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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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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노은기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5. 9.18 주일설교 |
본문의 말씀을 현대어 성경으로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복을 내리셨다. “딸 아들 많이 낳아 그 후손들이 온 땅에 퍼져라. 땅을 정복하여라. 내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와 땅 위에 기어다니는 온갖 짐승들을 다스릴 권한을 너희에게 주마. 너희는 그것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여라.”
〈창세기 1:28, 현대어 성경〉
우리 교회에서 말씀증거 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저는 말씀증거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제가 무엇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배위원장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생각보다 무척 떨리고, 입이 잘 떨어지지 아니하네요. 그래서 평소에 제가 흥얼거리던 찬송 하나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 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 새 -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 -위시요 나의 방패시라.
후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2. 나의 생명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의지 -시라
주는 나를 이끄시어 주의 길 인도 하시며
나의 생애 목자 되시니 내가 따르리라.
저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죽음의 고비를 두 번 넘었습니다. 그렇다고 전쟁터에 나가서 전쟁을 하다가 사선을 넘은 것은 아니고요. 첫 번째는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뇌염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저희 부모님과 친척들은 죽은 저를 버리기 위해 리어카를 준비하여 저를 싣고 화장터로 가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사상태였겠죠. 진짜로 죽었으면 저는 여기에 있지 못하죠. 이런 지경에 이르기 까지, 저는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면서 사경을 헤매었는데, 그 순간 저는 지옥에 있었습니다.
시골방 한 가운데 누워있는데, 온 방안이 뱀들로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천장에도 구렁이가 기어 다니고, 벽에도 구렁이 독사 같은 것이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제가 눈을 뜨고 있는 데 뱀이 제 이불 속으로 슬슬 기어 들어오고, 천장에서 혀를 날름거리다, 툭 떨어져 저를 덮쳐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저는 소리를 막 질러 댔습니다. “아―악 엄마 뱀, 엄마 뱀!” 하면서 손으로 허공을 가르키면서 소리쳤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애야 뭐가 보인다고 그래. 야, 정신 차려 애가 열이 많으니까 헛소릴 다하는구나” 라고 하시면서, 저를 위로하시고 찬물로 수건을 적셔 저의 이마에 얹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주 도립병원에 입원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린 저는 아 지옥이라는 것이 참말로 있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 기억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는 주님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지옥에만은 안 갈려고요. 천당이 있는 것은 잘 모르지만 지옥은 분명히 있구나 생각했으니까요.
두 번째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은 수 년 전. 저는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진찰을 마치고 의사 선생님이 입원 의뢰서를 주시는데, 눈앞이 캄캄 했습니다. 대장암이라 하시면서 당장 입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 어릴 때 한 번 아픈 것 빼놓고는 생전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에게도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암 선고를 받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죽음의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내가 땅속에 묻혀 썩어지는 것이 너무나도 무섭고 소름 끼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내가 죽으면 사랑하는 가족들은 어떻게 되나 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가족들, 그 다음은 지금 내가 죽으면 이대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을까? 즉 천국에 갈 수 있으며, 영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후부터 저는 생명과 죽음, 영생과 천국, 믿음과 구원 등 여러 가지 신앙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는데, 과연 무엇을 어떻게 믿고 살았는가?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이 세상에 살면서 저만 잘 먹고 잘 사는데 급급하여 살아온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잘 먹고 잘 살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배타적이고 이원론적인 사고가 저의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성하고 지금부터라도 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야 할 텐데, 하면서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들을 만드시고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생물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마음대로 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잘 다스려라, 보기가 정말 좋다 하셨는데, 잘못 생각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며 정복하라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필요하다면 모든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정복자의 권리만을 행사 하려 했지, 하나님이 진짜 바라신 청지기로서의 의무와 사명은 잊은 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모든 생명을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저에게는 두 번의 죽음의 고비가 너무나도 크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죽음의 고비를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생명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작은 생명 하나도 소중하구나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작은 생명, 사는 이야기” 로 정하였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생명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부족하지만 잠깐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시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씨앗이 땅에 뿌려져 싹이 트고 자라며,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을 자주 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껴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암에 걸려 죽음의 고비를 맛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 후로부터 저는 신비하고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자주 생각합니다. 멍청하게 앉아서 왜 가느다란 풀 한 포기가 큰 나무가 될까? 왜 작은 싹 하나가 자라서 큰 결실이 맺어질까? 어떻게 무슨 작용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미미한 흙 속에서 생명들이 자라고 다음 생명인 씨앗이 나올까? 하는 것 등 이었습니다.
생물적인 생명체는 단백질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세포들은 세포의 기능에 필수적인 여러 종류의 단백질을 함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백질 분자들은 50-3000개 정도의 아미노산을 포함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생물체는 일생동안 계속해서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기 때문에, 모든 살아있는 세포는 계속적인 아미노산의 공급이 필요로 합니다. 녹색식물이나 박테리아 일부 세포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을 자체에서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의 세포와 같은 세포들은 단지 20종의 아미노산을 만들 수 있으므로 나머지는 음식물 속의 단백질로부터 섭취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존하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이러한 생물학적인 생명원리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생물이 태어나고 자라며 서로 도움의 과정을―즉, 아미노산, 단백질, 세포들이 어떻게 도와 생명을 이루는 것인지, 벌과 나비들이 꽃을 찾아 날아다니면서 수정을 왜 도와주는지, 바다에 가면 망둥어가 있는데, 망둥어나 낚지가 종의 번식을 위하여 스스로의 몸을 내어 놓는 다든지 하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신비롭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집 뒤에 나즈막한 산이 있는 데, 그 산 에다 닭을 풀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닭이 아무데나 돌아다니면서 알을 낳고, 그 알을 품어서 병아리가 태어납니다. 달걀 그 자체가 무슨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21일 동안 어미 닭이 품어주면, 생명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달걀 하나가 병아리로 탄생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 신기 합니다. 어미닭이 달걀을 품은 지 하루, 이틀이 지나면 실핏줄이 생기고, 머리 ,눈 심장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4~5일이 지나면 심장 박동을 하게 되고 혈액 순환을 시작하여 15일 정도가 지나면 머리, 몸통, 다리, 털 등이 모양을 갖추고 달걀 안에서 성장하여, 정확하게 21일이 지나면 달걀 속에서 병아리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옵니다. 어떻게 호흡도 하지 못하는 병아리가 달걀 안에서 껍질을 깨는 것인지? 이런 것을 볼 때에 정말 신기하고, 달걀 그 자체가 생명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저희 동네 앞에는 갯벌이 넓게 형성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조개나 고기를 잡으러 갯벌에 갑니다. 갯벌의 매끄러움과 그 냄새는 처음 느끼는 사람에게는 약간 역겨운 것도 없지 않지만, 그 속에 수백 종의 많은 생물들과 미생물들이 공생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갯벌은 어류 및 패류의 생산 및 서식지 기능을 갖고 있지만, 자연 정화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갯벌 1평방km에 들어있는 미생물이 오염 물질을 분해하는 능력은, 도시 하수처리장 한 개의 처리능력과 비슷하고, 500마리의 갯지렁이는 하루에 한 사람이 배출하는 약 2kg의 배설물량을 정화시킬 정도라고 합니다. 숭어와 조개들은 갯벌을 먹고 그 속에 들어있는 생물과 미생물들을 섭취하면서 자랍니다. 또한 흙 1kg에 박테리아 진균류 등 곤충에서 벌레에 이르기까지 다세포 생물이 많게는 5억 마리까지 있다고 합니다. 생명은 신학적으로 이야기 할 때 물리적인 삶만을 이야기 하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저는 갯벌 속에 들어 있는 미생물들이나 , 흙 속에 들어있는 유기체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유기체적인 미생물들은 생명이 아닐까요? 소홀히 하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생명들입니다.
저희 가족이 처음 새길교회를 찾았을 때에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겨울인데도 보슬비가 구슬프게 내렸습니다. 서울 지리도 잘 몰라 여기 저기 물어서, 경기고등학교 정문 앞, 청소년 회관 건물, 서울에서 보는 화려하고 웅장한 그런 교회에 비하면 초라한 건물, 그것도 외부에는 새길교회 간판 하나만 세워져 있고 교회라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젖어 들었습니다.
어느 교회이든 입구에 가면 각종 헌금 봉투가 이름표대로 쭉 꽂혀 있고 그 이름대로 헌금한 액수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들어 온 시간은 길을 찾느라 헤매는 바람에 조금 늦은 시간이라 말씀증거를 하고 계셨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 지금은 무슨 말씀인지 잘 생각이 안 납니다만 좌우튼 저의 가족 모두의 심금을 울렸던 것 같습니다 . 강도에게 쫓기어 도망 온 사람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저의 두 눈에는 눈물 방울이 맺혔습니다. 세상에나 이런 평안을 안겨주는 교회도 있구나. 이런 감동을 주는 교회도 있구나 했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가끔 진한 감동을 받을 때가 있는 데, 나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생명을 살리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설교 중에 감동을 받을 때에는 아멘 하면서 큰소리로 외치고 싶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분위기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경건하고 지성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데에는 감성적인 은사도 필요한데 말입니다.
우리교회는 삼무교회라고 소문이 나있지만, 사실은 사무 교회인지도 모릅니다. 아멘 잘 안하는 교회로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시골교회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서슴없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저 막연히 그러한 것이죠. 그러나 지금은 막연히가 아니고 확실히 그러합니다. 이것은 저의 진실이고, 신앙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기 전에 사람들의 몫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생물을 잘 관리하고, 다스려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기체적인 미생물들을 생명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도, 여러분의 몫입니다.
이제는 나의 생명을 귀히 여기어 살아가는 것만큼, 남의 생명도, 작은 생명 하나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렸듯이 우리도 나의 생명을 바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의 신앙고백적인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는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의 생명을 바쳐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사는 것이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부족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온 자연의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잘 다스려라 하셨으니, 생명을 이어가는 디딤돌로서의 가교 역할을 이뤄내는 저희들 되게 하소서.
부족한 저를 위하여 십자가 나무에 매달려 몸부림 쳤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들에게 이렇게 복을 내리셨다. “딸 아들 많이 낳아 그 후손들이 온 땅에 퍼져라. 땅을 정복하여라. 내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와 땅 위에 기어다니는 온갖 짐승들을 다스릴 권한을 너희에게 주마. 너희는 그것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여라.”
〈창세기 1:28, 현대어 성경〉
우리 교회에서 말씀증거 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저는 말씀증거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제가 무엇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배위원장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생각보다 무척 떨리고, 입이 잘 떨어지지 아니하네요. 그래서 평소에 제가 흥얼거리던 찬송 하나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 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 새 -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 -위시요 나의 방패시라.
후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2. 나의 생명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의지 -시라
주는 나를 이끄시어 주의 길 인도 하시며
나의 생애 목자 되시니 내가 따르리라.
저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죽음의 고비를 두 번 넘었습니다. 그렇다고 전쟁터에 나가서 전쟁을 하다가 사선을 넘은 것은 아니고요. 첫 번째는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뇌염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저희 부모님과 친척들은 죽은 저를 버리기 위해 리어카를 준비하여 저를 싣고 화장터로 가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사상태였겠죠. 진짜로 죽었으면 저는 여기에 있지 못하죠. 이런 지경에 이르기 까지, 저는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면서 사경을 헤매었는데, 그 순간 저는 지옥에 있었습니다.
시골방 한 가운데 누워있는데, 온 방안이 뱀들로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천장에도 구렁이가 기어 다니고, 벽에도 구렁이 독사 같은 것이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제가 눈을 뜨고 있는 데 뱀이 제 이불 속으로 슬슬 기어 들어오고, 천장에서 혀를 날름거리다, 툭 떨어져 저를 덮쳐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저는 소리를 막 질러 댔습니다. “아―악 엄마 뱀, 엄마 뱀!” 하면서 손으로 허공을 가르키면서 소리쳤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애야 뭐가 보인다고 그래. 야, 정신 차려 애가 열이 많으니까 헛소릴 다하는구나” 라고 하시면서, 저를 위로하시고 찬물로 수건을 적셔 저의 이마에 얹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주 도립병원에 입원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린 저는 아 지옥이라는 것이 참말로 있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 기억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는 주님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지옥에만은 안 갈려고요. 천당이 있는 것은 잘 모르지만 지옥은 분명히 있구나 생각했으니까요.
두 번째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은 수 년 전. 저는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진찰을 마치고 의사 선생님이 입원 의뢰서를 주시는데, 눈앞이 캄캄 했습니다. 대장암이라 하시면서 당장 입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 어릴 때 한 번 아픈 것 빼놓고는 생전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에게도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암 선고를 받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죽음의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내가 땅속에 묻혀 썩어지는 것이 너무나도 무섭고 소름 끼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내가 죽으면 사랑하는 가족들은 어떻게 되나 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가족들, 그 다음은 지금 내가 죽으면 이대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을까? 즉 천국에 갈 수 있으며, 영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후부터 저는 생명과 죽음, 영생과 천국, 믿음과 구원 등 여러 가지 신앙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는데, 과연 무엇을 어떻게 믿고 살았는가?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이 세상에 살면서 저만 잘 먹고 잘 사는데 급급하여 살아온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잘 먹고 잘 살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배타적이고 이원론적인 사고가 저의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성하고 지금부터라도 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야 할 텐데, 하면서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들을 만드시고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생물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마음대로 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잘 다스려라, 보기가 정말 좋다 하셨는데, 잘못 생각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며 정복하라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필요하다면 모든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정복자의 권리만을 행사 하려 했지, 하나님이 진짜 바라신 청지기로서의 의무와 사명은 잊은 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모든 생명을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저에게는 두 번의 죽음의 고비가 너무나도 크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죽음의 고비를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생명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작은 생명 하나도 소중하구나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작은 생명, 사는 이야기” 로 정하였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생명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부족하지만 잠깐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시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씨앗이 땅에 뿌려져 싹이 트고 자라며,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을 자주 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껴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암에 걸려 죽음의 고비를 맛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 후로부터 저는 신비하고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자주 생각합니다. 멍청하게 앉아서 왜 가느다란 풀 한 포기가 큰 나무가 될까? 왜 작은 싹 하나가 자라서 큰 결실이 맺어질까? 어떻게 무슨 작용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미미한 흙 속에서 생명들이 자라고 다음 생명인 씨앗이 나올까? 하는 것 등 이었습니다.
생물적인 생명체는 단백질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세포들은 세포의 기능에 필수적인 여러 종류의 단백질을 함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백질 분자들은 50-3000개 정도의 아미노산을 포함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생물체는 일생동안 계속해서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기 때문에, 모든 살아있는 세포는 계속적인 아미노산의 공급이 필요로 합니다. 녹색식물이나 박테리아 일부 세포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을 자체에서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의 세포와 같은 세포들은 단지 20종의 아미노산을 만들 수 있으므로 나머지는 음식물 속의 단백질로부터 섭취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존하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이러한 생물학적인 생명원리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생물이 태어나고 자라며 서로 도움의 과정을―즉, 아미노산, 단백질, 세포들이 어떻게 도와 생명을 이루는 것인지, 벌과 나비들이 꽃을 찾아 날아다니면서 수정을 왜 도와주는지, 바다에 가면 망둥어가 있는데, 망둥어나 낚지가 종의 번식을 위하여 스스로의 몸을 내어 놓는 다든지 하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신비롭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집 뒤에 나즈막한 산이 있는 데, 그 산 에다 닭을 풀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닭이 아무데나 돌아다니면서 알을 낳고, 그 알을 품어서 병아리가 태어납니다. 달걀 그 자체가 무슨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21일 동안 어미 닭이 품어주면, 생명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달걀 하나가 병아리로 탄생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 신기 합니다. 어미닭이 달걀을 품은 지 하루, 이틀이 지나면 실핏줄이 생기고, 머리 ,눈 심장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4~5일이 지나면 심장 박동을 하게 되고 혈액 순환을 시작하여 15일 정도가 지나면 머리, 몸통, 다리, 털 등이 모양을 갖추고 달걀 안에서 성장하여, 정확하게 21일이 지나면 달걀 속에서 병아리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옵니다. 어떻게 호흡도 하지 못하는 병아리가 달걀 안에서 껍질을 깨는 것인지? 이런 것을 볼 때에 정말 신기하고, 달걀 그 자체가 생명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저희 동네 앞에는 갯벌이 넓게 형성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조개나 고기를 잡으러 갯벌에 갑니다. 갯벌의 매끄러움과 그 냄새는 처음 느끼는 사람에게는 약간 역겨운 것도 없지 않지만, 그 속에 수백 종의 많은 생물들과 미생물들이 공생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갯벌은 어류 및 패류의 생산 및 서식지 기능을 갖고 있지만, 자연 정화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갯벌 1평방km에 들어있는 미생물이 오염 물질을 분해하는 능력은, 도시 하수처리장 한 개의 처리능력과 비슷하고, 500마리의 갯지렁이는 하루에 한 사람이 배출하는 약 2kg의 배설물량을 정화시킬 정도라고 합니다. 숭어와 조개들은 갯벌을 먹고 그 속에 들어있는 생물과 미생물들을 섭취하면서 자랍니다. 또한 흙 1kg에 박테리아 진균류 등 곤충에서 벌레에 이르기까지 다세포 생물이 많게는 5억 마리까지 있다고 합니다. 생명은 신학적으로 이야기 할 때 물리적인 삶만을 이야기 하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저는 갯벌 속에 들어 있는 미생물들이나 , 흙 속에 들어있는 유기체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유기체적인 미생물들은 생명이 아닐까요? 소홀히 하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생명들입니다.
저희 가족이 처음 새길교회를 찾았을 때에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겨울인데도 보슬비가 구슬프게 내렸습니다. 서울 지리도 잘 몰라 여기 저기 물어서, 경기고등학교 정문 앞, 청소년 회관 건물, 서울에서 보는 화려하고 웅장한 그런 교회에 비하면 초라한 건물, 그것도 외부에는 새길교회 간판 하나만 세워져 있고 교회라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젖어 들었습니다.
어느 교회이든 입구에 가면 각종 헌금 봉투가 이름표대로 쭉 꽂혀 있고 그 이름대로 헌금한 액수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들어 온 시간은 길을 찾느라 헤매는 바람에 조금 늦은 시간이라 말씀증거를 하고 계셨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 지금은 무슨 말씀인지 잘 생각이 안 납니다만 좌우튼 저의 가족 모두의 심금을 울렸던 것 같습니다 . 강도에게 쫓기어 도망 온 사람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저의 두 눈에는 눈물 방울이 맺혔습니다. 세상에나 이런 평안을 안겨주는 교회도 있구나. 이런 감동을 주는 교회도 있구나 했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가끔 진한 감동을 받을 때가 있는 데, 나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생명을 살리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설교 중에 감동을 받을 때에는 아멘 하면서 큰소리로 외치고 싶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분위기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경건하고 지성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데에는 감성적인 은사도 필요한데 말입니다.
우리교회는 삼무교회라고 소문이 나있지만, 사실은 사무 교회인지도 모릅니다. 아멘 잘 안하는 교회로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시골교회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서슴없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저 막연히 그러한 것이죠. 그러나 지금은 막연히가 아니고 확실히 그러합니다. 이것은 저의 진실이고, 신앙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기 전에 사람들의 몫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생물을 잘 관리하고, 다스려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기체적인 미생물들을 생명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도, 여러분의 몫입니다.
이제는 나의 생명을 귀히 여기어 살아가는 것만큼, 남의 생명도, 작은 생명 하나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렸듯이 우리도 나의 생명을 바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의 신앙고백적인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는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의 생명을 바쳐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사는 것이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부족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온 자연의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잘 다스려라 하셨으니, 생명을 이어가는 디딤돌로서의 가교 역할을 이뤄내는 저희들 되게 하소서.
부족한 저를 위하여 십자가 나무에 매달려 몸부림 쳤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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