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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과 하나님

욥기 서중석 목사............... 조회 수 2254 추천 수 0 2008.05.28 08: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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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욥42:10-12 
설교자 : 서중석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욥기는 여러 세기동안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무수한 신학자들과 평신도들 모두에게 깊은 신학적 숙고와 경건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욥기의 주제는 '의인의 고난'으로, 욥기의 이야기 진행은 '항거 후 굴복'으로, 욥기의 마지막 단락은 '행복한 결말'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항목은 모두 피상적인 수준의 욥기 읽기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욥기 중에서 그 동안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해온 마지막 단락에 대한 집중적인 해석을 통해 욥기의 읽기 방향을 재 설정하고자 합니다.
욥기의 높은 봉우리들은 하나님이 나타나 폭풍 속에서 욥에게 말씀하는 장면과 욥의 대답과 욥기 저자의 최후의 평(42:10∼17) 등을 담고 있는 마지막 다섯 장입니다. 그 중에서도 42장 10∼17절은 끝마무리를 위해 가볍게 도입된 보충단락이 아니라 가장 높은 봉우리가 되는 핵심단락입니다. 그 이유는 이 단락이 욥기의 마지막 구절이 되는 42장 17절을 포함하고 있는바, 차차 밝혀지겠으나, 이 마지막 구절 속에 욥기 저자의 고난에 대한 사상이 농도 짙게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가 다녔었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도대체 이 말씀들이 모두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입다물라는 것입니다.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욥기의 저자도 욥의 철저한 굴복을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꺾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항거 후 굴복', 이것이 욥기에 대한 전형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욥기가 이 지점에서 끝난 것으로 가정할 때에만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욥기 저자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물론 욥은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받게 됩니다.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의 '복'이 주어집니다. 사태는 평정된 듯이 보이고 평화가 욥기에 다시 깃들이게 된 듯이 보입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이 다시 태어났고, 딸들의 경우에는 전국을 통틀어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욥은 일백 사십 년을 살다가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은 것으로 욥기는 끝을 맺습니다. 소설이나 영화의 해피 엔딩의 전형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은 항거하다가 결국 굴복하고 만 듯이 보이는 분위기를 반전시켜 줍니다. '기한이 차서'(sva yamin) 죽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욥은 그럭저럭 살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작가이자 198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보스턴대학교 엘리비젤(Elli Wiesel)교수가 'sva yamin'의 가장 적절한 영어 번역으로 제시한 'saturated with years'도 결국 같은 방향을 지시합니다. 곧 욥이 '세월 속에 흡수(와해)된 채' 살다 죽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한 채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결코 행복한 결말의 분위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절을 '욥이 늙도록 장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로 번역하는 것은 행복한 분위기를 가정하거나 암시하는 미흡한 처리가 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개역의 '기한이 차서'가 훨씬 더 담담한 분위기를 드러내주는 적절한 번역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욥은 그럭저럭 살았습니까? 욥은 고통받기 이전에 자신이 소유했던 것보다 갑절이나 더 소유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갑절이나 되는 재산의 소유는 과연 욥을 기쁘게 했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칠천 마리였던 양이 만 사천 마리가 되고, 삼천 마리였던 약대가 육천 마리로 늘었다는 것이 욥이 이유 없이 극심하게 당했던 고난에 대한 보상이 되었을까요? 재산을 두 배가 아니라 세 배로 받았다면 욥은 더 기뻐했을까요? 반대로 재산을 옛날보다 더 적게 받았다면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보상이 겨우 이것이냐고 실망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소유의 크기는 욥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앞장에서 소유물의 유무는 욥과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만일 욥이 "하나님, 이 점은 받아들이겠습니다만, 저 점은 곤란합니다" 하고 하나님과 쟁론했다면 하나님은 결국 그 토론에서 명백하게 이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토론에서 질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9:3)는 것을 이미 간파한 욥은 자신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말하며 뒤로 물러섭니다(42:3). 더 나아가 욥은 "다시는 더 말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하지도 아니하겠다"고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이것은 욥이 하나님에게 동의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욥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문제 자체가 파괴된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욥의 항거의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문제 자체가 소멸되기보다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한 것은 자신과 욥의 엄청난 질적 차이에 대한 강변이었지, 이유 없이 당한 욥의 고난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욥이 이전에 가졌던 문제 자체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다만 욥은 강력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위압'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그 문제를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뒤로 제쳐둔 채, 욥은 세월을 잊고 그럭저럭 살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욥은 하나님의 강한 자기 변론 이후로 더 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야만 했습니다. 자살은 유대교 전통에서 죄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세월 속에 흡수된 채' 살다 죽었습니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산다는 것은 삶을 거의 포기한 채 살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삶에 대한 그러한 포기는 힘센 하나님의 '위압'에 대해 힘없는 욥이 할 수 있었던 작은 항거의 몸짓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강한 어조로 말했을 때, 욥은 철저히 굴복한 듯이 보였습니다. 만일 욥기가 마지막 단락 없이 그 지점에서 끝이 났다면 '굴복한 듯이 보였다'는 판단은 '굴복했다'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마지막 항거의 단락을 핵으로 삼고 역으로 소급해 가면 그러한 굴복이 표면적인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욥은 단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억울하게 희생되어야 했던 인간(욥 이전 자녀)의 생명을 다른 인간(욥의 새 자녀)의 생명으로 대치하는 것이 마치 가능한 것처럼 그 제공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그러한 종류의 '대치'와 '보상'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건과 물건의 평면적 대치는 가능합니다. 카메라를 한 대 잃어버린 사람에게 새 카메라를 그것도 두 대를 주면 충분히 보상이 됩니다. 그러나 정신적 신체적 고통에 대한 물질적 보상은 그 물질이 아무리 크다 해도 미흡한 것입니다. 더구나 잘못 없이 죽어간 인간의 생명을 다른 인간의 생명으로 보상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자녀들을 일순에 모조리 없애 버리고 나서 그 이전 자녀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아름다운 새 자녀들을 줄 터이니 그런 줄 알라는 어떤 명령을 듣고서도, 그 제공을 아무런 항거 없이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상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제공을 욥이 묵묵히 받아들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처리에 항거는 하고 싶으나 항거할 힘이 없음을 깨달은 사람의 포기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니라 침묵 속의 항거입니다. "욥은 그러한 보상이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이대로 내버려두십시오"하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욥기 첫머리에서 욥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1:1). 그뿐 아니라 욥은 자기의 아들들이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을 배반할 것을 염려하여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다"(1:5).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욥기 저자는 왜 욥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묘사를 엄격히 제한시켰을까요? 더구나 욥이 "일백 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다"(42:16)면, 긴 세월을 살았다는 얘기인데,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며 살았는지, 또 자신의 후손들을 어떻게 보살피며 살았는지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흔히 동화에서 끝을 장식하는 '그 후 행복하게 살았다'는 정도의 간략한 보도조차 없습니다. 그저 오래 살았다는 그 기간만이 언급됩니다. 곧 욥의 삶의 '질'에 관한 지극히 짧은 형용사조차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렇다할 삶의 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럭저럭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명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욥기의 마지막 단락은 '욥이 항거한 후에 굴복했다'는 욥기에 대한 전형적이고도 낭만적인 도식을 '욥이 표면적으로 굴복한 후에 침묵 속에서 항거했다'로 역전시켜 줍니다. 행복한 결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 온 욥기는 다소 우울한 결말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정됩니다. 그러나 결말이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우울하기 때문에 희망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말을 통해 욥기가 애써 강조하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욥은 누구입니까? 욥은 한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 빈번히 짓밟혔던 수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 대한 상징적 대표입니다. 곧, 욥기의 저자는 욥에게 이러한 대표성을 부여함으로써 유대민족의 핍박받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로 고투합니다. 욥기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고통에 대한 납득할 만한 대답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욥기는 민족적 고난의 문제에 대한 값싼 해답들이 지혜문학 형식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던 정황에서 그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답을 거부하는 또 다른 하나의 독특한 지혜문학입니다. 곧 욥기의 저자는 욥을 침묵 속에서 항거하게 함으로써 그 책의 주제가 유대인들의 민족적 고난에 대한 명확하고도 웅장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혀줍니다. 욥기는 소위 '의인'은 상을 받고 '죄인'은 벌을 받는다는 통념, 또는 이방 민족은 심판을 받는다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사회적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의로운 유대인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 욥기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욥의 항거를 통해 욥기의 강조점은 인간의 고난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자유의 문제에로 이동됩니다. 민족적 고난에 대한 해답은 인간의 영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욥의 항거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욥기의 주제는 그 책의 표면적인 것들이 표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의인의 고난'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근본 주제는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자유하다는 것은 그 분이 인간의 인과율을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인간의 의식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욥기가 제시하는 인과율을 넘어선 자유로운 하나님 상은 일면 독자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저자가 만일 인과율에 갇힌 하나님 상을 제시했다면, 독자의 절망감은 훨씬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과율에 따라 심판한다면 개인이건 그룹이건 그 누구도 그 아래 남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과율 속에서는 '은혜'라는 개념이 와해됩니다. 이러한 욥기의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한 이사야의 선언과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55:8). 시인 괴테는 "손안에 잡힌 것은 무엇이든지 다 썩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을 때에만, 인간의 하나님이 됩니다. 지평선은 우리가 그것을 잡으려고 아무리 다가가도 여전히 뒤로 밀립니다. 바로 그 점이 지평선을 지평선답게 해줍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절감하면 할수록,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 인식의 한계를 심각하게 자각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절망과 침묵, 경건과 은혜에 대한 열망 역시 그만큼 더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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