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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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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왕상19: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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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미현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 |
아버지가 되시고 어머니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피로 우리에게 젖을 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혜의 영으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크신 능력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과 함께 이 아침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가끔 저는 이런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서양인들은 어떠한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는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 아시아인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동양종교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모습 하면 대부분 나이 지긋이 들은 얼굴에 하얀 수염이 있고 하얀 도포와 같은 옷을 입고 구름 위에 앉은 신선과 같은 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대부분 서양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가져 온 그림의 영향으로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30대의 백인 남자를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어떠한 하나님의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우리나라 말에는 다양한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가 발달되었는데, 어떤 형용사가 하나님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지 전능하신, 위대하신, 왕과 같이 위엄있는, 강력한 팔을 뻗으시는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아닌가요? 우리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에 익숙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성서 본문은 조금 다른 내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서 바알과 같은 우상을 섬기지 않도록 모든 우상들을 멀리하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아합왕의 부인인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세벨은 바알을 계속 섬기고자 하였고 이를 저지하는 엘리야를 처단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죽음의 위협에서 엘리야는 도망을 쳤습니다. 마침내 호렙산에 몸을 숨긴 엘리야는 이 산 중에서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아주 강력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 바람은 산을 가르는 듯 했고 바위를 부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강력한 바람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강력한 바람 다음에는 큰 지진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지진 안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잠잠해지고 이번에는 강력한 불길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길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길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잔잔한 속삭임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외투를 두르고 밖으로 나갔는데 동굴의 입구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잔잔하고 미미하며 부드러운 속삭임 가운데에서 위로하고 그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바람, 지진, 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이미지들이 역시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모습에 어울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속성을 떠올리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지 전능, 왕과 같은, 강한 힘을 펼치사 등등 크고 위대하고 강력한 하나님에 대한 형용사가 익숙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은 이러한 형용사로만 묘사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00여년 동안의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은 항상 대부분 강력하고 용감한 남성적인 존재로서, 또 왕과 같은 통치자로서 묘사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한 군주거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 뿐 아니라, 연민을 가득 품은 어머니와 같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아픔을 나누시기도 하시며 어머니가 고통 가운데 아기를 출산하고 그 젖으로 아기를 기르시듯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강력한 팔을 뻗치시며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그의 피조물을 감싸 안으면서 연민으로 품으시기도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증법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신다는 것입니다. 여성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간과내지는 잊혀진 성서 속의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들여진 남성적 하나님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여성적 하나님의 모습도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성성의 하나님이 강조된 것에 비해 이제는 하나님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칭 대명사를 바꾸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단편적인 모습으로 고정화되어 우리에게 전하여 졌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크게 두 종류의 예수의 제자들의 유형이 나옵니다. 한 유형은 베드로로 상징적으로 대변됩니다. 다른 한 유형은 예수에게 가장 사랑받던 제자 요한입니다. 바로 이 두 유형의 제자의 모습과 선교의 방법이 664년 영국의 위트비에서 있었던 한 공의회에서 일방적인 방법으로 결의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베드로의 전통과 요한의 전통 가운데 이후 어떠한 방법으로 선교가 진행되어야 하는지가 논의되었던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강력한 지도자들은 베드로의 전통을 선교의 방법으로 채택하였습니다. 이로써 요한의 방법은 교회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제자의 유형은 서로 어떻게 달랐을까요? 베드로는 바로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그 권위를 한 몸에 지닌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교회의 전통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지닌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전통 위에서 교회는 제도화 되어졌습니다. 이에 대비되는 것이 요한의 전통입니다. 요한은 예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예수에게 사랑받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제도화된 힘이나, 그 어떠한 권위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진정으로 예수를 가까이 하였고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예수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심지어 요한은 예수의 품에 안겨 예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자 하였던 제자였던 것입니다. 제가 스코트랜드 신학자의 “켈트 영성 이야기”라는 책을 번역한 바 있었습니다. 바로 이 책에서 저자는 이 두 전통의 전개 방법에 대하여 재미있게 비교하여 설명하고 그것이 스코트랜드의 켈트 전통으로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전통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베드로 전통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으니 이제는 요한의 전통이 강해져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두 전통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생산적 긴장감이 더욱 조화로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요한과 같이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에게 그렇게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장박동소리를 이 창조의 온 우주가운데에서 듣고자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습관적으로 우리는 일요일만을 위한 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는 주중에는 우리를 만나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외면하며 별다른 열망도 없이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럴 때면 우리에게 교회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한 제도적 공간의 의미 외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4세기 이후 로마제국 시대에 교회는 제도화 되어서 권위적으로만 정착되어져 갔던 것이고 가난한 자와 약자의 편에 서있던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국가 종교로서 그 힘을 발휘하고 이후에도 세계사의 중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진정으로 기도를 통한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서 우리는 꼭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목사의 중재가 필요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평신도 공동체를 지향하는 새길교회의 모습은 굉장히 모범적인 예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서 화해의 사건을 이루셨으므로 우리에게 다른 중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여 주는 중재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편협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또 어디에서든지 우리에게 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고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어느 곳에서건, 숲 속이나 공원 뿐 아니라, 복잡한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라도, 소음과 문제로 뒤엉킨 우리의 일상적 삶의 그 어느 현장에서도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자신 보다 더 우리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제도교회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필요합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서로 서로 신앙을 북돋아 주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동체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제자의 사명을 함께 감당해 가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바람을 통해서, 지진과 불을 통하여서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마침내 잔잔한 속삭임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늘 큰소리로만 외치시고 힘을 발휘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는 그 음성을 잘 듣도록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그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소음들 때문에 그 세미한 소리를 때로는 놓쳐 버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조용한 외침”은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높은 것만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반대되는 가치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기도 합니다.
새길교회 여러분들의 삶이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이어져 가든지 때로는 큰 소리로, 또 때로는 너무나 나지막한 소리로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통하여 우리가 어찌 살아야 좋을지 길 안내를 받고 지극히 작은 자들과의 연대 가운데 살아가는 새길공동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새길http://saegil.or.kr
서울강남구 대치동 889-5 샹제리제센터 A동808호(135-280)
전화:555-6959 e-mail:tosaegil@empal.com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과 함께 이 아침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가끔 저는 이런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서양인들은 어떠한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는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 아시아인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동양종교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모습 하면 대부분 나이 지긋이 들은 얼굴에 하얀 수염이 있고 하얀 도포와 같은 옷을 입고 구름 위에 앉은 신선과 같은 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대부분 서양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가져 온 그림의 영향으로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30대의 백인 남자를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어떠한 하나님의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우리나라 말에는 다양한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가 발달되었는데, 어떤 형용사가 하나님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지 전능하신, 위대하신, 왕과 같이 위엄있는, 강력한 팔을 뻗으시는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아닌가요? 우리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에 익숙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성서 본문은 조금 다른 내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서 바알과 같은 우상을 섬기지 않도록 모든 우상들을 멀리하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아합왕의 부인인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세벨은 바알을 계속 섬기고자 하였고 이를 저지하는 엘리야를 처단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죽음의 위협에서 엘리야는 도망을 쳤습니다. 마침내 호렙산에 몸을 숨긴 엘리야는 이 산 중에서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아주 강력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 바람은 산을 가르는 듯 했고 바위를 부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강력한 바람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강력한 바람 다음에는 큰 지진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지진 안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잠잠해지고 이번에는 강력한 불길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길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길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잔잔한 속삭임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외투를 두르고 밖으로 나갔는데 동굴의 입구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잔잔하고 미미하며 부드러운 속삭임 가운데에서 위로하고 그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바람, 지진, 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이미지들이 역시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모습에 어울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속성을 떠올리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지 전능, 왕과 같은, 강한 힘을 펼치사 등등 크고 위대하고 강력한 하나님에 대한 형용사가 익숙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은 이러한 형용사로만 묘사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00여년 동안의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은 항상 대부분 강력하고 용감한 남성적인 존재로서, 또 왕과 같은 통치자로서 묘사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한 군주거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 뿐 아니라, 연민을 가득 품은 어머니와 같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아픔을 나누시기도 하시며 어머니가 고통 가운데 아기를 출산하고 그 젖으로 아기를 기르시듯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강력한 팔을 뻗치시며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그의 피조물을 감싸 안으면서 연민으로 품으시기도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증법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신다는 것입니다. 여성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간과내지는 잊혀진 성서 속의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들여진 남성적 하나님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여성적 하나님의 모습도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성성의 하나님이 강조된 것에 비해 이제는 하나님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칭 대명사를 바꾸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단편적인 모습으로 고정화되어 우리에게 전하여 졌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크게 두 종류의 예수의 제자들의 유형이 나옵니다. 한 유형은 베드로로 상징적으로 대변됩니다. 다른 한 유형은 예수에게 가장 사랑받던 제자 요한입니다. 바로 이 두 유형의 제자의 모습과 선교의 방법이 664년 영국의 위트비에서 있었던 한 공의회에서 일방적인 방법으로 결의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베드로의 전통과 요한의 전통 가운데 이후 어떠한 방법으로 선교가 진행되어야 하는지가 논의되었던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강력한 지도자들은 베드로의 전통을 선교의 방법으로 채택하였습니다. 이로써 요한의 방법은 교회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제자의 유형은 서로 어떻게 달랐을까요? 베드로는 바로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그 권위를 한 몸에 지닌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교회의 전통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지닌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전통 위에서 교회는 제도화 되어졌습니다. 이에 대비되는 것이 요한의 전통입니다. 요한은 예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예수에게 사랑받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제도화된 힘이나, 그 어떠한 권위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진정으로 예수를 가까이 하였고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예수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심지어 요한은 예수의 품에 안겨 예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자 하였던 제자였던 것입니다. 제가 스코트랜드 신학자의 “켈트 영성 이야기”라는 책을 번역한 바 있었습니다. 바로 이 책에서 저자는 이 두 전통의 전개 방법에 대하여 재미있게 비교하여 설명하고 그것이 스코트랜드의 켈트 전통으로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전통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베드로 전통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으니 이제는 요한의 전통이 강해져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두 전통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생산적 긴장감이 더욱 조화로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요한과 같이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에게 그렇게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장박동소리를 이 창조의 온 우주가운데에서 듣고자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습관적으로 우리는 일요일만을 위한 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는 주중에는 우리를 만나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외면하며 별다른 열망도 없이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럴 때면 우리에게 교회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한 제도적 공간의 의미 외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4세기 이후 로마제국 시대에 교회는 제도화 되어서 권위적으로만 정착되어져 갔던 것이고 가난한 자와 약자의 편에 서있던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국가 종교로서 그 힘을 발휘하고 이후에도 세계사의 중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진정으로 기도를 통한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서 우리는 꼭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목사의 중재가 필요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평신도 공동체를 지향하는 새길교회의 모습은 굉장히 모범적인 예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서 화해의 사건을 이루셨으므로 우리에게 다른 중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여 주는 중재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편협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또 어디에서든지 우리에게 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고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어느 곳에서건, 숲 속이나 공원 뿐 아니라, 복잡한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라도, 소음과 문제로 뒤엉킨 우리의 일상적 삶의 그 어느 현장에서도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자신 보다 더 우리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제도교회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필요합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서로 서로 신앙을 북돋아 주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동체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제자의 사명을 함께 감당해 가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바람을 통해서, 지진과 불을 통하여서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마침내 잔잔한 속삭임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늘 큰소리로만 외치시고 힘을 발휘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는 그 음성을 잘 듣도록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그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소음들 때문에 그 세미한 소리를 때로는 놓쳐 버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조용한 외침”은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높은 것만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반대되는 가치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기도 합니다.
새길교회 여러분들의 삶이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이어져 가든지 때로는 큰 소리로, 또 때로는 너무나 나지막한 소리로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통하여 우리가 어찌 살아야 좋을지 길 안내를 받고 지극히 작은 자들과의 연대 가운데 살아가는 새길공동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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