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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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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찬교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6.11.12주일설교 |
출애굽기 3:14, 요한복음 17:3
1. 영생이란
공동번역 히브리서 6장 1절에 “우리는 초보적 교리를 넘어 서서 성숙한 신앙의 경지로 나아갑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은 초보적 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성숙한 경지에 이른 신앙인이라고 믿고 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어느 구절을 제일 좋아하시나요.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3절을,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요한 웨슬레는 요한1서 4장 18절을, 유영모 선생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3절을 좋아하셨답니다.
요한은 17장 3절에서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문인데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라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이 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하튼, 여러분은 영생을 오래 사는 ‘장생’이라고 혹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시나요? 다음 이야기를 통하여 영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당나라 때 공부를 많이 한 덕산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만 하고 있는 스님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을 하는 스님들이 있는 절로 떠났습니다. 절 앞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점심때였습니다. 그는 길가의 떡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점심 좀 주세요.”
“어서 오시오, 어서 짐을 내려놓구려.”
떡을 파는 할머니는 친절하게 말하며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짐은 참 무거웠습니다. 피땀 흘려 연구한 책을 가져온 것입니다. 떡 파는 할머니는 깜짝 놀라 이 무거운 것이 다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자기의 연구논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굉장한 학자이구려.”
그 말에 스님은 만족한 얼굴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 물을 것이 있소. 내가 지금까지 깨치지 못한 말이「금강경」속에 있는데 그것은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란 말이요. 당신이 지금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도대체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하는 것이요?”
과거심은 지나갔으니 찍을 수 없고 미래심은 오지 않았으니 찍을 수 없고 찍을 수 있다면 현재심 뿐인데 현재심도 찍으려는 순간 사라지고 마니 현재심이라고 찍어질 것 같지가 않다. 스님은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섰습니다. 노파는 떡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산골 노파의 질문하나 대답할 수 없는 스님은 슬펐습니다. 자기의 입장이 어딘가 잘못된 것임을 느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자기의 입장이 뚜렷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석가의 말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외우고 그것을 해석해 보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자기의 시간관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관이었습니다. 마음에 점을 찍었다는 말은 입장을 가졌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점심이야기를 통하여 영생은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을 초월한 즉 4차원을 넘어선 것이지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말은 시간을 초월한 즉 생사를 초월한 깨달음이 영생이라는 것이죠. 어떤 깨달음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죠, 그런데 이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알 것 같으면서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스님은 자기가 가져온『금강경』주석을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이 잘린 사람처럼-사실 노파의 보이지 않는 칼에 목이 잘리기도 했지만은- 노파 앞에 무릎을 꿇으며 천 번 배례하고 불씨를 부탁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 줄 스승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노파는 여기서 십리를 더 가면 용담원에 용담 스님이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천재일우에 만난 이 스승에게 그는 마음의 문을 열고 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스님은 밤도 늦었으니 물러가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서야 덕산은 자기로 돌아와 스님께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은 칠흑 같은 암흑이었습니다. 덕산은 첫 길이라 동서를 분간할 수 가 없었습니다. 덕산은 스님을 향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용담은 초에 불을 붙여 덕산에게 주었습니다. 덕산이 토방으로 내려서자 용담 스님은 촛불을 탁 불어 꺼 버렸습니다.
그 순간에 덕산은 굉장히 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덕산이 가만히 서 있으니까 차차 훤해지기 시작했으며 차츰 별이 나타나고, 먼 산이 보이기 시작하여 대문이 나타나고, 어느 정도 훤해진 속에서 덕산은 자기발로 걸어서 대문을 나서 자기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금년 여름 어느 날 밤 저는 친구와 함께 당진의 대호방조제에 밤낚시를 하러 갔었습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더군요. 왜 그 별들이 낮에는 보이지 않았을까요? 태양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요. 클 태 거짓 양 즉 큰 거짓인 태양에 가려서 저 광활한 우주가 보이지 않은 것이죠. 태양을 꺼야 비로소 우주가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하이데거를 전공한 외국어대 이 기상 교수는 태양을 끄라고 얘기합니다.
촛불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알고 있는 지식, 즉 이성의 한계를 깨닫고 그 한계를 넘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나아가야 깨달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생각을 넘어서 있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은 우상일 뿐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병아리가 되듯이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자기중심적 사고의 틀을 깨고 보다 넓고 다른 높은 차원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2. 하나님 체험
(1)모세의 하나님 체험
그러면 이런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체험한 분이 누가 있을까요? 모세와 예수님이 떠오르네요. 먼저 모세의 경우를 보지요.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엘(로힘)(2,500회)이라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고, 이집트는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지요. 엘은 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태양신은 힘이 있는 보이는 신이었지요. 모세는 ‘보이지 않지만 계시는 분’인 ‘여호와’(6,700회)을 체험하지요.
‘여호와’는 ‘ehyeh’라고 발음되는 히브리어인데, 모세가 하나님을 체험한 출애굽기 3장 14절 “ehyeh aser ehyeh”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동사 어근 ‘hyh’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닌 ‘미완료형 동사형’의 이름이랍니다. ‘hyh’의 동사는 1인칭 단순 현재시재, 미래시재, 사역동사로 쓰일 수 있는데, 위 구절은 각각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희와 함께 하리라', ‘존재자를 있게 한 존재'의 뜻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존재 중심으로 보면 스스로 있는 자요. 존재자 중심으로 보면 존재자를 있게 한 존재지요. 그러니 첫째, 셋째가 하나요. 또한 시간을 초월하면 셋이 하나이지요. 모세는 이런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죠. 기독교는 계시종교인데 무슨 체험이냐고요? 계시와 체험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보면 계시요, 사람중심으로 보면 체험이지요. 별이 보인다는 것은 별이 보여주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이죠. 모세가 깨닫고 체험한 것은 생명이 있게 한 분, 즉, 생명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만물의 어버이)이라는 거죠. 그리고 이 근본체험을 하고 이스라엘백성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킵니다.
(2) 예수님의 하나님 체험
다음 두 성경구절을 통하여 예수님의 하나님체험에 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 나오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요한복음 10장 38절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내재)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초재)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자비라는 히브리어 원어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어머니의 품속 글자의 복수형이라죠. 그렇다면 이 두 구절을 동양적 언어로 가장 잘 이해한 말이『주역』「계사전하」5장에 나오는 窮神知化가 아닐까 합니다. 窮자는 굴속에 몸이 들어 있는 또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의 품속에 우리 몸이 들어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글자이니까요. 그리고 요한복음 10장 38절 말씀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비유는 “태양을 머금고 있는 이슬의 모습” 또는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데 알 속에서 병아리가 생겨 그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3.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슬 속에 있는 태양, 알 속의 병아리인 예수님을 여러분은 어떤 분이라 생각하세요. 마태복음은 유태사람을 위해서, 마가복음은 로마사람을 위해서, 누가복음은 희랍사람을 위해서, 요한복음은 동양 사람을 위해서 씌어졌다고 합니다. 어느 문화권이냐에 따라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죠. 그것은 그 문화권의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하기 쉽도록 썼다는 것이겠죠. 그래서 요한복음 1장 중 “데오스 엔 호 로고스”를 한국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번역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俱?和尙 凡宥所問 ?竪一指 구지화상 범유소문 지수일지
구지화상은 누가 와서 어떤 질문을 하여도 손가락 하나를 내 세웠습니다. 구지 밑에는 심부름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자기가 스님의 뜻을 아는 것처럼 손님이 와서 ‘스님 계신가?’ 하고 물으면 으레 손가락을 내세웠습니다. 이 손가락에 깊은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 사람들은 이 어린애에게 질려서 스님을 만나 보지도 못하고 가버리곤 했습니다. 물론 스님을 만나도 손가락을 내세우는 것 이외에 아무 대답도 없을 것이 너무도 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선 어린애한테 우롱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구지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당장 어린애를 불러 사람들이 나의 행방을 물었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구지 앞에서도 손가락을 내세웠습니다. 그때 구지는 가혹하게도 어린애의 손가락을 잘라버렸습니다. 어린애는 피가 나는 손을 움켜잡고 치료하려고 뛰어갔습니다. 그 때 스님이 뒤에서 불렀습니다. 어린애는 스님의 부름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때 스님이 허공을 향하여 손가락을 높이 세웠습니다. 어린애도 따라서 손가락을 높이 세우려고 하였으나 자기의 손가락은 이미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자기의 가슴이 메어 터지게 떠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구지는 왜 손가락을 쳐들었는가 하면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손가락을 쳐든 것입니다. 물론 손가락 하나를 위로 올렸다는 말은 올라가란 말도 되고, 참을 찾으라는 말도 되고, 억만 가지로 해석해도 맞아 들어갈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리를 배운다고 또는 성경을 본다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자기의 생각을 성경의 특정구절로 합리화해서 교리를 만들어 절대화하는 일이 있다면 차라리 덕산이 불경을 불사르거나 구지가 손가락을 자른 것처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고린도후서 3장 6절에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라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동전이 딸랑 떨어지는 순간 구원받는다.’와 같은 교회지도자들의 교리가 절대화되었을 때 루터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은 옳지만 지금은 교리나 성경이 우상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나 성경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니지 않나요? 교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지 교리나 성경을 문자대로 받아 들여 하나님을 가리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각 하에서 예수님에서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글 개역판은 요한복음 1장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어성경 United Bible Societies의 Today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에는 “Before the world was created, the Word already existed; he was with God. and he was the same as Go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곧” 과 “the same as”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곧’이라는 한자말은 ‘즉’이지요. 이 ‘즉’의 의미는 다음 말에서 쉽게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사즉생과 사同생” 두 말은 다른 말이지요. 예수 즉 여호와지만 예수 동 여호와와는 다른 것이지요. 그리고 로고스는 ‘말씀’보다는 ‘도’로 번역하는 것이 한국 사람에게 더 와 닿지 않을까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도통한 도인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태초부터 계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당나라 때 구마라습의 제자 승조가 30세에 박해를 받아 죽음을 당하기 직전 지은시가 있습니다.
四大元無主 五蘊本是空 以首臨白刃 猶如斬春風
4대원무주 오온본시공 이수임백인 유여참춘풍
지수화풍의 4대원이 주인이 없는 것이며, 색수상행식(의식되는 상대, 느끼는 감정, 생각하는 사상, 인격적인 행동, 주체의식)의 마음도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이제 내 목이 흰 칼날 밑에 놓여 있다. 봄바람을 자르는 것이나 다를 바가 무엇인가?
마음은 하나님에 속한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말도 내 말이 아니고 한국말이고, 모든 사상은 세계의 사상이지 내 사상이 아닙니다. 사상의 맨 끝으로 올라가면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맨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죠. 예수님의 가르침도 맨 처음부터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죠.
요한복음 1장 11절 “그가 자기 땅 에 오셨다”, 14절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셨다”, 18절 “그 분이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와 14장 9절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은 불교에서 석가를 화신으로 보는 것처럼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불교에서는 우주 전체가 부처라 할 때의 부처는 法身이라 하고, 또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 세상에 와서 남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化身이라 합니다. 예수는 화신이지요. 현존재지요. 예수는 여호수아의 준 말인데, 이 말의 의미는 신명기31장 8절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복을 빌어 줄 때 “여호와께서 친히 그대 앞에서 가시며 그대와 함께 계시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야훼라는 말이 존재라면 예수라는 말은 요새말로 “현존재”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와 14장 24절 “이 말은, 내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廻光返照’라 할 수 있죠. 빛을 돌려서 비춰주는 것인데, 말하자면 햇빛을 달이 받아서 그 달이 다시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주는 것과 같죠. 요한복음 10:33~38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냐고 놓고 유대사람과 예수님의 대화가 나오는 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의 논쟁은 여기서 끝난 것이지요.
아까 해 드린 이야기의 주인공 구두스님에 대하여 설두라는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對揚深愛老俱? 宇宙空來更宥誰 僧向滄溟下浮木 夜濤相共?盲龜
대양심애노구지 우주공래갱유수 승향창명하부목 야도상공접맹구
중생을 사랑하는 늙은 구지스님, 천지가 생긴 이래 이렇게 인간을 사랑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중생을 위해 뗏목을 띄워 주었으니 거친 파도에 눈먼 거북들이 뗏목에 달라붙어 살게 되었구나.
같은 이야기가 종밀이『원각경』을 끝내고 난 후에 자기의 견해를 피력한『원각경소』의 내용 중에 부목맹구난치우(浮木盲龜難値遇)이란 말이 나옵니다. 바다 속에서 오래 산 거북이 너무 오랫동안 깊은 바다 속에 빛을 못 봐서 퇴화하여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이 거북이 나중에 조물주에게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결과 조물주께서 거북의 배꼽에 눈을 하나 허락하였습니다. 이 배꼽 눈으로 무엇을 보고자 자꾸자꾸 밝은 데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거북이 바다 위로 떠서 오래 떠돌아다니다가 떠다니던 부목을 만났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떠돌다가 만났는가 하면 千載一遇다, 천년을 걸려서 한 번 만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 거북이 부목을 붙잡고 몇 해를 돌아다니다가 부목에 생겨난 어떤 구멍, 말하자면 관솔 같은 구멍하고 배꼽 눈이 일치했습니다. 진리의 태양을 본 것이죠.
바로 예수님 같은 분을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것이지요. 예수님은 수천 년의 역사에 한 번 나온 큰 스승이시지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모세와 예수님의 하나님체험과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 저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안들을 생각해 보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밥을 먹고 그 밥의 에너지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 밥은 水昇火降의 생명현상에서 생성되는 것입니다. 물은 보통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불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데, 식물에서는 이와 반대로 물이 올라가고 빛이 내려와서 광합성작용을 하여 우리가 먹는 음식과 산소가 생기지요. 지구는 태양과 세 점을 이은 면적이 일정하게 유지하며 돕니다. 인공위성도 무중력 공간으로 가는데 조금 느리면 떨어지고, 조그만 빨라도 타 버리는데 지구가 이렇게 태양을 도는 것은 신비자체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물에 만약 장력이 없다면 우리는 태양빛에 다 타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유지되니까 광합성작용이 일어나고 지구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주가 하나님의 품속이지요.
이러한 생명현상은 리사이클링을 통하여 지속됩니다. 몇 년 전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전’을 본적이 있습니다. 창조의 신인 ‘브라만’과 파괴의 신인 ‘시바’가 있더군요. 쌀이 만들어지는 것은 브라만이 하고 소화는 시바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화는 사실은 부패의 과정이잖아요. 이런 파괴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는 거잖아요. 죽음도 사실 이런 것이죠. 어느 스님이 잘 먹고 잘 싸야 건강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과정이 잘되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이죠. 사실 몸은 자연, ‘4대원 무주’이지요. 내 몸이지만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숨을 쉴 수도 있고 안 쉴 수도 있는 것이 아니죠. 몸은 자연이니까 자연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건강은 몸 자신을 자연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종족보전에 인센티브를 주셨습니다. 식물에게는 꽃의 아름다움을 주셨고, 사람에게도 아기를 갖고 키우는 데도 기쁨을 주시지요. 이러한 모든 것이 있게 한 분을 저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 예수님 말씀 중에서 기억에 절로 떠오른 것이 있습니까? 저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원숭이를 화를 올린 후 원숭이의 위에 내시경을 들이대면 위가 빨갛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면 미워하는 자신이 상하고 마음에 증오심을 품으면 마귀가 되어 무역센터빌딩을 폭파하고, 그 결과는 부시의 증오를 가져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죄 없는 민간인을 살해하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어떤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숨 쉴 때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 예수님이 우리 속에 부활하신 것 아닐까요? 경제학에서는 천연자원(토지), 물적자본, 인적자본을 생산의 3요소라 합니다.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천연자원에 사람이 일을 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것만큼은 남에게 주어도 손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었으니까요.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 이것을 실천한 사례 몇 가지를 들어 신학자나 목사가 아닌 우리 평신도가 깨달음을 얻고 이것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될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친하게 지낸 목사님께서 여주에 있는 장애인이 있는 곳을 방문하면서 저에게 기독교인이 이자를 받는 것이 맞는지 연구 좀 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올해 노벨평화상과 서울평화상을 동시에 수상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은행가인,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66) 그라민은행 총재는 지난 30여 년 동안 600만 명의 가난한 사람, 특히 여성들에게 신용대출을 해 그 중 58%를 가난에서 구제했습니다. 최근에 신문에 기사가 나왔으니 긴 설명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난지도에서 야학을 할 때 남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다는 것이죠. 희망의 단어가 없었죠, 빈곤 문화죠.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까? ‘이들을 아프리카에 옮겨 농장을 가꾸게 해야지’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잊어 먹고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는 사례를 최근『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읽었습니다. 첫 번째는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의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사례입니다.(629쪽) 에이브러햄 조지는 인도에서 태어나 인도군에 복무하다 퇴역 후 미 우주항공국에 근무하던 어머니를 따라가 뉴욕대학에서 공부하고, 국제금융 분야 소프트 전문회사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 회사를 매각하고는 인도로 돌아가서, 미국에서 번 돈을 이용해 인도를 밑에서부터 변화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그가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책임 있는 신문과 언론인 없이는 인도의 통치 수준이 개선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언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또한 불가촉천민이 사는 방갈로르 외각에 그는 산티브하반 초등학교를 세웠고 이를 더 자랑스러워합니다. 입학생의 자격은 불가촉천민입니다.『세계는 평평하다』의 저자 토머스 L. 프리드먼이 방문해서 이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컴퓨터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 저자가 8살짜리 소녀와 컴퓨터 타이핑 시합을 했는데 그 소녀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세계 어디서든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영어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불가능했던 지난 여러 세기 동안 불가능하기만 했던 경력과 직업을 그 들도 가질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근처에서 살면 언제나 불가촉천민이지만 그들이 다른 곳에 가면, 그리고 적절히 교육을 받고 사회화 교육을 밟는다면 그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산티브하반 학생들에게 프리드먼이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했을 때 그들은 우주비행사, 의사, 소아과의사, 시인, 물리학자나 화학자, 과학자, 외과의사, 탐정, 작가 … 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캄보디아에서 일과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례입니다. 제레미 호켄스타인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뒤 매킨지 컨설팅에 일하다가 같이 일하는 동료와 함께 인생항로를 바꿉니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데이터 입력회사인 ‘디지털 디바이드 데이터’를 캄보디아의 프놈펜에 설립했습니다. 젊은이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05년에는 창업한지 4년 만에 3개 사무실에 170명의 직원을 두고 있습니다.(491~492쪽)
셋째는 문명의 혜택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빌 게이츠 재단의 체계적인 지원에 대한 것입니다. 270억 달러의 자금으로 설립된 빌과 멜린다 게이츠 제단은 질병에 시달리고 기회를 박탈당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원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말라리아로 해마다 100만 명이 죽고 이 중 약 70만 명이 어린이이고, 대부분은 아프리카에 삽니다. 2003년 빌 게이츠 재단은, ‘지구 보전을 위한 대도전’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과학자들로부터 8,000페이지에 이르는 아이디어를 받아 2003년 가을에 14개 도전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출생 직후에 단 한 번의 접종으로 효과가 있는 백신개발, 만성전염병을 치유할 면역법 개발 등이 있습니다. 일 년 내에 75개국 과학자들로부터 이들 문제를 해결할 제안을 받았고, 가장 적합한 제안에 2억 5천 달러의 현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과학적 상상력에 도덕적 호소를 하고 과학계가 실제로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재단의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지난 20년간의 과학기술이 이룩한 놀라운 발전을 볼 때 과제의 일부를 해결할 수단을 가지고 있고, 단지 부족한 것은 자금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아프리카나 인도의 농촌 지역은 보건체계가 망가져 있어 빌게이츠 재단은 무너진 보건체제를 대체할 배달 시스템과 의약품 개발에도 열심입니다.(509~512쪽)
이상의 사례를 통해서 볼 때 비판을 통한 긍정을 거쳐 어려운 자를 위한 실질적인 대안의 모색과 실천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38절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 지라도 그 일을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교우 여러분! 궁신지화 덕지성야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1. 영생이란
공동번역 히브리서 6장 1절에 “우리는 초보적 교리를 넘어 서서 성숙한 신앙의 경지로 나아갑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은 초보적 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성숙한 경지에 이른 신앙인이라고 믿고 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어느 구절을 제일 좋아하시나요.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3절을,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요한 웨슬레는 요한1서 4장 18절을, 유영모 선생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3절을 좋아하셨답니다.
요한은 17장 3절에서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문인데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라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이 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하튼, 여러분은 영생을 오래 사는 ‘장생’이라고 혹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시나요? 다음 이야기를 통하여 영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당나라 때 공부를 많이 한 덕산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만 하고 있는 스님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을 하는 스님들이 있는 절로 떠났습니다. 절 앞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점심때였습니다. 그는 길가의 떡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점심 좀 주세요.”
“어서 오시오, 어서 짐을 내려놓구려.”
떡을 파는 할머니는 친절하게 말하며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짐은 참 무거웠습니다. 피땀 흘려 연구한 책을 가져온 것입니다. 떡 파는 할머니는 깜짝 놀라 이 무거운 것이 다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자기의 연구논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굉장한 학자이구려.”
그 말에 스님은 만족한 얼굴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 물을 것이 있소. 내가 지금까지 깨치지 못한 말이「금강경」속에 있는데 그것은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란 말이요. 당신이 지금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도대체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하는 것이요?”
과거심은 지나갔으니 찍을 수 없고 미래심은 오지 않았으니 찍을 수 없고 찍을 수 있다면 현재심 뿐인데 현재심도 찍으려는 순간 사라지고 마니 현재심이라고 찍어질 것 같지가 않다. 스님은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섰습니다. 노파는 떡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산골 노파의 질문하나 대답할 수 없는 스님은 슬펐습니다. 자기의 입장이 어딘가 잘못된 것임을 느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자기의 입장이 뚜렷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석가의 말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외우고 그것을 해석해 보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자기의 시간관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관이었습니다. 마음에 점을 찍었다는 말은 입장을 가졌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점심이야기를 통하여 영생은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을 초월한 즉 4차원을 넘어선 것이지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말은 시간을 초월한 즉 생사를 초월한 깨달음이 영생이라는 것이죠. 어떤 깨달음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죠, 그런데 이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알 것 같으면서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스님은 자기가 가져온『금강경』주석을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이 잘린 사람처럼-사실 노파의 보이지 않는 칼에 목이 잘리기도 했지만은- 노파 앞에 무릎을 꿇으며 천 번 배례하고 불씨를 부탁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 줄 스승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노파는 여기서 십리를 더 가면 용담원에 용담 스님이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천재일우에 만난 이 스승에게 그는 마음의 문을 열고 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스님은 밤도 늦었으니 물러가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서야 덕산은 자기로 돌아와 스님께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은 칠흑 같은 암흑이었습니다. 덕산은 첫 길이라 동서를 분간할 수 가 없었습니다. 덕산은 스님을 향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용담은 초에 불을 붙여 덕산에게 주었습니다. 덕산이 토방으로 내려서자 용담 스님은 촛불을 탁 불어 꺼 버렸습니다.
그 순간에 덕산은 굉장히 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덕산이 가만히 서 있으니까 차차 훤해지기 시작했으며 차츰 별이 나타나고, 먼 산이 보이기 시작하여 대문이 나타나고, 어느 정도 훤해진 속에서 덕산은 자기발로 걸어서 대문을 나서 자기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금년 여름 어느 날 밤 저는 친구와 함께 당진의 대호방조제에 밤낚시를 하러 갔었습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더군요. 왜 그 별들이 낮에는 보이지 않았을까요? 태양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요. 클 태 거짓 양 즉 큰 거짓인 태양에 가려서 저 광활한 우주가 보이지 않은 것이죠. 태양을 꺼야 비로소 우주가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하이데거를 전공한 외국어대 이 기상 교수는 태양을 끄라고 얘기합니다.
촛불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알고 있는 지식, 즉 이성의 한계를 깨닫고 그 한계를 넘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나아가야 깨달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생각을 넘어서 있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은 우상일 뿐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병아리가 되듯이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자기중심적 사고의 틀을 깨고 보다 넓고 다른 높은 차원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2. 하나님 체험
(1)모세의 하나님 체험
그러면 이런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체험한 분이 누가 있을까요? 모세와 예수님이 떠오르네요. 먼저 모세의 경우를 보지요.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엘(로힘)(2,500회)이라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고, 이집트는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지요. 엘은 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태양신은 힘이 있는 보이는 신이었지요. 모세는 ‘보이지 않지만 계시는 분’인 ‘여호와’(6,700회)을 체험하지요.
‘여호와’는 ‘ehyeh’라고 발음되는 히브리어인데, 모세가 하나님을 체험한 출애굽기 3장 14절 “ehyeh aser ehyeh”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동사 어근 ‘hyh’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닌 ‘미완료형 동사형’의 이름이랍니다. ‘hyh’의 동사는 1인칭 단순 현재시재, 미래시재, 사역동사로 쓰일 수 있는데, 위 구절은 각각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희와 함께 하리라', ‘존재자를 있게 한 존재'의 뜻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존재 중심으로 보면 스스로 있는 자요. 존재자 중심으로 보면 존재자를 있게 한 존재지요. 그러니 첫째, 셋째가 하나요. 또한 시간을 초월하면 셋이 하나이지요. 모세는 이런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죠. 기독교는 계시종교인데 무슨 체험이냐고요? 계시와 체험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보면 계시요, 사람중심으로 보면 체험이지요. 별이 보인다는 것은 별이 보여주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이죠. 모세가 깨닫고 체험한 것은 생명이 있게 한 분, 즉, 생명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만물의 어버이)이라는 거죠. 그리고 이 근본체험을 하고 이스라엘백성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킵니다.
(2) 예수님의 하나님 체험
다음 두 성경구절을 통하여 예수님의 하나님체험에 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 나오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요한복음 10장 38절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내재)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초재)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자비라는 히브리어 원어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어머니의 품속 글자의 복수형이라죠. 그렇다면 이 두 구절을 동양적 언어로 가장 잘 이해한 말이『주역』「계사전하」5장에 나오는 窮神知化가 아닐까 합니다. 窮자는 굴속에 몸이 들어 있는 또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의 품속에 우리 몸이 들어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글자이니까요. 그리고 요한복음 10장 38절 말씀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비유는 “태양을 머금고 있는 이슬의 모습” 또는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데 알 속에서 병아리가 생겨 그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3.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슬 속에 있는 태양, 알 속의 병아리인 예수님을 여러분은 어떤 분이라 생각하세요. 마태복음은 유태사람을 위해서, 마가복음은 로마사람을 위해서, 누가복음은 희랍사람을 위해서, 요한복음은 동양 사람을 위해서 씌어졌다고 합니다. 어느 문화권이냐에 따라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죠. 그것은 그 문화권의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하기 쉽도록 썼다는 것이겠죠. 그래서 요한복음 1장 중 “데오스 엔 호 로고스”를 한국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번역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俱?和尙 凡宥所問 ?竪一指 구지화상 범유소문 지수일지
구지화상은 누가 와서 어떤 질문을 하여도 손가락 하나를 내 세웠습니다. 구지 밑에는 심부름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자기가 스님의 뜻을 아는 것처럼 손님이 와서 ‘스님 계신가?’ 하고 물으면 으레 손가락을 내세웠습니다. 이 손가락에 깊은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 사람들은 이 어린애에게 질려서 스님을 만나 보지도 못하고 가버리곤 했습니다. 물론 스님을 만나도 손가락을 내세우는 것 이외에 아무 대답도 없을 것이 너무도 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선 어린애한테 우롱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구지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당장 어린애를 불러 사람들이 나의 행방을 물었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구지 앞에서도 손가락을 내세웠습니다. 그때 구지는 가혹하게도 어린애의 손가락을 잘라버렸습니다. 어린애는 피가 나는 손을 움켜잡고 치료하려고 뛰어갔습니다. 그 때 스님이 뒤에서 불렀습니다. 어린애는 스님의 부름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때 스님이 허공을 향하여 손가락을 높이 세웠습니다. 어린애도 따라서 손가락을 높이 세우려고 하였으나 자기의 손가락은 이미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자기의 가슴이 메어 터지게 떠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구지는 왜 손가락을 쳐들었는가 하면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손가락을 쳐든 것입니다. 물론 손가락 하나를 위로 올렸다는 말은 올라가란 말도 되고, 참을 찾으라는 말도 되고, 억만 가지로 해석해도 맞아 들어갈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리를 배운다고 또는 성경을 본다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자기의 생각을 성경의 특정구절로 합리화해서 교리를 만들어 절대화하는 일이 있다면 차라리 덕산이 불경을 불사르거나 구지가 손가락을 자른 것처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고린도후서 3장 6절에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라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동전이 딸랑 떨어지는 순간 구원받는다.’와 같은 교회지도자들의 교리가 절대화되었을 때 루터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은 옳지만 지금은 교리나 성경이 우상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나 성경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니지 않나요? 교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지 교리나 성경을 문자대로 받아 들여 하나님을 가리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각 하에서 예수님에서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글 개역판은 요한복음 1장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어성경 United Bible Societies의 Today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에는 “Before the world was created, the Word already existed; he was with God. and he was the same as Go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곧” 과 “the same as”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곧’이라는 한자말은 ‘즉’이지요. 이 ‘즉’의 의미는 다음 말에서 쉽게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사즉생과 사同생” 두 말은 다른 말이지요. 예수 즉 여호와지만 예수 동 여호와와는 다른 것이지요. 그리고 로고스는 ‘말씀’보다는 ‘도’로 번역하는 것이 한국 사람에게 더 와 닿지 않을까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도통한 도인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태초부터 계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당나라 때 구마라습의 제자 승조가 30세에 박해를 받아 죽음을 당하기 직전 지은시가 있습니다.
四大元無主 五蘊本是空 以首臨白刃 猶如斬春風
4대원무주 오온본시공 이수임백인 유여참춘풍
지수화풍의 4대원이 주인이 없는 것이며, 색수상행식(의식되는 상대, 느끼는 감정, 생각하는 사상, 인격적인 행동, 주체의식)의 마음도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이제 내 목이 흰 칼날 밑에 놓여 있다. 봄바람을 자르는 것이나 다를 바가 무엇인가?
마음은 하나님에 속한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말도 내 말이 아니고 한국말이고, 모든 사상은 세계의 사상이지 내 사상이 아닙니다. 사상의 맨 끝으로 올라가면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맨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죠. 예수님의 가르침도 맨 처음부터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죠.
요한복음 1장 11절 “그가 자기 땅 에 오셨다”, 14절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셨다”, 18절 “그 분이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와 14장 9절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은 불교에서 석가를 화신으로 보는 것처럼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불교에서는 우주 전체가 부처라 할 때의 부처는 法身이라 하고, 또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 세상에 와서 남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化身이라 합니다. 예수는 화신이지요. 현존재지요. 예수는 여호수아의 준 말인데, 이 말의 의미는 신명기31장 8절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복을 빌어 줄 때 “여호와께서 친히 그대 앞에서 가시며 그대와 함께 계시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야훼라는 말이 존재라면 예수라는 말은 요새말로 “현존재”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와 14장 24절 “이 말은, 내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廻光返照’라 할 수 있죠. 빛을 돌려서 비춰주는 것인데, 말하자면 햇빛을 달이 받아서 그 달이 다시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주는 것과 같죠. 요한복음 10:33~38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냐고 놓고 유대사람과 예수님의 대화가 나오는 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의 논쟁은 여기서 끝난 것이지요.
아까 해 드린 이야기의 주인공 구두스님에 대하여 설두라는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對揚深愛老俱? 宇宙空來更宥誰 僧向滄溟下浮木 夜濤相共?盲龜
대양심애노구지 우주공래갱유수 승향창명하부목 야도상공접맹구
중생을 사랑하는 늙은 구지스님, 천지가 생긴 이래 이렇게 인간을 사랑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중생을 위해 뗏목을 띄워 주었으니 거친 파도에 눈먼 거북들이 뗏목에 달라붙어 살게 되었구나.
같은 이야기가 종밀이『원각경』을 끝내고 난 후에 자기의 견해를 피력한『원각경소』의 내용 중에 부목맹구난치우(浮木盲龜難値遇)이란 말이 나옵니다. 바다 속에서 오래 산 거북이 너무 오랫동안 깊은 바다 속에 빛을 못 봐서 퇴화하여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이 거북이 나중에 조물주에게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결과 조물주께서 거북의 배꼽에 눈을 하나 허락하였습니다. 이 배꼽 눈으로 무엇을 보고자 자꾸자꾸 밝은 데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거북이 바다 위로 떠서 오래 떠돌아다니다가 떠다니던 부목을 만났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떠돌다가 만났는가 하면 千載一遇다, 천년을 걸려서 한 번 만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 거북이 부목을 붙잡고 몇 해를 돌아다니다가 부목에 생겨난 어떤 구멍, 말하자면 관솔 같은 구멍하고 배꼽 눈이 일치했습니다. 진리의 태양을 본 것이죠.
바로 예수님 같은 분을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것이지요. 예수님은 수천 년의 역사에 한 번 나온 큰 스승이시지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모세와 예수님의 하나님체험과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 저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안들을 생각해 보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밥을 먹고 그 밥의 에너지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 밥은 水昇火降의 생명현상에서 생성되는 것입니다. 물은 보통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불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데, 식물에서는 이와 반대로 물이 올라가고 빛이 내려와서 광합성작용을 하여 우리가 먹는 음식과 산소가 생기지요. 지구는 태양과 세 점을 이은 면적이 일정하게 유지하며 돕니다. 인공위성도 무중력 공간으로 가는데 조금 느리면 떨어지고, 조그만 빨라도 타 버리는데 지구가 이렇게 태양을 도는 것은 신비자체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물에 만약 장력이 없다면 우리는 태양빛에 다 타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유지되니까 광합성작용이 일어나고 지구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주가 하나님의 품속이지요.
이러한 생명현상은 리사이클링을 통하여 지속됩니다. 몇 년 전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전’을 본적이 있습니다. 창조의 신인 ‘브라만’과 파괴의 신인 ‘시바’가 있더군요. 쌀이 만들어지는 것은 브라만이 하고 소화는 시바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화는 사실은 부패의 과정이잖아요. 이런 파괴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는 거잖아요. 죽음도 사실 이런 것이죠. 어느 스님이 잘 먹고 잘 싸야 건강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과정이 잘되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이죠. 사실 몸은 자연, ‘4대원 무주’이지요. 내 몸이지만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숨을 쉴 수도 있고 안 쉴 수도 있는 것이 아니죠. 몸은 자연이니까 자연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건강은 몸 자신을 자연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종족보전에 인센티브를 주셨습니다. 식물에게는 꽃의 아름다움을 주셨고, 사람에게도 아기를 갖고 키우는 데도 기쁨을 주시지요. 이러한 모든 것이 있게 한 분을 저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 예수님 말씀 중에서 기억에 절로 떠오른 것이 있습니까? 저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원숭이를 화를 올린 후 원숭이의 위에 내시경을 들이대면 위가 빨갛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면 미워하는 자신이 상하고 마음에 증오심을 품으면 마귀가 되어 무역센터빌딩을 폭파하고, 그 결과는 부시의 증오를 가져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죄 없는 민간인을 살해하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어떤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숨 쉴 때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 예수님이 우리 속에 부활하신 것 아닐까요? 경제학에서는 천연자원(토지), 물적자본, 인적자본을 생산의 3요소라 합니다.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천연자원에 사람이 일을 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것만큼은 남에게 주어도 손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었으니까요.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 이것을 실천한 사례 몇 가지를 들어 신학자나 목사가 아닌 우리 평신도가 깨달음을 얻고 이것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될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친하게 지낸 목사님께서 여주에 있는 장애인이 있는 곳을 방문하면서 저에게 기독교인이 이자를 받는 것이 맞는지 연구 좀 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올해 노벨평화상과 서울평화상을 동시에 수상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은행가인,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66) 그라민은행 총재는 지난 30여 년 동안 600만 명의 가난한 사람, 특히 여성들에게 신용대출을 해 그 중 58%를 가난에서 구제했습니다. 최근에 신문에 기사가 나왔으니 긴 설명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난지도에서 야학을 할 때 남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다는 것이죠. 희망의 단어가 없었죠, 빈곤 문화죠.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까? ‘이들을 아프리카에 옮겨 농장을 가꾸게 해야지’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잊어 먹고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는 사례를 최근『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읽었습니다. 첫 번째는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의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사례입니다.(629쪽) 에이브러햄 조지는 인도에서 태어나 인도군에 복무하다 퇴역 후 미 우주항공국에 근무하던 어머니를 따라가 뉴욕대학에서 공부하고, 국제금융 분야 소프트 전문회사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 회사를 매각하고는 인도로 돌아가서, 미국에서 번 돈을 이용해 인도를 밑에서부터 변화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그가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책임 있는 신문과 언론인 없이는 인도의 통치 수준이 개선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언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또한 불가촉천민이 사는 방갈로르 외각에 그는 산티브하반 초등학교를 세웠고 이를 더 자랑스러워합니다. 입학생의 자격은 불가촉천민입니다.『세계는 평평하다』의 저자 토머스 L. 프리드먼이 방문해서 이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컴퓨터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 저자가 8살짜리 소녀와 컴퓨터 타이핑 시합을 했는데 그 소녀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세계 어디서든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영어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불가능했던 지난 여러 세기 동안 불가능하기만 했던 경력과 직업을 그 들도 가질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근처에서 살면 언제나 불가촉천민이지만 그들이 다른 곳에 가면, 그리고 적절히 교육을 받고 사회화 교육을 밟는다면 그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산티브하반 학생들에게 프리드먼이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했을 때 그들은 우주비행사, 의사, 소아과의사, 시인, 물리학자나 화학자, 과학자, 외과의사, 탐정, 작가 … 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캄보디아에서 일과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례입니다. 제레미 호켄스타인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뒤 매킨지 컨설팅에 일하다가 같이 일하는 동료와 함께 인생항로를 바꿉니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데이터 입력회사인 ‘디지털 디바이드 데이터’를 캄보디아의 프놈펜에 설립했습니다. 젊은이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05년에는 창업한지 4년 만에 3개 사무실에 170명의 직원을 두고 있습니다.(491~492쪽)
셋째는 문명의 혜택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빌 게이츠 재단의 체계적인 지원에 대한 것입니다. 270억 달러의 자금으로 설립된 빌과 멜린다 게이츠 제단은 질병에 시달리고 기회를 박탈당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원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말라리아로 해마다 100만 명이 죽고 이 중 약 70만 명이 어린이이고, 대부분은 아프리카에 삽니다. 2003년 빌 게이츠 재단은, ‘지구 보전을 위한 대도전’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과학자들로부터 8,000페이지에 이르는 아이디어를 받아 2003년 가을에 14개 도전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출생 직후에 단 한 번의 접종으로 효과가 있는 백신개발, 만성전염병을 치유할 면역법 개발 등이 있습니다. 일 년 내에 75개국 과학자들로부터 이들 문제를 해결할 제안을 받았고, 가장 적합한 제안에 2억 5천 달러의 현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과학적 상상력에 도덕적 호소를 하고 과학계가 실제로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재단의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지난 20년간의 과학기술이 이룩한 놀라운 발전을 볼 때 과제의 일부를 해결할 수단을 가지고 있고, 단지 부족한 것은 자금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아프리카나 인도의 농촌 지역은 보건체계가 망가져 있어 빌게이츠 재단은 무너진 보건체제를 대체할 배달 시스템과 의약품 개발에도 열심입니다.(509~512쪽)
이상의 사례를 통해서 볼 때 비판을 통한 긍정을 거쳐 어려운 자를 위한 실질적인 대안의 모색과 실천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38절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 지라도 그 일을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교우 여러분! 궁신지화 덕지성야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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