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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저편 아이들의 보호자

출애굽기 최만자............... 조회 수 3759 추천 수 0 2003.05.13 18: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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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22:22-23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우리 저편 아이들의 보호자


요즈음 가족관계의 순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고 있습니다. 가족의 관심의 1순위는 자녀들이고, 2순위는 애완 동물, 3위는 배우자, 4위는 도우미, 5위는 가까운 친지, 6위는 부모라고 합니다. 시골에서 살고 있는 부모가 아들집에 다니러 와서 며칠 지나다가 아들 내외에게 '강아지 보다 못한 6순위는 돌아간다. 잘 살아라'고 하고 자기 거처인 시골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부모에 대한 경미한 관심을 풍자하는 것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1순위 자녀에 대한 지나친 애정의 편중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는데, 저는 오늘 이 자녀 관심의 측면에서 생각하려고 이 이야기를 서두로 잡았습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깊은 사랑은 중요하고 귀중한 것이지만 내 자식만 귀하게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자녀 사랑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사실과 그 사랑을 혈연관계를 넘어서 확대하기 위한 노력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과거의 어린이 문제는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의 횡포, 어른들의 일방적 태도가 어린이들을 비인격화시키고 비인간적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한 비판에 집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른들은 아이들을 아직 인격이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또 소유물로 생각하여 함부로 대하거나 그 존재 의미를 인정하지 않으며 어른 마음대로 아이들의 문제를 결정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녀에 대한 일방적 권위주의, 가부장적 군림 등에 대한 비판이 크게 대두되고 이제는 민주적인 부모상들이 제시되며 어린이의 권리를 인정하는 운동들도 많이 전개되었습니다. 요즈음은 아이들 기 살리기가 너무 지나쳐 교육문제가 된다고 말하기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정말 거의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은 끔찍하게 위하고 온갖 애정을 퍼부어 줍니다. 특히 어린이날을 맞은 때에는 선물이며 놀이동산으로 나들이 가기, 좋은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것 먹기 등 아이들을 위해 많은 것들을 베풀고 있습니다. 혼자 지내는 친구가 자식 가진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정말이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제 자식이라면 껌뻑들 죽더라고 자신의 느낌을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 혈연의 자녀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그들을 위하고 사랑합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숭고한 사랑을 부정적으로 생각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녀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 부모의 그러한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들의 이러한 사랑이 오직 혈연적 관계에 한정되어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는 이기적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이로 인한 사회적 관계가 왜곡되게 나타나게 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번 어린이날을 맞으면서 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 한번 자신의 삶의 태도를 돌이켜보고 내 자식이 아닌 우리 저편에 있는 아이들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우리 저편의 아이들이라고 제목을 말한 것은 우리가 금지옥엽 끔찍하게 생각해서 온갖 사랑을 퍼부어 그 사랑을 받고 사는 아이들이 아닌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이들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우리가 돌아보면 너무나 많은 어린이들이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고아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대신 기아, 곧 버려진 아이들의 문제가 심각하고 고아원 아닌 보육원에서 그들이 보호받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버려지는 경우는 미혼모 자녀인 경우와 생활고로 인한 가정해체가 대부분입니다. 미혼모의 자녀일 경우는 그 상당수가 해외로 입양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고아 수출 제1위국으로 지적 받을 만큼 많은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하고 있습니다. 6·25이후 14만 명이 해외로 입양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 중 미혼모 자녀가 83퍼센트나 된다고 합니다. 현재도 매년 2천 명 이상이 입양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입양아는 좋은 가정에 잘 입양되어 잘 자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의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입니다. 오래 전이지만 미국에서 입양아 상담을 하고 있는 후배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입양아 가운데는 극심한 심리적 갈등으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양부모와의 갈등,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 등으로 자해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양부모를 살해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 양육과정의 고통을 우리가 얼마나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무관심하고 있는 그들의 어머니들인 미혼모들은 또 얼마나 큰 고통 속에 살고 있겠습니까? 미혼모를 돌보는 어느 기관의 직원이 말하기를 그들이 출산해서 초기 양육기까지만 기관에 있게 하는데 외부와의 깊은 단절은 물론이고, 아이와 이별로 인한 정신적 충격 속에 큰 고통을 당하며 산다고 합니다. 날로 증가하는 미혼모 문제를 도덕적 차원에서 비난만 하거나 성적 순결 교육만 강조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그들이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아 갈 수 있고 안정되게 출산과 양육을 할 수 있는 제도와 시설의 확장이 불행한 아이들과 여성들의 수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고 문제로 발생하는 문제는 아버지는 대부분 알콜 중독이 되고 가정폭력이 계속되고 어머니는 결국 가출하고 아버지도 종래에는 사망하거나 가출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입니다. 그나마 할아버지, 할머니가 양육을 맡는 아이 경우는 다행이지만 그들도 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까운 친척들도 아이들의 양육을 맡을 조건이 되지 않거나 대부분 이를 기피하기 때문에 결국 가난과 어른들의 왜곡된 생활로 인하여 아이들이 희생물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이 보육원인데 현재 시설로 감당이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의 시야를 더 멀리하여 지금 이라크 전쟁 때문에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 당하고 있을 까 생각하게 됩니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의 재난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이들은 의례 노약자와 어린이, 여성들입니다. 이라크 전쟁통에 부모 친척을 잃은 아이들이 얼마이겠으며 또 부상당하고 중태에 빠져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미군 폭격으로 두 팔을 잃고 온 몸에 중화상을 입은 12세의 알리 소년을 소개한 신문은 이런 경우는 오히려 평범한 편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대부분 중상자이며 이라크 병원은 이런 아이들로 넘쳐나고 있다고 합니다. 약품이나 제대로 된 의료장비가 없어 단순치료나 응급처치만 할 뿐 큰 수술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많은 아이들이 전쟁의 공포로 악몽, 복통, 심지어 설사와 야뇨증 등을 일으키며 정신적 심리적 질병을 앓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가난하여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의 난민 어린이들의 기아현상에 우리가 가슴 쓰렸는데, 지금은 북한 어린이들의 굶주림 때문에 마음이 둥둥거립니다. 제가 1994년 연변에 갔을 때 이미 그 때 들은 이야기가 북한 어린이 상당수가 구류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약품도 없고 양식도 없어 그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신체 장애아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유니세프 북한 주재대표는 지난 4월 15일에 신문에 밝히기를 '북한에서 오는 6월이면 모든 영양제, 의약품이 떨어져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어린이 7만 명이 사경을 헤매게 될 것이라'며 대북 원조를 호소하였습니다.

  이뿐이겠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이〈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를 보셨는지요? 저는 몇 해전 이 영화를 보고 한편으론 해맑은 웃음이 나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기도 했습니다. 지극히 가난한 한 중동지역 가정의 남매가 신발이 하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그 신발 하나로 둘이서 학교를 오가기 위해 오전 수업을 하는 오빠가 오후수업의 누이가 늦지 않게 학교로 가게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 달리기를 하는 모습, 달리기 시합에서 이등을 하면 신발을 타게되기에 이등을 하려고 애를 썼는데 일등을 하고 말아 슬퍼하는 아이 모습을 보면서 저 아이들이 밝고 맑은 천국 자체이구나 하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가 가난을 극히 미화만 하고 사회의 불평등한 경제구조에는 너무 무관심하다는 평을 받긴 합니다만, 이 영화는 비록 가난하지만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정상적으로 받고 자라 아름다운 마음과 성품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가난이 문제이지만 가난 때문에 아무도 왜곡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극심한 빈곤 상황에서는 아이들은 노동력으로 착취당하거나 팔려 가는 등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의 쓰레기 더미에 형성된 스모키 마운틴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쓰레기 수거로 생계를 유지하도록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데, 쓰레기 소각장의 유해 가스로 인해 정산인 아이큐를 가진 어린이가 20명중 1명 꼴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계축구 4강을 자랑하는 월드컵 신화의 뒤안길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어린이들이 심지어 5-6세 어린이도 있다는데 그런 아이들이 공 하나에 100-150원을 받고 시력을 잃어가며 바늘에 손을 심하게 찔려가며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적게는 수 만 명 많게는 수십 만 명의 어린이들이 가난한 자기나라의 수입증강을 위해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가정들에서는 딸들을 매매하여 생존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중국이나 인도 등의 나라들에서는 아직도 딸을 팔아 자신들의 생존을 유지해 나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저 편에 있는 고통 당하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생각하면서 '고아를 학대하지 마라'는 성서의 계명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출애굽기 22:22-23에서는 단순히 고아를 잘 돌보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는 대단히 엄격한 명령이 내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 학대하다-te annun은 히브리어는 출애굽기 1장 11-12절에서 애굽의 강제노동에 의하여 학대당하는 그러한 노동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이 단어는 강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곧 과부들이 강간당하고 고아들이 강제노동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이를 강력하게 금지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호소하면 하나님께서 그 호소를 듣고 대신 복수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법령의 동기는 하나님께서는 약자들의 외침을 꼭 들어주신다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원한을 반드시 복수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상에 보호자가 없는 경우는 하나님이 친히 저들의 보호자로 나서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약자를 함부로 하고 얕보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며 하나님은 철저히 저들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들 곧 사회적 요 보호자들의 권리를 복구시키고 그들의 복수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과부와 고아의 압박자는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아내와 아들은 과부와 고아가 될 것이라고 압박자에게 경고합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회에서 보호자가 없어 고통 당하는 자, 그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명령하신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그분의 모성적 속성인 연민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노예로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을 보고 그이 연민이 떨려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은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힘없어 억압당하는 자들 앞에서 그의 연민이 떨려 작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억압당하는 자의 보호자입니다.  

  보호자가 없는 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계명의 배경은 고대 씨족사회 공동체의 특성에 있다고 보입니다. 대 가족이 1차 단위가 되고 가족과 가족들이 어울려 씨족사회를 이룬 고대 유목민사회에서는 철저하게 공동체의 특성을 가졌습니다. 가장은 가족의 보호와 자기 집에 몸붙여 사는 자도 보호할 책임을 가졌습니다. 이 가족들이 모여진 씨족은 동일한 장소에서 살면서 여러 가족들은 씨족 테두리 안에서 모두가 혈연관계를 맺고 공유재산과 공동과업을 가지고 공동체로 살았습니다.  한 개인은 가족 공동체 안에 예속되어 있을 때에야 생존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가족이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대한 사회적 단위이며 그 가족 안에서만 생존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보호가족을 잃을 경우에는 생존의 위협을 크게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씨족사회의 특성으로 상호 연대의식과 공동운명의식으로 상호 밀접히 연결되어있다 하지만 그래도 직접 보호자를 잃은 경우 고아나 과부들은 쉽게 다른 이들에 의해 고통과 착취를 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족을 잃은 이들은 기본적 생존권 보장이 되지 않았고 개인의 안전이 위협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위협 상황에 대해 성서는 씨족이 이를 연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남편 잃은 과부, 부모 잃은 고아,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씨족 공동체가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이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과부보호법은 시형제 결혼제도와 아니면 친정 부모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호 망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이것이 잘 실행되지 않아서 과부들이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했고 가난하게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남편이 재산을 많이 남겨 놓은 과부의 경우는 예외였습니다만(예를 들면 유딧과 같은 경우)

  고아들도 빈곤과 착취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보호자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들은 보통 씨족의 다른 구성원에 의해 보호받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양친을 잃은 경우는 다른 가족에 입양되었는데 이 경우 자기 유산을 뺏기거나 유기 되기도 하는 등의 위험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사막의 악조건 때문에 가족을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었던 유목민 공동체에서 아직 자기 능력이 형성되지 못한 아이들의 경우에는 고통 당함의 위협이 늘 따랐던 것입니다.

  성서의 계명에 따라서 본다면 사막의 유목민 생활은 상호보호의 연대적 책임감을 고도로 발전시키며 혈연관계에서 벗어나게 된 이들 곧 고아나 과부와 같은 직접 혈연의 보호자가 없게 된 자들을 사회적 공동책임아래 보호하도록 하고 있어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사막생활은 연대의식과 각 구성원간의 일체감의 요구 때문에 빈부 출현이 불가능한 이상적인 평등사회였고, 이스라엘은 늘 이 사막생활을 이상으로 두고 사회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 발생된 빈부 격차와 사회분화, 불평등의 구조로 인한 악의 현실은 그래서 이스라엘 예언자들에게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고아는 하나님의 특별보호 아래 있는 대표적 계층이 됩니다. 그래서 선지자도 이사야나 예레미야도 고아 돌봄을 강조하였고(이사 1:17, 렘 7:6) 욥기는 고아를 학대하는 것은 잔인과 불의한 생동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욥 6:27). 가나안 정착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기원전 600년대의 신명기서에서도 이민자, 고아, 과부의 생존권을 위한 계명은 선포되고 있습니다. 신명기서는 이를 가난한자에 대한 자선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라고까지 규정합니다. 남기는 곡식, 포도송이, 올리브 열매는 동정이나 자선사업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의 권리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씨족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공동체적 연대책임이 강조 될 수도 없는 현대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상은 씨족 공동체의 연대적 책임의식을 추구하는 것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힘없는 이들의 보호자로 친히 나서신 하나님의 연민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연대적 책임의식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의 혈연관계의 범위를 보다 광범위하게 확대하여 나가는 노력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연민에 참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 씨족 공동체에서 부모 잃은 아이들을 친족이 책임졌듯이 우리 친족 가운데 부모 잃은 아이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는 일, 우리주변의 미혼모나 혹은 이혼 등의 이유로 한 부모 가정이 된 자녀들에 대하여 관심 갖기, 또는 생활고로 해체된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연대적 책임의식의 확장을 노력함으로서 오늘의 그리스도인이며 성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전쟁의 상처로 깊은 고통에 있는 아이들, 지극한 가난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가련한 아이들,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지구촌의 어린이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가지는 심성을 성숙시켜 나가는 일이 바로 오늘의 하나님의 일에 참여함이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연대적 책임의식의 확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저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제 아이들이 3-4세 적이던 오래 전에 저는 가정이 해체된 조카아이를 맡아 한 3년 키운 적이 있습니다. 해외입양을 시키려는 결정을 친척들이 내린 상태에서 제가 맡아 키우겠다고 나서서 맡았습니다. 그러나 평생 그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던 제 결심은 3년을 넘어서지 못하고 재혼한 아이 아버지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하고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 아쉬움으로 지금도 그 딸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합니다. 또 저는 보육원에 있는 자매를 얼마간 돌본 적이 있습니다. 생활고로 가정이 해체된 경우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주말마다 집에 와서 함께 지내기도 하고 가끔씩 저희가 찾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짧게 끝나고 더 이상 노력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어떠한 형태로든 고통 중에 있는 어린이들에 대하여 우리가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우리의 끔찍한 자기자식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성서적 삶이며 성서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번 어린이날을 맞은 우리가 한번 깊이 숙고해 보자는 의미에서 이상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씨족공동체의 이상인 연대책임의식의 실천이요 친히 고아들의 보호자가 되신 하나님의 연민의 속성을 우리가 닮아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하나님의 연민의 사랑을 극대화하여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힘없고 요 보호대상인 어린아이가 하나님나라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이 어린이 주일에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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