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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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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삿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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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동현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유월 첫 주일인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지난 주일이 성령강림절이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해마다 성령강림절이 되면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사신 날로부터 50번째 되는 날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신자들에게 성령이 내린 사건을 기억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기독교회의 탄생사건이라 할 수 있기에, 이 하늘 아래 모든 기독교회는 성령강림절에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교회의 교회 됨이 어떠한 것인지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강림절 이후 맞이하는 주일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듯 교회도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새롭게 자라나는 모습을 드러내도록 힘쓸만합니다.
또한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지난 주일은 농 어촌주일로 지킨 교회들도 있습니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만, 5월 28일이 권농일인 것을 고려하여 그리하는 것 같습니다. 이즈음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우리 나라에서 하는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보니, 날이 가물어 천수답의 경우 모내기 때문에 농사꾼들이 가슴을 태우고 있다는 소식은 영 뒷전에 밀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젠 먹을 쌀도 수입하겠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면서 농사꾼들의 마음은 더욱 더 무거워지는데 그에 대해 보도하는 언론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기껏해야 며칠 전에 대통령이 경기도 어느 시골에서 기계로 모심기하는 장면을 요란스레 텔레비전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또한 5월31일을 바다의 날로 정하고 정부에 해양부를 새로 만든 사실을 크게 알림을 통해 이제껏 소홀히 보았던 바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좋으나, 농촌문제는 더더구나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진 듯합니다.
다가오는 6월 5일은 24번째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남한에서도 오늘 6월 첫 주일이나 다음 주일을 환경주일로 지키는 교단들이나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환경보존위원회에서는 한국교회 환경연구소가 기획한 올해 환경주일 자료집을 펴내어 전국 교회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6월 6일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바친 사람들의 높은 뜻과 공을 기리는 현충일이고, 25일은 46년 전 우리 겨레끼리 죽이는 무서운 싸움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그래서인지, 흔히들 이 6월을 호국의 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라 지키는 일을 깊이 생각해보며 다짐하는 달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의 소식과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한민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 농사일, 바다일, 환경, 나라 - 이런 굵직굵직한 주제들이 오늘 6월 첫 주일의 설교를 준비하던 제게 떠올랐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 시간에는 주로 성령과 나라에 관한 성경 말씀 한군데의 뜻을 새겨보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본문은 오랜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삼천년 전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디안 족이라는 이웃 사람들에게 매우 시달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이라는 젊은이를 불러 이들을 그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신 이야기의 첫 장에 들어 있습니다.
34절에 보면 "주의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으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를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으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옷 입혔다는 뜻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흔히 설교자를 위해 기도드릴 때 "말씀을 전할 아무개에게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히셔서"라 하는 수가 있는데, 이야말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옷 입혔다고 하는 바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결국, 이 표현은 성령이 기드온을 온통 사로잡아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대로 그를 부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고통에서 건져낸 것은 하나님의 영, 신약의 표현으로 한다면 성령께서 그를 사로잡아 부리셔서 이루신 일임을 이 표현에서 얼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오늘 설교의 제목을 "기드온을 부리신 성령"이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이제 사사기 6-8장을 통틀어서 군데군데 필요한 부분을 함께 보시면서, 기드온의 사건에서 한 세 가지 정도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오늘 본문에서 주의 영이, 성령이 기드온을 사로잡은 목적은 어려움에 빠진 하나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함이었음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사사기 6장 앞부분을 보면, 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일곱 해째 미디안 사람들의 종노릇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써 씨앗을 뿌려 곡식을 가꾸어 놓으면 미디안 사람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나타나 그것을 모조리 짓밟아버리거나 빼앗아가 버리는 통에 먹을 것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듣고 읽어서 알고 있는 정도입니다만, 여러분들 가운데 연세드신 분들은 지난날 일본 사람들이나 해방 바로 다음 해에 미국 사람들이 억지로 우리 나라 사람들한테서 쌀과 곡물을 거두어가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결국 한 나라가 외적에 시달릴 때 가장 심각한 것은 식량난이라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이 시간의 주제에서 중심 내용이 되지는 못합니다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나라를 지키자면 농·어업 같은 일차산업을 잘 지켜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살려주십사 하고 울부짖었고,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그 일꾼으로서 기드온을 부르시고 그를 성령으로 사로잡으셔서 부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그 누구를 성령으로 사로잡으실 때는 그 사람 개인에게만 어떤 특별한 혜택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들의 잘못으로 겪는 어려움이기는 하지만 그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그를 통해서 건져내어 주시려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공동체 구원을 겨냥하여 어떤 사람을 일꾼으로 뽑으시고 그를 성령으로 사로잡아 부리신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말하는 공동체란 이스라엘을 가리키기에, 이를 오늘 우리 시대에 맞게 바꾸어 생각한다면 교회가 되겠습니다만, 넓게는 우리가 속한 겨레와 나라와, 더 나아가서는 이 세계 전체를 뜻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살리시고자 하는 대상은 하나님 백성의 모임을 넘어서서 각 나라 각 민족, 온 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 한반도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로잡으신다면, 그 목적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겨레와 이 세상을 살리시고자 하는데 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옷 입어 내 개인이 능력 있고 영감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내 가정과 내 교회가 잘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이 시대가 참으로 필요로 하는 일꾼은 성령에 사로잡혀서 이 나라, 이 겨레, 이 교회, 이 세계를 온갖 어려움에서 건져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리하여,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끊임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 "하나님, 저희들도 성령으로 사로잡으셔서, 저희들에게도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히사, 하나님을 거슬려 잘못되어 가고 있는 이 교회, 이 겨레, 이 나라, 이 세상을 바로 잡고 살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 교회, 이 겨레, 이 나라, 이 세상을 바로잡고 살릴 수 있도록 저희들도 성령으로 옷 입혀 주옵소서!"
둘째, 우리들이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는 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다는 점을 기드온 사건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6장의 흐름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을 무서워하여 숨어서 밀 타작을 하던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일꾼으로 부르셨다는 소식을 전해 준 날 밤(11-24절)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 바알 제단을 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습니다(25-32절).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습니다(33-35절).
여러분, 성경 찬송책 끼고 교회 드나들면서 기도도 드리고 찬송도 부르고 이런저런 교회 일을 한다고 해서, 신학적으로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하나님 섬김을 뜻하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겉으로 고상하게 행동하고 남달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하나님보다 다른 그 무엇을 더 중하게 생각하면 이는 우상숭배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드온이 살던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는 가나안 우상 바알을 섬기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셔서 그들이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억눌려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높이고 섬기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나와 내 자식과 내 가정의 번영이, 성공이, 우리 교회를 먼저 내세우는 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우상은 어떠한 것들입니까? 우리가 참으로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고 어려움에 빠진 한국교회, 이 나라, 이 겨레, 이 세상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우상들과 거짓 하나님들을 위해 우리 마음속에 쌓아 놓은 바들을 사정없이 헐어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새로 쌓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사람들의 적은 힘을 통해서 크게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드온 사건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선 기드온이란 사람이 그리 신통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6장 12-15절을 함께 보십시다:
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힘센 장사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기드온이 그에게 되물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주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들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께서 우리를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기드온이 주께 아뢰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이처럼 기드온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에게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일꾼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듣고서도 자신의 약함을 내세워 물러서려고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맨 끝에 나오는 기드온의 말을 겸손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 기드온의 상황을 드러낸다고도 하겠습니다.
이 기드온은 이미 앞서 11절에서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 이삭을 타작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요즈음 말로 해서 기드온에게는 그리 굳센 믿음도 없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뿐만 아니라, 27절에 보면 기드온이 바알 제단을 헐 때도 "그의 아버지 집안 사람들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일을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흔히들 기드온을 가리켜 믿음의 용사라 하는 말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 신통하지도 않은 사람인 기드온을 통해서 큰 일을 벌이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숱한 적군을 물리친 이스라엘 군대의 수가 겨우 300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도 같은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기드온을 뒤따라 미디안과 싸우겠다고 모인 사람의 수가 32,000명이었습니다. 많이 모인 적군의 수에 견주어 보면 32,000의 군사란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32,000명이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속으로 무서워 떠는 사람들은 돌려보내라고 하셨습니다. 7장 2-3절이 이를 말해줍니다:
주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 그러니 너는 이제라도 그들에게 말하여 두려워서 떨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길르앗 산을 떠나서 돌아가게 하여라." . . .
그래서 20,000명이 돌아가고 12,000명이 남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많다고 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다 - "주께서 또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군인이 아직도 많다...'. . ."
그리하여 남은 12,000명 가운데서 300명만 뽑게 하셨습니다. 결국 기드온은 이 300명만 데리고 나가서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숱한 적군을 무찔렀습니다. 아니 사사기 7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적군을 무찔러 놓으셔서 기드온과 그를 따라간 300명은 그냥 그 승리의 열매를 따먹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드온을 부리셔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내실 때 그 일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보잘것없는 수의 사람들을 데리고 싸움을 이기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이겨 놓으신 싸움에 이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약한 사람들의 적은 힘으로써 큰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의 약함과 모자람을 잘 아는, 오늘 우리들도 늘 새로운 용기를 품을 수 있습니다. 6장 16절에서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하신 말씀을 우리 자신들을 향한 말씀으로도 듣는 것입니다.
이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사도바울이 약한 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게 된다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장 27절의 말씀과도 통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령이 그 아무개를 부리셔서 나라와 겨레를 살리는 큰 일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사람의 큰 힘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사람의 힘은 될 수 있는 대로 적어야 하나님께서 크게 일하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따라서, 우리 약한 사람들도 크신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실 때 함께 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리하여,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무슨 큰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웃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해보려고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약한 우리도 성령의 부리심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하나님이 일하실 틈이 줄어듭니다. 여기서 특히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들은 내가, 우리가 가진 것이 적지 않기에, 그것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을 지니고 그것을 믿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덜 일하시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한번쯤 돌아보실만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 스스로 자신을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까? 오히려 나는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실 수밖에 없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주로 약한 사람들을 데리고 일하시는가 하고 혹이라도 항의하실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마지막 넷째로, 성령께서 부리신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기드온의 겸손을 배웁니다.
여기서 겸손이란 남이 나를 높이려 해도 내가 내 자신을 잘 알기에 남의 칭찬에 들뜨지 않고 내가 오늘의 나 되도록 하신 하나님만을 높임을 뜻합니다. 실제 일이야 어쨌든 기드온이 겨우 300 사람만 데리고 나가서 그 숱한 적군을 물리치고 돌아오자 이에 크게 감명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와 그에게 매달리며 말합니다. -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8장22절).
다름 아니라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기드온 집안이 이스라엘의 통치자 노릇하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기에는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러나 기드온은 한마디로 잘라 거절합니다. -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8:23). "동포 여러분, 오늘 우리가 미디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은 내가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신 것이지 내가 여러분들을 살려낸 것이 아니오" - 이런 뜻의 말이 아닙니까?
이 얼마나 듣기에 좋고 흐뭇한 말입니까? 오늘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적지 아니한데 그 분들에게 이러한 말을 기대한다면 무리이겠습니까?
여러분, 참으로 성령께서 부리시는 사람은 자신을 높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람을 다스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남 위에서 남을 부리려 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을 부리신 성령" -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시지, 기드온이 아님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드온이 기드온으로 이름이 나고 성경에 그 이야기가 적혀 오늘 우리까지 읽게 되는 것은 성령 때문이지, 기드온이 그리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면 모두 이 시대의 기드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시대의 기드온으로 부르셨다 하겠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부르심을 따라 우리 자신들은 참으로 약하고 보잘것 없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만 믿고 용감히 온갖 우상들을 헐어버리고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고 나설 수 있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 때도 스스로를 높이지 않고 하나님만이 다스리시도록 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오늘 6월 첫 주일을 맞아 성령과 나라에 대해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기드온처럼 성령의 부리심을 받는 기독교인들이 되어 문제 많은 우리 한국교회, 이 나라, 이 겨레, 이 세상을 살리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굳게 다짐하십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또한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지난 주일은 농 어촌주일로 지킨 교회들도 있습니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만, 5월 28일이 권농일인 것을 고려하여 그리하는 것 같습니다. 이즈음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우리 나라에서 하는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보니, 날이 가물어 천수답의 경우 모내기 때문에 농사꾼들이 가슴을 태우고 있다는 소식은 영 뒷전에 밀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젠 먹을 쌀도 수입하겠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면서 농사꾼들의 마음은 더욱 더 무거워지는데 그에 대해 보도하는 언론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기껏해야 며칠 전에 대통령이 경기도 어느 시골에서 기계로 모심기하는 장면을 요란스레 텔레비전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또한 5월31일을 바다의 날로 정하고 정부에 해양부를 새로 만든 사실을 크게 알림을 통해 이제껏 소홀히 보았던 바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좋으나, 농촌문제는 더더구나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진 듯합니다.
다가오는 6월 5일은 24번째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남한에서도 오늘 6월 첫 주일이나 다음 주일을 환경주일로 지키는 교단들이나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환경보존위원회에서는 한국교회 환경연구소가 기획한 올해 환경주일 자료집을 펴내어 전국 교회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6월 6일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바친 사람들의 높은 뜻과 공을 기리는 현충일이고, 25일은 46년 전 우리 겨레끼리 죽이는 무서운 싸움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그래서인지, 흔히들 이 6월을 호국의 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라 지키는 일을 깊이 생각해보며 다짐하는 달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의 소식과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한민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 농사일, 바다일, 환경, 나라 - 이런 굵직굵직한 주제들이 오늘 6월 첫 주일의 설교를 준비하던 제게 떠올랐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 시간에는 주로 성령과 나라에 관한 성경 말씀 한군데의 뜻을 새겨보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본문은 오랜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삼천년 전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디안 족이라는 이웃 사람들에게 매우 시달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이라는 젊은이를 불러 이들을 그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신 이야기의 첫 장에 들어 있습니다.
34절에 보면 "주의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으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를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으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옷 입혔다는 뜻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흔히 설교자를 위해 기도드릴 때 "말씀을 전할 아무개에게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히셔서"라 하는 수가 있는데, 이야말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옷 입혔다고 하는 바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결국, 이 표현은 성령이 기드온을 온통 사로잡아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대로 그를 부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고통에서 건져낸 것은 하나님의 영, 신약의 표현으로 한다면 성령께서 그를 사로잡아 부리셔서 이루신 일임을 이 표현에서 얼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오늘 설교의 제목을 "기드온을 부리신 성령"이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이제 사사기 6-8장을 통틀어서 군데군데 필요한 부분을 함께 보시면서, 기드온의 사건에서 한 세 가지 정도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오늘 본문에서 주의 영이, 성령이 기드온을 사로잡은 목적은 어려움에 빠진 하나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함이었음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사사기 6장 앞부분을 보면, 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일곱 해째 미디안 사람들의 종노릇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써 씨앗을 뿌려 곡식을 가꾸어 놓으면 미디안 사람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나타나 그것을 모조리 짓밟아버리거나 빼앗아가 버리는 통에 먹을 것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듣고 읽어서 알고 있는 정도입니다만, 여러분들 가운데 연세드신 분들은 지난날 일본 사람들이나 해방 바로 다음 해에 미국 사람들이 억지로 우리 나라 사람들한테서 쌀과 곡물을 거두어가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결국 한 나라가 외적에 시달릴 때 가장 심각한 것은 식량난이라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이 시간의 주제에서 중심 내용이 되지는 못합니다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나라를 지키자면 농·어업 같은 일차산업을 잘 지켜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살려주십사 하고 울부짖었고,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그 일꾼으로서 기드온을 부르시고 그를 성령으로 사로잡으셔서 부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그 누구를 성령으로 사로잡으실 때는 그 사람 개인에게만 어떤 특별한 혜택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들의 잘못으로 겪는 어려움이기는 하지만 그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그를 통해서 건져내어 주시려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공동체 구원을 겨냥하여 어떤 사람을 일꾼으로 뽑으시고 그를 성령으로 사로잡아 부리신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말하는 공동체란 이스라엘을 가리키기에, 이를 오늘 우리 시대에 맞게 바꾸어 생각한다면 교회가 되겠습니다만, 넓게는 우리가 속한 겨레와 나라와, 더 나아가서는 이 세계 전체를 뜻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살리시고자 하는 대상은 하나님 백성의 모임을 넘어서서 각 나라 각 민족, 온 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 한반도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로잡으신다면, 그 목적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겨레와 이 세상을 살리시고자 하는데 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옷 입어 내 개인이 능력 있고 영감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내 가정과 내 교회가 잘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이 시대가 참으로 필요로 하는 일꾼은 성령에 사로잡혀서 이 나라, 이 겨레, 이 교회, 이 세계를 온갖 어려움에서 건져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리하여,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끊임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 "하나님, 저희들도 성령으로 사로잡으셔서, 저희들에게도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히사, 하나님을 거슬려 잘못되어 가고 있는 이 교회, 이 겨레, 이 나라, 이 세상을 바로 잡고 살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 교회, 이 겨레, 이 나라, 이 세상을 바로잡고 살릴 수 있도록 저희들도 성령으로 옷 입혀 주옵소서!"
둘째, 우리들이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는 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다는 점을 기드온 사건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6장의 흐름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을 무서워하여 숨어서 밀 타작을 하던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일꾼으로 부르셨다는 소식을 전해 준 날 밤(11-24절)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 바알 제단을 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습니다(25-32절).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습니다(33-35절).
여러분, 성경 찬송책 끼고 교회 드나들면서 기도도 드리고 찬송도 부르고 이런저런 교회 일을 한다고 해서, 신학적으로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하나님 섬김을 뜻하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겉으로 고상하게 행동하고 남달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하나님보다 다른 그 무엇을 더 중하게 생각하면 이는 우상숭배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드온이 살던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는 가나안 우상 바알을 섬기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셔서 그들이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억눌려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높이고 섬기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나와 내 자식과 내 가정의 번영이, 성공이, 우리 교회를 먼저 내세우는 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우상은 어떠한 것들입니까? 우리가 참으로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고 어려움에 빠진 한국교회, 이 나라, 이 겨레, 이 세상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우상들과 거짓 하나님들을 위해 우리 마음속에 쌓아 놓은 바들을 사정없이 헐어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새로 쌓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사람들의 적은 힘을 통해서 크게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드온 사건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선 기드온이란 사람이 그리 신통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6장 12-15절을 함께 보십시다:
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힘센 장사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기드온이 그에게 되물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주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들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께서 우리를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기드온이 주께 아뢰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이처럼 기드온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에게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일꾼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듣고서도 자신의 약함을 내세워 물러서려고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맨 끝에 나오는 기드온의 말을 겸손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 기드온의 상황을 드러낸다고도 하겠습니다.
이 기드온은 이미 앞서 11절에서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 이삭을 타작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요즈음 말로 해서 기드온에게는 그리 굳센 믿음도 없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뿐만 아니라, 27절에 보면 기드온이 바알 제단을 헐 때도 "그의 아버지 집안 사람들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일을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흔히들 기드온을 가리켜 믿음의 용사라 하는 말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 신통하지도 않은 사람인 기드온을 통해서 큰 일을 벌이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숱한 적군을 물리친 이스라엘 군대의 수가 겨우 300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도 같은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기드온을 뒤따라 미디안과 싸우겠다고 모인 사람의 수가 32,000명이었습니다. 많이 모인 적군의 수에 견주어 보면 32,000의 군사란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32,000명이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속으로 무서워 떠는 사람들은 돌려보내라고 하셨습니다. 7장 2-3절이 이를 말해줍니다:
주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 그러니 너는 이제라도 그들에게 말하여 두려워서 떨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길르앗 산을 떠나서 돌아가게 하여라." . . .
그래서 20,000명이 돌아가고 12,000명이 남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많다고 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다 - "주께서 또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군인이 아직도 많다...'. . ."
그리하여 남은 12,000명 가운데서 300명만 뽑게 하셨습니다. 결국 기드온은 이 300명만 데리고 나가서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숱한 적군을 무찔렀습니다. 아니 사사기 7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적군을 무찔러 놓으셔서 기드온과 그를 따라간 300명은 그냥 그 승리의 열매를 따먹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드온을 부리셔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내실 때 그 일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보잘것없는 수의 사람들을 데리고 싸움을 이기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이겨 놓으신 싸움에 이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약한 사람들의 적은 힘으로써 큰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의 약함과 모자람을 잘 아는, 오늘 우리들도 늘 새로운 용기를 품을 수 있습니다. 6장 16절에서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하신 말씀을 우리 자신들을 향한 말씀으로도 듣는 것입니다.
이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사도바울이 약한 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게 된다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장 27절의 말씀과도 통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령이 그 아무개를 부리셔서 나라와 겨레를 살리는 큰 일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사람의 큰 힘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사람의 힘은 될 수 있는 대로 적어야 하나님께서 크게 일하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따라서, 우리 약한 사람들도 크신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실 때 함께 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리하여,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무슨 큰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웃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해보려고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약한 우리도 성령의 부리심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하나님이 일하실 틈이 줄어듭니다. 여기서 특히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들은 내가, 우리가 가진 것이 적지 않기에, 그것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을 지니고 그것을 믿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덜 일하시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한번쯤 돌아보실만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 스스로 자신을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까? 오히려 나는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실 수밖에 없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주로 약한 사람들을 데리고 일하시는가 하고 혹이라도 항의하실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마지막 넷째로, 성령께서 부리신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기드온의 겸손을 배웁니다.
여기서 겸손이란 남이 나를 높이려 해도 내가 내 자신을 잘 알기에 남의 칭찬에 들뜨지 않고 내가 오늘의 나 되도록 하신 하나님만을 높임을 뜻합니다. 실제 일이야 어쨌든 기드온이 겨우 300 사람만 데리고 나가서 그 숱한 적군을 물리치고 돌아오자 이에 크게 감명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와 그에게 매달리며 말합니다. -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8장22절).
다름 아니라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기드온 집안이 이스라엘의 통치자 노릇하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기에는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러나 기드온은 한마디로 잘라 거절합니다. -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8:23). "동포 여러분, 오늘 우리가 미디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은 내가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신 것이지 내가 여러분들을 살려낸 것이 아니오" - 이런 뜻의 말이 아닙니까?
이 얼마나 듣기에 좋고 흐뭇한 말입니까? 오늘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적지 아니한데 그 분들에게 이러한 말을 기대한다면 무리이겠습니까?
여러분, 참으로 성령께서 부리시는 사람은 자신을 높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람을 다스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남 위에서 남을 부리려 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을 부리신 성령" -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시지, 기드온이 아님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드온이 기드온으로 이름이 나고 성경에 그 이야기가 적혀 오늘 우리까지 읽게 되는 것은 성령 때문이지, 기드온이 그리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면 모두 이 시대의 기드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시대의 기드온으로 부르셨다 하겠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부르심을 따라 우리 자신들은 참으로 약하고 보잘것 없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만 믿고 용감히 온갖 우상들을 헐어버리고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고 나설 수 있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 때도 스스로를 높이지 않고 하나님만이 다스리시도록 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오늘 6월 첫 주일을 맞아 성령과 나라에 대해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기드온처럼 성령의 부리심을 받는 기독교인들이 되어 문제 많은 우리 한국교회, 이 나라, 이 겨레, 이 세상을 살리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굳게 다짐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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