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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2:2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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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3년 8월 24일 주일2부설교 |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쌔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항복하면 이기고 다투면 진다』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2차세계대전때 독일과 일본은 미국 중심의 연합군에게 지고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 두 나라는 똑같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세계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대단히 궁핍한 나라에서 대통령과 각료들이 모여 나라 살림을 부요하게 하는 방법을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장관이 그 해결법으로 독일과 일본처럼 연합군에 대항하여 전쟁을 한 후에 항복하자는 안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연합군의 도움으로 경제적 번영을 독일이나 일본처럼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案)에 대하여 대다수가 반대했습니다. 그 이유인즉 연합군과 전쟁을 했다가 이기는 날이면 그 뒤에 책임을 어떻게 지겠냐는 것입니다. 지면 좋지만 이기는 날이면 낭패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웃고 지나갈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다툼이 일어났을때 속히 항복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의 삶을 살지만 하나님과 다투되 이기어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하면 그 이후의 삶은 낭패에 낭패를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야곱의 얍복강 나루터 씨름
우리는 첫째로, 야곱의 얍복강 나루터 씨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0년 전에 형을 속이고 형과 다투어서 형의 얼굴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친 야곱이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처자를 거느리고 많은 짐승떼와 함께 형이 사는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된것입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형에게 사자를 보내어서 자기가 돌아온다고 연락을 하니까 형이 절치부심 20년 동안 복수할날을 기다리다가 동생이 온다는 말을 듣고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생을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이 말을 들을 야곱은 간담이 서늘해 졌습니다. 창자가 녹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처자들과 짐승떼만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는 이 강 이편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형이 처자와 종들을 치면 도망치고 그렇지 않으면 건너가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처자들은 죽더라도 자기는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 11절에 보면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라고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 혼자 얍복 나루터 이편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정황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어둠속에서 한 장정이 나타나서 야곱하고 씨름이 벌어졌습니다. 추측한데 그 장정은 “가족들을 다 강건너 보내 놓고 너 혼자 있느냐! 너도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건너가라.” 그렇게 강권할 야곱은 그렇지 않겠다고 저항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창세기 32장 24절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아무 이유없이 씨름할 턱이 없습니다. 그 장정은 야곱보고 “이 약삭빠른 놈아! 처자는 죽어도 너는 살겠다는 것인가? 함께 건너가라!” 그러나 야곱은 “처자는 죽더라도 내가 살아야지. 나는 못건너 갑니다.” 그러면서 다툰 것 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장정이 강요를 하고 끌어 내려고 해도 야곱은 버팁니다. 마치 외양간에서 끌려 나오지 않는 소를 끌고 나오려면 소는 뒷걸음질 치고 주인은 땡기고 하는 그 모습인 것입니다. 넘어지고 매어치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그러면서도 야곱은 기어코 버티고 그는 항복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맹렬히 밤새 씨름했지만 야곱이 항복지 않으므로 새벽 미명에 그 장정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 절름발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냥은 도저히 항복을 안하니까. 항복을 안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환도뼈를 쳐서라도 그를 깨어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32장 26절에 보면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은 환도뼈가 어그러져서 절름발이가 되었으니 이제는 축복을 받지 않고 그 사람을 보내었다가는 자기는 절망입니다. 도망치는 능력을 잃은 것을 깨달은 야곱은 항복하고 복을 구하여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라는 말은 사기꾼이라는 말이고 이스라엘이란 말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자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 28절로 29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하고 밤새도록 씨름하신 분이 다른분이 아닌 하나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고 말했기 때문에 밤새도록 겨룬 분이 다른 분 아닌 성육신 하기전에 계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씨름해서 결국은 아침에 환도뼈가 어그러져서 항복해서 패했을때 그 이름이 사기꾼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자로 변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과 씨름하여 야곱이 졌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이긴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기면 진자가 되고 하나님과 씨름해서 지면 하나님이 이긴자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씨름해서 자기 고집대로 이기면 하나님이 도와 주실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 삶에서 진자가 되고 하나님과 씨름해서 항복하고 패배하면 하나님이 붙들어 도와 주시므로 이 세상살이에 이긴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패하므로 이긴자가 된것입니다.
호세아 12장 3절로 5절에 보면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항복한 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이겼으면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지고 항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자로 명명해 주시고 그와 같이한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4절로 16절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지렁이 같은 야곱입니다. 하나님 앞에 졌습니다. 이제는 두손 들었습니다. 아무런 발버둥을 칠 수 없는 지렁이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뭐라고 말합니까?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야웨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것이라’ 지렁이가 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살아서 바둥거리면 하나님이 도와 줄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를 삼아서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며 작은 산들로 겨같게 할것입니다. 지렁이가 된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는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크고 적은 산들을 부서 뜨려서 성령의 능력으로 바람에 날릴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깨어져서 항복하고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그를 죽이려고 온 형의 마음도 변화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형이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올때는 분도막심하여 한칼에 야곱을 날려 버릴려고 작정하고 왔습니다만 야곱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에서의 마음을 하나님이 변화시키셨습니다.
창세기 33장 4절에 보면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죽이려고 온 사람이 동생을 얼싸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울었습니다. 그 마음에 크나큰 감동과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죽이러 온 에서가 오히려 야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앞잡이가 되겠다고 자원하게 된 것입니다. 죽이려고 불같이 달려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로 일시에 야곱을 오히려 호위하는 호위대가 된것입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한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지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해주시고 하나님께 이기면 우리는 집니다. 그런데 야곱처럼 좀처럼 우리가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너무나 씨름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 안하겠다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주일인데 교회가라.” “안가겠습니다.” 씨름을 합니다. “십일조 내라!” “못내요.” 씨름을 합니다. “전도하라!” “부끄러워 할 수가 없어요. 안해요.”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과 씨름을 많이 합니다. 야곱은 환도뼈를 쳐서 어그러져서 절름발이가 되어 절망에 처하니까 항복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을때 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골에는 소가 재산 밑천이 아닙니까? 집에 불이나서 타게 되면 먼저 소부터 끌어내야 됩니다. 소가 있으면 그 집은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소를 잃어 버리면 일어나지 못합니다. 불이 활활 붙는데 마굿간에 들어가서 소를 끌고 아무리 끌어 내려도 소는 안나옵니다. 불이 활활 타니까 마굿간에서 안나오려고 합니다. 이럴땐 소 여물통을 뒤엎어야 됩니다. 소가 보는 앞에서 자기가 먹는 밥통인 여물통을 뒤엎어 버리면 소는 순순히 끌려 나옵니다. 소가 생각하기에 “여물통이 뒤엎어지는 것 보니 이건 내집이 아니구나. 이제 여기는 끝이났다.” 사람도 소처럼 아무리 하나님이 따라오라 해도 안따라올때 사람의 여물통을 뒤엎어 버리면 나옵니다. 제가 45년 목회하면서 보니까 병으로 때려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사업이 망하면 손들고 나옵니다. 밥통이 엎어지면... “아~ 이것 더 이상 살수 없구나.” 손들고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매를 맞아야 항복을 하게 되니 이것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매를 맞기전에 항복하고 나오면 승리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크고 적은일에 하나님과 다투고 씨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오늘 둘째 생각하고 싶은 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보십시오.
예수님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난 다음에 그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 마음속에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씨름한 것처럼 자기와 씨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으로 오신 이상 인간적인 삶의 애착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려고 할때에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세상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생각하고 심히 번뇌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에 보면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들어 가실 때 제자들로 말씀하기를 “내 마음이 심히 번뇌하여 죽게 되었다. 마음이 죽을정도로 번뇌를 한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상죄를 다 담당하고 몸찢고 죽을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주님이 그것을 면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에서 최후로 몸부림 친 것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반발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려고 할때 자기 속에 형언할수 없는 번뇌가 다가온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싸움은 아닙니다.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는 기도의 몸부림을 쳤습니다. 기도의 씨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로 45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자기와 씨름했습니다.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쓰디쓴 고난을 옮겨 주옵소서. 두 번째도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러나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세 번째 또한 주님께서 그렇게 기도해서 완전히 자기를 쳐서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고 복종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번뇌를 가지고 몸부림을 치신 것을 알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땀이 피방울이 되도록 주님께서는 몸부림치고 기도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고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기 전에 자기의 마음과 이 무시무시한 씨름을 하신 것을 볼때에 우리에게 그런 씨름이 없다고 볼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한번 하나님께 항복했으면 다시 뒤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체포 되어서 가야바의 뜰에서 또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수없는 모욕과 곤욕을 당하실때도 예수님은 저항하시지 아니하시고 아무말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내가 너를 죽이고 살릴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어찌하여 내게 변명도 안하고 대답도 안하는가?” 예수님은 장엄하게 침묵을 지켰습니다. 왜냐, 이미 십자가에 죽기로 각오하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맡긴 이상은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관하게 침묵을 지키고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6장 53절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님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잠잠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기 때문에 잠잠한 것입니다. 로마군단의 한 영은 최대 6천명의 보병대에 기병대까지 합친 규모로는 12억이면 7만이 넘는 천군을 동원하시고도 남으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하면 7만명 이상 되는 하늘의 군대를 하나님이 동원해서 나를 건진다.”는 것입니다. 천사 7만명을 동원하면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당신을 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항복한 예수 그리스도,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부활시켜서 영원히 이기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면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님께 항복하고 당신 자신을 내어 맡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승리자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30절로 31절에 보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그는 하나님께 짐으로 구주와 임금으로 이기게 된것입니다. 그는 죄와 세상과 마귀의 병과 저주와 죽음을 영원히 이길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항복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기고 하나님을 이기면 우리는 영원히 패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씨름과 승리 비결
셋째로, 왜 우리는 하나님과 늘 씨름을 합니까?
우리의 삶속에 씨름이 많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어찌하든지 피해보려고 자꾸 꾀를 부리기 때문에 우리가 야곱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말은 사기꾼, 꾀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꾀돌이가 되어 가지고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안지키고 피하고도 한번 믿어 보겠다 그렇게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되 축복은 계명을 지켜야 얻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축복은 계명을 지켜야 받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로 6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구원은 예수 믿으면 남녀, 노유, 빈부, 귀천없이 구원받지만 축복은 계명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록 팰러 1세는 평생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쓴 미국의 거부였습니다. 역사적인 거부였던 록 팰러는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첫 번째 여인에게 버림을 받은 남자였습니다. 가난하고 장래성이 없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결혼한 부인이 버리고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세가지 기적을 일으켰는데 가장 가난했던 자가 가장 부유하고 되고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남에게 나누어 주고 건강하고 장수했다는 것입니다. 록 팰러가 세가지 기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주일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다는 점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나이라고 버림받았지만 하나님께 충성은 열심이었습니다. 주일날 한번도 예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춤추는 곳이나 유흥장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고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매일 감사기도를 한번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성경을 매일같이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때는 성경을 읽어줄 사람을 채용해서 귀로 성경을 들으면서 말씀을 날마다 대면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믿음으로 훌륭하게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그는 순간 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애써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고 미국 역사상 손꼽는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계명을 안지키려고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이혼합니다. 왜 이혼합니까? 성격차이로 이혼한다고 그럽니다. 남편과 아내가 성격이 맞지 않으면 자꾸 충돌하기 때문에 같이 살지 못하고 이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성격차이가 생겨서 자꾸 충돌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성격이요, 품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에 복종하고 따라가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지 하나님의 품성을 거역하고 내뜻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과 성격차이로 부딪혀서 결국에는 하나님과 다투게 돼지요. 우리는 항상 계명과 다투고 씨름하는 나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로마서 7장 22절로 24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것 여러분의 고백이 아닙니까? 내 속으로는 하나님 법을 사랑하고 계명대로 살고 싶은데 내 육체에 한 다른 법 죄의 법이 있어 나를 끊임없이 사로잡아 죄의 법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 무수한 갈등이 생기고 기도할 때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뿐 아니라 삶의 우선 순위로 하나님과 늘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할 것 먼저하고 나중할 것 나중에 하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보다 내 개인의 생각과 욕심을 먼저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하게 되고 하나님은 “하늘나라와 하늘 의를 먼저하고 그 다음 너의 일을 하라.” “아니올시다. 내 생각과 내 욕심을 먼저하고 그 다음 내가 하나님 일을 하겠습니다.”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에 들어간 육군 신병이 군대생활 하면서 일생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군인이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보다 선배된 병장에게 물었습니다. “군인생활을 좀 깨끗하게 명예롭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자세히 가르켜 주십시오.” 선배 병장은 껄껄 웃으면서 “군대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은 간단하다. 무조건 하고 상사에게 복종만 하면 된다. 군대생활이라는 것은 명령에 복종하는 생활이니까 서라면 서고 앉으라고 앉고 자라면 자고 깨라면 깨고 전쟁에 전진하라면 하고 죽으라면 죽고 복종만 하면 군대생활 잘할수 있다.” 한참만에 사병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군대에서 대령님이 명령을 하는데 중령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고 소령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고 대위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면 어느 명령을 따라야 합니까?” 그러니까 병장이 껄껄 웃으면서 “이사람아! 명령이 여러 계통에서 나올때는 제일 높은 사람의 명령만 들으면 된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제일 높은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어떤 명령이 와도 우리는 하나님 명령에 복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을 안하고 다른 명령을 듣고 가려니까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명령, 마귀의 명령을 따르려고 하니까 우리의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영광과 예수님의 뜻을 우선 구하면 우리 마음속이 편안하게 됩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부정이나 사기사건의 장본인들이 교회 출석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텔레비전에 흔히 볼 수 있는 감옥가는 많은 사람들중에 성도들이 있고 집사, 안수집사, 장로, 목사까지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믿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었다가 그런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구원 안받은 것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보다도 내 생각과 내 욕심을 먼저 쫓다가 그런 어려움에 처하게 된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이 그것입니다. 우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항상 매일매일의 생활에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보다도 나의 생각과 나의 욕심을 먼저 구하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현실적인 씨름인 것입니다.
호세아 12장 6절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사명의 부르심에 우리가 복종하지 않으므로 늘 씨름을 하지요. 요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20여일만에 니느웨를 멸망 시키겠다.” 그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멸망 받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앗수르가 늘 이스라엘을 침공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요나는 애국심이 발로해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욥바에서 배를 타고 니느웨의 정반대인 가시스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갈등이 났지요. 도망치는데 그냥 가만 있습니까? 파도가 대적하여 배 안에서 어마어마한 풍랑을 겪고 결국에는 사공들이 그를 물에 던지는 큰 시련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 갈등이 오고 그런 씨름이 옵니까? 사명의 부르심에 불복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도, 봉사, 선교, 헌신, 희생등의 하나님의 명령이 임했을때 이를 저항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차타고 들어오면서 저 입구에서부터 집사님들이 새벽에 와서 안내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나는 올때마다 느낍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월급 받는 것도 아니고 고용받은 것도 아닌데 새벽 5시쯤 벌써 나와서 일하자면 벌써 2시, 3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순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명을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에 순종하지 아니할때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데 자기는 안하겠다고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씨름해서 이기면 지고 져야 이기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사 한분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일본에 가서 선교사가 되라 그렇게 했는데 그는 “하나님 내가 교회를 한국에서 세워서 일본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겠습니다.” 그리고 순종 안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변역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일본에 가라” 했는데 “아니요. 나는 한국에서 교회를 세워서 많은 선교사를 양성해서 일본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할줄 아느뇨?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지 그는 결국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가 어느정도 성장, 발전했는데 교회에 큰 분쟁이 생겨서 교회가 풍비박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교회를 지켜달라고 기도할 때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네가 일할곳이 아니지 않느냐? 나는 너를 일본에 가라고 했는데 너는 왜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러므로 너가 목회하는 이 목회장소가 풍비박산이 되지 않느냐?’ 그는 크게 회개하고 그 교회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일본에 건너가서 지금 일본에서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의 부르심에 불복종할 때 끊임없는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십니다. 그 임하신 사명을 등한이 여기면 안됩니다. 그것에 복종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중국의 순임금이 하루는 신하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명령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희에게 망태기 하나씩을 줄터이니 내가 정한 우물에 가서 물을 하나 가득히 망태기에 담아서 오너라.” 그런데 15명의 신하에게 망태기 하나씩을 주었는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망태기는 엉성엉성하게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물을 어떻게 망태기에 담아 옵니까? 14명의 신하는 망태기를 가지고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망태기에 물을 담아오라는 임금님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못담아 오다가는 혼이 날테니까 에라 줄행랑을 치자.” 도망을 치는데 그중에 한 사람은 우물에 가서 망태기에 물을 담습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망태기에 부으니까 다 빠져 버렸지요. 또 퍼서 담고 또 퍼서 담고. 아침부터 해가 질때까지 물을 퍼 담았습니다. 사람들이 다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저런 멍청이 같은 놈이 어딨느냐?” 그러나 이 사람은 임금님이 명령했기 때문에 자기는 불합리한 일이라도 명령에는 복종해야 된다. 저녁이 되어서 이제는 우물에서 물이없습니다. 하도퍼서 망태기에 부었기 때문에 우물에 물이 없었어요. 그래서 물이 있는가 없는 살펴 보려고 우물밑을 보니까 우물 밑바닥에 큰 금덩어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는 금덩어리를 건져 내었습니다. 그래서 망태기에 담고 임금님에게 가서 “임금님! 하루종일 물을 퍼서 망태기에 담아도 물은 다 빠져 나가고 물은 남지 않지만 나중에 우물물이 말라서 보니 금덩어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임금님에게 가져 왔습니다. 임금님이 껄껄 웃으면서 “내가 일부러 우물속에 금덩어리를 넣어 놓았느니라. 내 명령에 복종하느냐 복종 안하느냐 시험을 해보았는데 14명은 다 도망을 쳐버리고 너만은 우직스럽게 순종해서 나의 명령을 지켰으니 금덩어리는 네것이다. 가져 가거라.”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안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가 되든 이해가 안되든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라고 하실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할 것이 아니라 순종할 것입니다. 이해는 그후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순종이 먼저 실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항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시편 25편 10절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베드로전서 5장 6절로 7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하나님을 이기려고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기꾼이라는 이름인 야곱으로 인생을 살면서 항상 시련과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태어났을때는 다 야곱입니다. 꾀돌이입니다. 사기꾼들입니다. 그래서 늘 시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면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나님의 은혜로 복과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면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자라. 졌는데 하나님은 이긴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졌으나 인생사에는 하나님이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항복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야곱으로 일생을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 살것이냐 하나님과 씨름해서 져서 이스라엘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 하셔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승리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결정해야 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삶속에 다가온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들은 이모저모로 피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변명을 말하고 하나님과 다투고 씨름하고 하나님을 이기려고 할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등대를 이기려고 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의 등대인 하나님을 이기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비켜 서지를 않습니다. 비켜 설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항복하고 비켜서고 명령에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 삶속에 그렇지 못할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크고 적은 일에 너무나 하나님과 다툽니다. 하나님 이해할수 없다고 자꾸 고개를 흔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복종할것밖에 없사오니 복종하고 순종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항복하면 이기고 다투면 진다』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2차세계대전때 독일과 일본은 미국 중심의 연합군에게 지고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 두 나라는 똑같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세계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대단히 궁핍한 나라에서 대통령과 각료들이 모여 나라 살림을 부요하게 하는 방법을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장관이 그 해결법으로 독일과 일본처럼 연합군에 대항하여 전쟁을 한 후에 항복하자는 안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연합군의 도움으로 경제적 번영을 독일이나 일본처럼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案)에 대하여 대다수가 반대했습니다. 그 이유인즉 연합군과 전쟁을 했다가 이기는 날이면 그 뒤에 책임을 어떻게 지겠냐는 것입니다. 지면 좋지만 이기는 날이면 낭패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웃고 지나갈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다툼이 일어났을때 속히 항복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의 삶을 살지만 하나님과 다투되 이기어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하면 그 이후의 삶은 낭패에 낭패를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야곱의 얍복강 나루터 씨름
우리는 첫째로, 야곱의 얍복강 나루터 씨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0년 전에 형을 속이고 형과 다투어서 형의 얼굴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친 야곱이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처자를 거느리고 많은 짐승떼와 함께 형이 사는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된것입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형에게 사자를 보내어서 자기가 돌아온다고 연락을 하니까 형이 절치부심 20년 동안 복수할날을 기다리다가 동생이 온다는 말을 듣고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생을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이 말을 들을 야곱은 간담이 서늘해 졌습니다. 창자가 녹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처자들과 짐승떼만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는 이 강 이편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형이 처자와 종들을 치면 도망치고 그렇지 않으면 건너가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처자들은 죽더라도 자기는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 11절에 보면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라고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 혼자 얍복 나루터 이편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정황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어둠속에서 한 장정이 나타나서 야곱하고 씨름이 벌어졌습니다. 추측한데 그 장정은 “가족들을 다 강건너 보내 놓고 너 혼자 있느냐! 너도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건너가라.” 그렇게 강권할 야곱은 그렇지 않겠다고 저항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창세기 32장 24절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아무 이유없이 씨름할 턱이 없습니다. 그 장정은 야곱보고 “이 약삭빠른 놈아! 처자는 죽어도 너는 살겠다는 것인가? 함께 건너가라!” 그러나 야곱은 “처자는 죽더라도 내가 살아야지. 나는 못건너 갑니다.” 그러면서 다툰 것 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장정이 강요를 하고 끌어 내려고 해도 야곱은 버팁니다. 마치 외양간에서 끌려 나오지 않는 소를 끌고 나오려면 소는 뒷걸음질 치고 주인은 땡기고 하는 그 모습인 것입니다. 넘어지고 매어치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그러면서도 야곱은 기어코 버티고 그는 항복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맹렬히 밤새 씨름했지만 야곱이 항복지 않으므로 새벽 미명에 그 장정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 절름발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냥은 도저히 항복을 안하니까. 항복을 안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환도뼈를 쳐서라도 그를 깨어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32장 26절에 보면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은 환도뼈가 어그러져서 절름발이가 되었으니 이제는 축복을 받지 않고 그 사람을 보내었다가는 자기는 절망입니다. 도망치는 능력을 잃은 것을 깨달은 야곱은 항복하고 복을 구하여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라는 말은 사기꾼이라는 말이고 이스라엘이란 말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자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 28절로 29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하고 밤새도록 씨름하신 분이 다른분이 아닌 하나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고 말했기 때문에 밤새도록 겨룬 분이 다른 분 아닌 성육신 하기전에 계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씨름해서 결국은 아침에 환도뼈가 어그러져서 항복해서 패했을때 그 이름이 사기꾼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자로 변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과 씨름하여 야곱이 졌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이긴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기면 진자가 되고 하나님과 씨름해서 지면 하나님이 이긴자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씨름해서 자기 고집대로 이기면 하나님이 도와 주실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 삶에서 진자가 되고 하나님과 씨름해서 항복하고 패배하면 하나님이 붙들어 도와 주시므로 이 세상살이에 이긴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패하므로 이긴자가 된것입니다.
호세아 12장 3절로 5절에 보면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항복한 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이겼으면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지고 항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자로 명명해 주시고 그와 같이한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4절로 16절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지렁이 같은 야곱입니다. 하나님 앞에 졌습니다. 이제는 두손 들었습니다. 아무런 발버둥을 칠 수 없는 지렁이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뭐라고 말합니까?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야웨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것이라’ 지렁이가 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살아서 바둥거리면 하나님이 도와 줄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를 삼아서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며 작은 산들로 겨같게 할것입니다. 지렁이가 된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는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크고 적은 산들을 부서 뜨려서 성령의 능력으로 바람에 날릴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깨어져서 항복하고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그를 죽이려고 온 형의 마음도 변화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형이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올때는 분도막심하여 한칼에 야곱을 날려 버릴려고 작정하고 왔습니다만 야곱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에서의 마음을 하나님이 변화시키셨습니다.
창세기 33장 4절에 보면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죽이려고 온 사람이 동생을 얼싸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울었습니다. 그 마음에 크나큰 감동과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죽이러 온 에서가 오히려 야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앞잡이가 되겠다고 자원하게 된 것입니다. 죽이려고 불같이 달려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로 일시에 야곱을 오히려 호위하는 호위대가 된것입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한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지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해주시고 하나님께 이기면 우리는 집니다. 그런데 야곱처럼 좀처럼 우리가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너무나 씨름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 안하겠다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주일인데 교회가라.” “안가겠습니다.” 씨름을 합니다. “십일조 내라!” “못내요.” 씨름을 합니다. “전도하라!” “부끄러워 할 수가 없어요. 안해요.”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과 씨름을 많이 합니다. 야곱은 환도뼈를 쳐서 어그러져서 절름발이가 되어 절망에 처하니까 항복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을때 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골에는 소가 재산 밑천이 아닙니까? 집에 불이나서 타게 되면 먼저 소부터 끌어내야 됩니다. 소가 있으면 그 집은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소를 잃어 버리면 일어나지 못합니다. 불이 활활 붙는데 마굿간에 들어가서 소를 끌고 아무리 끌어 내려도 소는 안나옵니다. 불이 활활 타니까 마굿간에서 안나오려고 합니다. 이럴땐 소 여물통을 뒤엎어야 됩니다. 소가 보는 앞에서 자기가 먹는 밥통인 여물통을 뒤엎어 버리면 소는 순순히 끌려 나옵니다. 소가 생각하기에 “여물통이 뒤엎어지는 것 보니 이건 내집이 아니구나. 이제 여기는 끝이났다.” 사람도 소처럼 아무리 하나님이 따라오라 해도 안따라올때 사람의 여물통을 뒤엎어 버리면 나옵니다. 제가 45년 목회하면서 보니까 병으로 때려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사업이 망하면 손들고 나옵니다. 밥통이 엎어지면... “아~ 이것 더 이상 살수 없구나.” 손들고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매를 맞아야 항복을 하게 되니 이것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매를 맞기전에 항복하고 나오면 승리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크고 적은일에 하나님과 다투고 씨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오늘 둘째 생각하고 싶은 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보십시오.
예수님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난 다음에 그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 마음속에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씨름한 것처럼 자기와 씨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으로 오신 이상 인간적인 삶의 애착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려고 할때에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세상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생각하고 심히 번뇌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에 보면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들어 가실 때 제자들로 말씀하기를 “내 마음이 심히 번뇌하여 죽게 되었다. 마음이 죽을정도로 번뇌를 한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상죄를 다 담당하고 몸찢고 죽을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주님이 그것을 면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에서 최후로 몸부림 친 것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반발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려고 할때 자기 속에 형언할수 없는 번뇌가 다가온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싸움은 아닙니다.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는 기도의 몸부림을 쳤습니다. 기도의 씨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로 45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자기와 씨름했습니다.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쓰디쓴 고난을 옮겨 주옵소서. 두 번째도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러나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세 번째 또한 주님께서 그렇게 기도해서 완전히 자기를 쳐서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고 복종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번뇌를 가지고 몸부림을 치신 것을 알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땀이 피방울이 되도록 주님께서는 몸부림치고 기도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고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기 전에 자기의 마음과 이 무시무시한 씨름을 하신 것을 볼때에 우리에게 그런 씨름이 없다고 볼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한번 하나님께 항복했으면 다시 뒤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체포 되어서 가야바의 뜰에서 또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수없는 모욕과 곤욕을 당하실때도 예수님은 저항하시지 아니하시고 아무말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내가 너를 죽이고 살릴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어찌하여 내게 변명도 안하고 대답도 안하는가?” 예수님은 장엄하게 침묵을 지켰습니다. 왜냐, 이미 십자가에 죽기로 각오하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맡긴 이상은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관하게 침묵을 지키고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6장 53절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님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잠잠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기 때문에 잠잠한 것입니다. 로마군단의 한 영은 최대 6천명의 보병대에 기병대까지 합친 규모로는 12억이면 7만이 넘는 천군을 동원하시고도 남으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하면 7만명 이상 되는 하늘의 군대를 하나님이 동원해서 나를 건진다.”는 것입니다. 천사 7만명을 동원하면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당신을 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항복한 예수 그리스도,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부활시켜서 영원히 이기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면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님께 항복하고 당신 자신을 내어 맡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승리자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30절로 31절에 보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그는 하나님께 짐으로 구주와 임금으로 이기게 된것입니다. 그는 죄와 세상과 마귀의 병과 저주와 죽음을 영원히 이길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항복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기고 하나님을 이기면 우리는 영원히 패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씨름과 승리 비결
셋째로, 왜 우리는 하나님과 늘 씨름을 합니까?
우리의 삶속에 씨름이 많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어찌하든지 피해보려고 자꾸 꾀를 부리기 때문에 우리가 야곱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말은 사기꾼, 꾀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꾀돌이가 되어 가지고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안지키고 피하고도 한번 믿어 보겠다 그렇게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되 축복은 계명을 지켜야 얻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축복은 계명을 지켜야 받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로 6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구원은 예수 믿으면 남녀, 노유, 빈부, 귀천없이 구원받지만 축복은 계명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록 팰러 1세는 평생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쓴 미국의 거부였습니다. 역사적인 거부였던 록 팰러는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첫 번째 여인에게 버림을 받은 남자였습니다. 가난하고 장래성이 없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결혼한 부인이 버리고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세가지 기적을 일으켰는데 가장 가난했던 자가 가장 부유하고 되고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남에게 나누어 주고 건강하고 장수했다는 것입니다. 록 팰러가 세가지 기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주일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다는 점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나이라고 버림받았지만 하나님께 충성은 열심이었습니다. 주일날 한번도 예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춤추는 곳이나 유흥장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고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매일 감사기도를 한번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성경을 매일같이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때는 성경을 읽어줄 사람을 채용해서 귀로 성경을 들으면서 말씀을 날마다 대면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믿음으로 훌륭하게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그는 순간 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애써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고 미국 역사상 손꼽는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계명을 안지키려고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이혼합니다. 왜 이혼합니까? 성격차이로 이혼한다고 그럽니다. 남편과 아내가 성격이 맞지 않으면 자꾸 충돌하기 때문에 같이 살지 못하고 이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성격차이가 생겨서 자꾸 충돌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성격이요, 품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에 복종하고 따라가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지 하나님의 품성을 거역하고 내뜻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과 성격차이로 부딪혀서 결국에는 하나님과 다투게 돼지요. 우리는 항상 계명과 다투고 씨름하는 나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로마서 7장 22절로 24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것 여러분의 고백이 아닙니까? 내 속으로는 하나님 법을 사랑하고 계명대로 살고 싶은데 내 육체에 한 다른 법 죄의 법이 있어 나를 끊임없이 사로잡아 죄의 법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 무수한 갈등이 생기고 기도할 때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뿐 아니라 삶의 우선 순위로 하나님과 늘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할 것 먼저하고 나중할 것 나중에 하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보다 내 개인의 생각과 욕심을 먼저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하게 되고 하나님은 “하늘나라와 하늘 의를 먼저하고 그 다음 너의 일을 하라.” “아니올시다. 내 생각과 내 욕심을 먼저하고 그 다음 내가 하나님 일을 하겠습니다.”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에 들어간 육군 신병이 군대생활 하면서 일생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군인이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보다 선배된 병장에게 물었습니다. “군인생활을 좀 깨끗하게 명예롭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자세히 가르켜 주십시오.” 선배 병장은 껄껄 웃으면서 “군대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은 간단하다. 무조건 하고 상사에게 복종만 하면 된다. 군대생활이라는 것은 명령에 복종하는 생활이니까 서라면 서고 앉으라고 앉고 자라면 자고 깨라면 깨고 전쟁에 전진하라면 하고 죽으라면 죽고 복종만 하면 군대생활 잘할수 있다.” 한참만에 사병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군대에서 대령님이 명령을 하는데 중령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고 소령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고 대위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면 어느 명령을 따라야 합니까?” 그러니까 병장이 껄껄 웃으면서 “이사람아! 명령이 여러 계통에서 나올때는 제일 높은 사람의 명령만 들으면 된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제일 높은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어떤 명령이 와도 우리는 하나님 명령에 복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을 안하고 다른 명령을 듣고 가려니까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명령, 마귀의 명령을 따르려고 하니까 우리의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영광과 예수님의 뜻을 우선 구하면 우리 마음속이 편안하게 됩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부정이나 사기사건의 장본인들이 교회 출석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텔레비전에 흔히 볼 수 있는 감옥가는 많은 사람들중에 성도들이 있고 집사, 안수집사, 장로, 목사까지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믿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었다가 그런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구원 안받은 것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보다도 내 생각과 내 욕심을 먼저 쫓다가 그런 어려움에 처하게 된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이 그것입니다. 우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항상 매일매일의 생활에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보다도 나의 생각과 나의 욕심을 먼저 구하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현실적인 씨름인 것입니다.
호세아 12장 6절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사명의 부르심에 우리가 복종하지 않으므로 늘 씨름을 하지요. 요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20여일만에 니느웨를 멸망 시키겠다.” 그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멸망 받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앗수르가 늘 이스라엘을 침공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요나는 애국심이 발로해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욥바에서 배를 타고 니느웨의 정반대인 가시스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갈등이 났지요. 도망치는데 그냥 가만 있습니까? 파도가 대적하여 배 안에서 어마어마한 풍랑을 겪고 결국에는 사공들이 그를 물에 던지는 큰 시련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 갈등이 오고 그런 씨름이 옵니까? 사명의 부르심에 불복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도, 봉사, 선교, 헌신, 희생등의 하나님의 명령이 임했을때 이를 저항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차타고 들어오면서 저 입구에서부터 집사님들이 새벽에 와서 안내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나는 올때마다 느낍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월급 받는 것도 아니고 고용받은 것도 아닌데 새벽 5시쯤 벌써 나와서 일하자면 벌써 2시, 3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순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명을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에 순종하지 아니할때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데 자기는 안하겠다고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씨름해서 이기면 지고 져야 이기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사 한분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일본에 가서 선교사가 되라 그렇게 했는데 그는 “하나님 내가 교회를 한국에서 세워서 일본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겠습니다.” 그리고 순종 안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변역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일본에 가라” 했는데 “아니요. 나는 한국에서 교회를 세워서 많은 선교사를 양성해서 일본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할줄 아느뇨?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지 그는 결국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가 어느정도 성장, 발전했는데 교회에 큰 분쟁이 생겨서 교회가 풍비박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교회를 지켜달라고 기도할 때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네가 일할곳이 아니지 않느냐? 나는 너를 일본에 가라고 했는데 너는 왜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러므로 너가 목회하는 이 목회장소가 풍비박산이 되지 않느냐?’ 그는 크게 회개하고 그 교회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일본에 건너가서 지금 일본에서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의 부르심에 불복종할 때 끊임없는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십니다. 그 임하신 사명을 등한이 여기면 안됩니다. 그것에 복종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중국의 순임금이 하루는 신하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명령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희에게 망태기 하나씩을 줄터이니 내가 정한 우물에 가서 물을 하나 가득히 망태기에 담아서 오너라.” 그런데 15명의 신하에게 망태기 하나씩을 주었는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망태기는 엉성엉성하게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물을 어떻게 망태기에 담아 옵니까? 14명의 신하는 망태기를 가지고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망태기에 물을 담아오라는 임금님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못담아 오다가는 혼이 날테니까 에라 줄행랑을 치자.” 도망을 치는데 그중에 한 사람은 우물에 가서 망태기에 물을 담습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망태기에 부으니까 다 빠져 버렸지요. 또 퍼서 담고 또 퍼서 담고. 아침부터 해가 질때까지 물을 퍼 담았습니다. 사람들이 다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저런 멍청이 같은 놈이 어딨느냐?” 그러나 이 사람은 임금님이 명령했기 때문에 자기는 불합리한 일이라도 명령에는 복종해야 된다. 저녁이 되어서 이제는 우물에서 물이없습니다. 하도퍼서 망태기에 부었기 때문에 우물에 물이 없었어요. 그래서 물이 있는가 없는 살펴 보려고 우물밑을 보니까 우물 밑바닥에 큰 금덩어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는 금덩어리를 건져 내었습니다. 그래서 망태기에 담고 임금님에게 가서 “임금님! 하루종일 물을 퍼서 망태기에 담아도 물은 다 빠져 나가고 물은 남지 않지만 나중에 우물물이 말라서 보니 금덩어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임금님에게 가져 왔습니다. 임금님이 껄껄 웃으면서 “내가 일부러 우물속에 금덩어리를 넣어 놓았느니라. 내 명령에 복종하느냐 복종 안하느냐 시험을 해보았는데 14명은 다 도망을 쳐버리고 너만은 우직스럽게 순종해서 나의 명령을 지켰으니 금덩어리는 네것이다. 가져 가거라.”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안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가 되든 이해가 안되든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라고 하실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할 것이 아니라 순종할 것입니다. 이해는 그후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순종이 먼저 실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항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시편 25편 10절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베드로전서 5장 6절로 7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하나님을 이기려고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기꾼이라는 이름인 야곱으로 인생을 살면서 항상 시련과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태어났을때는 다 야곱입니다. 꾀돌이입니다. 사기꾼들입니다. 그래서 늘 시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면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나님의 은혜로 복과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면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자라. 졌는데 하나님은 이긴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졌으나 인생사에는 하나님이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항복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야곱으로 일생을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 살것이냐 하나님과 씨름해서 져서 이스라엘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 하셔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승리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결정해야 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삶속에 다가온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들은 이모저모로 피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변명을 말하고 하나님과 다투고 씨름하고 하나님을 이기려고 할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등대를 이기려고 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의 등대인 하나님을 이기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비켜 서지를 않습니다. 비켜 설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항복하고 비켜서고 명령에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 삶속에 그렇지 못할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크고 적은 일에 너무나 하나님과 다툽니다. 하나님 이해할수 없다고 자꾸 고개를 흔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복종할것밖에 없사오니 복종하고 순종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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