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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옹호하며

열왕기상 권진관............... 조회 수 1811 추천 수 0 2008.06.25 10:46:27
.........
성경본문 : 왕상12:25-33 
설교자 : 권진관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오늘 이 설교에서는 "애매모호성", 영어로 ambiguity라고 하는 말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애매모호성이라는 말은 누구나 혹은 그 무엇도 절대적으로 선할 수도 없고, 또 절대적으로 악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삶의 애매모호성이라는 차원을 무시할 때 오히려 극단적인 악이 저질러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두 사람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로보암과 이세벨이라는 사람인데,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었고, 이세벨은 북왕국 아합왕의 부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성서에서 가장 악한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주류(主流)와 "다르다"고 하여 악한 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로보암 왕은 10개의 이스라엘 지파부족의 지지를 받으며 북왕국을 창건했습니다. 이들 지파부족들은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에 이르는 왕들에 의해 강요되었던 노예노동에 저항했고 이 저항을 이끌었던 사람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 성서는 이 여로보암 왕을 죄인 중의 우두머리 혹은 죄의 원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열왕기서 기자들은 이스라엘 왕들의 잘못의 뿌리는 여로보암 왕에 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도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고 여로보암왕이 걷던 길을 그대로 걸어 이스라엘을 같은 죄에 빠지게 하였다" (열왕기 상 15:34). 다윗왕이 야훼의 충실한 종으로 그려졌다고 한다면, 여로보암은 야훼께 죄지은 자로 그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야훼께 죄를 지었다고 구약성서는 가르칩니다. 여로보암의 죄가 이스라엘을 쇠망케 했다는 것이 구약성서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열왕기는 일정한 관점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이 관점은 소위 신명기적 역사로부터 유래합니다. 신명기적 역사가(Deuteronomistic Historian)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첫째로, 이것은 야훼와 다윗 왕조 사이의 고유한 계약관계를 지지하는 다윗 왕조 신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민족적, 국가적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로 포함됩니다. 동시에 신명기적 역사가는 역사 기록을 하는 데 있어서 기본 관점과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신명기적 사가들은 우선 주변의 제국주의적 세력에 대항하여 새로운 다윗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 관점에서 역사기록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는 문제의식은 왜 북왕국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업적과 행동들은 이러한 신명기적 역사가의 관점과 관심에 의해서 해석되어졌고 기록, .편집되어졌습니다. 신명기적 역사가들은 여로보암에 대해서는 매우 철저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억압받는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남왕국 유다의 왕 르호보암이 더 심각한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명기적 역사가들은 르호보암의 업적과 행위들에 대해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정치적 잘못을 결정적인 죄악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신명기적 역사가들에게 있는 것은 거의 분명한 것같습니다. 신명기적 역사가는 예루살렘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어기는 죄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신명기적 역사가들은 강제노동과 같은 사회적.구조적 악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회윤리적인 관점에서 불 때 여로보암 보다는 르호보암이 더 큰 잘못을 범했다 하겠습니다. 르호보암은 강제적 노예노동을 경감시켜 달라고 청하러 온 민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써 위협했습니다. "나의 새끼손가락이 부왕의 허리보다 굵다. 너희는 부왕께서 메워 주신 멍에가 무겁다고 한다마는, 나는 그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너희에게 지우리라. 부왕께서는 너희를 가죽채찍으로 치셨으나 나는 쇠채찍으로 다스리리라" (열왕기상 12:10-11). 강요된 노동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북왕국을 "자유의 나라"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태동은 사회혁명의 결과였다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북왕국은 약자들의 단결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학자들까지도 여로보암을 종교적으로 낙인찍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르호보암의 잘못은 가볍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르호보암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리석음" (folly)이라는 정도의 수식어를 붙이지만, 여로보암의 행위에 대해서는 "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에게는 항상 죄인이라는 낙인이 따릅니다. 그는 구약성서 기자로부터 낙인 찍혔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열왕기상 12장에는 르호보암이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왕이라고 그려지고 있고 (24절), 여로보암은 제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행하는 왕이라는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32절).
우리는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이 "민중이 위대하게 되기를 빈다"("may the people be great")이라는 뜻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민중의 이익을 위해 공헌했지만, 남왕국 유다왕 르호보암은 민중의 복지에 오히려 저해가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지도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성서 귀절 인용에서 보듯이 여로보암을 떳떳하지 못하고 비겁한 죄인으로 신명기적 사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세겜을 수축하고 거기에서 살다가 그 후 브누엘을 세우고 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스스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라가 다윗의 왕가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야훼의 전에 제사하러 올라가다가 마음이 정통 상전인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쏠리는 날에는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 갈 것이다." 이스라엘 왕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렇게 선포하였다. "예루살렘에 제사하러 올라 가기란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에집트에서 구해 주신 이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금송아지 하나는 베델에,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예배하러 베델과 단에 갔다. 왕은 또한 언덕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지파가 아닌 일반백성 가운데서 사제를 임명하였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에게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유다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순례절을 제팔월 십 오일로 정하고 자기가 세운 베델의 산당에서 사제들을 임명하였다. 왕은 자기의 마음대로 정한 제팔 월 십 오일이 되면 자기가 세운 베델의 제단에 올라 갔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킬 순례절을 이렇게 제정하고 친히 그 제단에 분향제를 드리러 올라 갔던 것이다 (열왕기상 12:25-33).

위에 인용된 여로보암의 독백 속에 "유다 왕 르호보암"의 이름이 두 번 반복되어 나오고 있으며, 여로보암 왕이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대단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통치 앞날과 운명에 대해 여로보암이 매우 불안해 하고 있는 것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민중들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매우 안절부절 하는 겁쟁이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능력없고 심약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그의 진짜 모습과 불일치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간단히 말해 위의 텍스트는 여로보암을 깎아 내리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위의 텍스트에서는 여로보암이 누구와 상의하여 궁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와 상의했는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조언자들과 상의하였고, 그 조언자와 그는 남 왕국 유다의 정치체제와 종교체제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데에 일치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한 국가가 독립과 국가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정한 정책을 펼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면, 여로보암과 그의 조언자들은 그들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왕으로서의 자기 권한 안에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텍스트는 여로보암의 행위는 무조건 죄가 되는 것이고, 불경한 일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텍스트를 쓴 신명기적 사가들은 여로보암이 아훼에게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에게 드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에게 있어서 이 송아지는 분명 야훼를 상징하는 것일 뿐 그것 자체가 야훼 하느님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신명기적 역사가들은 여로보암의 죄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금송아지를 만든 것. 둘째, 종교적인 예배와 생활을 중앙집권화하지 않고 분산.다변화한 것. 셋째, 금송아지를 성전에 둔 것. 넷째, 레위 족속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사제로 임명한 것. 다섯째, 순례절의 날을 바꾼 것 등입니다. 신명기적 이야기꾼 (narrator)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죄의 원흉 (the author of sin)이요, "후대의 왕들이 그것으로 인해 평가되어지는 악의 전형" (the paradigm of wickedness)이었습니다. 여기에 반해서 다윗은 "경건한 왕의 전형"(the paradigm of the pious king)으로 성서에 나타납니다.
금송아지는 야훼 하느님을 나타내는 토착적인 상징 혹은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금송아지들은 단순히 종교적 상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계약궤가 야훼의 보좌였다고 한다면, 수소는 야훼의 대좌(臺座)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또 산당 여럿을 세운 것은 다신종교를 북돋을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종교의 옛 전통을 복원하려 했을 뿐이지 다른 종교를 추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은 여로보암을 신성모독과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이들 지도자들은 종교를 중앙집권화 함으로써 더 많은 권력을 가졌던 이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중들이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러 간다는 것은 매우 큰 비용과 수고가 드는 일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여로보암은 여러 곳에 산당을 지음으로써 민중들의 이러한 짐을 경감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민중을 위대하게 만들었던 지도자였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여로보암과 그의 세력이 세웠던 정치체제와 종교제도가 "민중적인" 것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항구적으로 "민중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언자 아모스는 여로보암에 의해 구축되었던 베델 성전종교가 민중을 억압하고 왕권을 대변하는 정권의 시녀로 전락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암 4:4, 7:13). 한때 민중적이었던 정치와 종교가 권력을 잡게 되거나 권력과 야합하게 되면 민중을 멀리하고 민중을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현실을 우리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저명한 여성해방신학자이자 구약학자인 필리스 트리블 (Phyllis Trible)이 이세벨에 관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세벨은 성서에서 악의 화신처럼 서술되어지고 있습니다(예, 열왕기상 16:29-34, 19:1-8, 21장, 열왕기하 9장). 여기에서 트리블은 이세벨과 엘리야를 그들의 실제 행동과 말을 중심으로 비교합니다. 그녀는 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 외에 특별히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엘리야는 야훼 신을, 이세벨은 바알 신을 섬겼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세벨은 엘리야처럼 자기가 믿는 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세벨은 신명기적 역사가의 입장에서 볼 때 "몹쓸" 여자였을 것입니다. 트리블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습니다. 즉, 신명기적 사가들 (DH)에 의해 덮어 씌워진 종교-이데올로기적 낙인의 관점에서 이세벨을 보지 말고, 그 덮어 씌워진 낙인의 껍질을 벗겨서 보게 되면 이세벨의 행동과 말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트리블의 이러한 실험은 분명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배타적인 종교-이념적인 사고에 의해 규정되는 것일 수록 트리블의 이러한 실험과 제안은 우리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직시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다른 견해와 사고를 가진 사람을 그 다름 때문에 그를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여로보암 왕이나 이세벨 왕비는 한 종류의 정치적, 종교적 사상만이 허락되던 시대와 사회의 희생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이들과 비교해 볼 때 이세벨은 매우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엘리야라고 하는 구약 최고의 예언자요, "전설적인" 하느님의 사람과 경쟁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굳건히 서서 자신을 공격하는 장군 예후의 군대에 홀로 당당히 맞섰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비겁하지 않게 당당하게 맞았습니다. 그녀는 트리블이 말했듯이 그녀의 남편의 충실한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의기소침해 있던 남편 아합왕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일으켜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이세벨의 됨됨이에 대한 트리블의 노래를 인용합니다.

"이세벨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누구이기에 아합이 그토록 복종하였는가?
왜 그랬을까? 자신의 남편을 조력했던 그런 훌륭한 부인이었으니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마음으로부터 신뢰했으며 그는 그녀로 말미암아 넉넉히 벌어들인다
그녀는 평생 한결같이 그에게 잘 해 주고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 ....... ......

밭을 사도 잘 생각해서 사고
제 손으로 벌어 포도원을 장만한다
허리를 동인 모습은 힘차고
일하는 두 팔은 억세기만 하다 (잠언 31:11, 12, 16, 17)"

이세벨은 이러한 모든 것을 상심하고 자포자기하고 있는 남편인 아합왕을 위해 행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모든 행동을 종교적인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이니셔티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그녀의 신 바알을 거부했고, 그녀와 함께 했던 바알의 예언자들을 살육했습니다.

이제 몇 가지의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나사렛 예수도 유다의 유일적 종교체제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예수는 로마의 정치권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유대적 종교 지배세력에 의해 고난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하나의 유일적 (monolithic) 종교 체제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에 의해 배척받았고 심판받았습니다. 동시에 예수는 이러한 유일적 종교가치관에서 배척받은 사람들을 오히려 주인공으로 만들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돌아온 탕자 이야기와 그를 배척하는 첫째 아들의 이야기,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여로보암의 복권을 암시 받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북왕국의 수도는 사마리아였습니다.
(2)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것을 보고 또 우리의 상황을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격률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편견에 의해 가려진 눈으로가 아니라, 가려지지 않는 "육안으로"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로, 우리가 사물을 판단할 때에는 종교적인 편견이나 일반적인 편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 속에서, 누가 이세벨입니까? 누가 여로보암입니까?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이 이세벨이나 여로보암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이면 멀리합니다. 우리와 비슷한 생각이 아니면 그것을 배척합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다르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을 배척하거나 말살시킨다면, 진정한 인간성에 위배됩니다. 다름에서부터 우리는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공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티모르 사람들이 독립을 원한다고 이들을 말살하려고 하는 인도네시아 민병대 사람들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반인륜적 범죄행위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보다 나은 인간성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평등을 유지할 때, 인류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도 동류의 생각, 동류의 사람들 외에는 배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와 같은 입장을 갖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생각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생각은 배척해 버린다면 더 이상 발전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독선적인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나만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나도 틀릴 수 있고, 아니면 적어도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종교인들처럼 타협할 줄 모르고 열려있지 않고, 독선적인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일 수록 독선적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열려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우리는 자주 봅니다. 우리는 뒤집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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