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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5:1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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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중석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의 이전 이름)에게 약속하시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보라고 말씀하신 후, 네 자손이 별들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의 광휘(光輝)는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삼년된 암소와 삼년된 염소와 삼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각각 한 마리씩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십니다. 아브람은 그것들을 다 준비해 놓고 새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중간을 모두 갈라 마주 놓았습니다.
해가 지고 아브람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자손이 이방나라에서 "나그네"(낯선 자)로 취급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박해와 고문을 당할 것이나 그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고, 그들의 압제자들은 징벌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연기가 솟아오르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갈라놓은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고 창세기에는 적혀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더불어' 세운 그의 언약을 이렇게 마감하십니다: "이집트 강으로부터 유프라데스 강에 이르기까지 이 땅을 네 자손들에게 주리라".
창세기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계약)이라고 못박습니다. 계약은 쌍방의 합의에 의해서만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람이 한 역할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후손이 포로가 될 것이라는 계약의 내용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가해진 핍박의 내용에 대해서도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외국 땅에서 나그네들이 되어야 합니까? 더구나, 계약은 쌍방의 정신 상태가 비슷해야 수행될 수 있습니다. 한 쪽은 명료한 상태에서, 다른 한 쪽은 몽롱한 상태에서 체결되는 계약은 계약다운 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더불어' 세운 계약(언약)이라 할 때, 아브람의 상태는 잠이 든 상태였습니다. 그것도 선잠이 아니라 '깊이' 잠든 상태였습니다. 모세나 예레미야가 명료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람에게는 그가 깊이 잠든 상태에서 말씀하셨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체결된 계약이 제대로 된 계약입니까? 아니, 근본적으로 이것을 '더불어' 세운 계약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엄격히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왜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이 깊이 잠이 든 상태였다는 것을 강조했을까요? 자신에게 자신이 없음을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려했던 아브람의 항변이 왜 여기서는 재연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계약의 내용 중 노예생활, 핍박받는 생활, 나그네 생활 등의 항목들에 대해 생시였다면 분명 항거했을 아브람이 깊은 잠에 빠졌기 때문에 항거할 여지조차 없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소위 '믿음의 조상' 아브람(아브라함)을 후손들의 비난으로부터 변호해 주려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계약의 유효성 여부에 관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의 정당성 여부의 최종 판정은 결국 하나님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그 언약의 내용 중 아브람의 후손들이 외국 땅에서 '나그네'(paroikos; 70인 역)로 살아가야 한다는 항목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 나그네이고, 나그네란 무엇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나그네로 세상에 옵니다. 어디로부터 오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셈입니다. 세상이 인간을 원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은 세상에 대해서 낯선 자로 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낯선 자가 되기 쉽습니다. 인간의 나그네성 또는 인간의 낯설음을 실존 철학에서는 인간의 실존 양식으로까지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외국의 낯선 자들을 우리 나라에서 빈번히 접촉하게 되고, 또 우리가 외국에 나가면 우리 자신이 낯선 자들이 됩니다. 성서는 나그네(낯선 자)를 세 가지 부류로 나눕니다. 첫째는 '게르'(ger)인데 이는 타민족의 나그네를 뜻합니다. 둘째는 '노히리'(nochri)인데, 이는 타민족의 나그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나그네를 말합니다. 셋째는 '자르'(zar)인데, 이 용어는 동족의 나그네를 멸시하는 나그네를 뜻합니다. 곧, 환대, 분리, 멸시의 세 부류입니다. 이러한 분류는 자신들이 오랜 세월 나그네 생활을 해 왔던 유대인들이 다른 나그네들을 취급하는 경우나, 다른 나그네들이 나그네로서의 유대인을 취급하는 경우 모두에 해당됩니다.
첫 번째 부류인 '게르'부터 살펴봅시다.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모든 '게르'를 사랑하도록 권고를 받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 곧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에서 '이웃'은 바로 첫 번째 낯선 자의 부류인 '게르'를 뜻합니다. 곧 사람은 타민족의 낯선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이 '게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게르'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들은 이집트에서 혹독한 취급을 당했으나, 그 당한 방법 그대로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낯선 자 '게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게르'는 아브라함과 직접적인 친척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신 후, 그를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하나의 낯선 자였습니다. 곧 첫 번째 유대인 나그네였습니다. 그의 유대성 때문에 그 자신이 소외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자기 후손이 다른 민족에게 환대를 받지 못할 나그네가 된다는 항목을 걱정했습니다.
나그네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 또는 금지된 것들을 말하거나 행동에 옮기기도 합니다. 나그네는 그가 거처하는 혹은 순례하는 곳에서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었던 토박이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고, 추방되거나, 심지어 처형당하기도 합니다. 그가 환영받는 경우란, 그의 상태와 이름, 그의 과거와 기억, 그의 민족과의 연대성을 포기한 후에나 가능합니다. 가령, 한 유대인 나그네가 환영받는 경우란, 그가 크리스천이 되거나 모슬림 등으로 개종해야 가능합니다. "네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우리 중 하나가 되어라"입니다. 아니, "우리가 되어라"입니다. 이것을 가장 과격하게 밀고 나간 것이 독일의 나치였습니다. 히틀러 통치 시기에는 낯선 자에 대한 두려움, 낯선 자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 때에는 낯선 자의 문화적 혹은 종교적 개종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낯선 자는 손상을 당해야 했습니다. 축소되어야 했습니다.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어느 이교도를 취급할 때보다 더 잔인하게 나치는 낯선 자들을 죽이기 전 그들을 탈 인간화시키려 했습니다. 거기서 낯선 자는 물질이 되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낯선 자들을 대하는 방식은 나치와는 아주 다릅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은 각기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본래적인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크리스천들을 개종시켜 유대교인을 만들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 유대인다운 유대인을 만들려합니다. 그들은 그 낯선 자가 유대인들 자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제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낯선 자들은 갖고 있으나 자신들은 아직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제공받기를 원합니다. 유대인들은 낯선 자가 자신들처럼 닮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낯선 자가 자신의 독특성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에게 낯선 자란 함께 살아야 하고 자신들의 폭을 넓혀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낯선 자를 고맙게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위대함은 자기 집에 낯선 자들을 초대하고, 그들이 환대를 느끼도록 했다는 데 있습니다. 랍비 엘리에제르(Eliezer)는 방랑하는 낯선 자들을 환대해주었던 그의 일관된 모습 때문에 추앙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나그네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어나 누구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집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나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묘사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에녹과 노아와 더불어 아브라함이나 사라도 "땅에서는 외국인들과 떠돌이들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항상 도상에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서 오래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나그네가 되기 위해 아브라함은 그의 과거의 자신과 단절했습니다. 때때로 이 단절은 결과가 좋을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부모를 떠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왕궁을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절이 유대인 본성을 거부하는 종류의 단절로까지 과격하게 진전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요세퍼스(Josephus), 스피노자(Spinoza), 하이네(Heine), 베르그송(Bergson) 등은 지나치게 나간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유대인다움에 대해서조차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다움을 잃은 나그네는 유대인 사회에서 부정적 모델로 간주됩니다.
두 번째 부류의 나그네는 '노히리'입니다. 타민족의 나그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나그네가 바로 이 부류입니다. 이들은 상대 민족의 기쁨이나 슬픔에는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게르'로 남도록 권유받습니다. 유대인은 누구에게도 '노히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게르'였고, 결코 '노히리'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유대인다움을 간직하면서 다른 민족의 독특성을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게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대인다움에 대한 절대적 우월감 또는 배타적 집착 때문에 타민족의 독특성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유대인다움으로 타민족을 공격하고 수치스럽게 하고 부정한다면 그 사람은 '노히리'로 판정됩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인이 자신의 독일성을 내세워 유대인을 부정한다면 그는 '노히리'로 명명됩니다.
세 번째 부류의 나그네는 동족의 나그네를 멸시하는 나그네, 곧 '자르'입니다. 말을 바꾸면 '자르'는 유대인의 경우, 유대인으로서 자신이나 다른 유대인에게 낯선 자가 되는 부류입니다. 유대인으로 타인이나 자신의 유대인다움을 역겨워하는 사람은 '자르'로 명명됩니다. 곧 '자르'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나치는 유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미워하도록 강요하기까지 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 살인자의 시각으로 판단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다른 유대인을 학대하고 처형하는 임무를 맡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나치의 인간성 말살의 극단적인 표본이 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강요에 의한 것이고,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다른 유대인을 멸시하는 '자르'에게는 구원이 없음이 천명됩니다. 레위기는 "이웃을 사랑하라" 할 때 그 이웃에 이 '자르'를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곧, 이 '자르'는 동정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 쓰레기로 취급당했습니다.
이 세 부류의 나그네(낯선 자)를 살펴볼 때, 현재 유대인의 경우, 그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나그네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나라에 따라 그들에 대한 태도는 상이합니다. 그들을 환대하기도 하고, 그들을 암암리에 격리시키려고도 합니다. 그들은 이미 반세기 전 '연기가 솟아오르는 풀무'를 보았고, '타오르는 횃불'이 희생 제물인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희생 제물의 숫자는 육백만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밤이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희생 제물들은 구제 받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유의 위대한 수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왜 당신은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철길들을 폭파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가 침묵했습니다. 세계는 유대인들을 극도로 낯설어 했습니다. 세계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나님의 언약들 중 지금까지 성취된 것은 무엇입니까? 뭇별처럼 많은 자손입니까? 아니, 다른 민족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성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후보로 쉽게 떠오르는 것은 400년 동안 애굽에서의 노예생활로부터의 구출이라는 항목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완전한 성취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괴롭힘을 당하는 기간은 400년 정도로 되어 있었으나, 20세기에 와서 그들이 당한 괴로움은 과거 400년 동안 그들이 당했던 괴로움을 완전히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의 고통의 기간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400년으로 말씀하셨으나, 그 기간은 430년으로 30년이 더 길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으로 예고되었으나, 그들이 가지고 나온 것은 큰 재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했다"(출12:39)는 것이 출애굽기의 보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일강으로부터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땅에 관한 약속은 어떠합니까? 그 땅은 지금 유대인들의 땅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의 이 언약에 대해서 낯선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언약이 결국은 성취될 것이라고 지금도 끈질기게 기다립니다. 그러면 언약 중 지금까지 성취된 것으로 분명히 간주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왜 아브라함은 동의했습니까? 왜 그 약속의 내용 중 노예생활, 핍박받는 생활, 나그네 생활에 관한 항목에 대해 왜 아브라함은 거부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아브라함은 "심히 두려워했다"(창15:12)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언약의 부대 조건을 명료히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낯선 자들' 혹은 '나그네들'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한 가지 제한이 부가되었다는 것을 그는 포착했습니다. 곧 '이방에서'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만 낯선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언약이었습니다. 말을 바꾸면 그들은 고향에서는, 곧 자기들끼리는 낯선 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확신을 얻게 된 내용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그 언약에 동의했고 따라서 이 언약은 일방적 언약이 아니라, '아브람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언약이 사회 속에서의 삶을 위한 청사진을 담고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낯선 자들 없이 사는 것은 메마른 체계만 산출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끼리만 사는 것은 불가피하게 삶의 내용을 위축시킬 것입니다. 낯선 자들을 만나는 것은 마치 고통이 그러하듯이 중요하고, 창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낯선 사람들 가운데서만, 낯선 사람들에게만 낯선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나 하나님에게는 낯선 자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언약에 함축된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취된 언약의 내용은 바로 이 부분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중 그 누구도 '자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의 유대성을 거부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생활 중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 분은 그 분의 피조물에게 낯선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역사 속에, 세계사 속에 함께 계셔왔습니다. 인간은 그 분을 낯선 분으로 취급해서도 안되고, 그 자신이 그 분에게 낯선 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그네가 되는 경우든 또는 우리가 다른 나그네를 대하는 나그네인 경우든, 우리는 '게르'로서의 나그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노히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타민족 사람들의 독특성을 제거하려해서도 안될 것이고, 우리의 독특성을 제거 당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의 정체성과 독특성을 인정하는 나그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인을 '양놈'으로, 일본인을 '쪽발이'로, 중국인을 '뙤놈'으로, 러시아인을 '노랭이'로 무시하는 '노히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태가 본 예수는 자신을 나그네와 동일시 한 후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그룹(ger)과 그들에 대해 무관심한 그룹(nochri)을 분리시키고 전자에게는 영생을, 후자에게는 영벌을 약속합니다.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그룹은 '의인'들로 간주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동족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자르'가 결코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엽전'으로 비하하는 '자르', "한국사람은 안돼"하고 동족에게 체념하는 '자르'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와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족, 조선족들을 경시하는 '자르'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L.A.의 올림픽 타운이나 뉴욕의 Flushing처럼 한인교포들이 몰려 사는 곳을 노골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멸시하면서 천박한 쾌감을 느끼는 같은 한인교포들이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외국에 사는 한국인끼리 서로 피하고 멸시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한인으로 한인을 멸시하는 '자르'는 인간쓰레기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유대인을 포함하여 다른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낯선 분으로 여기거나 그러한 하나님에 대해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려는 크리스천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바리새인은 나쁜 사람이고 크리스천은 좋은 사람이라는 유치한 도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교는 공로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라는 루터식 편견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정한 하나님께서 그 눈을 결국 이방인에게로 돌리셨다는 식의 편향된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유대인도 중요하고 크리스천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작은 분으로 만들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작아질수록 그 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낯선 분이 될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 분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 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영광이 그 분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3,36).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해가 지고 아브람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자손이 이방나라에서 "나그네"(낯선 자)로 취급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박해와 고문을 당할 것이나 그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고, 그들의 압제자들은 징벌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연기가 솟아오르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갈라놓은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고 창세기에는 적혀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더불어' 세운 그의 언약을 이렇게 마감하십니다: "이집트 강으로부터 유프라데스 강에 이르기까지 이 땅을 네 자손들에게 주리라".
창세기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계약)이라고 못박습니다. 계약은 쌍방의 합의에 의해서만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람이 한 역할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후손이 포로가 될 것이라는 계약의 내용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가해진 핍박의 내용에 대해서도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외국 땅에서 나그네들이 되어야 합니까? 더구나, 계약은 쌍방의 정신 상태가 비슷해야 수행될 수 있습니다. 한 쪽은 명료한 상태에서, 다른 한 쪽은 몽롱한 상태에서 체결되는 계약은 계약다운 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더불어' 세운 계약(언약)이라 할 때, 아브람의 상태는 잠이 든 상태였습니다. 그것도 선잠이 아니라 '깊이' 잠든 상태였습니다. 모세나 예레미야가 명료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람에게는 그가 깊이 잠든 상태에서 말씀하셨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체결된 계약이 제대로 된 계약입니까? 아니, 근본적으로 이것을 '더불어' 세운 계약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엄격히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왜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이 깊이 잠이 든 상태였다는 것을 강조했을까요? 자신에게 자신이 없음을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려했던 아브람의 항변이 왜 여기서는 재연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계약의 내용 중 노예생활, 핍박받는 생활, 나그네 생활 등의 항목들에 대해 생시였다면 분명 항거했을 아브람이 깊은 잠에 빠졌기 때문에 항거할 여지조차 없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소위 '믿음의 조상' 아브람(아브라함)을 후손들의 비난으로부터 변호해 주려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계약의 유효성 여부에 관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의 정당성 여부의 최종 판정은 결국 하나님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그 언약의 내용 중 아브람의 후손들이 외국 땅에서 '나그네'(paroikos; 70인 역)로 살아가야 한다는 항목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 나그네이고, 나그네란 무엇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나그네로 세상에 옵니다. 어디로부터 오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셈입니다. 세상이 인간을 원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은 세상에 대해서 낯선 자로 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낯선 자가 되기 쉽습니다. 인간의 나그네성 또는 인간의 낯설음을 실존 철학에서는 인간의 실존 양식으로까지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외국의 낯선 자들을 우리 나라에서 빈번히 접촉하게 되고, 또 우리가 외국에 나가면 우리 자신이 낯선 자들이 됩니다. 성서는 나그네(낯선 자)를 세 가지 부류로 나눕니다. 첫째는 '게르'(ger)인데 이는 타민족의 나그네를 뜻합니다. 둘째는 '노히리'(nochri)인데, 이는 타민족의 나그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나그네를 말합니다. 셋째는 '자르'(zar)인데, 이 용어는 동족의 나그네를 멸시하는 나그네를 뜻합니다. 곧, 환대, 분리, 멸시의 세 부류입니다. 이러한 분류는 자신들이 오랜 세월 나그네 생활을 해 왔던 유대인들이 다른 나그네들을 취급하는 경우나, 다른 나그네들이 나그네로서의 유대인을 취급하는 경우 모두에 해당됩니다.
첫 번째 부류인 '게르'부터 살펴봅시다.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모든 '게르'를 사랑하도록 권고를 받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 곧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에서 '이웃'은 바로 첫 번째 낯선 자의 부류인 '게르'를 뜻합니다. 곧 사람은 타민족의 낯선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이 '게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게르'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들은 이집트에서 혹독한 취급을 당했으나, 그 당한 방법 그대로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낯선 자 '게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게르'는 아브라함과 직접적인 친척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신 후, 그를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하나의 낯선 자였습니다. 곧 첫 번째 유대인 나그네였습니다. 그의 유대성 때문에 그 자신이 소외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자기 후손이 다른 민족에게 환대를 받지 못할 나그네가 된다는 항목을 걱정했습니다.
나그네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 또는 금지된 것들을 말하거나 행동에 옮기기도 합니다. 나그네는 그가 거처하는 혹은 순례하는 곳에서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었던 토박이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고, 추방되거나, 심지어 처형당하기도 합니다. 그가 환영받는 경우란, 그의 상태와 이름, 그의 과거와 기억, 그의 민족과의 연대성을 포기한 후에나 가능합니다. 가령, 한 유대인 나그네가 환영받는 경우란, 그가 크리스천이 되거나 모슬림 등으로 개종해야 가능합니다. "네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우리 중 하나가 되어라"입니다. 아니, "우리가 되어라"입니다. 이것을 가장 과격하게 밀고 나간 것이 독일의 나치였습니다. 히틀러 통치 시기에는 낯선 자에 대한 두려움, 낯선 자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 때에는 낯선 자의 문화적 혹은 종교적 개종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낯선 자는 손상을 당해야 했습니다. 축소되어야 했습니다.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어느 이교도를 취급할 때보다 더 잔인하게 나치는 낯선 자들을 죽이기 전 그들을 탈 인간화시키려 했습니다. 거기서 낯선 자는 물질이 되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낯선 자들을 대하는 방식은 나치와는 아주 다릅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은 각기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본래적인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크리스천들을 개종시켜 유대교인을 만들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 유대인다운 유대인을 만들려합니다. 그들은 그 낯선 자가 유대인들 자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제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낯선 자들은 갖고 있으나 자신들은 아직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제공받기를 원합니다. 유대인들은 낯선 자가 자신들처럼 닮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낯선 자가 자신의 독특성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에게 낯선 자란 함께 살아야 하고 자신들의 폭을 넓혀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낯선 자를 고맙게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위대함은 자기 집에 낯선 자들을 초대하고, 그들이 환대를 느끼도록 했다는 데 있습니다. 랍비 엘리에제르(Eliezer)는 방랑하는 낯선 자들을 환대해주었던 그의 일관된 모습 때문에 추앙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나그네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어나 누구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집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나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묘사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에녹과 노아와 더불어 아브라함이나 사라도 "땅에서는 외국인들과 떠돌이들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항상 도상에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서 오래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나그네가 되기 위해 아브라함은 그의 과거의 자신과 단절했습니다. 때때로 이 단절은 결과가 좋을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부모를 떠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왕궁을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절이 유대인 본성을 거부하는 종류의 단절로까지 과격하게 진전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요세퍼스(Josephus), 스피노자(Spinoza), 하이네(Heine), 베르그송(Bergson) 등은 지나치게 나간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유대인다움에 대해서조차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다움을 잃은 나그네는 유대인 사회에서 부정적 모델로 간주됩니다.
두 번째 부류의 나그네는 '노히리'입니다. 타민족의 나그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나그네가 바로 이 부류입니다. 이들은 상대 민족의 기쁨이나 슬픔에는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게르'로 남도록 권유받습니다. 유대인은 누구에게도 '노히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게르'였고, 결코 '노히리'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유대인다움을 간직하면서 다른 민족의 독특성을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게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대인다움에 대한 절대적 우월감 또는 배타적 집착 때문에 타민족의 독특성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유대인다움으로 타민족을 공격하고 수치스럽게 하고 부정한다면 그 사람은 '노히리'로 판정됩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인이 자신의 독일성을 내세워 유대인을 부정한다면 그는 '노히리'로 명명됩니다.
세 번째 부류의 나그네는 동족의 나그네를 멸시하는 나그네, 곧 '자르'입니다. 말을 바꾸면 '자르'는 유대인의 경우, 유대인으로서 자신이나 다른 유대인에게 낯선 자가 되는 부류입니다. 유대인으로 타인이나 자신의 유대인다움을 역겨워하는 사람은 '자르'로 명명됩니다. 곧 '자르'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나치는 유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미워하도록 강요하기까지 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 살인자의 시각으로 판단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다른 유대인을 학대하고 처형하는 임무를 맡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나치의 인간성 말살의 극단적인 표본이 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강요에 의한 것이고,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다른 유대인을 멸시하는 '자르'에게는 구원이 없음이 천명됩니다. 레위기는 "이웃을 사랑하라" 할 때 그 이웃에 이 '자르'를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곧, 이 '자르'는 동정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 쓰레기로 취급당했습니다.
이 세 부류의 나그네(낯선 자)를 살펴볼 때, 현재 유대인의 경우, 그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나그네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나라에 따라 그들에 대한 태도는 상이합니다. 그들을 환대하기도 하고, 그들을 암암리에 격리시키려고도 합니다. 그들은 이미 반세기 전 '연기가 솟아오르는 풀무'를 보았고, '타오르는 횃불'이 희생 제물인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희생 제물의 숫자는 육백만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밤이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희생 제물들은 구제 받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유의 위대한 수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왜 당신은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철길들을 폭파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가 침묵했습니다. 세계는 유대인들을 극도로 낯설어 했습니다. 세계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나님의 언약들 중 지금까지 성취된 것은 무엇입니까? 뭇별처럼 많은 자손입니까? 아니, 다른 민족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성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후보로 쉽게 떠오르는 것은 400년 동안 애굽에서의 노예생활로부터의 구출이라는 항목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완전한 성취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괴롭힘을 당하는 기간은 400년 정도로 되어 있었으나, 20세기에 와서 그들이 당한 괴로움은 과거 400년 동안 그들이 당했던 괴로움을 완전히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의 고통의 기간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400년으로 말씀하셨으나, 그 기간은 430년으로 30년이 더 길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으로 예고되었으나, 그들이 가지고 나온 것은 큰 재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했다"(출12:39)는 것이 출애굽기의 보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일강으로부터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땅에 관한 약속은 어떠합니까? 그 땅은 지금 유대인들의 땅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의 이 언약에 대해서 낯선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언약이 결국은 성취될 것이라고 지금도 끈질기게 기다립니다. 그러면 언약 중 지금까지 성취된 것으로 분명히 간주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왜 아브라함은 동의했습니까? 왜 그 약속의 내용 중 노예생활, 핍박받는 생활, 나그네 생활에 관한 항목에 대해 왜 아브라함은 거부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아브라함은 "심히 두려워했다"(창15:12)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언약의 부대 조건을 명료히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낯선 자들' 혹은 '나그네들'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한 가지 제한이 부가되었다는 것을 그는 포착했습니다. 곧 '이방에서'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만 낯선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언약이었습니다. 말을 바꾸면 그들은 고향에서는, 곧 자기들끼리는 낯선 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확신을 얻게 된 내용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그 언약에 동의했고 따라서 이 언약은 일방적 언약이 아니라, '아브람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언약이 사회 속에서의 삶을 위한 청사진을 담고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낯선 자들 없이 사는 것은 메마른 체계만 산출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끼리만 사는 것은 불가피하게 삶의 내용을 위축시킬 것입니다. 낯선 자들을 만나는 것은 마치 고통이 그러하듯이 중요하고, 창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낯선 사람들 가운데서만, 낯선 사람들에게만 낯선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나 하나님에게는 낯선 자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언약에 함축된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취된 언약의 내용은 바로 이 부분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중 그 누구도 '자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의 유대성을 거부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생활 중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 분은 그 분의 피조물에게 낯선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역사 속에, 세계사 속에 함께 계셔왔습니다. 인간은 그 분을 낯선 분으로 취급해서도 안되고, 그 자신이 그 분에게 낯선 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그네가 되는 경우든 또는 우리가 다른 나그네를 대하는 나그네인 경우든, 우리는 '게르'로서의 나그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노히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타민족 사람들의 독특성을 제거하려해서도 안될 것이고, 우리의 독특성을 제거 당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의 정체성과 독특성을 인정하는 나그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인을 '양놈'으로, 일본인을 '쪽발이'로, 중국인을 '뙤놈'으로, 러시아인을 '노랭이'로 무시하는 '노히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태가 본 예수는 자신을 나그네와 동일시 한 후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그룹(ger)과 그들에 대해 무관심한 그룹(nochri)을 분리시키고 전자에게는 영생을, 후자에게는 영벌을 약속합니다.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그룹은 '의인'들로 간주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동족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자르'가 결코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엽전'으로 비하하는 '자르', "한국사람은 안돼"하고 동족에게 체념하는 '자르'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와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족, 조선족들을 경시하는 '자르'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L.A.의 올림픽 타운이나 뉴욕의 Flushing처럼 한인교포들이 몰려 사는 곳을 노골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멸시하면서 천박한 쾌감을 느끼는 같은 한인교포들이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외국에 사는 한국인끼리 서로 피하고 멸시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한인으로 한인을 멸시하는 '자르'는 인간쓰레기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유대인을 포함하여 다른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낯선 분으로 여기거나 그러한 하나님에 대해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려는 크리스천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바리새인은 나쁜 사람이고 크리스천은 좋은 사람이라는 유치한 도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교는 공로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라는 루터식 편견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정한 하나님께서 그 눈을 결국 이방인에게로 돌리셨다는 식의 편향된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유대인도 중요하고 크리스천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작은 분으로 만들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작아질수록 그 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낯선 분이 될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 분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 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영광이 그 분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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