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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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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상태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6.10.8주일설교 |
출애굽기 20:3~6, 12
추석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고향에 다녀오신 분들은 오가는 길에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요. 그래도 오랜만에 가족친지들이 함께 모여서 지난 세월에 대한 정담도 나누고 푸짐한 잔치를 즐기다 보면 각박한 현대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는 해소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명절만 되면 고민이 된다는 분도 계십니다. 제사 문제 때문에 늘 마음이 편치 않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교회가 적절한 지침을 제시해 주지 않거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교리적으로만 다그치는 바람에 믿지 않는 가족들과 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 안이 모두 기독교인이고 추도예배를 드리는 가정은 고민될 게 없겠지요. 그러나 제사를 드리는 가정에 참여해야 되는 분은 고민이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제사 문화에 대한 초기 천주교의 이해]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던 선교 초기에, 기독교인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제사문제였습니다. 개신교보다 약 100년이나 먼저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는 죽은 사람을 위해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는 십계명의 첫 계명과,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두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천주교는 제사문화를 거부하게 되었고, 이런 천주교인들의 태도는 조상에 대한 효를 인륜도덕의 기초로 삼는 당시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조상의 은공을 부인하는 불효막심한 죄고, 그런 파렴치한 일을 옳다고 가르치는 천주교는 인륜 도덕을 해치는 사악한 종교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엔 당파 싸움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다산 정약용 선생을 비롯해서 주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파의 학자들이 천주교에 많이 귀의했기 때문에 당시 집권 정치인들로부터 대대적인 박해를 받게 되어 수만명이 순교를 당하는 엄청난 비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천주교에서는 제사제도를 허용하는데, 개신교에서는 대부분의 교회가 제사제도를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사를 허락한 천주교회에 대해서 우상숭배를 한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서도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제사를 지내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보수 목사로 알려진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도 우리나라의 전통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말했다가 두고두고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 우상숭배인가?]
그러면 왜 이렇게, 제사 문제가 교회마다 해석이 다르고 혼선을 빗고 있는 것일까요? 그 중요한 이유는, 제사문화에는 윤리적인 성격과 종교적인 성격이 함께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이어주신 조상님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효심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십계명의 제 5계명,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라는 말씀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십계명이 주어질 당시에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이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사는 것과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부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부활신앙에 눈을 뜨게 된 때는 바벨론 포로 시기 이후 조로아스터교와 접하고 난 이후부터니까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 자손이 모래알처럼 번성하는 복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또한 구약의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장수한 것으로 기록되는 이유도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사는 것이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임을 나타내는 기록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복,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살기 위해 꼭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모 공경이 단순히 직계 부모,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이상은 제외하거나 돌아가는 분은 제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조상을 대대로 기렸습니다. 다윗을 거슬러 올라가고, 모세도 거슬러 올라가고,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조상들을 기렸습니다.
[어느 한 편만 옳은 것일까?]
그러나 조상을 공경하고 기리는 그 마음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지만, 우리의 전통 제사문화에는 좀 더 깊은 종교적 의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상님을 단지 존경하고 감사하는 차원을 넘어 여전히 그 인격이 혼으로 살아있고, 제사를 잘 드려야 가문이 복을 받고 잘 살게 된다는 ‘조상신 숭배 의식’은 종교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 또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종교적 요소보다는 윤리성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상을 신으로 섬긴다는 의식은 점차 사라지고 ‘효심’에 근거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제사 드린다면 우상숭배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제사 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견해입니다. 천주교나 일부 개신교에서 제사문화를 허용하는 것도 이런 점을 인정하는 것이구요.
저 역시 제사문화를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명절이나 기일에 조상님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감사하며 드리는 절은 우리가 부모님이나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 문화를 그대로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현대사회에서 짚어볼 점은 있습니다. 조상님께 감사하고 공경한다는 그 전통문화의 내용은 좋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건 없건 과도한 음식을 장만해야 하는, 지나칠 정도로 소비적인 형식 자체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좋은 내용, 즉 조상님을 공경하는 전통예절은 보전하되, 문제가 있는 형식으로서의 제사제도는 좀 더 간소하게 바꾸어도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에서 드리는 ‘추도예배’ 자체가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사제도를 우상숭배로 거부하는 배타적 외래문화로서의 추도예배가 아니라, 형식은 바꾸더라도 조상님께 감사하고 공경하는 옛 제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내용으로 계승하는 추도예배라면, 훌륭한 대안문화의 하나로 인정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전통문화로서의 제사의례도 그대로 좋고 또한 우리 기독교의 추도예배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추도예배를 무가치한 외래문화로 규정한다든가 전통적인 제사의례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어느 한 쪽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극복해야 할 문화적 배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에,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찾아가서 누가 왕이 될 만한 인물인지 알아보려고 했을 때, 풍채 좋은 맏아들을 보고 마음을 뺏기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은 풍채 좋은 장사형의 맏아들이 아니라 앳되고 예쁘장한, 소녀같은 용모의 다윗이었지요.
말씀을 정리해야 되겠네요. 추도예배를 계속 드려왔고, 지금도 여전히 추도예배에 더 의미를 두시는 교우님은 추도예배를 계속 드리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사의례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교우님들은 마음 편하게 제사를 드리시면 좋겠습니다.
3천 년 전, 다윗가문을 방문한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추석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고향에 다녀오신 분들은 오가는 길에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요. 그래도 오랜만에 가족친지들이 함께 모여서 지난 세월에 대한 정담도 나누고 푸짐한 잔치를 즐기다 보면 각박한 현대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는 해소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명절만 되면 고민이 된다는 분도 계십니다. 제사 문제 때문에 늘 마음이 편치 않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교회가 적절한 지침을 제시해 주지 않거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교리적으로만 다그치는 바람에 믿지 않는 가족들과 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 안이 모두 기독교인이고 추도예배를 드리는 가정은 고민될 게 없겠지요. 그러나 제사를 드리는 가정에 참여해야 되는 분은 고민이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제사 문화에 대한 초기 천주교의 이해]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던 선교 초기에, 기독교인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제사문제였습니다. 개신교보다 약 100년이나 먼저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는 죽은 사람을 위해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는 십계명의 첫 계명과,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두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천주교는 제사문화를 거부하게 되었고, 이런 천주교인들의 태도는 조상에 대한 효를 인륜도덕의 기초로 삼는 당시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조상의 은공을 부인하는 불효막심한 죄고, 그런 파렴치한 일을 옳다고 가르치는 천주교는 인륜 도덕을 해치는 사악한 종교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엔 당파 싸움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다산 정약용 선생을 비롯해서 주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파의 학자들이 천주교에 많이 귀의했기 때문에 당시 집권 정치인들로부터 대대적인 박해를 받게 되어 수만명이 순교를 당하는 엄청난 비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천주교에서는 제사제도를 허용하는데, 개신교에서는 대부분의 교회가 제사제도를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사를 허락한 천주교회에 대해서 우상숭배를 한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서도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제사를 지내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보수 목사로 알려진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도 우리나라의 전통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말했다가 두고두고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 우상숭배인가?]
그러면 왜 이렇게, 제사 문제가 교회마다 해석이 다르고 혼선을 빗고 있는 것일까요? 그 중요한 이유는, 제사문화에는 윤리적인 성격과 종교적인 성격이 함께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이어주신 조상님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효심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십계명의 제 5계명,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라는 말씀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십계명이 주어질 당시에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이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사는 것과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부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부활신앙에 눈을 뜨게 된 때는 바벨론 포로 시기 이후 조로아스터교와 접하고 난 이후부터니까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 자손이 모래알처럼 번성하는 복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또한 구약의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장수한 것으로 기록되는 이유도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사는 것이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임을 나타내는 기록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복,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살기 위해 꼭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모 공경이 단순히 직계 부모,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이상은 제외하거나 돌아가는 분은 제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조상을 대대로 기렸습니다. 다윗을 거슬러 올라가고, 모세도 거슬러 올라가고,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조상들을 기렸습니다.
[어느 한 편만 옳은 것일까?]
그러나 조상을 공경하고 기리는 그 마음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지만, 우리의 전통 제사문화에는 좀 더 깊은 종교적 의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상님을 단지 존경하고 감사하는 차원을 넘어 여전히 그 인격이 혼으로 살아있고, 제사를 잘 드려야 가문이 복을 받고 잘 살게 된다는 ‘조상신 숭배 의식’은 종교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 또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종교적 요소보다는 윤리성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상을 신으로 섬긴다는 의식은 점차 사라지고 ‘효심’에 근거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제사 드린다면 우상숭배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제사 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견해입니다. 천주교나 일부 개신교에서 제사문화를 허용하는 것도 이런 점을 인정하는 것이구요.
저 역시 제사문화를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명절이나 기일에 조상님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감사하며 드리는 절은 우리가 부모님이나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 문화를 그대로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현대사회에서 짚어볼 점은 있습니다. 조상님께 감사하고 공경한다는 그 전통문화의 내용은 좋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건 없건 과도한 음식을 장만해야 하는, 지나칠 정도로 소비적인 형식 자체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좋은 내용, 즉 조상님을 공경하는 전통예절은 보전하되, 문제가 있는 형식으로서의 제사제도는 좀 더 간소하게 바꾸어도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에서 드리는 ‘추도예배’ 자체가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사제도를 우상숭배로 거부하는 배타적 외래문화로서의 추도예배가 아니라, 형식은 바꾸더라도 조상님께 감사하고 공경하는 옛 제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내용으로 계승하는 추도예배라면, 훌륭한 대안문화의 하나로 인정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전통문화로서의 제사의례도 그대로 좋고 또한 우리 기독교의 추도예배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추도예배를 무가치한 외래문화로 규정한다든가 전통적인 제사의례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어느 한 쪽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극복해야 할 문화적 배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에,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찾아가서 누가 왕이 될 만한 인물인지 알아보려고 했을 때, 풍채 좋은 맏아들을 보고 마음을 뺏기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은 풍채 좋은 장사형의 맏아들이 아니라 앳되고 예쁘장한, 소녀같은 용모의 다윗이었지요.
말씀을 정리해야 되겠네요. 추도예배를 계속 드려왔고, 지금도 여전히 추도예배에 더 의미를 두시는 교우님은 추도예배를 계속 드리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사의례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교우님들은 마음 편하게 제사를 드리시면 좋겠습니다.
3천 년 전, 다윗가문을 방문한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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