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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레2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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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동현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그 땅이 안식하도록 하라" - 이 제목은 레위기 25장 2절 뒷부분을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한 데서 따온 것입니다. 그에 해당하는 부분을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땅도 쉬어야 한다"로 옮기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안식년을 지켜야 함을 가르칩니다. 안식년이란 표현은 5절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에게 모세가 전해야 할 말씀의 첫마디를 2절에서 찾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읽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너희가 들어가면, 나 주가 쉴 때에, 땅도 쉬게 하여야 한다". 이를 어색하겠습니다만 히브리 말투를 살려 달리 옮겨 본다면,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줄, 그 땅에 다다르거든 그 땅이 야훼를 위한 안식절기에 안식하도록 하라"가 되겠습니다.
가나안 땅이 안식하도록 함이 무슨 뜻인지를 3-5절이 일러줍니다. 6년 동안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땅을 갈아 땅의 소출을 거두어들이다가 일곱 번째 해에는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부터 쳐서 일곱 번째 해마다 맞이하는 안식년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농사를 쉬는 해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식년에 사람들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땅이 쉬어도, 땅에서 저절로 나는 것이 있다고 본문 5절이 일러주고, 그것을 주인, 종, 나그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뿐만 아니라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먹을 수 있어야 함을 본문 6절이 일러줍니다.
여러분, 이러한 안식년의 규정이 오늘 우리 시대의 영성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선 이른바 이·삼차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해 있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땅과 농사일에 관한 규정은 먼 옛날의 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일곱 번째 해마다 땅을 놀려야 한다는 것은, 어찌하든지 토지 이용도를 높여 수익성이 좋은 농업을 하려는 우리 실정에는 도무지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다름 아니라, 지난 주 초에 온 겨레가 명절로 보낸 설날이 본디는 농사일의 흐름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설날이라는 명절이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중국의 역사자료에 따르면 이미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설을 쇠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설을 쇠는 여러 가지 풍습 가운데 조상의 덕을 기리고, 가족과 친족과 이웃 사이의 결속을 다지는 것들과 아울러 새해의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음력설에는 여전히 농사일에 대해서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즈음 농사 짓는 사람들은 농한기임에도 불구하고, 매서운 바깥 날씨에 아랑곳 않고 비닐 하우스 같은 곳에서 채소를 가꾸고 과일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까운 도회지에 나가서 막일을 한다든지 해서 푼돈을 - 때로는 큰돈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 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농경지는 겨울이 되면 "쉽니다". 또, 이렇게 땅이 쉴 때 그 땅을 갈아먹는 사람들인 농사꾼들도 쉬는 것이 어찌 보면 사철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라 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가나안 땅이 일곱 번째 해마다 쉬도록 하라는 본문 규정을 보며, 우리도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땅이 쉬는 겨울, 특히 새해의 농사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비는 마음으로 맞이하곤 했던 설날이 든 양력 이월을 보내면서, "그 땅이 안식하도록 하라"고 오래 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으로 다음 네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농사지어서 먹을 것을 내도록 해 주는 땅도 일한다는 점을 깨우쳐 줍니다. 본디 안식, 곧 쉼이란 일함과 짝을 이룹니다. 안식일 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레째날 맞이하는 안식일은 부지런히 일하는 엿새가 있기에 필요한 날입니다. 그처럼 땅이 안식을 필요로 함은 땅도 일을 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땅이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땅이 일을 하다니 그 무슨 말입니까 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온 누리를 지으신 6일 중 셋째 날에 벌어진 일의 하나를 알려주는 창세기 1장 11-12절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이 두 절에서 맨 먼저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11절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하는 문장과, 12절의 첫 문장인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에서 "땅"이 문장의 주어라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서, 식물을 돋아나게 하는 주체가 땅이라는 점이 똑똑히 드러납니다. 또 12절에서 "돋아나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가 "(안에 있는 무엇이) 밖으로 나오게 하다"라는 뜻을 지님도 기억할 만합니다. 이런 표현에서 우리는 생명체를 품고 있다가 내놓는 피조물이 땅이어서 땅 또한 살아 있는 피조물이요, 어머니 같은 피조물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창세기 1장 11-12절은 땅이 이 세상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식물을 창조하실 때 그 일을 함께 한, 특별한 피조물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땅은 창조의 동역자라 할 수 있는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이 제 속에 생명을 품고 있다가 밖으로 내는 일을 한번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늘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땅은 어제도 오늘도 창조의 위대한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오늘 우리들은 이 땅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그렇게 땅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살아 있어서 생명을 내는 일을 하는 땅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영성이 되면 좋겠습니다. 땅은 살아 있어서 생명을 내면서 창조의 일을 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는 영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땅을 단순히 우리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만 쓰지 않으며, 또 이 땅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도록 때때로 쉬게 할 줄도 압니다. 땅을 쉬게 한다 함이 본문에서는 땅을 놀린다는 뜻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에서처럼 일곱 번째 해마다 모든 땅을 놀릴 수는 없겠지만, 땅이 안식하도록 하는 근본 정신만큼은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부로 부려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희년에 관한 본문으로 알려진 레위기 25장이 안식년에 대한 규정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비록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기름진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히브리 사람들을, 거칠기 짝이 없는 빈 들판으로 이끌어 내신 야훼 하나님께서, 사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들어가도록 하신 가나안 땅에 마침내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갔을 때, 이들에게 농사를 지어서 먹을 것을 낼 수 있는 그 약속의 땅은 참으로 귀중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마음껏 농사를 지으며 안정된 삶을 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더러 그 땅을 함부로 부려먹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이는 통일의 시대를 눈앞에 둔 오늘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나 남북이 갈라진 채 두 번째 오십 년의 첫해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겨레가 다시 하나될 때를 바라고 기다리며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 할 때, 우리의 땅을 잘 보존하고 지키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일곱 번째 해에 땅이 누릴 안식에 대해 본문이 말할 때, 이는 여섯해 동안 부지런히 땅을 잘 갈아야 함을 전제하고 있기에, 오늘 우리 나라 사람들도 땅에 씨뿌리고 땅을 가꾸어 먹을 것을 거두어들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2장 5절과 15절의 가르침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창세기 1장과는 다른 식으로 천지창조에 대해 말하는 본문의 첫머리에 속하는 2장 5절은 창조 이전의 상태를 일러주면서, 땅에 식물이 아직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그리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던 점을 들고 있습니다. 이를 사람 중심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땅이 있고 또 하나님이 그 땅에 비를 내리시더라도 사람이 땅을 갈아야 땅이 식물을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는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갈지 않는 땅에서도 식물이 나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본문 레위기 25장 5절에서도 그러한 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창세기 2장 5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람은 땅을 갈면서 살도록 지어졌음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2장 15절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 지으신 첫 사람을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데려다 두심은 "그 곳을 맡아 돌보게 하려" 하심이라고 옮기고 있지만, 이를 히브리어 본문으로 읽으면 "갈고 지키도록"하려 하심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으로 하여금 에덴 동산을 갈도록, 경작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농사지으면서 살도록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땅을 가는 일, 곧 농사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함을 깨닫게 됩니다. 먹을 것이 흘러 넘치는 요즈음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서 돈만 내면 언제나 제 먹고 싶은 것을 살 수 있다는 식의 생활의식과 습관이 이 점을 잊어버리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땅을 가는 일이 중요함은 또한 다른 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땅의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땅은 이고 사람은 이어서 은 에서 만드셨다는 식이 됩니다. 이는 사람과 땅은 뿌리가 같음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은 땅을 갈 때가 가장 사람답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문화를 뜻하는 서양말들이 땅을 간다는 라틴말에서 비롯되었음을 아실 것입니다만, 이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산업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사람이 땅을 가는 일을 소홀히 하면 사람다워지지 못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조그만 텃밭이라도 가꾸어 보신 분은 넉넉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땅을 가는 일을 제대로 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질병이 생기고, 사회문제가 일어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산업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처음 사람에게 땅을 갈 책임을 맡기시고 사람과 땅이 운명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 철회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리하여, 우리 시대가 다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또 한 가지 내용은 땅을 가는 일을 귀중히 여기는 영성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영성이란 낱말을 우리가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팔십 년대부터 이곳저곳에서 강조되고 있는 이 낱말의 뜻을 제 나름대로 몇 마디로 줄여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구약성경에서 영이라 할 때 이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사람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열린 관계, 사귀는 관계를 뜻하는 영성은 또한 반드시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이웃 사람들과 피조물 세계에 대한 열린 관계, 사귀는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린 관계는 이웃과 피조물에 대한 열린 관계로 그 모습이 드러나는 수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온 누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갈도록 하신 뜻을 존중하여 땅을 갈면서 사는 것은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영성의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농사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할 때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겨 하지 않는 농사일을 하는 분들을 존중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농사꾼들이 그 사람들인데, 이 분들은 결국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처음 맡기신 일을 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할 일 없으면 땅이나 파지, 농사나 짓지 하는 말은 아주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농사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온갖 정성을 들여서 바른 마음과 건강한 몸으로 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농사일입니다. 오늘 우리 대신 농사짓는 우리의 이웃들이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건강하게 농사짓기보다는 울분에 찬 마음과 여러모로 병든 몸으로 마지못해 농사짓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가슴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부터 농촌을 살리자, 농촌교회를 돕자 하는 운동이 도시 사람들과 도시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러한 움직임들을 보면서 불만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가난한 사람에게 돈 몇 푼 던져주는 식으로 농촌과 농민과 농촌교회를 대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시 사람들이 농촌을 돕는다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돕지 않는다는 것이 엄청난 잘못이고 파렴치한 죄입니다.
저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식들 키워 출세시키기 위해서 잡숫고 싶은 것은 두말할 것 없고 최소한의 음식도 못 잡수시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시고 험하게 살아오셨던 어버이께서 연세가 많아 힘도 없어지고 겉모습도 볼 품 없어지자, 그 어버이 덕에 크게 된 자식들이 오히려 그 어버이를 부끄러워하고 아무렇게나 여기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오늘 우리 도시나 도시 사람들이 농촌과 농민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지난날 고도의 경제성장은 농촌의 엄청난 희생 가운데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수출산업을 통해 국민소득을 크게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농촌출신의 저임금 청소년 노동자들이 뼈빠지게 일해 온 것과 쌀값을 비롯하여 농산물의 값이 매우 쌌던 까닭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 도시 사람들이 농촌과 농민들을 귀히 여겨야 하는 또 다른 까닭은 농촌과 농민이 살지 못하면 도시도 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부터 중공업정책을 쓰고 농업을 경시해 온 결과 식량지급도가 30퍼센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이라, 흔히 하는 말로 우리가 먹는 세끼 가운데 두끼가 외국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음식의 질이 우리 몸에 안 맞다는 것은 제쳐놓더라도, 엄청난 농약과 방부제가 수입식품에 묻어 들어온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 얼마 전 발표를 보면 이젠 가공용 쌀뿐만 아니라 식량용 쌀조차도 자급이 안 되어서 수입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는데, 앞으로 그렇게 수입할 쌀조차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이 심각하다고 합니다만, 남한에도 쌀이 없어 밥을 먹을 수 없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벼농사 지어봤자 수지가 안 맞아 논농사를 포기하는 농민들이 늘어나는데 앞으로 논이 이런 식으로 사라지면, 그 논이 여름에 담고 있던 빗물이 땅에 흘러 넘쳐 우리는 홍수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라 합니다. 게다가, 전에 제가 읽은 것입니다만, 농촌에서 도시로 살러 들어온 한 사람 때문에 드는 사회 간접시설 경비의 몇 분의 일만 들여서 농촌생활 향상에 힘을 써도 이농현상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터인데,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앞으로 도시는 주거문제, 교통문제, 상하수도문제 등으로 인해 폭발하고 말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여러분, 땅 가는 일과 사람을 중하게 보는 것이 우리시대 영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지난 몇 해 동안 제가 기회 있는 대로 도시 교회 지도자들에게 부탁드려온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도시 교회 제직회 부서 가운데 '농촌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새길교회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마다 농촌부가 있어서, 땅의 귀중함을, 땅 가는 일의 귀중함을 모르고 태어나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땅을 만지고 땅을 가는 경험을 하면서, 사람과 땅이 뿌리가 같고 땅 가는 일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맡기신 첫째 일거리임을 몸으로 겪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농산물 사먹기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습니다만, 그것이 다일 수는 없습니다. 농촌에 가서 농민들에게 겸손히 농사일도 배워보고 그들의 어려운 형편도 알아보고 국가 정책적으로 농촌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 대안도 제시하는 등 여러 가지 면으로 우리 모두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일을 교회마다 '농촌부'를 통해 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셋째, 땅이 먹을 것을 내도록 하시는 이는 오로지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안식년에 농사를 짓지 않아도 땅에서 저절로 나는 것이 있다 함은 사람이 땀흘려 땅을 가는 것만으로는 먹을 것이 생산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사람이 부지런히 농사도 지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땅이 농산물을 낼 수 있는 것은 온 누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안식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농사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현대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땅이 먹을 것을 필요한 만큼 내질 않습니다.
식사기도를 드릴 때마다 앞서 말한 대로 먹을 것을 내기 위해 피땀 흘린 사람들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이 먹을 것을 내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도 되새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으로 하여금 먹을 것을 내도록 하심을 잊지 않는 것, 이 또한 먹을 것이 흘러 넘쳐 도무지 고마워할 줄 모르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지녀야 할 영성의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땅이 내는 먹을 것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짐승들이 모두 나누어 먹는 것이지 그 어떤 사람이나 몇몇 사람이 홀로 먹는 것이 아님도 본문에서 배웁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나라도 이젠 몇 사람에 한 사람은 비만이다, 과체중이다저 자신도 그래서 부끄럽습니다만하면서 살 빼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합니다만, 여전히 먹을 것이 없거나 모자라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먹을 것을 나누어서 먹기는커녕 제 입맛에 맞지 않다고 마구 버리는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적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이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음식을 함부로 버리면 천벌 받는다는 것이 우리 옛 조상들이 가르쳐 오던 바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이웃과 피조물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것이 우리 시대 기독교인들이 지녀야 할 영성의 또 다른 내용입니다.
"그 땅으로 안식하도록 하라"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른바 평화통일 희년을 그리 큰 열매 없이 넘겨보내고 2분단 제2 반세기의 첫해에 들어와 있는 우리들이 다시 한번 곰곰이 그 뜻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음력 정월을 계기로 해서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삼천리 강산 한반도의 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생명을 품고 있다가 생명을 내는 일을 하는 땅이 얼마나 귀중한지, 그 땅을 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땅을 갈아서 먹을 것을 내는 농민들의 수고가 어떠한지를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힘 자라는 대로 이 땅을 잘 보살필 것과 하나님 주시는 먹을 것을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과 나누어 먹어야 할 것을 굳게 다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영성의 중요한 내용들임을 늘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끝맺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가나안 땅이 안식하도록 함이 무슨 뜻인지를 3-5절이 일러줍니다. 6년 동안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땅을 갈아 땅의 소출을 거두어들이다가 일곱 번째 해에는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부터 쳐서 일곱 번째 해마다 맞이하는 안식년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농사를 쉬는 해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식년에 사람들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땅이 쉬어도, 땅에서 저절로 나는 것이 있다고 본문 5절이 일러주고, 그것을 주인, 종, 나그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뿐만 아니라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먹을 수 있어야 함을 본문 6절이 일러줍니다.
여러분, 이러한 안식년의 규정이 오늘 우리 시대의 영성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선 이른바 이·삼차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해 있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땅과 농사일에 관한 규정은 먼 옛날의 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일곱 번째 해마다 땅을 놀려야 한다는 것은, 어찌하든지 토지 이용도를 높여 수익성이 좋은 농업을 하려는 우리 실정에는 도무지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다름 아니라, 지난 주 초에 온 겨레가 명절로 보낸 설날이 본디는 농사일의 흐름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설날이라는 명절이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중국의 역사자료에 따르면 이미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설을 쇠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설을 쇠는 여러 가지 풍습 가운데 조상의 덕을 기리고, 가족과 친족과 이웃 사이의 결속을 다지는 것들과 아울러 새해의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음력설에는 여전히 농사일에 대해서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즈음 농사 짓는 사람들은 농한기임에도 불구하고, 매서운 바깥 날씨에 아랑곳 않고 비닐 하우스 같은 곳에서 채소를 가꾸고 과일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까운 도회지에 나가서 막일을 한다든지 해서 푼돈을 - 때로는 큰돈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 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농경지는 겨울이 되면 "쉽니다". 또, 이렇게 땅이 쉴 때 그 땅을 갈아먹는 사람들인 농사꾼들도 쉬는 것이 어찌 보면 사철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라 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가나안 땅이 일곱 번째 해마다 쉬도록 하라는 본문 규정을 보며, 우리도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땅이 쉬는 겨울, 특히 새해의 농사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비는 마음으로 맞이하곤 했던 설날이 든 양력 이월을 보내면서, "그 땅이 안식하도록 하라"고 오래 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으로 다음 네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농사지어서 먹을 것을 내도록 해 주는 땅도 일한다는 점을 깨우쳐 줍니다. 본디 안식, 곧 쉼이란 일함과 짝을 이룹니다. 안식일 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레째날 맞이하는 안식일은 부지런히 일하는 엿새가 있기에 필요한 날입니다. 그처럼 땅이 안식을 필요로 함은 땅도 일을 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땅이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땅이 일을 하다니 그 무슨 말입니까 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온 누리를 지으신 6일 중 셋째 날에 벌어진 일의 하나를 알려주는 창세기 1장 11-12절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이 두 절에서 맨 먼저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11절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하는 문장과, 12절의 첫 문장인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에서 "땅"이 문장의 주어라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서, 식물을 돋아나게 하는 주체가 땅이라는 점이 똑똑히 드러납니다. 또 12절에서 "돋아나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가 "(안에 있는 무엇이) 밖으로 나오게 하다"라는 뜻을 지님도 기억할 만합니다. 이런 표현에서 우리는 생명체를 품고 있다가 내놓는 피조물이 땅이어서 땅 또한 살아 있는 피조물이요, 어머니 같은 피조물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창세기 1장 11-12절은 땅이 이 세상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식물을 창조하실 때 그 일을 함께 한, 특별한 피조물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땅은 창조의 동역자라 할 수 있는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이 제 속에 생명을 품고 있다가 밖으로 내는 일을 한번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늘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땅은 어제도 오늘도 창조의 위대한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오늘 우리들은 이 땅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그렇게 땅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살아 있어서 생명을 내는 일을 하는 땅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영성이 되면 좋겠습니다. 땅은 살아 있어서 생명을 내면서 창조의 일을 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는 영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땅을 단순히 우리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만 쓰지 않으며, 또 이 땅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도록 때때로 쉬게 할 줄도 압니다. 땅을 쉬게 한다 함이 본문에서는 땅을 놀린다는 뜻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에서처럼 일곱 번째 해마다 모든 땅을 놀릴 수는 없겠지만, 땅이 안식하도록 하는 근본 정신만큼은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부로 부려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희년에 관한 본문으로 알려진 레위기 25장이 안식년에 대한 규정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비록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기름진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히브리 사람들을, 거칠기 짝이 없는 빈 들판으로 이끌어 내신 야훼 하나님께서, 사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들어가도록 하신 가나안 땅에 마침내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갔을 때, 이들에게 농사를 지어서 먹을 것을 낼 수 있는 그 약속의 땅은 참으로 귀중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마음껏 농사를 지으며 안정된 삶을 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더러 그 땅을 함부로 부려먹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이는 통일의 시대를 눈앞에 둔 오늘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나 남북이 갈라진 채 두 번째 오십 년의 첫해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겨레가 다시 하나될 때를 바라고 기다리며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 할 때, 우리의 땅을 잘 보존하고 지키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일곱 번째 해에 땅이 누릴 안식에 대해 본문이 말할 때, 이는 여섯해 동안 부지런히 땅을 잘 갈아야 함을 전제하고 있기에, 오늘 우리 나라 사람들도 땅에 씨뿌리고 땅을 가꾸어 먹을 것을 거두어들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2장 5절과 15절의 가르침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창세기 1장과는 다른 식으로 천지창조에 대해 말하는 본문의 첫머리에 속하는 2장 5절은 창조 이전의 상태를 일러주면서, 땅에 식물이 아직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그리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던 점을 들고 있습니다. 이를 사람 중심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땅이 있고 또 하나님이 그 땅에 비를 내리시더라도 사람이 땅을 갈아야 땅이 식물을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는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갈지 않는 땅에서도 식물이 나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본문 레위기 25장 5절에서도 그러한 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창세기 2장 5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람은 땅을 갈면서 살도록 지어졌음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2장 15절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 지으신 첫 사람을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데려다 두심은 "그 곳을 맡아 돌보게 하려" 하심이라고 옮기고 있지만, 이를 히브리어 본문으로 읽으면 "갈고 지키도록"하려 하심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으로 하여금 에덴 동산을 갈도록, 경작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농사지으면서 살도록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땅을 가는 일, 곧 농사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함을 깨닫게 됩니다. 먹을 것이 흘러 넘치는 요즈음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서 돈만 내면 언제나 제 먹고 싶은 것을 살 수 있다는 식의 생활의식과 습관이 이 점을 잊어버리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땅을 가는 일이 중요함은 또한 다른 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땅의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땅은 이고 사람은 이어서 은 에서 만드셨다는 식이 됩니다. 이는 사람과 땅은 뿌리가 같음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은 땅을 갈 때가 가장 사람답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문화를 뜻하는 서양말들이 땅을 간다는 라틴말에서 비롯되었음을 아실 것입니다만, 이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산업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사람이 땅을 가는 일을 소홀히 하면 사람다워지지 못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조그만 텃밭이라도 가꾸어 보신 분은 넉넉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땅을 가는 일을 제대로 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질병이 생기고, 사회문제가 일어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산업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처음 사람에게 땅을 갈 책임을 맡기시고 사람과 땅이 운명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 철회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리하여, 우리 시대가 다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또 한 가지 내용은 땅을 가는 일을 귀중히 여기는 영성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영성이란 낱말을 우리가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팔십 년대부터 이곳저곳에서 강조되고 있는 이 낱말의 뜻을 제 나름대로 몇 마디로 줄여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구약성경에서 영이라 할 때 이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사람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열린 관계, 사귀는 관계를 뜻하는 영성은 또한 반드시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이웃 사람들과 피조물 세계에 대한 열린 관계, 사귀는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린 관계는 이웃과 피조물에 대한 열린 관계로 그 모습이 드러나는 수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온 누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갈도록 하신 뜻을 존중하여 땅을 갈면서 사는 것은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영성의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농사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할 때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겨 하지 않는 농사일을 하는 분들을 존중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농사꾼들이 그 사람들인데, 이 분들은 결국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처음 맡기신 일을 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할 일 없으면 땅이나 파지, 농사나 짓지 하는 말은 아주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농사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온갖 정성을 들여서 바른 마음과 건강한 몸으로 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농사일입니다. 오늘 우리 대신 농사짓는 우리의 이웃들이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건강하게 농사짓기보다는 울분에 찬 마음과 여러모로 병든 몸으로 마지못해 농사짓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가슴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부터 농촌을 살리자, 농촌교회를 돕자 하는 운동이 도시 사람들과 도시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러한 움직임들을 보면서 불만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가난한 사람에게 돈 몇 푼 던져주는 식으로 농촌과 농민과 농촌교회를 대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시 사람들이 농촌을 돕는다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돕지 않는다는 것이 엄청난 잘못이고 파렴치한 죄입니다.
저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자식들 키워 출세시키기 위해서 잡숫고 싶은 것은 두말할 것 없고 최소한의 음식도 못 잡수시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시고 험하게 살아오셨던 어버이께서 연세가 많아 힘도 없어지고 겉모습도 볼 품 없어지자, 그 어버이 덕에 크게 된 자식들이 오히려 그 어버이를 부끄러워하고 아무렇게나 여기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오늘 우리 도시나 도시 사람들이 농촌과 농민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지난날 고도의 경제성장은 농촌의 엄청난 희생 가운데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수출산업을 통해 국민소득을 크게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농촌출신의 저임금 청소년 노동자들이 뼈빠지게 일해 온 것과 쌀값을 비롯하여 농산물의 값이 매우 쌌던 까닭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 도시 사람들이 농촌과 농민들을 귀히 여겨야 하는 또 다른 까닭은 농촌과 농민이 살지 못하면 도시도 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부터 중공업정책을 쓰고 농업을 경시해 온 결과 식량지급도가 30퍼센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이라, 흔히 하는 말로 우리가 먹는 세끼 가운데 두끼가 외국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음식의 질이 우리 몸에 안 맞다는 것은 제쳐놓더라도, 엄청난 농약과 방부제가 수입식품에 묻어 들어온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 얼마 전 발표를 보면 이젠 가공용 쌀뿐만 아니라 식량용 쌀조차도 자급이 안 되어서 수입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는데, 앞으로 그렇게 수입할 쌀조차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이 심각하다고 합니다만, 남한에도 쌀이 없어 밥을 먹을 수 없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벼농사 지어봤자 수지가 안 맞아 논농사를 포기하는 농민들이 늘어나는데 앞으로 논이 이런 식으로 사라지면, 그 논이 여름에 담고 있던 빗물이 땅에 흘러 넘쳐 우리는 홍수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라 합니다. 게다가, 전에 제가 읽은 것입니다만, 농촌에서 도시로 살러 들어온 한 사람 때문에 드는 사회 간접시설 경비의 몇 분의 일만 들여서 농촌생활 향상에 힘을 써도 이농현상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터인데,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앞으로 도시는 주거문제, 교통문제, 상하수도문제 등으로 인해 폭발하고 말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여러분, 땅 가는 일과 사람을 중하게 보는 것이 우리시대 영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지난 몇 해 동안 제가 기회 있는 대로 도시 교회 지도자들에게 부탁드려온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도시 교회 제직회 부서 가운데 '농촌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새길교회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마다 농촌부가 있어서, 땅의 귀중함을, 땅 가는 일의 귀중함을 모르고 태어나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땅을 만지고 땅을 가는 경험을 하면서, 사람과 땅이 뿌리가 같고 땅 가는 일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맡기신 첫째 일거리임을 몸으로 겪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농산물 사먹기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습니다만, 그것이 다일 수는 없습니다. 농촌에 가서 농민들에게 겸손히 농사일도 배워보고 그들의 어려운 형편도 알아보고 국가 정책적으로 농촌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 대안도 제시하는 등 여러 가지 면으로 우리 모두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일을 교회마다 '농촌부'를 통해 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셋째, 땅이 먹을 것을 내도록 하시는 이는 오로지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안식년에 농사를 짓지 않아도 땅에서 저절로 나는 것이 있다 함은 사람이 땀흘려 땅을 가는 것만으로는 먹을 것이 생산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사람이 부지런히 농사도 지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땅이 농산물을 낼 수 있는 것은 온 누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안식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농사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현대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땅이 먹을 것을 필요한 만큼 내질 않습니다.
식사기도를 드릴 때마다 앞서 말한 대로 먹을 것을 내기 위해 피땀 흘린 사람들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이 먹을 것을 내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도 되새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으로 하여금 먹을 것을 내도록 하심을 잊지 않는 것, 이 또한 먹을 것이 흘러 넘쳐 도무지 고마워할 줄 모르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지녀야 할 영성의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땅이 내는 먹을 것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짐승들이 모두 나누어 먹는 것이지 그 어떤 사람이나 몇몇 사람이 홀로 먹는 것이 아님도 본문에서 배웁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나라도 이젠 몇 사람에 한 사람은 비만이다, 과체중이다저 자신도 그래서 부끄럽습니다만하면서 살 빼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합니다만, 여전히 먹을 것이 없거나 모자라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먹을 것을 나누어서 먹기는커녕 제 입맛에 맞지 않다고 마구 버리는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적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이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음식을 함부로 버리면 천벌 받는다는 것이 우리 옛 조상들이 가르쳐 오던 바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이웃과 피조물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것이 우리 시대 기독교인들이 지녀야 할 영성의 또 다른 내용입니다.
"그 땅으로 안식하도록 하라"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른바 평화통일 희년을 그리 큰 열매 없이 넘겨보내고 2분단 제2 반세기의 첫해에 들어와 있는 우리들이 다시 한번 곰곰이 그 뜻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음력 정월을 계기로 해서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삼천리 강산 한반도의 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생명을 품고 있다가 생명을 내는 일을 하는 땅이 얼마나 귀중한지, 그 땅을 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땅을 갈아서 먹을 것을 내는 농민들의 수고가 어떠한지를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힘 자라는 대로 이 땅을 잘 보살필 것과 하나님 주시는 먹을 것을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과 나누어 먹어야 할 것을 굳게 다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영성의 중요한 내용들임을 늘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끝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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