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희망, 그 놀라운 힘

베드로전 한완상............... 조회 수 1901 추천 수 0 2008.10.15 23:40:19
.........
성경본문 : 벧전1:3-6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7.3.4주일설교 

제목: 희망, 그 놀라운 힘
본문: 베드로전서 1:3-6, 로마서 12:12

꼭 스무 해 전 새길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어둠의 역사 속에서도 새날이 밝아옴을 선포합니다>라는 신앙고백은 갓 태어난 새길 아기의 첫 울음소리 같았습니다. 1987년 이른 봄은 희망의 봄 같지 않았습니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같았지요. 군사정권이 정권안보를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민주주의를 억누르고 있던 때였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아직도 어두웠었지요. 이때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머리 둘 곳 없다고 믿었던 믿음의 동지들이 오늘의 새길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우리는 암담한 미래와 괴로운 현실에 갇혀 있었으며, 세계로부터 정치적 조롱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 안팎에서 절망과 고독이 우리들의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지요. 이때 조그마한 희망의 횃불을 들고 시작한 열린 평신도 공동체가 바로 새길공동체였습니다.

이십년이 지난 지금, 과연 우리들의 희망은 어느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까? 과연 새 날이 왔고, 그간 우리들의 꿈과 희망이 현실로 전환되어 왔습니까?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경제적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선후진국을 가릴 것 없이 개발탐욕은 자연과 생태계를 더욱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인류의 종말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올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꽃이 보름 가까이 일찍 핀다는 것이 결코 희망의 징후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길한 징조로 느껴집니다. 나라 안을 보면, 정치적 민주화 속도는 너무 불규칙하게 빨라 마치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가 내리막길을 거칠게 내달리는 형국 같습니다. 이러다가는 히틀러가 화려한 거짓 희망으로 독일 국민을 현혹시키면서 구세주같이 등장했던 저 독일의 1920년대 형편이 재현되지 않을까 불안해지기까지 합니다. 한국적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극적 모습을 미리 내다보는 듯합니다. 사회적으로도 십대들의 자살과 폭행, 방화와 폭주가 내일의 참담한 우리 모습을 또한 미리 보는 듯해 섬뜩해집니다. 한마디로 지난 20년간 어둠의 세력은 물러간 듯하면서도 더욱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치 우리의 희망 수준은 안타까울 만큼 올라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새길교회 20주년 생일을 맞아 우리는 희망의 가치와 그 힘에 대해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합니다. 원래 희망의 가치는 절망의 상황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불안과 고독, 절망과 좌절의 현실이 없다면 희망의 빛은 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희망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 절망의 밑바닥 현실에서 빛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먼저 인간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예수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은 무던히도 괴롭고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예수께서 겪으셨던 고민과 고난의 깊은 뜻을 제자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체포당하시고, 힘든 고난의 과정으로 들어갔을 때 스승을 배반하거나 비겁하게 달아났습니다. 그것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예수가 당시 로마법에 따라 처참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한 직후, 한때 구름처럼 몰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다짐했던 소수의 제자들마저 불안과 절망을 씹으며 고향으로 귀환하거나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기며 사태를 관망했습니다. 그것도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이 비겁했고 절망했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좌절과 절망, 불안과 공포로부터 놀랍게 해방시켜준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들이 180° 달라진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킨 실제적 힘은 바로 예수 부활 사건체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부활한 예수의 존재가 절망과 공포의 밑바닥에서 납작 엎드려 떨고 있던 사람들을 벌떡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의 육체가 살아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재생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더 역동적인 영적 존재로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어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손수 다가오신 것이지요. 육체의 인간 예수보다 부활로 체험된 예수께서 훨씬 더 힘 있고 더 감동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절망은 희망으로, 그들의 좌절은 분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개인과 역사의 구조를 변혁시키는 엄청난 실체적 힘이었습니다. 바로 이 부활의 힘이 아름다운 기독교를 촉발시킨 동력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희망의 참 힘이 폭발한 사건이지요. 지난날 죽었던 인간 예수가 역사적 인물로 단순히 기억되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질적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영의 존재로 <오늘>, <여기에서> 살아 계시어 우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변혁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또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바로 그 체험에 따른 고백이 소중하며 그 고백이 새 날이 밝아옴을 선포하는 희망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체험하게 된 후부터는 어떠한 환난이나 곤경이 닥쳐와도 예수를 배반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음에 우리는 새삼 주목해야합니다. 아시다시피 거의 대부분 1세대 예수제자들은 로마제국의 처절한 탄압과 핍박 속에서 살았지만 부활의 그리스도 안에서 용기 있게 순교할 수 있었던 자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 따르미였습니다. 인간 예수를 따를 때는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고, 가슴도 그렇게 따뜻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각기 자기 출세에 따른 개인적 욕망에 따라 예수 뒤를 쫓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를 실존적으로 만난 뒤부터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지요. 정말 감동적으로 용기 있게 온갖 역경과 고난을 해쳐나갔고 그것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라는 새로운 희망의 능력 곧 부활의 희망을 몸소 감동적으로 체화(體化)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과 행동의 깊은 뜻을 새로운 각도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하, 그 뜻이었구나! 그래서 우리 주님(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행동하셨구나”라고 새롭게 깨닫게 하는 영의 눈이 열리게 되었지요. 이 <아하>는 새로운 각성과 희망의 탄성입니다. 그래서 우둔했던 제자들은 비로소 역사적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구약의 예언들과 연결시킬 수 있었고, 나아가 새롭게 예수 삶과 죽음을 깊이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서란 바로 그 <아하>의 깨달음으로 역사의 예수를 다시 해석하고 증언한 고백문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는 비록 그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으나 결국은 하나라는 점입니다. 비록 갈릴리 인간예수가 우리 인간들처럼 여러 가지 육체적 한계를 지니시고 사셨다가 육체적으로는 죽으셨던 분이였으나, 그의 메시지는 희망의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치가 더욱 선명해지면서 놀라
감동의 힘을 우리에게 주게 된 것은 유한한 존재 인간예수가 부활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오늘도 영의 힘으로 힘 있게 움직이시고 살아 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실체적 영성을 거룩한 영, 곧 성령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많은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나 성자들과 다릅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나 간디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지만, 오늘 우리의 실존적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는 아닙니다. 다만 그분들의 말씀과 삶을 지금도 우리가 기억하고 존중하지만 그들이 내 삶을 올곧게 실제로 이끄시고 변화시키시고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죽은 위대한 역사적 인물에 불과합니다. 결코 그들이 예수님처럼 <오늘>, <바로 여기에서> 우리를 희망의 능력으로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현실의 존재, 실제의 존재는 아닙니다. 다만 기억과 존경의 대상일 뿐이지요.

오늘 저는 새길의 20돌을 맞아, 희망의 힘이 저에게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를 고백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의 삶을 통해, 인간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가 어떻게 희망의 힘으로 역사했는지를 여러분과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1980년 봄, 여름, 가을은 저에게 혹독한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 하기야 1976년 2월부터 저는 서울대학이라는 상아탑에서 한국적 들판(在野)으로 쫓겨나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들판의 삶이 반드시 괴롭기 만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여러 로마황제들의 탄압 속에서 카타콤베에 모여 부활의 예수를 열정적으로 경배했던 초대교회처럼, 괴로운 70년대 좌절과 억압의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았던 동지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처럼, 네로의 폭정 속에서 베드로 전서가 격려하듯, 또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 했듯이 저도 이를 동지들과 함께 희망 중에 서로 참고 견디며 서로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서 광주학살을 주저 없이 저질렀습니다. 이때는 그 어느 때보다 아프게 불안과 공포 분위기가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억압의 파동이 시작될 즈음 저는 정확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남산의 중앙정보부 지하 2층으로 끌려갔습니다. 하기야 체포되어 갈 때는(5월 17일 00시) 광주의 비극이 일어난 것도 몰랐습니다. 그것이 어둠과 공포의 긴 터널의 시작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 살벌했던 때 절망과 공포는 저의 실존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2층에서 지옥의 심문 두 달을 보내고, 서대문 교도소로 이감될 때 느꼈던 그 상대적 행복감을 여러분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산에서 서대문으로 이동 중에는 검은 차 뒷좌석에서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가 짓눌려 차창 밖의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짐작으로 ‘번잡한 광화문 거리를 지나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창밖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거리의 온갖 소음들, 이를테면 차 굴러가는 소리, 사람들의 웅얼대는 잡음들이 저에게는 오히려 모차르트의 달콤한 멜로디처럼 들렸습니다. 두 달간 지하 2층에 갇혀있을 때 살아있는 인간소리가 그렇게 그리웠나 봅니다.

여름과 늦가을을 서대문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절망과 좌절을 이겨내기 위해 매일 저는 책 속에서 살아보려고 애썼습니다. 성서를 비롯하여, 소설과 전공서적, 심지어 아내가 넣어준 웃기는 만화책까지도 친구로 삼아 열심히 읽었습니다. 책 속의 인물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재미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코로닌의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소설『토지』를 다시 읽으며 새삼 비분강개도 했습니다. 다산의 책을 읽으며 그 분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면서 그가 마치 친형 같이 바로 옆에 다가와 저를 격려해 준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절망과 고독, 좌절감과 분노를 삭이기 위해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으나 그것도 한참 후에야 허락이 되었습니다.『역사에 부치는 편지』라는 책은 제가 세 딸과 아내에게 쓴 편지로 엮어진 책이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 없는 감옥에서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만, 검열이 엄중한 지라 하고픈 표현을 자제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답답했지요. 때로는 서울대학교 교수에서 서대문 감옥의 죄수로 전락한 저의 신세에 대해 비감해지기도 했습니다. 저의 죄수복에 붙여진 수감 번호(58번)에 눈길이 갈 때마다 비감은 더해갔지요. 사람이 숫자로 환치되면, 인간 존엄성은 증발되고 맙니다. 숫자는 쉽게 지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과 인간 존엄성은 지우개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 서대문 교도소 교도관들이 저희들을 숫자로만 취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숫자로 호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체로 <교수님>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그 해 여름 어느날 우리가 갇혀있던 동(棟)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우리를 담당하지 않았던 교도관이 우리 동에 들어와 유인호 교수(당시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를 보고 번호를 불렀습니다. 갑자기 유 교수의 우렁찬 성난 목소리가 전체 건물을 흔드는 듯했습니다.

“이 놈, 네가 감히 번호로 나를 부르다니…”

이 소리를 듣자 그곳의 모든 양심수들(교수, 성직자, 정치인, 변호사 등)은 일제히 창살문을 흔들고 발로 감방 문을 거세게 차기 시작했습니다. 죄수들이 소란을 피운 셈이지만, 그것은 인간 존엄성을 무시했던 권력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요. 가까스로 수습이 되긴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저는 우울한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열악한 음식과 환경, 특히 0.7평 밖에 안 되는 작은 감방 속에 변기가 따로 없었습니다. ‘뺑기통’이라는 김치 항아리만한 플라스틱 똥통을 끼고 살았지요. 방바닥 밑에는 큰 들쥐보다 더 살찐 쥐들이 낮에는 감방 밑에서 운동회 하듯 쉼 없이 부산하게 소음을 내다가 밤이 되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저 같은 사람을 무시하듯 힐끗힐끗 쳐다보며 감방 안을 들락날락했으니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숫자로 취급되는 감방에서 쥐들도 나를 무시하는 구나’라는 자격지심도 생겼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희한하게 우리들은 묘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불안하고 불편하고, 외로웠던 조건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저를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옆방에 잠시 갇혀있던 기업인이 하루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교수님. 나는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가족들도 나를 돌보지 않아 외롭기 짝이 없습니다. 아내는 미국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한 교수님은 여기 피크닉 오신 것처럼 행복해보이던데,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니, 제가 여기 소풍 나온 사람처럼 즐겁게 보입니까?”
“예. 한 교수님 뿐 아니라, 함께 오신 분들 다 그런 것 같은데요. 지난번 문을 차고 흔들 때 보니까 즐겁게 보이고 놀랍던데요….”

저도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피크닉을 온 사람처럼 내가 보일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돈 많은 회장께서 저희들 속에서 은근히 빛나는 그 어떤 희망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정작 자기 자신 속에는 절망만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기야 절망한 사람은 피크닉을 가지 않지요.

제 속에 있는 희망의 빛을 꿰뚫어 본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를 감시할 책임을 진 젊은 교도관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코 희망 속에 언제나 즐거워하지 못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즐거워하려고 노력은 했으나, 늘 불편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11월 초 저와 서남동 목사님이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다는 소식을 석방 하루 전날 그 교도관이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밤늦게 감방 문을 조용히 두드렸습니다. 모든 죄수들은 잠들었을 때였습니다.

“내일 석방되니까, 한 교수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그 부탁이 무엇인지 묻지 마시고, 무조건 들어준다고 말씀하세요. 그래야 내가 무엇을 부탁하는지 말하겠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 부탁하면…” 하면서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항상 그러했듯이 그는 맑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해보라고 했지요.
“내가 지금 사귀는 여자가 있는데 내년 봄에 그녀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그때 한 교수님이 꼭 주례를 해 준다고 약속해 주세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가 정말 귀여운 젊은이구나 하고 새삼 느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부탁을 받아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가 주례를 수인이었던 저에게 부탁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그가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납니다. 자기는 아직도 20대 후반이지만, 자기에게는 직업상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한 교수님은 비록 감방에 갇혀 있지만, 희망이 있지 않느냐며 부러워했지요. 과연 그랬던가를 저는 스스로 물었습니다. 저는 제 안에 과연 희망이 불붙어 있는지 스스로 확신할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교도관은 제 속에 꺼지지 않고 빛나고 있는 희망의 불빛을 꿰뚫어 볼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제 속의 희망의 징후를 나보다 더 훤히 꿰뚫어보게 된 것은 아마도 제가 책을 보며 가끔 미소를 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론 제가 읽었던 책 중 재미있는 것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책을 빌려주기도 했으니까요. 세월이 흘러 십여 년이 지난 후, 저는 KBS의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에서 경찰로 변화된 그 젊은 교도관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또 한 가지 희망 체험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제가 남에게 희망을 만들어 준 체험 이야기 입니다. 1980년 가을 김대중 씨가 사형구형이 떨어지는 순간 우리 공동피고인들은 모두 애국가를 처절하게 불렀습니다. 누군가 선창한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우리는 끓어오르는 감동과 분노로 결연하게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그것은 절망과 억압의 군사재판정의 두려운 벽을 허물어뜨리는 희망의 몸부림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희망의 저항 또는 저항적 희망의 몸짓이었습니다. 그날 교도소에 돌아오니, 바로 1층에 갇혀있던 DJ의 큰 아들이 저를 보고 외쳤습니다. “한 박사님 우리 아버지 어떻게 되었어요?” 저는 마음이 무거워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사형구형 받았어요”라고 말할 수 없었지요. 나의 머뭇거림으로 눈치 챈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그를 마주 쳐다 볼 수 없었습니다. 절망, 바로 그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침을 당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마침 제 감방 바로 앞에는 한화갑 씨가 갇혀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으레 아침 인사를 서로 주고받았지요. 그는 평소 DJ와 저희들 사이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분이었지요. 그도 DJ의 사형구형 후 침통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가 가장 염려했던 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요. 절망은 더욱 끝없이 추락하는 듯 했습니다. 한화갑 씨의 얼굴만 봐도 절망의 그늘이 얼마나 짙은지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얼굴도 보나마나 절망과 비통으로 찌그러져 있었겠지요. 그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출신이어서 국제정세에 밝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희망을 꼭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하루는 슬픈 얼굴을 한 그에게 단호하게 이렇게 희망의 위로를 했습니다.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DJ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안 죽을 뿐만 아니라, 살아서 미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됩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레이건 같은 보수적 인물이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는데 DJ가 살아남기 더욱 어려울 것으로 그는 판단했습니다. 하기야 저뿐만 아니라 다른 동지들도 모두 그러한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그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 같아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니, 그는 세계 앞에 자기가 인권을 존중하는 대통령이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가 패배시킨 카터 대통령은 인권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기에 더더욱 레이건은 인권을 존중하는 모습을 부각시키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가 대통령 되어 DJ의 사형을 묵인한다면, 세계 여론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입니다. 레이건이 보수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DJ 구명에 앞장 설 것 같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만약 DJ가 산다면, 전두환 정부가 그의 국내체류를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본으로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DJ가 납치되어 박 정권이 받은 정치적 상처를 현 정부는 똑똑히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낼 곳은 미국 밖에 없습니다. DJ은 살아서 곧 미국가게 될 것입니다….”

한화갑 씨는 반색하면서도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기야 나도 속으로는 자신이 없었고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을 뿐이었습니다. 다만, 후배친구가 저렇게 절망 속에서 괴로워 하니까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을 뿐이었지요. 그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 다급했고, 또 그 희망이 저에게도 절박하게 필요했지요, 그래서 희망을 제조한 것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DJ가 1982년 12월 말에 미국에 오실 때 제가 워싱턴 공항으로 마중 나갔던 일, DJ가 미국 오신 후 첫 일요일 워싱턴 시내에 위치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그가 끓어오르는 기쁨과 슬픔을 참지 못해 소리 내어 오열했던 일, 그리고 바로 그 곁에서 저도 함께 미사를 드렸던 일 등이 눈에 선합니다.) 이같은 희망제조는 결국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바울은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린도전서 13:7 후반)
현대 국제판 영어성서는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It’은 사랑입니다.

It always protects,
always trusts,
always hopes,
always preserves.

영어가 더 쉽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사랑은 <항상> 희망을 품게 하며 온갖 어려움을 <언제나> 견디어내게 하는 힘입니다. 높은 산이나 거친 들에서나, 감옥에서나 궁궐에서나, 어디서나 어느 때나 사랑은 희망을 심어 견디어 낼 수 있게 하는 놀라운 힘입니다. 절망 속에 허덕이는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희망을 만들어 주고 심어 주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희망과 사랑은 항상 동전의 양면일 뿐입니다. 아니 사실 같은 하나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엄한 존재로 살 수 있는 것은 서로 신뢰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힘을 갖고 있고 또 이 힘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인간 예수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었으며, 부활의 그리스도는 이런 존재가 되게 하는 사랑과 희망의 힘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나눈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해도 틀림없습니다. 희망을 나눠가질 때, 특히 어려운 조건 속에서 그러할 때 사랑과 희망은 사막에서 샘물 터지듯,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피듯 할 것입니다.

지난 2월 12일자 타임지는 인간두뇌의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거기서 <희망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의과대학교수인 스캇 해이그(Scott Haig)박사의 글을 실었습니다. 그의 환자들 중에 뇌가 죽어버린 환자가 있었습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일 그 환자를 왕진하는데, 어느날 간호사가 그의 부재시에 일어났던 이 환자의 일시적 회생을 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전문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어제 그 환자가 갑자기 깨어나서 주위의 가족을 일일이 돌아보며, 위로하고, 등도 두드려 주고, 미소 짓고 담소한 뒤 다시 죽음의 침묵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뇌 세포는 완전히 망가졌는데도 말입니다. 여기서 해이그 박사는 육체의 세포조직과 관계 없는 그 어떤 인간의 마음, 인간의지, 영적의 힘 같은 것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세포덩어리보다 더 크고 신비한 그 무엇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만이 갖는 희망의 힘(the power of hope)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마음, 그것은 십자가 처형으로 죽어버린 예수의 육체, 그의 두뇌조직과는 관계없는 새로운 힘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비워 남을 채워주고, 육체를 죽이는 세력을 용서해주며, 절망의 세력을 사랑과 희망의 능력으로 이겨내는 힘, 바로 그것입니다. 그 희망이 우리의 용기를 솟게 하는 힘이지요. 희망이 이기적 욕망과 다른 것은 그것이 남에게 값지게 살 용기를 주고 온갖 어려움을 견디어 내게 하는 사랑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절망 속에서 견디게 할 뿐 아니라, 그 속에서도 즐거워하게 하는 힘, 그것이 놀라운 희망의 힘입니다.

이런 뜻에서 20년 전 <어둠의 역사 속에서도 새날이 밝아옴을 선포 합니다>라는 새길 선포는 아직도 우리에게는 절박하게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전 지구가 기후변화로 위기를 겪고 있고, 나라마다 선후진국을 가릴 것 없이 양극화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단으로 온 민족이 고통당하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며, 개발의 이름으로 인간과 자연을 또다시 훼손시키려는 세력이 움틀 거리는 위기의 순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평화와 개혁을 외치는 세력은 설득력을 상실하여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십자가에 바퀴를 달아 십자가의 영적 힘을 희화하는 세력이 날로 힘을 얻는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도 교회와 제도 기독교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순교를 불사하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순교의 그 고상한 가치를 무너뜨리는 세력도 힘을 얻고 있듯 합니다. 그들의 집단적 삭발은 우리를 분노케 하기보다 우리를 슬프게 할 뿐입니다.

이때야말로 갈릴리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밝게 비춰져야 하고, 부활의 그리스도 능력이 크게 폭발해야 할 카이로스(Kairos)의 때입니다. 새길의 존재이유는 바로 이 카이로스의 요청에 겸손히 그리고 힘차게 응답하는데 있습니다. 아직 새길공동체는 갈 길이 멀고 험합니다. 그러기에 희망의 메시지, 새날이 밝아옴을 계속 선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더욱 힘을 모아야 합니다. 생일은 단순히 날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기념행사가 아니라, 앞으로 더욱 열심히 희망의 빛을 계속 발하려는 마음 다짐의 행사라 하겠습니다. 갈릴리 예수는 어둠과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그 희망을 실천하시다가 죽으셨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그 희망을 힘있게 다시 심어주시고 어떤 악조건에서도 용기 있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감화시켜주십니다. 부활의 예수는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우리의 주님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은 예수따르미의 신성한 의무일 뿐 아니라 참으로 소중한 특권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길의 20회 생일을 맞아 희망의 그 놀라운 힘을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752 요한일서 사랑의 실천 요일3:14-18  한태완 목사  2007-12-01 2718
751 요한일서 양심,종교,성경 요일5:1-5  강종수 목사  2007-11-25 1890
750 요한일서 있는 그대로 요일4:7-13  차옥숭 원장  2003-11-28 2841
749 요한일서 예수의 현존체험 요일1:1-2  김 진 목사  2003-11-28 2753
748 요한일서 세상을 이기는 힘 요일5:1-5  한태완 목사  2007-11-08 4213
747 요한일서 성도들이 기도로 간구해야 할 것 요일5:14  한태완 목사  2007-11-06 2576
746 베드로후 불심판의 가능성 벧후3:3-6  강종수 목사  2009-01-18 1638
745 베드로후 그리스도의 영광과 증거 벧후1:16-22  소재열 목사  2008-01-23 1796
744 베드로후 몸을 긍정하는 신앙 벧후3:11-13  홍명관 형제  2004-05-05 2460
743 베드로후 종말을 바라보는 사람 벧후3:8-13  강종수 목사  2007-07-22 2060
» 베드로전 희망, 그 놀라운 힘 벧전1:3-6  한완상 형제  2008-10-15 1901
741 베드로전 종말론적인 삶 벧전4:1-11  정용섭 목사  2008-09-18 2076
740 베드로전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벧전3:18-22  소재열 목사  2008-01-23 2081
739 베드로전 여행과 지도자 벧전2:11-12  한태완 목사  2007-11-07 1944
738 야고보서 믿고 참고 기다려라 약5:10-11  조용기 목사  2009-01-02 2179
737 야고보서 인내하면 좋은 날을 봅니다 약1:2-4  이한규 목사  2008-12-23 2461
736 야고보서 입술을 잘 지키십시오 약3:1-6  이한규 목사  2008-12-23 1957
735 야고보서 고난속에 피는 부활의 꽃 약5:13  조용기 목사  2008-11-21 7516
734 야고보서 생각을 이탈시킴(4) 약1:14  김남준 목사  2008-09-09 1473
733 야고보서 생각을 이탈시킴(3) 약1:14  김남준 목사  2008-09-09 1413
732 야고보서 생각을 이탈시킴(2) 약1:14  김남준 목사  2008-09-09 1462
731 야고보서 생각을 이탈시킴(1) 약1:14  김남준 목사  2008-09-09 1780
730 야고보서 말씀과 기도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사(2) 약1:14  김남준 목사  2008-09-09 1530
729 야고보서 말씀과 기도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사1 약1:14  김남준 목사  2008-09-09 1908
728 야고보서 묵상과 기도의 유익 약1:14  김남준 목사  2008-08-27 2030
727 야고보서 생각을 이탈하게 하는 죄를 파괴하는 길(2) 약1:14  김남준 목사  2008-08-27 1573
726 야고보서 죄의 속임과 계획 약1:15  김남준 목사  2008-08-27 1934
725 야고보서 욕심, 죄, 무욕 약1:12-15  길희성 형제  2008-06-20 2010
724 야고보서 사단의 전술 전략 약4:7  한태완 목사  2007-11-26 2560
723 야고보서 실행하는 신앙 약19-25  강종수 목사  2007-11-11 2075
722 야고보서 헛되고 허무한 인생 약4:14-16  한태완 목사  2007-11-07 3265
721 야고보서 실천합시다. 약2:14-26  한태완 목사  2007-11-06 2636
720 야고보서 드리는 신앙 약2:19-24  강종수 목사  2007-07-15 2079
719 야고보서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 법 file 약4:5-10  강종수 목사  2007-06-10 2529
718 히브리서 말씀의 능력과 위대성 히4:12-13  이한규 목사  2008-12-23 2481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