 말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종말을 의식한다는 것은 곧 자기의 남은 생애를 의식한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남은 생애라는 말은 우리의 삶에 끝이 있다는 뜻이니까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언젠가, 아니 빠른 시간 안에 마지막이 온다는 생각에서 그때까지의 남은 생애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그런 생각이 없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주 독특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은 생애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이방인들이 즐겨하던 일을 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곧 방탕에 빠지고 욕정에 흐르고 술에 취하고 진탕 먹고 마시며 떠들어 대고 가증한 우상 숭배를 일삼아 왔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잡아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 자기의 모든 삶을 소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의 형태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은 생애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자기를 발산하는 삶이 아니라 훨씬 내면적인 가치를 중요한 것으로 알고 살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눈에 이상하게 비쳤습니다. "이방인들은 여러분이 이제 자기네와 함께 방탕에 휩쓸리지 않는다고 해서 괴이하게 생각하며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4절). 아마 이런 상황은 그 당시에 대단히 심각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 문명이 기본적으로 소비 지향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이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이런 점에서 분명히 구별됩니다.

심판

종말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구절은 5,6절입니다. "산 사람과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 여기서 '산 사람과 죽은 자'라고 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결국 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질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만 옳다는 말이냐? 당신들만 구원받는다는 말이냐? 그런 생각은 무언가 심리적으로 강박관념에 떨어진 게 아니냐? 대충 이렇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심판은 그렇게 좁은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편, 또는 남의 편이라는 식으로 편가르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심판은 궁극적으로 '진리론'에 속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모든 사건들이 진리인지 아닌지 결국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지금 당장은 누가 옳은지 그른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이 선으로 위장할 수도 있고, 선이 악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교묘한 방식으로 사람의 눈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궁극적인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그 어떤 눈가림이나 속임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 분 앞에서 "바른 대로 고해야만 합니다." 이런 심판을 의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이런 심판의 때를 종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에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놀라운 마음으로 자기의 남은 생애를 계산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맑은 마음의 기도

그래서 베드로는 7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려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십시오." 마틴 루터 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기도하기 위해서 자기를 절제하고(m  ig) 맑은 마음(n chtern)을 가지시오." 두 번역 모두 종말과 기도를 핵심 요소로 삼고 있습니다. 종말을 의식하는 사람은 우선 기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종말은 바로 하나님의 독점적 사건이기 때문에 이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뜻입니다. 그 사이에는 더 이상 지식이나 재물이나 교양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독특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맑은 마음이 되어야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곧 그 당시에 교회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그런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방언이나 환상 같은 것들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체험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런 열광주의자들로 하여금 자숙할 것을 여러 번 지적했습니다. 주로 문선명의 통일교나 박태선의 전도관, 또는 영생교 같은 소종파에서 발생하는 이런 열광주의적 현상은 비단 종교만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도 나타나곤 합니다. 히틀러의 나치즘 같은 현상이 대표적입니다. 지난 월드컵 대회 때 전국 대도시의 광장과 대학교 캠퍼스에 집단적으로 모여 응원을 펼쳤던 '붉은 악마', 또는 지난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김정일과 김대중 사진이 올라있는 현수막을 보고 울면서 끌어내린 북한 응원단들의 행동도 역시 열광주의 성격이 농후합니다. 베드로가 이런 기도의 열광주의를 배격한 이유는 열광주의가 인간의 인식, 판단 능력을 훼손시킨다는 데에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인식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칫 현실 도피적인 상태에 떨어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베드로는 단순히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맑은 정신을 갖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무엇이 옳고 가장 참된 것인지 분별할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모든 일에 앞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은 늘 무엇을 하는 것에만 마음을 쏟고 있는데, 베드로는 그런 일을 하기 전에, 그런 행동을 하기 전에 우선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그것입니다. 이게 인간을 둘러싼 모든 일들이 의미를 획득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지 누가 누구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거나 함께 있고 싶다는 우리의 감정이나 심리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요한 일서에 명시적으로 진술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곧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진정으로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행동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기독교의 독단적인, 배타적인 도그마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작동되는 본질적인 원리이자 힘입니다.

우리의 행동에 사랑이신 하나님이 활동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동은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리면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귀찮게' 생각합니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속에서는 귀찮게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원래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자기 중심이 흔들리게 되는 일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남을 돕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인정받게 되면 즐겁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귀찮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외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나 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놓아두라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자기 속에서도 귀찮게 생각이 들지 않아야만 그의 행동은 힘을 받게 됩니다.

요즘 현대인의 인간관계가 점점 삭막해진다고 말들 합니다. 옛날에는 삼 사대가 한 집에 모여 살기 때문에 여럿이 한 공동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만 요즘처럼 핵가족 시대에는 그런 생각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두레 제도는 한 마을의 공동체 정신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파트 한 통로에 살면서도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갑니다. 옛날에는 이웃이 생존을 위한 동지였다면 이제는 아무 상관없는, 더 나아가서 귀찮은 대상이 될 뿐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유대교 신학자인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 관계인 '나와 너'가 아니라 대물 관계인 '나와 그것'이 되었다고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요즘도 계모임이나 동창회, 정당이나 친목단체 등이 없지 않습니다. 시민단체나 노조도 있습니다. 홍수와 태풍피해 때마다 수 백억 원의 국민성금이 걷히는 걸 보면 아직도 우리 국민들은 서로간에 연민의 정을 갖고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의 일면만 보고 현대인들이 오늘 베드로가 표현하고 있듯 "서로 극진히 대접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순간적인 동정심이 발동할 수는 있지만 어느 순간에 우리는 원수처럼 돌변합니다.

극진한 대접의 현실성

어쨌거나 "서로 극진히 대접하라"는 베드로의 이 말을 들으면서 나도 떳떳하지 못합니다. 가능한 대로 자신에게만 충실하려고 했지 남에 대한 깊은 관심과 배려는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좀더 직접적으로 보자면 과연 내가 남을 극진히 대접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가 있습니다. 예컨대 돈이 없어서 자식의 병을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도와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게 극진히 대접하는 게 아닐까요? 내 자식이 병들었다면 당연히 집을 팔아서라도 고쳤을 테니까 말입니다. 아마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렇게 처분하고 살아가긴 하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그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아직 이런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대충 윤곽을 잡고 있기만 할 뿐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바로 앞서 말한 병, 실업, 교육과 같은 복지 문제는 어느 한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국가로 하여금 국가재정을 이렇게 인간의 생존을 책임지는 쪽으로 사용하도록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만 할 것입니
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개인적으로 돕는 의무로부터 개별 기독교인들이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이런 문제는 모든 복지 문제가 전혀 문제로 남게되지 않는 종말에 가서야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런 책임과 그 한계 사이의 긴장을 떨쳐내지 못할 것입니다.

은총론 안에서

저는 이 문제의 해결책을 오늘 본문에서 유추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고 봅니다. 1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총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이어서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설교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남을 도와주는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힘을 받은 사람답게 봉사해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은총론으로 귀결됩니다. 한 사람이 모든 문제를 짊어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은총으로 서로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가지고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라고 한다면 설교를 바르게 하고, 학생들을 바르게 가르치고, 좋은 책을 쓰거나 번역하는 일을 은총과 봉사의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살기만 하면 그는 '서로 극진히 대접하라'는 베드로의 말씀에 충실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종말론적인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자기의 삶을 은총과 봉사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을 은총으로 여기지 않고, 따라서 이웃을 향한 봉사의 도구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확대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삶이긴 하지만 자기의 능력을 은총으로 여기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앞서 본 말씀같이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서만 가능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인 줄 알게 되고, 그럴 때만 우리는 봉사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서도 이렇게 삶을 은총과 봉사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을 초월해서 참되게 사랑의 세계에 참여해서 살아갈까, 하는 의아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배 순서지에 실린 '오늘의 읽을거리'에 나오는 '미디아'(39)라는 독일 여의사는 참으로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라크 북부지역의 마흐무르에 있는 쿠르드 난민촌의 유일한 여의사라고 합니다. 그녀가 어떠한 사연으로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자세하기는 모르겠지만 자기의 삶을 완전히 쿠르드족을 위해 바쳤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물론 이 여자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적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사람들이 비록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믿는 사람이나 다를 게 없다고 봅니다. 칼 라너는 이런 사람들을 '익명의 기독교인'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은총론은 10절 후반절에서 그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총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은총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게 무슨 말씀인가요? 사람들을 극진하게 대접할 줄 아는 이런 종말론적 삶의 자세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키워나가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옳게 분별해서 풍성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소위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주어 풍성하게 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 빼앗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서로 뜻이 통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종말과 일상

오늘 베드로 사도는 종말 사건 앞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지녀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서 소상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견 '종말'은 모든 세상일이 끝나는 시간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일을 때려치우고 탈속적 사건만 기다려야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1992년에 있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에게서 벌어졌던 해프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1922년 10월 몇 일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면서 직장, 학교를 그만두고 재림장소에 모여서 종교적인 집회만 벌였습니다. 아마 정통 기독교 안에서 이런 모습의 종말론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탈역사적이라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반증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선포와 함께 일상의 삶을 봉사의 차원에서 끌어가라고 가르칩니다.
스피노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일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오늘 베드로의 말씀에 의하면 내일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의 능력들을 봉사에 바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면 "모든 일에든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토록 영광과 권세를 누리실 분이십니다. 아멘."(11절).   <200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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