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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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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9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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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03.10.19 |
오늘 시편 기자는 시인으로서의 특성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1절만 보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 위엄을 옷으로 입으시고 왕위에 오르셨다. 야훼께서 그 위엄 위에 능력을 띠삼아 동이셨다." 만약 이런 표현을 보고 하나님을 어떤 나라의 왕처럼 생각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이런 방식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왕의 제관식이 가장 권위 있는 행사였으니까요.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위엄'을 옷으로 입으셨다고 합니다. 위엄이 있는 분 앞에 가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낮추어야만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위엄이라는 옷 위에 '능력'이라는 띠를 동이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을 동시에 갖고 있는 분으로서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장면이 그림처럼 우리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그런데 위엄과 능력으로 옷과 띠를 삼은 존재는 실제로 어떤 분일까요?
세상과 하나님
시편 기자는 우선 위엄과 능력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세우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토대가 아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흔들리지 않는 세상은 "처음부터 당신은 야훼시옵니다"는 명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이 세상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본 것입니다.
성서 기자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과 깊은 연관성 가운데서 바라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깊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나 철학도 역시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그 바탕에 놓고 자신들의 사유체계를 세워나갔습니다. 과연 이 세상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토대는 무엇일까요? 우선 오늘 성서 본문이 기록된 고대인들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3천년 전 고대인들이나 오늘 우리나 세상을 보는 직관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약간 철학적인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게 별 대단한 학문이 아니라 이 세상과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세상'이라는 성서 기자의 설명도 역시 철학적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크게는 우주가 있고, 작게는 이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현상과 어떤 사물들이 있습니다. 민들레, 사슴, 모기가 있습니다. 안개가 있고 구름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아주 가깝게는 인간이 있고 친구가 있고, 교회도 있고, 학교도 있습니다. 이런 '있는' 것들을 크게 구분하면 생명과 비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있다'고 하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왜 나무가 이 지구에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렇게도 질문해야 합니다. 왜 어떤 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걸까요? 지금도 하루에 수십 종의 종들이 지구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왜 그런 것들은 그렇게 잠시 있다가 없어져야만 하는 걸까요? 잠시 동안 이 땅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 이런 질문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질문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이에 대한 실증적인 대답이 아직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에 대해서 좀더 근본적으로 성실한 질문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예컨대 아주 뛰어난 도공을 알려고 한다면 그가 만든 질그릇을 연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어떤 사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만든 세상을 깊이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가장 핵심적인 길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만 주장할 뿐이지 세상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 안에서 두 극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입장입니다. 가시적인 이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치우쳐서 살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한국의 기독교에는 이런 신앙적 특성이 뿌리깊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을 이용하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용해서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기술문명은 이런 사고방식에서 출발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최근 우리 한국교회 안에 점차 큰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신앙 태도 이와 비슷합니다. 소위 '청부론'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런 신앙유형은 외면적으로는 깨끗한 재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철저하게 자본중심의 이 세계사적 흐름에 편승해서 즐겁게 살아가려는 현대인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도피하거나, 아니면 적당한 윤리적 체계를 통해서 세상을 이용하겠다는 양자 모두 바른 길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우리가 외면한다면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이 되고, 이 세상을 이용하는 데만 마음을 둔다면 하나님의 행위를 천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당신의 왕좌는 처음부터 요지부동이오니"(2절)라는 구절과 연결시켜본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왕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 자체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거하는, 즉 위엄과 능력으로 이 세상에 토대를 놓으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근거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세상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흔들리는 자연
오늘 시편기자는 왜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셨다"고 노래하는 걸까요? 이 사실이 누구에게나 명확하다면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3절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물결소리 높습니다! 야훼여, 강물소리 술렁댑니다. 서로 부딪치며 광란합니다."
시편 기자는 무슨 현상을 보고 이렇게 노래합니까? 4절에는 '몸부림치는 바다소리'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홍수나 화산폭발 현상 앞에서 큰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런 자연현상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현대인들도 뜻하지 않는 자연재해 앞에서 두려워하는 데 하물며 3천년 전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이런 두려움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신화 형식을 통해서 자주 등장했습니다. 창세기의 노아 홍수도 역시 이런 신화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지나기 때문에 그렇지 지구를 중심으로 한 자연 현상을 진지하게 들어야본다면 오늘 시편기자가 고백하듯이 그것들이 "서로 부딪치며 광란한다"는 묘사에 동감할 것입니다. 한 두가만 지적해 볼까요? 지구에는 정기적으로 빙하기가 찾아오는데, 지금은 다행히 간빙기에 해당됩니다. 빙하기가 시작되면 지구 표면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뒤덮이게 될 것입니다. 운이 좋으면 적도 부근만 겨우 추위에 강한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있겠지요. 뿐만 아니라 지구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경우에는 비록 지구가 반조각이 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재앙만이 우리 삶의 토대를 위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 이 지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 실제적으로 훨씬 위험합니다. 지금의 속도로 자동차가 계속 늘어난다면 당연히 대기권 안의 산소가 줄어들겠지요. 현재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는 대기의 가스 분포 상황이 허물어진다면 가장 먼저 인간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오존층 붕괴가 먼저 일어날 것 같습니다. 태양 빛이 오존층에 의해서 일단 걸러지지 않고 몽땅 지표에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이 생명계가 어떤 위험에 노출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삶의 질서
시편기자는 위에서 말한 자연의 소용돌이만 두렵게 생각한 게 아닙니다. 고대시대는 정치권력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런 힘들은 과연 두려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지금 시편기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을 '많고 많은 물결소리'라고 표현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이 활동하고 있는 그 시대의 일인지 아니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던 그 시대의 일인지 말입니다. 또는 남북이스라엘 모두를 포함해서 민중들을 포악하게 대했던 왕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시편 94편을 93편과 연장성 속에서 읽어야만 할 필요는 없지만 시편기자들의 상황과 생각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참고로 삼을 수는 있습니다. 94편 1,2절은 이렇습니다. "복수의 하느님, 야훼여, 복수의 하느님, 나타나소서. 일어나소서, 세상을 재판하시오 교만한 자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소서." 교만한 자는 자연적 재앙처럼 사람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성서시대는 이런 교만한 왕과 제국들이 패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이런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자연재앙과 비슷했습니다. 예언자와 시편기자들은 그들의 악한 힘을 명확하게 보았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역사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인간의 역사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자기의 신앙만 올바로 이끌어 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교만한 자들에 의해서 훼손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간혹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는 개인 신앙에만 치우쳐서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 운동가들이 해야 할 일이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종의 역사 낙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한쪽은 정치투쟁을 통해서 이 사회를 명실상부하게 민주화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옳은 말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렇게 정의와 평화를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쪽은 기독교인들의 도덕성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해서 이 역사가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역사는 종말론적으로 완결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가 하는 일들은 아무리 철저했다고 하더라도 잠정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터전
시편기자는 자연적 재앙과 정치 권력의 횡포가 아무리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세상의 터전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왕좌는 처음부터 '요지부동'입니다(2절).
또한 "높은 데 계신 야훼는 더 세십니다. 몸부림치는 바다소리보다 세시고 많고 많은 물결소리보다 더 세십니다."(4절). 이게 곧 우리가 시편기자에게서 배워야할 신앙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악한 힘들이 요동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의 극단적인 생태론자들과 상당한 부분에서 생각을 같이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다르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교적 비관론에 기울어져 있지만 나는 궁극적으로 낙관론자이기 때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별은 이 우주 가운데서 이 지구뿐입니다. 태양처럼 위성을 갖고 있는 별이 없을뿐더러 설령 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와 같은 환경이 주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구와 똑같은 환경을 가진 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유기물의 생성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현재 지구에서 벌어지는 정도의 생명현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이 생명현상은 우연과 우연의 결합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지 이렇게 귀중한 지구가 생태적으로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데에는 생태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비록 인간이 그런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는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생명현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 동안 서울시민의 쓰레기를 모았던 난지도가 쓰레기 투입이 끝나고 나니까 몇 년 후에 생태적으로 되살아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생명 복원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짐승들이 멸종당한다
고 하더라도, 다시 미생물로부터 새로운 진화의 과정이 전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상태까지 이르지 않도록 우리가 이 지구의 생태적 조건을 보호하고 유지시켜야 마땅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은 이 세상의 터전을 지켜내십니다.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셨다"는 시편기자의 주장을 나는 받아들입니다.
역사의 주인
이런 신앙은 인간의 역사에까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서로 부딪치며 광란하는' 이 세상의 교만한 권력은 아무리 요동친다고 하더라도 하
나님이 세우신 이 세상, 그리고 그 역사를 허물지 못합니다. 이런 시편기자의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저는 역사 낙관주의자입니다. 단지 이 세상의 역사를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 유토피아로 건설할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세상의 터전을 세우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낙관주의자입니다.
1990년 대 초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다음에 세계질서가 훨씬 정의롭지 못한 쪽으로 발전해나가는 것 같아서 심기가 편치 않습니
다. 경제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국가 사이에, 개인과 개인 사이에 빈부격차는 심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이익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현상의 표본이라는 점에서 더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이렇게 흔들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경제의 바른 질서가 세워질 것입니다.
요즘 미국의 행태를 보면서 오늘 시편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물결소리, 강물소리, 광란을 보고 듣는 것 같습니다. 이라크 땅을 아무리 뒤져도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처음 이라크 전쟁을 일으킬 때에 내세웠던 명분이 헛것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면 마땅히 국제사회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물러서야 하는데, 추후적으로 국제사회의 공인을 얻어내는 데만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유엔의 안보리가 미국에게 밉보이기 싫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이미 엎지르진 물이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피해를 최소화해야겠다는 생각인지 이라크 전후복구 계획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계사의 한 페이지는 정리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이런 힘이 먹혀든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신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이 역사를 바르게 세워나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몸부림치는 바다소리보다' 세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막연한 것 아니냐,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발언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역사를 방기하는 게 아니라 철저한 참여를 전제합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바로 세워나가시는 역사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희망하고 거기에 참여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신다'는 시편기자의 고백은 역사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참여하는 자의 외침입니다. 또한 역사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교만한, 몇몇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호소이자 예언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위엄과 능력으로 옷을 입으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위엄과 능력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힘입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의 한 아기를 메시아로 일으켜 세운 힘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분을 죽은 자로부터 부활시킨 그 능력입니다. 바로 이런 분이 우리 삶을 지켜주십니다. 우리 삶의 터전은 결국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2003.10.19>
세상과 하나님
시편 기자는 우선 위엄과 능력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세우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토대가 아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흔들리지 않는 세상은 "처음부터 당신은 야훼시옵니다"는 명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이 세상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본 것입니다.
성서 기자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과 깊은 연관성 가운데서 바라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깊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나 철학도 역시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그 바탕에 놓고 자신들의 사유체계를 세워나갔습니다. 과연 이 세상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토대는 무엇일까요? 우선 오늘 성서 본문이 기록된 고대인들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3천년 전 고대인들이나 오늘 우리나 세상을 보는 직관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약간 철학적인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게 별 대단한 학문이 아니라 이 세상과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세상'이라는 성서 기자의 설명도 역시 철학적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크게는 우주가 있고, 작게는 이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현상과 어떤 사물들이 있습니다. 민들레, 사슴, 모기가 있습니다. 안개가 있고 구름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아주 가깝게는 인간이 있고 친구가 있고, 교회도 있고, 학교도 있습니다. 이런 '있는' 것들을 크게 구분하면 생명과 비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있다'고 하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왜 나무가 이 지구에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렇게도 질문해야 합니다. 왜 어떤 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걸까요? 지금도 하루에 수십 종의 종들이 지구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왜 그런 것들은 그렇게 잠시 있다가 없어져야만 하는 걸까요? 잠시 동안 이 땅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 이런 질문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질문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이에 대한 실증적인 대답이 아직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에 대해서 좀더 근본적으로 성실한 질문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예컨대 아주 뛰어난 도공을 알려고 한다면 그가 만든 질그릇을 연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어떤 사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만든 세상을 깊이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가장 핵심적인 길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만 주장할 뿐이지 세상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 안에서 두 극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입장입니다. 가시적인 이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치우쳐서 살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한국의 기독교에는 이런 신앙적 특성이 뿌리깊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을 이용하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용해서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기술문명은 이런 사고방식에서 출발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최근 우리 한국교회 안에 점차 큰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신앙 태도 이와 비슷합니다. 소위 '청부론'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런 신앙유형은 외면적으로는 깨끗한 재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철저하게 자본중심의 이 세계사적 흐름에 편승해서 즐겁게 살아가려는 현대인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도피하거나, 아니면 적당한 윤리적 체계를 통해서 세상을 이용하겠다는 양자 모두 바른 길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우리가 외면한다면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이 되고, 이 세상을 이용하는 데만 마음을 둔다면 하나님의 행위를 천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당신의 왕좌는 처음부터 요지부동이오니"(2절)라는 구절과 연결시켜본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왕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 자체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거하는, 즉 위엄과 능력으로 이 세상에 토대를 놓으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근거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세상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흔들리는 자연
오늘 시편기자는 왜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셨다"고 노래하는 걸까요? 이 사실이 누구에게나 명확하다면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3절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물결소리 높습니다! 야훼여, 강물소리 술렁댑니다. 서로 부딪치며 광란합니다."
시편 기자는 무슨 현상을 보고 이렇게 노래합니까? 4절에는 '몸부림치는 바다소리'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홍수나 화산폭발 현상 앞에서 큰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런 자연현상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현대인들도 뜻하지 않는 자연재해 앞에서 두려워하는 데 하물며 3천년 전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이런 두려움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신화 형식을 통해서 자주 등장했습니다. 창세기의 노아 홍수도 역시 이런 신화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지나기 때문에 그렇지 지구를 중심으로 한 자연 현상을 진지하게 들어야본다면 오늘 시편기자가 고백하듯이 그것들이 "서로 부딪치며 광란한다"는 묘사에 동감할 것입니다. 한 두가만 지적해 볼까요? 지구에는 정기적으로 빙하기가 찾아오는데, 지금은 다행히 간빙기에 해당됩니다. 빙하기가 시작되면 지구 표면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뒤덮이게 될 것입니다. 운이 좋으면 적도 부근만 겨우 추위에 강한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있겠지요. 뿐만 아니라 지구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경우에는 비록 지구가 반조각이 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재앙만이 우리 삶의 토대를 위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 이 지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 실제적으로 훨씬 위험합니다. 지금의 속도로 자동차가 계속 늘어난다면 당연히 대기권 안의 산소가 줄어들겠지요. 현재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는 대기의 가스 분포 상황이 허물어진다면 가장 먼저 인간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오존층 붕괴가 먼저 일어날 것 같습니다. 태양 빛이 오존층에 의해서 일단 걸러지지 않고 몽땅 지표에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이 생명계가 어떤 위험에 노출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삶의 질서
시편기자는 위에서 말한 자연의 소용돌이만 두렵게 생각한 게 아닙니다. 고대시대는 정치권력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런 힘들은 과연 두려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지금 시편기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을 '많고 많은 물결소리'라고 표현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이 활동하고 있는 그 시대의 일인지 아니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던 그 시대의 일인지 말입니다. 또는 남북이스라엘 모두를 포함해서 민중들을 포악하게 대했던 왕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시편 94편을 93편과 연장성 속에서 읽어야만 할 필요는 없지만 시편기자들의 상황과 생각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참고로 삼을 수는 있습니다. 94편 1,2절은 이렇습니다. "복수의 하느님, 야훼여, 복수의 하느님, 나타나소서. 일어나소서, 세상을 재판하시오 교만한 자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소서." 교만한 자는 자연적 재앙처럼 사람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성서시대는 이런 교만한 왕과 제국들이 패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이런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자연재앙과 비슷했습니다. 예언자와 시편기자들은 그들의 악한 힘을 명확하게 보았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역사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인간의 역사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자기의 신앙만 올바로 이끌어 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교만한 자들에 의해서 훼손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간혹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는 개인 신앙에만 치우쳐서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 운동가들이 해야 할 일이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종의 역사 낙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한쪽은 정치투쟁을 통해서 이 사회를 명실상부하게 민주화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옳은 말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렇게 정의와 평화를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쪽은 기독교인들의 도덕성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해서 이 역사가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역사는 종말론적으로 완결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가 하는 일들은 아무리 철저했다고 하더라도 잠정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터전
시편기자는 자연적 재앙과 정치 권력의 횡포가 아무리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세상의 터전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왕좌는 처음부터 '요지부동'입니다(2절).
또한 "높은 데 계신 야훼는 더 세십니다. 몸부림치는 바다소리보다 세시고 많고 많은 물결소리보다 더 세십니다."(4절). 이게 곧 우리가 시편기자에게서 배워야할 신앙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악한 힘들이 요동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의 극단적인 생태론자들과 상당한 부분에서 생각을 같이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다르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교적 비관론에 기울어져 있지만 나는 궁극적으로 낙관론자이기 때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별은 이 우주 가운데서 이 지구뿐입니다. 태양처럼 위성을 갖고 있는 별이 없을뿐더러 설령 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와 같은 환경이 주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구와 똑같은 환경을 가진 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유기물의 생성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현재 지구에서 벌어지는 정도의 생명현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이 생명현상은 우연과 우연의 결합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지 이렇게 귀중한 지구가 생태적으로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데에는 생태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비록 인간이 그런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는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생명현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 동안 서울시민의 쓰레기를 모았던 난지도가 쓰레기 투입이 끝나고 나니까 몇 년 후에 생태적으로 되살아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생명 복원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짐승들이 멸종당한다
고 하더라도, 다시 미생물로부터 새로운 진화의 과정이 전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상태까지 이르지 않도록 우리가 이 지구의 생태적 조건을 보호하고 유지시켜야 마땅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은 이 세상의 터전을 지켜내십니다.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셨다"는 시편기자의 주장을 나는 받아들입니다.
역사의 주인
이런 신앙은 인간의 역사에까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서로 부딪치며 광란하는' 이 세상의 교만한 권력은 아무리 요동친다고 하더라도 하
나님이 세우신 이 세상, 그리고 그 역사를 허물지 못합니다. 이런 시편기자의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저는 역사 낙관주의자입니다. 단지 이 세상의 역사를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 유토피아로 건설할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세상의 터전을 세우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낙관주의자입니다.
1990년 대 초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다음에 세계질서가 훨씬 정의롭지 못한 쪽으로 발전해나가는 것 같아서 심기가 편치 않습니
다. 경제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국가 사이에, 개인과 개인 사이에 빈부격차는 심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이익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현상의 표본이라는 점에서 더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이렇게 흔들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경제의 바른 질서가 세워질 것입니다.
요즘 미국의 행태를 보면서 오늘 시편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물결소리, 강물소리, 광란을 보고 듣는 것 같습니다. 이라크 땅을 아무리 뒤져도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처음 이라크 전쟁을 일으킬 때에 내세웠던 명분이 헛것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면 마땅히 국제사회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물러서야 하는데, 추후적으로 국제사회의 공인을 얻어내는 데만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유엔의 안보리가 미국에게 밉보이기 싫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이미 엎지르진 물이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피해를 최소화해야겠다는 생각인지 이라크 전후복구 계획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계사의 한 페이지는 정리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이런 힘이 먹혀든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신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이 역사를 바르게 세워나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몸부림치는 바다소리보다' 세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막연한 것 아니냐,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발언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역사를 방기하는 게 아니라 철저한 참여를 전제합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바로 세워나가시는 역사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희망하고 거기에 참여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흔들리지 않게 든든히 세우신다'는 시편기자의 고백은 역사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참여하는 자의 외침입니다. 또한 역사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교만한, 몇몇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호소이자 예언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위엄과 능력으로 옷을 입으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위엄과 능력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힘입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의 한 아기를 메시아로 일으켜 세운 힘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분을 죽은 자로부터 부활시킨 그 능력입니다. 바로 이런 분이 우리 삶을 지켜주십니다. 우리 삶의 터전은 결국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200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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