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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으로의 귀환

창세기 한세희............... 조회 수 1447 추천 수 0 2008.10.26 23: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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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1-5 
설교자 : 한세희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7.4.15주일설교 
창세기 1:1-5, 2:8-9, 2:19

올해는 황금돼지 띠의 해라고 해서 출산율이 다소 상승할 것으로 기대됩니다만,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에는 가구당 평균 6명 정도를 낳았는데 이제는 겨우 1명을 조금 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요인 때문도 아니고 자발적인 출산의 회피라는 점에서 그 문제의 심각성이 큽니다.

아이 갖는 것을 꺼리는 표면적 이유는 주로 경제적인 것입니다. 조기퇴직 등으로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진 데다가 주택 마련과 노후대책 등을 고려해 볼 때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여가며 자녀를 기를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언가 심각한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려는 아이에게 “얘야, 미안하다, 아무래도 이 세상은 네게 추천할 만한 곳이 못 되는 것 같구나” 하며 달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절대빈곤을 극복하며 강인하게 살아 온 우리 구세대들이 보기에 국민소득 2만불의 풍요 속에서 살고 있는 요즘 세대의 위기의식은 엄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절대빈곤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상대빈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극에 달한 물질주의와 성공제일주의, 그리고 온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는 무한경쟁체제 하에서 겪게 되는 소외감과,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되며 언제 낙오자로 전락할지 모르는 위험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절망감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은 갈수록 깊어지며 범세계적 대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선진국일수록 더 자살률이 높은데 우리나라는 OECD국가들 중에서 3년째 자살률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산업화, 근대화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꿈,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적 진보를 이루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 여겼던 소박한 꿈은 여지없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에 비하면 이런 문제들은 오히려 행복한 고민처럼 보입니다. 남극,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4월에 피던 꽃이 3월에 피고, 남해의 어종이 동해에서 잡히고, 지구 곳곳에 한발과 홍수와 폭풍으로 피해가 속출하는데도, 죽어가는 자연이 내뱉는 외마디소리에 우리는 귀를 틀어막고 딴전을 피우고 있습니다. 인류가 지구에 가한 착취와 횡포는 이제 그 수용범위를 넘어선 것이 분명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 결말의 서곡을 듣고 있고, 우리 중 어떤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우리 자녀들과 손자들이 그 비극적 결말의 직접적 당사자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무언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인류는 어쩌다가 사태를 여기까지 몰고 온 것일까요?

구약성서에 의하면 불행의 시작은 에덴동산에서 일어납니다. 에덴이라는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던 최초의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바람에 에덴 밖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인류는 불행의 숙명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일어난 일들을 성서의 기록을 근거로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1-2장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6일 만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십니다. 그러나 그 6일이 실제로는 무척 긴 시간이었습니다. 맨 첫날 빛을 창조하신 때부터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실 때까지 실제로 걸린 시간은 약 150억에서 200억 년에 해당된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추정입니다. 그리고, 화석을 분석해 추정한 지구의 역사는 대략 45억5천만 년 가량 된다고 합니다. 지구에 에너지를 공급하여 나머지 창조과정, 즉 각종 생물과 인간의 창조를 완성시킨 것은 햇빛이었습니다. 공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햇빛으로 광합성을 하는 식물들은 탄수화물의 형태로 그 몸 속에 햇빛을 저장하였다가 그 식물을 먹는 동물들에게 햇빛을 전달해 줍니다. 미국의 톰 하트만이라는 학자는 그런 의미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햇빛을 먹고 살고, 햇빛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현생인류의 기원을 어느 시점으로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만 년 전에서 몇 십만 년 전까지로 오차 범위가 넓은 것 같은데, 톰 하트만은 20만 년 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6일간의 천지창조는 수백억 년 간의 우주 생성과정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같은 인명들 역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보다 큰 범주의 인류 혹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4장의 기록에 의하면 가인은 농경정착민을, 그리고 아벨은 유목민을 각각 대표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동생인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더 선호하시는 것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는 장면에서, 유목민들이 일시적으로는 더 우세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농경정착민에게 제압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의 갈등은 그 후에도 훈족의 대이동과 징기스칸 시대와 같이 역사를 통틀어 수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아담 역시 에덴 시절을 살았던, 오랜 기간 동안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1장 29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 안의 모든 “씨 맺는 식물과 열매 맺는 나무”를 먹거리로 주십니다. 동물까지도 먹거리로 주시는 것은 9장 3절에 가서야 나오는데, 대홍수 이후 노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에덴에서의 인류의 삶의 방식은 수렵채취였지만 사냥보다도 채식이 중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에덴에서 추방당한 후부터 농사와 목축에 의존하게 되는데, 당시의 농사는 땅이 곡식과 야채 대신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낼 정도로”(3:18)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농사를 더 쉽게 짓게 된 것은 가축과 노예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즉 강제로 남의 햇빛을 뺏어다 쓴 후부터입니다.

성서의 내용이 워낙 간단해서 언뜻 보면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악과를 따먹고 추방당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류가 체계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는 시점인 7천 년 전을 기준점으로 삼을 경우, 그보다 몇 배 혹은 몇 십 배 더 기간을 에덴에서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인류의 기원이 20만 년 전이라면, 이를 1년으로 환산할 경우 1월 1일부터 12월 5일까지를 에덴에서 살았고 단지 26일만을 에덴 밖에서 산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창세기에서 인류의 타락에만 초점을 두고 바라봄으로써 그 이전에 있었던 훨씬 더 장구한 성공적인 삶의 기간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잊혀진 기간 동안, 우리 조상들이 에덴에서 영위했던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창세기 1-2장에서 우리는 일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관리하게 하시면서 전적인 자유를 허락하셨지만 인간이 그 위임된 권한을 잘못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동산의 한 가운데에 있는 언덕 위에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으시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인간은 생명나무를 바라보며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배웠고, 금지된 나무를 통해 자신들이 동산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며 겸손을 배웠습니다. 그 나무들은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선과 악을 알게 하여 그들을 선한 삶으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자연의 일부로 자신을 인식하였고 뭇 생물들과 아름답게 공생하였습니다. 톰 하트만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매일 주어지는 현재의 햇빛으로 만족하며 살았고, 하루에 2시간 정도만 먹거리를 장만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자연과 교감하며 영성체험을 하고, 이웃과 어울려 이야기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벽화를 그리는 등 여가를 즐겼습니다.

학자들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가 본 것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삶의 방식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는 일부 부족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시맨으로 알려진 아프리카의 산족, 콜롬비아의 코기족, 우간다의 이크족, 북미의 나바호족, 브라질의 카야포족 등 아직도 옛 부족사회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에덴의 증인들입니다. 비록 문명사회와의 접촉으로 다소 변질되기는 했지만 그들의 공통점들을 통해 에덴 시절의 구문화를 어느 정도는 엿볼 수 있습니다. 구문화의 부족들을 대부분 박멸한 신문화의 사람들은 그들을 식인종, 미개인, 야만인, 구석기시대 사람 등으로 부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왜곡된 정보를 듣는 바람에 그들이 무섭고 더럽고 잔인하고 어리석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부족은 보통 10명에서 이백 명 내외의 사람들로 구성되는데, 그들은 제각기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한 가운데, 부족간에 평화협정을 맺고 각자의 정체성을 존중했습니다. 부족 간에도 평등했지만 부족 내에서도 서열은 없었습니다. 부족마다 지도자가 있었지만 이는 권력이라기보다 자문역이었습니다. 실제 권력은 평의회와 같은 공개회의에서 나왔습니다. 모두가 빙 둘러앉아 차례차례 발언하는데, 신성한 막대기를 든 사람이 발언 후 그 막대기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 줄 때까지 모두가 침묵하며 경청했습니다. 신분에 의한 고정된 지도력이 없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요구되는 특정한 기능을 가진 사람이 그 기능을 수행하는 동안 지도력을 발휘하고 나면 또 다른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대체되곤 했습니다. 대개는 이런 과정을 평생토록 지켜본 할머니들이 영향력 있는 자문역을 맡고 있어서, 지도자들은 그들의 의견을 먼저 묻곤 했습니다. 여성의 권한은 남성에 못지않았고, 특히 자녀의 생산과 관련해서는 여자에게 독점적인 권한이 있어서, 출산 후에는 의도적으로 별거를 하여 터울을 4-5년 정도로 조절하곤 했습니다. 어떤 부족들은 부족간 회의에 참석할 대의원들의 선출권을 여성들에게만 주기도 했습니다. 부족 안에서 소유 개념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굶주리는데 혼자만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불필요한 살상은 최대한 피했고, 먹기 위해 짐승을 죽일 때는 먼저 감사의 예를 올리고, 죽인 후에는 그 짐승의 영혼을 기리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 후의 농경시대 사람들에 비해 체격도 10cm 이상 더 컸고, 충치나 퇴행성질환도 훨씬 적었습니다. 인류가 출현한 이후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을 이렇게 성공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사실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의 모습을 본 따서 창조되었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계속해서 에덴에 머물지 못하고 추방당한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각종 동물들을 데려다가 이름을 짓게 하시고 어떻게 부르는지 관찰하십니다. 아담이 그들을 어떻게 불렀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처음에는 하와를 부를 때 “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부른 것처럼 다른 생물들도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각자에 맞는 이름들을 붙여 주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런 열매를 가진 나무”로 변하듯 관점이 바뀌는 일이 일어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1:28)는 구절은 타락 후의 관점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이렇게 만물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동산의 질서를 깨트리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날 때 자연에 붙인 이름이 어떠했을지는 그의 후손인 요즘 사람들이 붙인 이름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학자들은 저녁노을과 바닷가의 경치, 물 속의 산호초 등 지구상의 자연의 가치가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물리적, 정신적 유익을 줄 것인지 일일이 계산한 후 합계 330조 달러에 해당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자연과 동식물뿐 아니라 우리 자신들에게도 이제 제각기 가격표가 붙었고 그것이 우리 진짜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침내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맙니다. 이제 그들의 행동에 절제와 금지라는 개념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더 이상 에덴의 질서 속에서 융화되어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에덴 바깥으로 내보내십니다. 스스로를 자연의 주인으로 삼고 자연을 착취, 지배,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런 관점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돌연변이였고, 미친 짓으로 취급될 정도로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암세포처럼 핵분열을 하며 퍼져 나갑니다. 한 부족이 별안간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자연 속의 모든 가용자원을 무기로 삼아 이웃 부족들을 몰살시키거나 노예로 포획할 경우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과 맞서 싸워야 했고, 전투에서 이기건 지건 결국은 힘에 의존하는 폭력의 문화에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최초의 지역은 약 7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 왕국입니다. 창세기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쓰여진 수메르 신화들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사실상 거기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제 가장 힘센 사람을 정점으로 수직적인 계층사회가 형성되었고,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격하되었습니다. 3장에서 에덴에서의 타락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는 모습도 그들의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성은 발언권도 없고, 터울을 조절할 권한도 없이 결혼 후 1~2년 간격으로 노동력을 생산하는 기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경작지를 늘립니다. 식량 생산이 늘자 인구가 급증합니다. 도시를 짓고 성벽을 쌓기 위해 나무를 베어 내면서 환경이 급속히 파괴됩니다. 한때 숲으로 뒤덮여 있던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비옥한 초승달지역”이 점차 초원이 되고 사막으로 화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자원을 찾아 이웃을 공격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숲과 함께 수많은 동식물이 멸종하고 자연은 황폐해집니다. 안에서 잃는 햇빛을 밖에서 보충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약탈 대상을 공략하며 제국을 확장합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문화는 어떠했을까요? 그들 역시 주변의 강력한 제국주의적 신문화의 영향 아래 동화되어 가고 있었지만 12부족의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구문화적 요소를 다소나마 견지하고 있었고, 이것이 약화될 때마다 예언자들이 나타나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안식년마다 경작지를 쉬게 해서 지력을 회복시키고, 거기서 저절로 나는 소출을 가난한 사람들이 취하게 했습니다. 비록 히브리인 노예에게만 해당되었지만 안식년에는 노예를 조건 없이 해방시켜야 했습니다. 또한 49년에 한 번씩 오는 희년에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고, 집안이 몰락하여 농지를 팔아 버렸던 가문에게 농지를 되돌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양극화의 고착을 막고 약자를 보호하는 이런 정의로운 전통들은 점점 사라져 갑니다. 주변 적국들과의 전쟁 때문에, 힘의 논리에 의존한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점점 약화되어 버렸고, 마침내 제국주의의 완결판인 로마에 복속되었을 때는 알맹이는 별로 없이 빈껍데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평범한 한 인간 예수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을 어떻게 살도록 창조하셨는지를 몸소 살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본래적 삶의 방식을 다시금 일깨워 주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6:26)에서와 같이 소유의 의미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 같은 예수님의 언행은 이미 제국주의적 신문화에 물든 당대의 현실에 전혀 맞지 않는 뚱딴지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유전자 속에 십여 만년 동안 살아오면서 기록되어 있던 원칙들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이었을 뿐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요한1:1)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앞을 향해 진보하는 대신 네 마음판에 새겨진 것을 똑똑히 들여다보고 돌이키라”는 급진적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류는 그 “태고부터 내려온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자비하게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박제화 하여 그 위에 오히려 제국주의적 신문화를 건설하고 퍼뜨렸습니다. 온 세상의 구문화 사회들을 쳐들어가 박멸하면서 제일 먼저 앞세웠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구문화 사람들에게 이들의 출현은 대재앙이었습니다. 무려 90% 이상의 사람들이 이들이 몰고 온 각종 전염병과 전쟁기술의 제물이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대부분 노예로 전락하거나 그들의 종교를 강요당하며 신문화에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타인의 햇빛을 약탈하기 위해 확장해 가던 제국의 경계가 마침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더 나아갈 곳이 없어지자 인류는 이제 땅 속의 햇빛에 손을 대었습니다. 3~4억 년 전의 지구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뜨거운 기후였습니다.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비롯한 많은 생물들이 살기에 적합한 온도로 낮추기 위해서 초과량의 이산화탄소를 석탄과 석유로 만들어 땅 속에 숨겨 두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금지된 햇빛을 꺼내어 마음대로 쓰면서 그 쓰레기인 이산화탄소를 공중에 다시 풀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온갖 재앙을 풀어 놓은 판도라의 상자였습니다. 지구온난화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어 전대미문의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고, 며칠 전에는, 만일 인류가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면 금세기 중 지구상에 있는 생물의 90% 이상이 멸종할 것이라는 유엔의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해 보니까 100년 후에는 최고 6.4도까지 기온이 올라가서, 지구의 허파로 기능하고 있는 아마존 열대우림의 2/3 이상이 사막으로 변하고 미국의 대부분도 사막으로 바뀌어 마지막 남은 회생의 가능성조차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라 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석유가 고갈되는 향후 30년 이내에 심각한 위기가 닥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유가의 급등으로 인한 범세계적 경제공황의 가능성, 그리고 석유자원의 패권을 놓고 지금의 이라크전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조차 점쳐지고 있습니다. 사막화, 홍수, 슈퍼 태풍 등의 기상이변과 북상하는 열대성 질병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당하거나 죽고,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그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만일 인류가 일부라도 살아남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우리 세대들을 뭐라고 할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과거, 현재, 미래의 온갖 햇빛을 일시에 소진하여 지구상의 대부분의 생물들을 멸절시킨 후 자멸하는 길을 선택한, 역사상 가장 어리석었던 사람들이라고 역사책에 기록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방영된 어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에 맞서서 싸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로 힘겹게 싸운 당사자는 바로 자연이었어요. 인간의 횡포에 맞서 싸우다 지쳐 버렸고, 이제 마지막 선택을 눈앞에 두고 있지요. 지구가 더 이상 지금의 시스템을 유지하지 못하고 갑자기 두 손을 들어 버릴 가능성은 상존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100년 이내의 어느 날 충격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운명의 날이 앞으로 100년째 해가 될 수도 있지만 단 1년 후에 닥쳐올 가능성조차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우리가 매일 주어지는 현재의 햇빛, 즉 각자에게 주어지는 하루 햇빛으로 살지 않고 남의 햇빛과 금지된 햇빛을 빼앗아 쓴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골고루 내려 주시는 “하루 햇빛”의 양은 얼마나 될까요? 숫자로 명시하기는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매일 새롭게 내려 주시는 현재의 햇빛을 모든 생물과 인간이 골고루 나누어 쓰도록 공평하게 나눈 것이 바로 “하루 햇빛”일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처럼 살아도 생태계에 부담을 주지 않는 범위의 햇빛을 “하루 햇빛”으로 부를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하루 햇빛을 초과하여 살고 있다면, 이는 다른 생물이나 사람, 혹은 우리 후손들의 햇빛을 훔치거나 빼앗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식주의 방식을 조금만 다르게 선택하면 몇 십 배씩 햇빛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물을 사료로 먹여 기른 육고기를 먹는 대신 야채나 곡물을 먹으면 무려 16배나 더 적은 햇빛을 먹게 됩니다. 즉, 똑같은 열량을 섭취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15명 분의 잉여 햇빛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방식을 조절하여 햇빛을 절약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땅 속의 햇빛은 가급적 아껴서, 우리 후손들이 현재의 햇빛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과도기적 목적을 위해 재투자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 않고 지구를 파괴하지도 않는 태양열, 태양광, 풍력, 조력 등의 재생에너지를 아프리카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균등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재생에너지의 개발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제하지 못하고 또다시 과소비와 인구폭발을 경험하며 새로운 재앙을 불러올 게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사물을 정의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새로이 선택할 때만이 우리 미래의 운명도 달라질 것입니다.

인류는 에덴을 떠난 후 주인 행세를 하며 자신 있게 휘젓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길을 잃고 말았고, 이제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습니다. 마치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왔는데 저 끝에 “여기 길 없음”이라는 팻말과 함께 까마득한 벼랑이 기다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설마설마 하면서 옆에서 씽씽 달려가는 다른 차에게 뒤쳐질까 조바심만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거리는 점점 더 좁혀져 가고 파국의 조짐이 여기저기서 파열음을 내며 경고의 수위를 높입니다. 이제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자동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리는 것, 그리고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 그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여태껏 그렇게도 자랑하고 떠들면서 속도경쟁을 하며 달려온 이 길이 엉터리 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어, 이 길이 아니네” 하면서 되돌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결정은 더 늦출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계속 가든 말든 이를 깨달은 사람이 먼저 차를 돌려 되돌아가야 합니다. 나 혼자만 살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위험을 감지하고 차를 돌릴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애초에 우리 집이었던 에덴을 떠난 게 잘못이었으니 이제 가출을 그만두고 되돌아가야 할 터인데 어떻게 그곳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에덴은 특정한 지역도 아니고, 죽어서만 갈 수 있는 내세도 아닙니다. 에덴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는 곳, 그곳이 바로 에덴이고, 우리가 그런 질서를 회복하는 곳은 어디든 에덴으로 바뀝니다. 인간이 주인 행세를 하는 대신, 수많은 피조물 중의 하나로서의 겸손이 있는 곳이 에덴입니다. 동산 한 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생명나무에서 생명의 경외심을 공급받고, 금지된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절제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 에덴입니다. 사물을 자기중심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동산지기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곳이 에덴입니다.

에덴은 “땅과의 긴장”이 해소된 곳, “땅과의 조화”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목표를 강요하며 땅을 착취하는 대신, 땅이 건강하게 살면서 기쁘게 내어주는 것을 감사히 받으며, 그에 맞춰 우리 욕심을 축소시키는 곳입니다. 국력의 확장에 연연해하지 않고, 그것이 땅에 좋다면 인구의 축소, 사회의 축소, 도시의 축소도 두려워하지 않는 곳입니다. 치열한 경쟁에 기반한 경제성장률에 목을 매는 대신 가진 것의 범위 내에서 소외된 자가 없도록 사랑으로 서로 돌보는 곳입니다. 검소한 의식주에서 만족을 누리며 일상생활의 가난을 기뻐하는 곳입니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힘 있고, 더 화려한 곳을 향해 달려오던 익숙한 길을 버리고 나를 축소시키며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는 곳, 바로 그곳이 에덴입니다. 사실 우리는 에덴을 떠났지만 에덴은 늘 우리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에덴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 유전자 속에 새겨 주신 삶의 방식이고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에덴을 떠난 인간의 삶의 궤적은, 낯선 곳에서 값진 유산을 탕진한 후 절망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의 삶과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언뜻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 가운데 있지만 그가 희망을 선택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즉시 탕자의 삶은 순식간에 낙원으로 옮겨집니다. 우리도 역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희망을 선택하는 그 순간까지가 어려울 뿐, 막상 뒤돌아서고 나면 전혀 다른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낙원은 이미 우리 속에 와서 우리가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그 낙원으로 들어가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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