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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보전

창세기 최만자............... 조회 수 1728 추천 수 0 2008.06.02 19: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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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6-28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새길교회 자매형제들은 매주일 예배에서 우리들의 신앙고백과 결단을 외웁니다. 그 첫머리에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언제나 새롭게 변혁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창조의 보전과 완성을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칩니다."라는 창조신앙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실제로 창조의 보전과 완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 별로 없고 그에 대한 관심도 매우 적었다는 자체 반성을 최근에 어떤 계기가 있어서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개인차원에서는 관심을 가졌지만 그것을 사회화하고 공동체적으로 실천하는데는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보면서, 이 계기에 생태계 위기를 보다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문제를 보다 근본적인데서부터 풀어 나가기 위하여 그리고 20세기 후반부터 인류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될 이 문제에 대한 시대적 인식을 확실히 갖기 위하여 오늘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지금 환경 오염의 상태를 보면 지구 열대 우림 지역의 ⅓이 파괴되고, 지구 표면토가 1/5씩 없어지고, 자원이 고갈되어 간다고 합니다. 핵무기는 지구를 몇십 번 파괴하고도 남을 양이 있고, 땅과 온갖 생물들이 물과 공기의 오염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그것을 먹고사는 인간 또한 죽음의 공포에 처해 있습니다. 지구가 이상기온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인류와 지구가 생존 위협에 처해 있어 생태계를 멸절시킬 정도로 심각하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초점을 두고 생각하려는 것은 이와 같은 생태계 위기가 초래된 원인, 요인에 대한 것과 그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은 어떠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생태학자들과 운동가들은 생태계 위기를 초래한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원인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이해가 인간 중심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고대에는 자연이란 인간 삶의 근원이요, 생존할 수 있도록 자원을 주는 공급처요, 생산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런 반면 자연은 또한 거칠고 통제가 불가능한 힘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두려움과 동시에 경외감을 가졌고, 인간 삶의 근원이며 신성한 존재로서 생명력의 어머니처럼 대하였습니다. 따라서 자연파괴는 바로 어머니의 파괴이며, 거룩한 존재에 대한 파괴로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여 생명일체적인 유기체적 관계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변화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고대의 희랍문화에서는 만물의 이치를 질료와 형상으로 이분화한 이원론적 사고를 가졌었는데 16-17세기에는 과학혁명으로 인간문화와 자연이 이분화 되었습니다. 자연은 이제 신비한 영역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법칙에 의하여 움직이는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탐구 개발할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극도로 찬양되는 계몽주의에서는 논리와 이성과 합법성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의 관계를 구성하는 지배적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자연을 대물화하고, 지배하고, 인간 중심적으로 개발·착취한 결과 생태계 전체가 오늘의 위기를 당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처음에 과학발달과 자연개발은 위기로 생각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인간문화를 발달시키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이로운 문명이라고 보았습니다. 산업화의 확대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연결되었고 또 진보와 성장논리로 이어졌으며, 자본주의의 이윤극대화를 위한 논리가 합해지면서 자연이 파괴됨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지구의 자원과 능력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재생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환경위기를 단순하게 생각하고 쓰레기나 오염물질을 처리하는 정도로 대처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연을 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1972년 로마클럽 보고서인 '성장의 한계'가 나오면서 생태계 위기의식은 확실해졌습니다. 이 보고서는 산업화와 인구성장이 지속되는 한 인류는 다음세기에 절대적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다고 전망하였습니다. 제한된 지구에서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물질생활에 대한 인간 욕망의 증가는 식량문제와 환경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며, 땅, 공기, 물의 오염이 인간과 지구 생존을 위협케 될 것을 내다보게 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는 WCC 차원에서 1970년대 이후 JPIC 신학이 확산되었고, 1990년에는 서울에서 그 세계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세계적으로는 1992년 리우 세계환경대회가 개최되어 인류생존을 위한 논의가 지구촌에 확산되었습니다.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관심에서, 자연이 스스로 고유한 생명체를 가진 존재이며 인간과 자연관계의 파라다임을 상호 의존적이고 유기체적인 관계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는 생태주의자들은,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기를 요구합니다. 이를 위해 인간이 어떤 영성적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탐색하는 생태주의자들은 원주민의 영성으로부터 많은 배움과 대안적 제시를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호주의 한 원주민 이야기에서, 그들은 집을 짓기 위하여 나무가 필요 할 때 사용하여야 할 나무에게 가서 한달 동안 사정을 말한다고 합니다: "내가 부득이 하여 집을 짓게 되었으니 이 나무를 떠나 달라고."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난 후에야 가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도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원주민의 영성은 자연과 인간의 깊은 관계, 자연존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땅을 사고 파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땅은 그들의 전부요 몸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생명일체적 인식은 불교에서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교의 이해는 생명경외가 보다 철저합니다.
생태계 위기를 당면하여서 이를 초래한 공범으로, 기독교의 창조론이 서구 과학기술문명에 의해 야기된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이 되었다고 지적 받음으로써, 비판받게 되었습니다.(Lynn White, 1967) 자연의 착취가 창세기로 말미암아 합리화되었으며, 기독교 창조론 특히 창세기 1:26-28에 나타나는 '정복하라' '다스려라'와 같은 표현은 인간의 자연지배를 하나님의 계획으로 입증하여서 과학, 기술이 자연을 착취하도록 뒷받침하였다고 비판받습니다. 그리고 성서 전반에 인간중심주의가 흐르고 있음도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도전을 받고 기독교는 자신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호론적으로 성서를 재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동안의 서구 과학기술문명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하여 온 기독교 역사를 반성하면서 기독교 본질을 새롭게 규명해 내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성서해석의 요점은 인간중심주의를 하나님중심으로, 그리고 자연에 대하여 지배가 아니라 보살핌의 관계로 창조이야기의 관점을 바꾸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에 대해 주로 이성적인 것이나 정신성으로 해석하면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보아 인간만이 신적 형상을 지녔다는 인간 우월주의로,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성립하고 자연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였다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해석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라는 것을 인간의 정신성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책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창 1:26절은 28절로 연결해 보면, 하나님이 그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그 인간이 담당해야할 과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정신적 차원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대신 담당해야할 과제가 바로 자연의 관리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다시 해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은 만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인간의 뜻에 따라 지배되고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지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세계의 소유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고,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계를 관리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신앙은 본래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근대인의 욕구를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또 '지배'와 '정복'이라는 말이 인간의 자연착취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서, 땅과 인간을 사귐과 교통과 연결된 생명체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 사용자와 피사용자의 관계로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재료로만 생각하고,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했다고 비판받게 한 창세기 2:15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갈고(아바드=섬기다) 지키는(샤마르) 일을 맡기신 것으로 되어있으며, 이는 인간이 철저히 관리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소유자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봉사자이며 섬기고 지켜야 할뿐입니다. 여기서 낙원에서의 이상적인 인간 모습이 홀로 사는 삶에서 함께 사는 삶으로(창 2:18, 18-24), 그리고 갈고 닦는 노동의 의무 없이는 의미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관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복하고 다스려라'(창 1:26, 28)는 직접적으로 오해받은 구절인데 사실 '다스리다'(radah)는 본래 이집트와 바빌론의 궁중언어로서 '돌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집트 황제가 어떤 영역을 자기의 소유로 삼고 그것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그는 그 땅의 주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자라는 것은 자연세계의 행복과 평화를 위하여 돌보고 가꾸어야 할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정복하고 다스려라'의 그 대상은 오직 동물들로만 국한하고 있는 것이지 땅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기에 불분명합니다. 동물만을 정복의 대상으로 부각시킨 의미는 고대세계에서는 동물은 인간의 큰 적이었기 때문에 투쟁해야할 대상이었습니다. 원래 동물은 인간의 음식물 아니었기 때문에 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큰 빛이 낮을 다스리듯 인간도 그렇게 동물을 관리하고, 동물은 인간의 다스림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관리하고 보살피라는 명령으로 해석하게 된 것은 중요한 생태 신학적 해석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성서가 말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불가분리의 관계임을 말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인간 아담은 땅(아다마)의 먼지(앗팔)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로 인간과 자연은 본질적으로 연결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은 먼지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3:19). 땅을 주제로 하고 있는 창세기 2-3장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땅과 생명의 결속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며, 인간을 피조물인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존재일지라도 인간은 유한하며, 땅에 속한 존재이며,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을 볼 때 인간을 보듯 보아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먼지로서의 인간은 인간의 작음과 없어질 존재임을 가리킵니다.
자연에 대한 성서의 이해는 자연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인간의 스승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로 지혜전승에 나타나는 사고입니다. 자연은 인간보다 하나님인식에 있어 더욱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운데서도 '주 하나님 지으신 세계' 등 그런 인식의 곡들이 있습니다. 성서에 보면 피조물인 자연은 창조주를 찬양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참조 욥기 12:7-9), 그 지혜를 인간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배워 인간은 다시 그것을 언어로 표현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편 8편입니다.
또 성서는 인간 사회와 역사와 자연의 하나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감이 자연과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말하는 것인데, 더 나아가 인간의 도덕적, 사회적, 역사적 삶도 자연과 밀접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자연의 황폐화를 초래하며,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면 동시에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날 '그 종말의 날'이 오면 천지가 개벽을 하여 새로운 자연세계가 출현함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자연적 재해가 내리고(홍수, 한발, 메뚜기 재앙, 화산, 지진, 등) 최후의 심판에 묵시문학적 표현을 통하여 세계의 종말은 정상적 자연 현상에 이변이 일어나는 증언을 성서는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로부터 해방되고 인간성이 회복되면 파괴된 자연도 회복된다고 증언합니다(호 2:21-22). 제3 이사야는 인류역사가 대 정화를 이룩하는 시대가 오면 하늘과 땅이 갱신되는 즉 자연의 대 회복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사 65, 계시록 1:5). 이외에도 인간의 회복이 자연의 회복이며 인간의 타락이 자연의 황폐화와 직결된다는 성서의 구절들은 매우 많습니다. 이와 같이 성서해석을 새롭게 하여 기독교의 생태학적 관심을 발전시켰습니다.
또 다른 한 관점은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는 신학을 발전시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모두의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 하나님의 표상은 너무 기독교 우월주의적이며, 배타적이고, 절대군주적이고, 군림하는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시대에 적합한 표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기독교의 하나님은 심판자적이고 폭력적이며 제국주의적이고 절대군주로 표상 되어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메시지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성찰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핵의 위협이 있고 생태계의 위기를 맞아 죽어 가는 지구에서 이제는 가능한 한 서로를 인정하면서 상호 힘을 불어넣고(empowering) 보살피고 돌보는 살림의 심성과 행위가 극대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때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앙고백은 생태학적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제시되는 메타포가 공생적이며, 상호의존적이며, 생명 연합적이고,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 도구적이면서도 본래적 가치를 함께 가지는 모델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하나님 이해가 너무 초월적이고, 인간의 삶과 무관하게 저 위에서 군림하는 하나님이며, 세상과 무관한 가부장적 아버지 하나님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지구에서의 굶주림이나 전쟁과 생태계의 위기에 그 하나님은 응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스 큉이나 데비드 트라시 같은 서구 신학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핵탄두가 불과 몇 마일 내에 장전되어 있고, 페루산 감자를 그 국민이 먹지 못하고 오히려 미국사람들이 먹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라는 물음을 물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이야기하고 신학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자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와 같은 새로운 이해의 요청은 사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실존에의 위협 앞에서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대학살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를 선지자 하박국이 외친 것처럼, 우리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에 희생된 제3세계를 위하여, 그 제3세계 내의 독재자들에게 탄압 받는 민중을 위하여, 또 백인들에 의하여 멸족의 위기를 당한 원주민들을 위하여, 그리고 가부장제에 의하여 억압당한 여성들을 위하여, 그리고 이제는 인간에 의하여 착취당한 자연을 위하여 말씀하실 하나님을 찾아 헤매어 왔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생태 여성신학의 대표적인 학자 샬리 멕훼이(Sallie McFague : Metaphorical Theology, 1987)는 세상을 하나님의 몸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합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성육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성육화하여 표현한 것이 이 세상이라는 이해는 지배적인 위계구조가(전통신학 페턴) 아니고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계 안에 내재함을 확신하는 표현입니다. 메튜 폭스라는 신학자가 "어머니인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시대의 수난이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지금 자연과 세계의 수난은 하나님 몸의 수난이며 그것은 바로 우리시대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멕훼이는 새로운 표상으로서의 하나님을 어머니, 연인, 친구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Mother, Love, Friend) 어머니 하나님은 단순하게 여성적인 것을 말함이 아니고 그 창조성과 육화되는 사건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보통 여성들이 어머니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에 남성들이 예민해 지는데 사실 이것은 남성에 대립하는 신성을 말하기보다는 이 시대의 생명창조와 성육신하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유대교적 절대군주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친근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아바 아바지라하셨는데 만일 지금 이 세상에 계시면 아마도 하나님을 어머니라 부를 것이라고 믿습니다. 연인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신적 열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영/육 이원론적 분리 개념을 극복하고자 함이며 생존을 위한 몸의 중요성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온전하게 하나되어 가는 관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인 하나님은 일상적인 것을 함께 하는 상호적 관계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은유입니다. 두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동등한 자유로운 관계성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우리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고 친근하게 나를 돌보고 사랑하는 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생태신학의 전모를 다 거론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우리 의식에 몇 가지 새로움을 가짐으로서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 보전에 참여하도록 노력할 것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창조하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태초의 창조 이후 우주 밖에 계시면서 자연법칙을 통하여 이 세계가 움직이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자기의 영을 끊임없이 만물 속에 부으시며, 자신의 영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자연을 역동적으로 만들며, 늘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우리는 계속적인 창조라고 부릅니다. 생태학적 관심은 이 하나님의 지속적 창조에 우리도 적극 참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지속적 창조는 이제 치유와 화해를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만물의 치유와 화해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생태학적 감수성을 가지는 일로서, 생태학적 감수성이란 첫째 만물에 생명이 있음을 알고 존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동근원성과 동귀결성을 깨닫는 일이며, 그 깨달음은 곧 유한한 인간이 겸손해 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존재함은 다른 뭇 생명의 죽음으로 인하여 가능함을 깨닫는 일입니다. 여기서 권정생님의 하나님의 눈물이란 동화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한 토끼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구하려고 민들레에게 갔는데 민들레의 말이 "네가 나를 먹으면 너무 아플 것이고 나는 죽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토끼는 차마 민들레를 먹지 못하고 클로버에게 또 솔잎에게도 갔는데 같은 상황이 되어 결국 죽게된 토끼가 "하나님 나는 어쩌면 좋아요"라고 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때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사실 다른 대상의 죽음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은 다른 대상을 살리는 일에 바쳐져야 합니다. 죽임의 삶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죽임으로 내가 살고 최대한의 살림으로 내가 사는 삶을 향해 살아가야 함을 암시합니다. 셋째로는 뭇 생명과의 관계가 상호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며 인간과 인간관계에서도 일방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일방적 관계는 늘 시혜적이며 일방적 의존성을 결과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연에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더 많듯이 모든 관계에서 내가 받는 것이 더 많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받는 것이 더 많다는 감성, 동시에 내가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도 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네 번째로는 만물에 대한 연민과 살림의 감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연민(compassion)은 함께 고통을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연민 곧 함께 고통 하면서 모든 것과의 조화와 관계의 새로움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영적 현존의 체험을 하고, 인간과 만물의 화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만물을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는 말은 이제 만물을 위하여 연민을 가지고 조화와 화해를 위하여 살라는 말씀으로 들려져야 할 것입니다.
이 생태학적 감수성을 구체적으로 삶 속에 실천하는 것은 지구자원의 유한성과 자연의 정화능력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개발과 소비를 해야한다는 지속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즉 이 감수성을 가지고 쓰레기 종량제라든가, 재활용 운동이라든가, 세제 덜 쓰기 운동을 해야 하고, 기업은 산업폐기물을 제대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생태주의자들은 제4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제까지의 혁명이 모두 인간의 삶을 위해 보다 더 많이 효과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서 사회를 어떻게 재조직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 혁명이라면 제4혁명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생산해 낼 사회를 만들기 위한 혁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태계의 위기와 위협의 문명 속에서 인류가 각성하고, 학문과 정치가 반성해야하고, 특히 종교와 신학이 깊이 생각하여서 사고와 삶의 형태를 제4의 혁명의식으로 만들어 나가야만 할 때라는 것을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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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 창세기 삶은 역전될 수 있다 창50:15-21  조용기 목사  2008-05-30 2487
834 창세기 죽음 준비 창48:17-19  민영진 목사  2008-05-29 2163
833 창세기 주어진 삶과 주장하는 삶 창22:15-19  조용기 목사  2008-05-28 2002
832 창세기 하나님 은총의 두 빛깔 - 녹색과 적색 창9:1-7  이정배 목사  2008-05-16 3597
831 창세기 우리 이름을 내고 창11:1-9  조용기 목사  2008-04-18 2253
830 창세기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의 긴장관계 창3:6-7  최만자 자매  2008-04-18 1992
829 창세기 낯선 자 창15:12-21  서중석 목사  2008-03-10 1879
828 창세기 칠년 풍년, 칠년 흉년 창41:1-8  최만자 자매  2008-03-10 1722
827 창세기 사랑의 연대 창45:5  서창원 목사  2008-02-15 1737
826 창세기 요셉의 길, 생명의 길 창45:5  박동현 목사  2008-02-15 2141
825 창세기 두 가지 사명 창1:28-2:3  강보형 목사  2008-01-24 1999
824 창세기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 창1:31  한완상 형제  2008-01-13 2272
823 창세기 열명만 있어도 창18:32-33  손운산 목사  2008-01-10 2269
822 창세기 기도로 승리한 야곱 창32:24-32  강종수 목사  2008-01-06 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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