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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의 긴장관계

창세기 최만자............... 조회 수 1992 추천 수 0 2008.04.18 0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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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6-7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기독교는 죄를 강조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셔서 인류를 구원하여 주셨고, 그 구원에 감격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았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죄인이라는 인간 이해를 가진 기독교는 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사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죄인된 인간과 죄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는 바로 오늘 봉독한 창세기 3장의 타락설화에 깊이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이야기에 바로 인간의 범죄와 타락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으며, 이 이야기에 근거하여 기독교는 인간 존재와 죄에 대한 본질을 해석하여 왔습니다. 창세기 3장을 근거로 한 죄에 대한 해석을 보면 '죄'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며,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자기교만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기교만 혹은 자기긍정은 죄가 된다는 신학적 해석과 교리가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철저하게 절대 창조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자기교만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은 절대자 앞에 보잘것없고 비천한 피조물임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절대복종하고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구원이요 은총이라고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해석하여 왔습니다. 바로 오늘 읽은 창세기 3:6∼7에 보면 인간이 자의식을 갖고 자기실현을 하고자 하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는 순간입니다. 즉 인간의 자기교만 혹은 자기실현은 죄가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자기부정은 구원의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창세기 3장을 보면 본문이 말하는 죄가 과연 인간의 자기실현 혹은 교만을 뜻하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실 본문에는 죄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단지 금령에 불복종한데 대해 하나님께서 벌주시는 데서 그것이 범죄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이 핵심적인 죄의 요소로 보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어보려는 교만 - 이 교만은 네피림의 교훈이나 바벨탑의 교훈에서 그랬듯이 항상 인간 타락의 가장 중요한 양상으로 창세기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교만은 야훼와 동등하게 되겠다는 욕망이라기보다는 엘로힘 즉 신적 존재들처럼 되려는 욕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겸허와는 상반되는 것임으로 그러한 것은 죄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교만을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이 교만이라는 것이, 첫째,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하는데 즉 그것은 성격상 선악을 결정하는 도덕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지 아니하고 자기본위적으로 결정하려는 인간 신격화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만의 의미는 '하나님처럼' 되는 것으로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절대자 창조주가 되려고 하는 인간 신격화를 말합니다. 실로 창세기 1∼2장에 나타나는 두 가지 공통된 교훈은 인간은 창조행위의 대상일 뿐 결코 그 주체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창조주가 아니며 유한한 피조물임을 명백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결코 창조주가 아닌 유한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창조라는 신적 능력의 밖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초점과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주장의 중심은 오히려 인간 신격화,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전적인 부정과 거부를 역설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인간이 피조물로서 창조의 주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은 인간을 우상화 또는 계급구조의 사회에 대한 도전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연 창조에 대한 창세기 기자의 선언이 자연의 마력의 해제를 뜻할 수 있듯이, 인간 창조는 인간에 대한 인간 비신격화 또는 인간화의 선언을 뜻합니다. 창세기의 맥락에서 하나님처럼은 당시의 고대근동의 신적 이미지를 내포합니다. 왕권같은 하나님 모습,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상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과 연결시켜 본다면 창조주와 피조물된 인간의 관계는 인간 사이의 절대적 평등성을 보다 강조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함이 죄임을 말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 사이의 불평등과 불의한 현실에 대한 해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통과 갈등으로 엮어진 인간 실존의 현실은 바로 인간간의 불평등한 구조 곧 어느 인간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소유함을 비판하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설화가 결정적으로 관심하는 물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 왜 죽음과 고통과 고역과 죄에 의해 한계 지어진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와 죄의 기원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이중성을 띤 존재로 체험되는 인간에 관한 물음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통과 노역과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죄와 한계에 대한 연관관계를 보여줍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불복종의 결과로 죽음을 벌로 받지는 않습니다. 죄와 죽음은 불가분리적으로 인간의 실존에 속함을 이야기로밖에는 섬세하게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보면 죄라는 개념은 상당히 사회적 역사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편이나 지혜문서에서 개인의 부도덕함이 죄로 고백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 부도덕도 민족이나 공동체에 대한 관계에서의 사건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특히 예언서에서 죄에 대한 이해는 사회적, 역사적인 개념입니다(아모스서의 심판신탁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로 인하여 내리는 심판은 모두 이웃을 억울하게 한 것이거나 가난한 자에 대한 돌봄을 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계약관계로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는데 그 선택받음은 이스라엘이 특별히 예쁘고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뭇민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내 자녀가 되면 지켜야 할 계명들이 주어지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범죄가 된다고 합니다. 그 계명의 핵심은 바로 이웃에 대한 책임입니다. 구약성서의 다른 어느 곳에도 창조설화가 죄의 기원이나 의미로 인용되거나 암시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창세기 타락설화는 그리스도교회의 교의신학에서는 원래의 상태와 타락이나 원죄에 관한 가르침과 관련하여 수립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회 안에서 교리로 자리 잡아온 죄의 의미와 용어는 후기 유대교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 아담, 당신은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죄를 지은 것은 당신이었어도 타락은 오직 당신 것이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후손들인 우리의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에즈라서)라고 합니다. 아담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한 개인으로 이해되고 그의 타락이 후손들에게 전해내려 왔다고 합니다. 바울의 해석도 이 후기 유대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죄교리가 나오게 되고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완전한 발전을 일굽니다. 즉, 죄는 어떤 것의 결핍이 아니라 존재의 어떤 실질적인 저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여, 타락 이전의 원래의 상태는 이상적인 무구한 상태이고, 타락으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며, 처음 인간이 지은 죄가 유전되어 모든 인간은 죄 없이 태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페라기우스 논쟁이라는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시작되었고 중세교회사에 그 논쟁의 불씨가 지속되어졌습니다.
중세교회가 '죄'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고 중요하게 다룬 배경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게르만사회에서 확장, 확립되어진 것에도 영향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게르만족들과 접하게 되면서 법을 중시하는 사고가 신학과 교회 속으로 강하게 침투하여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전통에 매어 있던 동방교회의 신학과는 달리 새로운 신학을 형성하면서 구원의 사건을 법(률)적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동방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역사를 하나님이 스스로 인류를 죽음과 마귀로부터 해방시키는 우주적 사건으로 이해했으나, 서방에서는 구속 행위를 예수를 통하여 정의를 회복시키는 사건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동방적 사고에서 인간 신화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회복되는 것으로 보았다면, 서방에서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예수가 모든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대리로 치러 받으신 '죄의 용서'를 통하여 회복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즉 예수의 구속사건도 채무자와 채권자의 법적 관계 유형으로 해석하였으며 터툴리안은 이러한 해석의 기반을 놓았습니다.
이 게르만적 법치사고와 그리스도교가 혼합되어 '죄'는 서방교회 신학의 중심테마가 되었으며, 유럽의 중세시대에는 '죄'에 관한 신학사상의 영향이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신학과 교회 내에서는 하나의 단단한 체제가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개개인의 죄를 먼저 보여준 후에 그 죄의 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감에 따라 죄로 인한 형벌과 영원한 지옥에서 구출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을 점점 더 많이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중세때 교회에서는 '죄'를 규정하는 일들이 많아졌고,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자이며, 우리와는 상관없는 전지전능자이고, 절대 초월자가 되어 인간 위에 군림하시면서 벌을 주려고 긴장해 계시는 분으로 이미지화되었습니다.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예수도 심판자로 등장하였고 중보자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성모 마리아가 우리를 위하여 아들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인간을 돌보는 신성은 성모를 통하여 유지되었습니다.
이같은 죄에 대한 인식의 강요는 지금도 계속되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회개를 강요하고 죄인임을 고백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회개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됨을 강조하고 그래서 자기를 철저히 부정할 것을 요구하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자기부정을 넘어서 자기비하를 하게 합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 가운데 "이 벌레만도 못한 나"라는 표현을 듣습니다. 기도만 아니고 찬송가 가사에도 그런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를 벌레라고 생각하고 그만도 못한 자신이라고 자기비하를 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벌레가 이 기도를 들으면 굉장히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요. 나름대로 하루를 살아도 최선을 다하고 살며, 한 순간의 생명일지라도 존재의미를 가지고 사는 벌레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자기비하로 그리스도인들은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 기도를 듣고 교만함을 버리고 최대로 자신을 낮춘 모습에 감동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자기비하는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는 이런 자기부정이나 자기비하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어졌으며, 이런 자기비하는 세상에서 자기고양, 자기긍정을 할 수 있는 자들보다는 세상에서 자기를 긍정할 수 없는 자들에게 더 깊게 내면적으로 작용하여서 부정적인 자기비하나 열등감을 더욱 내면화시키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긍정하지 못하고 떳떳하게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는 소극적 심성을 삶 속에 깊이 내면화시킵니다. 더욱이 이러한 죄의식은 복종의 윤리와 연결되면서 자기비하의 심성을 내면화시킵니다. 이 세상에서 부와 권력과 지식 등을 다 갖춘 이들이 "이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라고 드리는 자기비하의 기도는 그 기도의 순간이 끝나면 그는 결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면서 겸손하기까지 한 자로 고양되어 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러한 요소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드리는 "벌레만도 못한 이 연약하고 부족한 죄인"이라는 기도는 기도가 끝나도 계속 그를 그 상태에 있게 하며 기도를 통하여 결코 해방의 경험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처럼 자기의 교만이 죄가 됨으로 자기를 낮추고 복종하고 겸손해야한다는 기독교의 이해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역사를 통하여 살펴보면 이와 같은 자기부정과 복종을 강요한 기독교의 진리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앞에서 이루어진 노예의 자기비하, 여성의 자기비하, 흑인의 자기비하, 제3세계의 자기비하 그리고 원주민들의 자기비하는 바로 주인과 남성과 백인과 제1세계의 지배와 통제를 정당화시켰으며, 성서와 교회전통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인간이 종교 안에서 자기부정을 통하여 신적 거룩성에로 승화되어진다는 종교적 체험과 진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우주적 궁극적 실제의 힘이 인간 삶의 근원이 된다는 것과,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그래서 우주적 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열고 그 힘에 잇대어 역사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존재본질의 인식과, 그에 따른 윤리적 행위를 찾아 자신을 승화시켜 나가는 일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가 거의 이러한 자기부정의 차원을 실존적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로 제시함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잠시 불교의 경우에서 본다면 불교는 어떤 면에서 기독교보다 더 철저한 자기부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자기부정은 그것을 통한 자기승화에로 연결됩니다. 구도적 자기부정을 통한 정진의 행위는 누구든지 성불되는 거룩한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박한 자기비하가 아니라 참으로 철저한 자기부정이 되어 오히려 자기승화를 이루어 나가서 마침내 부처처럼 아니 부처가 되는 곳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불자의 최대 소망이 성불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자기실현을 죄로 규정하고 자기부정을 은혜라고 하는 이 자기부정에 의한 자기비하는 자기승화와 연결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완벽하게 인간의 무능과 죄됨의 고백 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위가 세워지고 절대무능한 인간은 모든 실천을 신에게 맡긴 채로 자기승화를 위한 과정을 생략하고 반복적으로 신 앞에 신의 전능을 찬양하면서 자신을 밑바닥으로 비하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구도가 되어졌습니다. 절대 창조주 하나님, 절대 피조물 인간의 분리는 저 하늘 위에 높이 계셔서 인간을 심판하는 권위주의적이며 우리와 관계가 단절된 하나님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하나님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면 이는 신성모독 죄에 걸리는 일이며 종교재판에 붙여질 것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특히 희생양으로 된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보고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하여 불복종의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하여 그 열매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처럼'되는 인간을 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하여 봅시다. 도대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조주의 권능을 행사하고 모든 인간을 다스리고 전지전능의 위엄을 부리고 등등 이런 행태를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행한 종교인일 것입니다. 권위주의적이고 통제하고 지배하고 인간에 대해 절대권을 행사하는 그런 신 앞에 복종하고 굽실거리면서 그 비위를 맞추는 그런 존재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연민의 본질이시고, 돌보고 배려하며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의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근본 의미가 보다 인간사이의 절대적 평등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 자신들 사이에서는 누구도 지배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함이 죄임을 말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사이의 불평등과 불의한 현실에 대한 해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통과 갈등으로 엮어진 인간실존의 현실은 바로 인간간의 불평등한 구조 곧 한 인간이 신적 권위로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소유함을 비판하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에서 말씀드린 구약 전체의 죄에 대한 이해와 맥을 같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처럼 돌보고 하나님처럼 평안을 주고 평화를 이루어 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최대 희망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역사 현실 속에 하나님으로 오셔서 하나님으로 살고 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삶을 배우고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바로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성신학자 커터 헤이워드는 오늘날 우리와 관계없이 역사 밖에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성숙한 현대인이 구원하여서 세상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식을 갖지 말고 교만해져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실현, 자기긍정이 죄가 된다는 전통적 교리가 삶 속에서 늘 자기가 부정 당하고 자기실현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죄는 오히려 자기부정이 될 것이며 자기실현을 할 용기를 갖지 못하는 것이 죄일 것이고 자기긍정과 자기실현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은총일 것입니다. 늘 자기실현과 자기확립 속에서 살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나 배려를 모르는 경험자들에게는 그 교리가 필요하고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과 경험은 다양합니다. 획일적으로 교리화시켜서 이를 보편적 진리로 규범화하는 것은 결국 약한자들을 더욱 억압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즉 죄에 대한 선포는 자기부정의 상황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벌레취급을 당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당한 이들에게는 자기부정의 현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인식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이 오히려 죄된 상태임을 알려주는 것이 은혜요 은총일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이해뿐만이 아니라 구원과 은총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과 섬김이 은총이라는 이해 또한 모두에게 동일한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 희생의 고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 계속 인내하고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요하는 것은 결코 고통의 짐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매맞는 여성의 경우 남편에게 구타당하여 육체적으로 병든 속에서도 아이들 키우고 가사를 돌보는 여성에게 계속 자신을 희생하고 인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정당한 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복신앙이라고 비판하는 그 신앙의 행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지금 배고픈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물질을 구하는 것은 결코 기복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기 위하여 하는 기도가 기복신앙의 행태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의 경험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렇다면 다시 창세기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죄'가 무엇입니까?
학자들은 대체로 창세기 3장의 성서기자는 비록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는 있지만 '죄' 자체의 본질과 기원을 밝히는 것을 전혀 의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설화는 오히려 고통의 현실을 살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정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의도는 인간의 지상 실존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한 피조물로 존재한다는 것, 곧 오류를 범할 수 있는 한계들은 물론이고 감추인 잠재력과 죽음에서 끝나는 삶 일체를 체험하는 한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관계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고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하나님의 평가에서 나타납니다. 악의 개념을 혼자 있는 것에 결부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성의 왜곡은 관계의 왜곡이며, 관계의 왜곡이 악의 현실이고, 그것은 인간성 상실 곧 비인간화의 현실입니다. 관계를 왜곡시키는 것이 죄입니다. 창세기 이야기는 불복종 후에 모든 관계 즉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이 세상에 오심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생은 자기부정의 극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기부정은 모든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으며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가 주신 생명의 풍성은 자기긍정의 존재로서 서는 삶을 갖게 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자기실현 자기긍정 경험이 중요하고 또 확신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자기부정은 자기비하로 전락하고, 맹목적인 고난과 희생을 미화시키며,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됩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왜곡된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자기비하는 생명을 더 풍요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비생명적 상태를 강화시키거나 지속시킬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자기비하로 전락하는 자기부정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의 맥락에서 자기부정으로부터 종교적 승화로 혹은 자기긍정으로부터의 종교적 승화로 나아가는 자기부정의 종교적 경험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세력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근원 앞에 유한한 존재임을 깨달아 겸손하며, 열과 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삶으로서 예수처럼, 하나님처럼 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기 존재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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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 창세기 삶은 역전될 수 있다 창50:15-21  조용기 목사  2008-05-30 2487
834 창세기 죽음 준비 창48:17-19  민영진 목사  2008-05-29 2163
833 창세기 주어진 삶과 주장하는 삶 창22:15-19  조용기 목사  2008-05-28 2002
832 창세기 하나님 은총의 두 빛깔 - 녹색과 적색 창9:1-7  이정배 목사  2008-05-16 3597
831 창세기 우리 이름을 내고 창11:1-9  조용기 목사  2008-04-18 2253
» 창세기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의 긴장관계 창3:6-7  최만자 자매  2008-04-18 1992
829 창세기 낯선 자 창15:12-21  서중석 목사  2008-03-10 1879
828 창세기 칠년 풍년, 칠년 흉년 창41:1-8  최만자 자매  2008-03-10 1722
827 창세기 사랑의 연대 창45:5  서창원 목사  2008-02-15 1737
826 창세기 요셉의 길, 생명의 길 창45:5  박동현 목사  2008-02-15 2141
825 창세기 두 가지 사명 창1:28-2:3  강보형 목사  2008-01-24 1999
824 창세기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 창1:31  한완상 형제  2008-01-13 2272
823 창세기 열명만 있어도 창18:32-33  손운산 목사  2008-01-10 2269
822 창세기 기도로 승리한 야곱 창32:24-32  강종수 목사  2008-01-06 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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