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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나기

창세기 김은주............... 조회 수 1576 추천 수 0 2008.09.29 13: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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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1-9 
설교자 : 김은주 목사 
참고 : 미국 Iliff 신학대 교수, 설교학/새길교회 2006.11.19주일설교 
창세기 12:1~9; 히브리서 11:8~16, 12:1~3

김기동 자매님과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한지도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 되었군요. 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곧 미국으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길을 떠나, 신학생으로 9년, 목사로 3년, 그리고 신학교 교수로 8년째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국의 독특한 역사적, 사회 정치적 상황 속에 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란 듣는 모든 자들을?조국 땅이건 타국 땅이건 어디에 몸담고 살던? 나그네의 길로, 이민자의 삶으로 초대하는 초청장과 같구나.

아마도 이민신학의 기초를 이루는 성경이야기는 단연 창세기 12장에서 22장에 걸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민 온 동기들은 각기 다르지만, 고국을 떠나 말도 문화도 인종도 풍토도 다른 나라에 와서 잘 살아보겠다고 외로움과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고생하는 이민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 남은 여생을 타국에서 살다가 타국에 뼈를 묻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집을 떠나 내가 지시 할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리라. … 너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끼치는 자가 될 것이다. … 땅의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개역한글 창세기 12:1~3).

이 믿기 어렵도록 놀랍고 엄청난 약속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얼마나 가슴이 벅차고 온몸이 전율하도록 두렵고 떨렸을까? 아쉽게도, 성서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 약속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 생략합니다. 단지,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공동번역 창세기 12:1)에 한 치의 미련도 두지 않고 길을 떠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조카 롯, 그리고 하인들과 가산을 챙겨, 아직 분명한 목적지도 모르는 채,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묵묵히 길을 떠납니다. 일가친척과 송별회는 했는지, 금의환향할 날을 기약했는지, 아브라함 당시는 엄격한 가부장적 사회구조였을 테니, 아내가 길 떠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을 것 같지는 않고….

언뜻 보기엔 계획 없이 맹목적으로 영감을 따라 사는 자 같습니다. 그러나 먼, 먼 후대의 자손인 신약성서의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선조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의 증인이라 칭송합니다. 원하면 언제든지 고향에 돌아갈 수도 있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고 길을 떠나, 끝까지 순례자, 나그네의 길을 간 아브라함. 그의 인생이 타국에 나가 사는 이민자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믿는 자들의 삶의 자세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길 떠나기…. 뭔가 확실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익숙해져 온 모든 것들?전통과 관습과 언어와 생활양식, 그리고 가치관을 비워야 합니다. 결단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인내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뭔가 나의 한계를 초월해 존재하는, 나를 인도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을 느낄 때, 마음 속 깊은 데서 울려오는, 기대치 않았던 분명한 음성을 들었을 때, 우리는 과거의 인생에 전혀 미련을 두지 않고 그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길 떠난 아브라함의 여정을 생각해 봅니다. 방년 75세의 나이에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시겠다는 약속에 가슴 부풀어 떠난 길인데, 그런데, 어언 100여 년간 걸어 온 나그네의 길을 돌이켜 보면, 그 길은 걷기에 결코 평탄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해 뜨는 동편의 아름다운 고향 땅을 떠나 수만 리 길을 걸어, 오늘 이곳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매일매일이 길 떠나기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기근을 피해, 분쟁을 피해, 벧엘에서 세겜으로, 애굽으로, 헤브론으로, 그랄, 브엘세바, 기럇아르바로… 이리 저리 거처를 옮겨다니며 나그네의 길을 가던 중, 재산과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두 번이나 빼앗길 뻔한 위험도 있었습니다. 자신을 따라 고향을 떠나 온 조카 롯이 소돔 땅에서 죽을 뻔도 했습니다. 사라의 미움을 산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날 때 아비로서 지켜만 봐야 했던 가슴 아픈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사라가 늦둥이 이삭을 낳았을 때일 겁니다. 그 순간이 가장 기뻤던 만큼, 이삭을 재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을 오르던 때가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이었을 겁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이런 위험을 당할 때마다, 혹시 자기가 들은 여화와의 음성이 환영이 아니었나 의심하지 않았을까? 길 떠나기로 작심한 본인이 어리석었다고 한탄하지는 않았을까? 떠나기 전에 좀 더 확실하게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여호와께 묻고 협상을 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종교심리학적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의 나그네 여정이 이런 고난을 통해 얼마나 풍성한 삶이 되었는지를 말하는데 주력합니다.

서거를 얼마 앞 둔 노년의 아브라함을 상상해 봅니다: 평생의 길 동무였던 사랑하는 아내 사라는 세상을 뜬 지 오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씨앗인 늦둥이 이삭은 혼인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어느 한 여름 밤, 초저녁잠을 한 숨 잔 뒤 뒤치락대다 천막 밖으로 나온 아브라함이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깜깜한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던 아브라함이 문득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아브라함아, 하늘을 보라. 수많은 별들을 다 셀 수 있겠느냐?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번성하리라(개역한글 창세기 15:5). … 내가 너를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고 … 너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끼치는 자가 될 것이다(창세기 12:2).”  

이제 노쇠하여 죽음을 앞둔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성에 대한 약속은 여전히 이루어져야 할 고귀한 미래의 약속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아브라함은 자기의 기나긴 나그네의 여정에서 그가 받은 하나님의 축복을 세기 시작합니다.  

별 하나에 축복 하나…….
고향 땅을 미련 없이 떠나온 이후,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자기 앞에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 담대하게 자신을 열어놓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을 믿기에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라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한 일, 롯을 살린 일, 이스마엘과 하갈이 동녘 땅에서 무사히 잘 살고 있는 일,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마다 전화위복이 되어 재산을 늘린 일, 번제로 바치려 했던 이삭이 살아서 대를 이어가고 있는 일, 가나안 땅에 사는 다른 종족들에게 존경받으며, 분쟁 없이 평화롭게 사는 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지혜와 용기, 돌보심과 사랑, 한없는 은혜와 인자하심은 밤하늘의 뭇 별들만큼이나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저는 감히 아브라함에 비유할 수는 없지만, 밤하늘의 별을 헤이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아브라함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길 떠난 지 20년 만에 안식년을 갖게 되어 처음으로 4개월간 한국에 장기체류를 하면서 그리웠던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이민생활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프린스톤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치고 덴버로 이사 간 후  7년 동안 프린스톤 근처도 지나가기 싫었습니다. 목회학 석사과정 이년 때에 첫아기를 낳아 그 애를 데리고 한 시간 반 씩 운전하며 뉴욕 브롱스에 위치한 한인교회를 매주일 오가며 전도사 생활을 할 때, 너무 힘들어 공부를 그만둘 생각도 했습니다. 빨간불 신호등에 서 있던 제 차를 갑자기 발작이 난 간질병 환자가 운전하던 차가 순식간에 달려와 박는 바람에 다쳐서 일 년간 공부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제 사고를 전해들은 이화대학 다닐 때 지도교수였던 장상 선생님께서, “김은주도 이젠 끝이구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석사를 마치고 미국장로교의 목사시험과 모든 관문을 다 통과해서 자격을 모두 갖추었건만, 한인교회 중 어디도 저를 여자라는 이유로 목사로 청빙을 안 했을 때입니다. 주위의 여러 사람이 조언하길, 교단을 call system이 아닌 appointment system을 쓰는 미국연합감리교로 바꾸라고 했습니다. 혹은, 한인교회만 말고 백인교회나 기관목사 자리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인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당시 300여 개에 달하는 미국장로교에 속한 한인교회에서 여자인 저를 목사로 불러 주기를 기도했고, 목사자격을 갖춘 지 5년 만에, 제가 박사과정을 마치던 해에, 극적으로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Asian으론 최초로 설교학 박사과정에 입학이 되자, 한국의 유명한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던 교수님이 저를 찾아와, 프린스톤 신학교가 한국 남자가 아닌 여자를 설교학 분야에 뽑은 것은 한국교회의 상황을 모르고 저지른 대 실수라고 제게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지금, 그 분이 창립한 한국설교학회에서 제게 설교학을 어떻게 가르치는지에 대한 주제강연을 부탁해서 열흘 전에 다녀왔습니다. 지난주에는, 그 분이 몸담고 있던 학교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여학생들의 초청으로, 전체 학생과 교수들이 모인 학교 chapel에서 설교도 하고, 설교에 대한 담론도 나누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로 차 있는 미국 신학교에서 소수인종으로 백인 학교에서 교수일을 하는 건, 어렵기도 하지만, 특별한 사명감을 일깨워 줍니다. 몇 년 전, 미국 감리교 교단에 속해있는 저의 학교에서 총장을 쫒아 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집안이 4대째 100여 년이 넘게 미국에서 살고 있는 Hispanic계 미국인이었고, 백인우월주의에 빠져있는 몇몇 교수들과 학장의 농간으로 사직을 강요당했습니다. 24명의 교수가 모두 침묵을 지키는 데, 저만 단독으로 이사회의 결정이 인종차별주의에 기초한 잘못된 것임을 밝히는 성명서를 이사회 전원에게 보냈습니다.  

그 일로 신문에 제 이름이 오르내리고 학장에게 협박과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학교가 잘못을 인정하고 쫓겨난 총장에게 물질적, 사회적 보상을 해 주고 모든 학교의 curriculum을 racism을 타파하는 것으로 바꾸는 개혁을 지금까지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학장은 사임을 했습니다.

20년 전 한국을 떠나올 때를 생각해 봅니다. 길 떠날 때, 제 마음속에 분명했던 것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런 “믿기 어렵도록 놀랍고 엄청난” 축복의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던 열정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가 뭔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이런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졌던 그 진리에 대한 열정이 바로 아브라함이 받았던 축복의 말씀과 진배없음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깨우치고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는 자가 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임을, 모든 민족이 나를 통해 복을 받게 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힘들었던 순간들을 구체적으로 기억 해 보면, 그 때마다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제가 알게 모르게 저와 함께하셨습니다. 특별히 어렵고 힘들어 번뇌하고 고민할 때, 저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용기와 인내를 내려 주셨습니다. 나그네의 길이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이 아님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함께 길 떠난 남편과 이민교회에서 만난, 우리보다 먼저 길 떠나온 믿음의 형제자매들, 인종은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격려하며 소수인종으로의 어려움을 겪으며, 나그네의 길을 함께 가는 흑인과 히스패닉 동료들, 백인으로서 누리는 모든 특권과 해택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기회가 되는대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소수인종의 편에 서서 그들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의식 있는 백인 친구들. 이들 모두가 진리를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는 일을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믿음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저에게 복을 끼치는, 구름처럼 저를 둘러싸고 있는 믿음의 증인들을 통해, 저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힘든 가운데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앞만 보고 꾸준히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New Jersey에 살 때 함께 교회 다니던 집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분은 홀어머니와 단 둘이 제주도에 사셨는데, 35년 전 유학생으로 고향을 떠나오신 후, 언제나 마음속으로 “내 고향은 제주도, 우리 어머니가 계신 제주도”라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연로하셔서 돌아가신 후, 그때부터 생각하기를, “내 고향은 미국,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이 있는 미국”이라고 생각을 바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하버드 법대에서 국제법을 전공하고 Washington D.C.에서 변호사 일을 하던,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럽던 아들이 갑자기 암으로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그분은 이 땅에 미련을 버리고 먼 훗날,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들을 다시 만날 때 까지, “내 고향은 하나님이 계신 곳, 어디든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는 곳”이라 생각하며 산다고 하셨습니다.

길 떠나기…. 귀소본능이 있는 우리 인간에겐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먹어 온 음식이 맛있고, 지금까지 길들여진 생활 습관이 편하고, 써 온 언어가 익숙하고, 하던 일이 쉽고, 다니던 교회가 전통적 가부장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할지라도 익숙해 있으니 그냥 다닙니다. 우리의 삶의 변화를 위하여, 우리의 믿음의 성숙을 위하여,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하여, 한국사회의 정의와 평화 구현을 위하여,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방문기간 중에 그런 분들을 만났습니다. 한국에 살지만, 고향 땅에 살지만 이 땅에서 길 떠나는 사람들로, 나그네로 사는, 많은 믿음의 증거자들을 만났습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맞이하여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 살기로 작정한, 새 길을 떠나는 아름다운 분들,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며 준비하는, 길 떠날 채비를 하는 용기있는 젊은이들, 정의사회를 꿈꾸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는, 이 땅의 굽은 길들을 평탄케 하는 예언자적인 일들을 사회 각처에 흩어져서 하고 계신 훌륭하신 선후배님들, 참된 교회의 이미지를 실현하고자 세상의 유혹과 싸우며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꾸준히 가고 있는 존경하는 목사님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새길교회 성도님들.

이 모든 길 떠나는 분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인도하실까 하는 호기심과 설레임일 것입니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새 길을 가는 것은 불안합니다. 그러나, 이미 전에 구름같이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이 길을 걸어갔음을 알고 새로운 각오로 용기있게 도전합니다. 나만이 타박타박 외롭게 걷는 길인 줄 알았는데, 함께 걷는 믿음의 동료들을 발견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며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 즐겁기만 합니다.

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은 “네 자손이, 네 믿음의 자손이, 밤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많아지리라”는 그 약속의 말씀을 이루는데 이 세상에서 여러 모습으로 새 길을 떠나는 믿음의 형제자매님들과, 이 자리에 모인 저와 여러분들이 동참하고 있음을 새삼 느낍니다.
우리를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별이 되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는 자가 되도록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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