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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사이에서

창세기 최만자............... 조회 수 1714 추천 수 0 2008.06.17 07: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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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19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삶을 가진 인생에게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아직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숨쉬는 우리 모두가 겪는 삶과 죽음, 곧 이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생각은 우리가 가까운 이를 죽음으로 잃게 될 때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가슴을 아직도 아리게 하는 박현우군의 장사를 치른 지 오래지 않은 지난 5월 21일 저는 또 한 분의 장례를 주관하는 책임을 맡아 장사를 치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삶과 죽음의 주제를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로 이 문제를 실존적 존재의 본질론적 이해로 규명하여 내는 것은 이미 동서고금의 종교적 진리들이, 그리고 위대한 성현들과 지혜자들이 그 대답을 갖가지로 던져 주었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현실적 사실만은 확실하게 확인되었고, 그 이상은 다양한 대답들이 던져진 채로 있다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실존의 본질을 규명해 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최근에 제가 읽은 한 책의 내용이 우연하게도 지난 21일 돌아가신 분의 경우와 유사하였습니다. 질병을 가진 그들이 투병과정에서 다양하고 성숙하게 죽음을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 책을 통하여 〈죽음을 대면하는 바로 그 순간들〉이 주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오늘 여러분들과 그 책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생각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21일 돌아가신 분에 대하여 몇 말씀 드리고 싶은데, 양해를 바랍니다. 그분은 이선애 목사님으로 아마도 우리 교우들 가운데 한 두 분은 그분을 아는 이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소뇌가 점차로 축소되면서 전신이 서서히 마비되어오는 매우 희귀한 병을 앓았습니다. 거의 8년 전에 발병하였는데, 처음에는 신체의 일부기능이 마비되기 시작하였고, 5년 전부터는 거의 전신을 쓰지 못하고 눈빛이나 손짓 혹은 약간의 소리의 전달로 의사소통을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연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여성이었는데, WCC에서 일했고 또 CCA 총무를 지낸 남편의 임지를 따라 사느라고 자기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여성의 삶이 주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지냈습니다. 한곳에 정착하여 자신의 할 일을 찾고 뿌리를 내리려 하면 남편이 또 다른 임지로 떠나게 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늘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CCA총무가 되어 싱가포르에 거주하게 되었을 때 약간의 안정을 얻어 아시아 지역의 여성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많은 일을 하였고, 특히 In God's Image(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계간지를 출판하여 침묵과 복종으로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던 아시아 여성들로 하여금 자기 이야기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큰 일을 하였던 분입니다. 한평생 여자로서의 한을 품고서 여성을 위해서 산 아내가 죽자 그 남편 되는 박목사님은 여성들이 나서서 장례를 치러 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그에 우리 여성신학인들은 모든 순서를 여성들이 맡아서 〈여성신학단체장〉으로 장례를 치러드렸습니다. 장례에 참여한 모든 분들이 여성들이 진행하는 의식을 매우 자연스럽게 따르는 분위기를 느꼈는데, 이는 고인의 생전의 뜻을 모두 잘 이해하셨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제가 오늘 특별히 그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가 아시아 여성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는데 별로 알려지지 않아 약간의 소개를 드리는 의미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앞에 말씀드렸듯이 최근에 읽은 한 책의 내용이 그 목사님의 오랜 투병기간 동안의 경험과 유사하며, 그래서 그 책과 그분의 경험을 통하여 〈죽음을 대면하는 바로 그 순간〉들이 주는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그 책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제목인데, 불치의 병이 든 스승 모리와 그의 투병 중에도 마지막까지 계속된 강의에 참여한 한 제자 사이에서 서로 주고받은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을 그려 놓은 책이었습니다. 이 모리 교수의 병은 루게릭 병이라고 알려진 근육 위축성 측색 경화증으로, 척추신경 또는 간뇌의 운동세포가 서서히 지속적으로 파괴되어 이 세포의 지배를 받는 근육이 위축되고,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원인 불명의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리 교수는 점차로 굳어져 가는 자신의 몸을 의식하면서도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강의를 계속하였고, 최후에는 그의 집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참석한 제자가 바로 이 책을 쓴 저자 미치 앨봄 이었으며, 그는 열네번의 화요일마다 가진 스승과의 강의시간 때 대화와 몸놀림과 투병 중의 그의 모든 사고들을 기록하였고, 이를 스승과 합의하에 책으로 낸 것입니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의 투병하는 삶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 사이(between life and death)의 투쟁일 것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이들은 무엇을 먼저 생각할까?, 존재의 의미를 어디에다 둘까?, 인간이 그 극한적 상황에서 생각하게 되는 일들은 무엇일까?, 과연 생을 어떻게 포기 할 수 있을까? 등등 그 상황에 대한 우리들의 두려운 궁금증은 사실 큽니다.
모리 교수가 의사의 선고를 받고 처음 병원 밖을 나왔을 때 그의 충격은 너무나 커서 그는 "세상이 멈춰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저 사람들은 내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을까?"라고 절망의 느낌을 가졌지만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것에 분노하였다고 책은 표현합니다. 그러나 모리 교수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 곧 죽음 앞에 있는 상황을 사람들에게 연구하도록 하였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천천히 생명이 삭으러 드는 자신을 연구하라고 내어 맡겼습니다. 그는 죽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토론하는 모임을 운영하였고,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죽음을 얼마나 겁내는가에 대해 토론했으며, '죽어간다는 말이 쓸모없다란 말과 동의어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상황이 인생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선 사람은 모두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고, 늘 그것을 준비하면서 살면 삶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모리 교수의 말을 빌리면 "모두들 죽게 되리란 사실을 누구나 알지만 자기가 죽는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면으로는 사람들이 죽으리란 걸 미리 안다면 언제든 죽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둘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는 동안 자기 삶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모리 교수가 이렇게 말하여도 제자 미치 앨봄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가 궁금하여 이를 스승에게 질문합니다. 교수는 죽음의 준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하게, 매일 어깨 위에 작은 새를 올려놓는 거야, 그리곤 새에게 오늘이 그날인가?, 나는 준비가 되었나?, 나는 해야 할 일들을 다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나? 라고 묻지" 라고 답합니다. 즉 매일 매순간을 마지막일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제자는 죽음 앞에 살고 있는 스승의 생각이 궁금하기 그지없어 자꾸만 질문을 합니다. "아는 사람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경험은 누구나 있는데 자기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음과 직면하면 모든 게 변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선생은 "모든 것을 다 벗기고, 결국 핵심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자기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매사가 아주 다르게 보이네" 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저는 먼저 우리가 정말 모두 죽게 될 존재인데 자기 죽음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하게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3:19절은 이 사실을 명백하게 알려주는 기독교 경전의 말씀인데도 우리는 결국 성서의 진리도 평소 의식하지 않고 사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성서 구절에 대한 주석적 해석을 덧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성서도 명백하게 인간은 가사적(可死的)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7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학자들은 이 2:7에서 흙을 빚어 창조된 인간은 남자 하나가 아니라 남녀가 하나로 된 양성구유적 존재라고 하면서 그 근거들을 제시합니다. 히브리어 '하 아담' 은 〈그 사람〉인데 사람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고, 나중에 남자와 여자로 구분될 때는 히브리어 이쉬(ishi남자)와 잇샤(isha여자)로 불려 집니다. 이 뜻은 결국 남녀 인간 모두가 흙에서 온 존재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2∼3장은 실로 흙을 주제로 하여 엮어진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2장 처음에 하나님이 〈흙〉을 경작할 인간이 없어서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으나, 그의 타락으로 징계를 내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흙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인 인간은 그 자신이 바로 자연의 일부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해석을 하게 되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비록 차이가 있을지라도 인간 그 자체가 자연의 일부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적임을 말해 줍니다. 즉 자연으로부터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요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존재의 형태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면 지금의 삶을 훨씬 의미 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리 교수는 말합니다. 즉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인생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살게 된다" 고 표현합니다. 선생은 "모든 것을 다 벗기고, 결국 핵심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자기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매사가 아주 다르게 보이네" 라고 답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을 읽으면서 저는 참으로 가사적 존재인 우리인데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많은 것들을 놓치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잡는데 그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가사적 존재인 우리가 인생의 가장 핵심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아마도 우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서 보게 될 때 가장 확실하게 보이고, 알게 되고,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핵심은 무엇일까' 를 묻게 됩니다. 이 교수와 제자의 대화에서는 인생의 핵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병이 호전 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니까 제자가 질문하기를 "만일 병이 낫는다면 옛날의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라고. 그러나 스승은 돌아 갈래야 돌아갈 수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이제는 인생에서 무엇이 핵심인지를 자신이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미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태도도 바뀌었고, 내 육체를 보는 시각도 바뀌었고, 궁극적인 질문을 해결하려 고군분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코 옛날의 사람으로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그렇게 까지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자 스승은 "사랑과 책임감, 영혼, 인식과 관련된 것들"이라면서 지금 자신이 다시 건강한 사람이 되더라도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자신의 주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쭉 그랬어야 했는데 과거에는 그런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에서 저는 정확하게 이분이 가장 중요한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잘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더 확실하게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엇일까'를 알려고 만일 24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겠는가고 물었을 때 한 그의 답을 통하여 짐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운동하고, 스위트 롤빵과 차로 멋진 아침 식사를 하고, 수영하러 가고, 친구들과 만나고, 서로의 소중함을 알고, 정원에 가서 나무와 새를 보고, 자연에 묻히겠네, 저녁에 식당에서 오리 고기를 먹고, 지칠 때까지 춤을 추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에 제자는 약간 실망을 느꼈는데 그는 대통령을 만나거나 이태리에 가는 등 이색적인 일을 말할 것으로 기대하였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루의 의미를 최대의 가치로 결정하고 있는 이 병든 교수의 말은 우리에게 새삼 삶에 대한 의미를 느끼게 해줍니다. 아마도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휠체어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에게 자유로운 걸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평범한 하루! 한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인생의 핵심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한 하루를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걷고 일하고 웃고 우는 것 그것이 생이요 생명일 것입니다. 이 일상적 하루를 의미 없이 생각하고 원대한 내일만을 향하는 것은 생명의 핵심과 부딪히지 않았을 때 가지는 생각일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생을 소중하게 의미 있게 가지는 것이 생과 사의 사이를 경험한 사람의 큰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하루하루를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라고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탐욕과 갈등과 미움과 시기와 경쟁으로 얽혀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관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기고 소유하고 승리하여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물러서지 않고 미움과 투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가 얽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모든 것이 포기 될 수 있을 것이며, 누구와도 새로운 관계를 형성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상적 삶의 소중함은 일상적 관계의 소중함과 일치되며, 일상적 관계를 아름답게 할 수 있는 힘이 거기서 생길 것이고, 일상적 관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인간 삶의 핵심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생과 사의 사이에서 가지게 되는 태도는 이 상황에서는 종말론적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특별한 인상을 받은 것은 그가 미리 해 본 그의 장례식이었습니다. 모리 교수의 질병이 서서히 깊게 진행되고 있을 때 대학에서 함께 가르치던 동료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자 그는 그 장례식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친구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죽은 친구에게 너무나 멋진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런 부질없는 일이 어디 있나. 이 친구가 듣고 기뻐할 이 좋은 이야기들을 모두 해주건만 정작 들어야 할 주인공인 친구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하는 모순이 아닌가"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엉뚱한 발상으로 일을 꾸몄습니다. 전화 몇 통을 건 후 날짜를 잡고 어느 추운 일요일 오후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을 모아 놓고 '살아 있는 장례식'을 치른 것입니다. 각자 멋진 말을 했고, 모리 교수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어떤 이들은 울었고, 몇몇은 웃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마지막이 되기 전에 듣고 싶은 말들을 모두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내는 이들도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전했습니다.
지금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살 때 우리는 보다 순수하고 진실해 질 것입니다. 죽음과 삶 사이에서 죽음보다는 오히려 진정한 삶을 확인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저는 이 모리 교수의 미리 한 장례식이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모리 교수가 죽음과 관련하여 그의 제자에게 전해주는 아름다운 말들을 여기에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들을 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고 소란을 떠는 것은 우리를 자연의 일부로 보지 않기 때문이지. 인간이 자연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우리가 가졌던 사랑의 감정을 기억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진짜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고 죽을 수 있다네. 자네가 가꾼 모든 사랑이 거기 그 안에 그대로 있고 모든 기억이 여전히 거기 고스란히 남아 있네. 자네는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어. 자네가 여기 있는 동안 만지고 보듬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네-- 라고." 그리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말할 때는 마치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인양 관심을 기울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일 따윈 없다는 것도"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종말론적으로 산다는 것은 지금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사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앞당겨 사는 보다 한 차원 다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과 사 사이에서 사는 경험은 이런 의미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너무 무거운 주제로 또 성서 보다 다른 한 책에 치우쳐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제 성서의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려는데 성서는 비록 인간을 가사적 존재로 밝히고 있지만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존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힌두교의 환생과는 다르지만 사후의 불멸에 대한 사상이 없지는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람이 죽어 스올로 가는데 죽은 이들이 모여 함께 사는 지하의 곳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이해는 그 스올이건 하늘이건 모든 우주의 지배가 하나님의 능력과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이며 인간의 생과 사도 그분의 주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가 마른풀 같이 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 우주적 능력 안에서 생명의 부활도 가능하게 된다는 부활신앙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즉 성서는 죽음에 대하여 그 자체에 비중을 크게 두지도 않으며,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목숨의 여부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된 현실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여부가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요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자유 하는 길은 하나님과의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며 생과 사 모두가 하나님의 주관 안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삶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 히브리적 사고입니다. 그분에게 앞날을 맡기고 그를 믿으라는 시편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삶과 죽음사이에서 인생을 다시 생각한 이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이들은 결코 죽음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죽음과 삶의 사이에서 (between life and death) 이들은 삶과 죽음 모두를 넘나들며 지내고 있습니다. 투병의 고통도 적나라하게 묘사됨은 물론이요, 어린 시절로부터 가족, 감정, 나이 드는 두려움, 돈 문제, 결혼, 문화, 용서, 그리고 죽음, 작별, 장례식 등에 이르기까지 투병기간은 삶과 죽음 전부를 하나로 엮어 넘나드는 시간이면서 그 양면의 의미를 모두 새롭고 깊게 구성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을 그렇게 생과 사의 종말론적 갈림길에 선 자세로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죽을 존재라는 것과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들을 놓치지 않으며, 혹 잘못된 관계들을 온전하게 회복하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을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생을 다시 돌아보고 믿음을 다시 생각해 보고 사랑의 관계를 늘 새롭게 만들어 보려는 노력을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는 죽음 앞에서 가지게 되는 자연스럽고 의미 있는 태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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