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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에 이르는 길

시편 홍순택............... 조회 수 1444 추천 수 0 2008.10.26 23: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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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131:1-2 
설교자 : 홍순택 형제 
참고 : 새길교회2007.4.29 주일설교 
들어가며
지난 며칠 간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사건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았습니다. 언론도 연일 관련된 소식들을 쏟아냈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개인의 심리적 문제, 미국의 사회구조적인 문제, 우리들과 언론들의 미국 편향적인 생각, 심지어 민족주의와 공동체의식에 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들이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교우님들께서는 그 많은 이야기들 중 어떤 이야기가 가슴에 남아 있으신지요. 저에게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남아있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버지니아 공대 내에 학교와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진 추모현장이 있는데, 그곳에 세워진 비석이 32개가 아니라 33개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콜럼바인 고교의 사건에서는 두 살인자도 함께 추모하는 것에 대해 유족 일부가 반발하였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승희 씨의 비석에도 추모의 글과 더불어 조승희 씨가 생전 겪었을 고통을 몰라보고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는 글들이 꽃과 함께 놓여졌다는 뉴스를 듣고 저는 일종의 성스러운 감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성스러워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생자들께는 죄송스런 말이지만 이번 사건과 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진 토론들은 우리들의 세상을 보는 눈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했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을 통해 현대사회의 부조리가 더 분명히 드러났고, 그 부조리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부각되었으며, 그 부조리를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이 보다 더 분명하고 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그분들은 이 시대의 부조리 속에 놓인 인간들 대신 고통을 당한 대고(代苦)의 그리스도들이라고 할 수 있지는 않을까요. 그 부조리에는 인간들의 욕망과 죄악, 무관심과 소외, 사회의 구조적 죄악들이 있겠지요. 그리고 그분들은 또한 그같은 부조리에 개인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일조하거나 최소한 방조하고 있는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진 대속(代贖)의 그리스도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겨진 숙제
이제 우리 남은 자들에게는 숙제가 남겨진 것 같습니다. 조승희 씨와 같은 사람들이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이 세계의 부조리를 개인적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적 차원에서 경감시키는 것이 그 숙제는 아닐런지요. 조승희 씨가 그런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은 자신의 괴로움과 억울함, 고통과 분노를 적절히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다 알고 계시듯이 이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공동체, 가정과 학교와 지역사회와 국가, 그 외에 그가 속했던 어떤 공동체가 있었다면 그 공동체도 물론―아! 교회도 물론 포함되겠지요― 조승희 씨 개인의 괴로움과 억울함, 고통과 분노를 알아채고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야 했겠지요. 괴로움과 억울함과 고통과 분노, 이것은―개인의 책임도 분명 있지만― 바로 그 공동체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며 사회경제적인 구조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공동체든 괴로움과 억울함과 고통과 분노를 해소하고 평온에 이르는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그런 방법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일단 개인적인 차원에서 분노를 대하는 모습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소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에 음악을 크게 듣습니다. 또는 여행을 갑니다. 그리고 가끔은 기도와 명상을 하거나 종교 서적을 읽기도 합니다. 음악을 듣거나 여행을 가고 명상을 하는 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분노의 원인이 되는 괴로움과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음악 감상이 끝나고 여행을 갔다 오고 명상을 하고 나도 여전히 제 삶의 문제들은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은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죠. 하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조금은 달라져 있는 저 자신을 느끼게 됩니다. 현실의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 딴 짓을 하고 났기에 기분전환이 되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 생각하고 고백하기로는, 전혀 비과학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성령의 도우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바라고 그렇게 믿기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은근히, 조용히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저는 고백하게 됩니다.

시편과 순례자 이야기
흔히 인생을 순례자의 여행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요즘에야 비행기 타고 자동차 타고 호텔에서 묵으며 그나마 편하게 여행을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겠죠. 인생 곳곳에 놓인 고통과 역경이 옛 순례자의 여행과 닮아있겠지요. 그렇지만 순례가 늘 괴롭고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순례의 길에는 우연히 만나게 되는 길벗이 생기게 마련이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만나기도 하죠. 무엇보다도 순례의 끝, 거룩한 땅에 이르게 된다는 숭고한 목적에 따라 길을 가게 되면서, 뜨거움과 배고픔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심지어 도적을 만나는 일에서조차도 거룩하신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됨으로써 고통 가운데에서도 그분이 주시는 평온에 이르기도 합니다.

인생 또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합니다. 고통의 의미를 찾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온에 이르길 원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종교적인 존재인가 봅니다. 왜 하느님께서 내게 고통을 베푸시는가. 물론 고통은 무조건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연지성일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겪으며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고통에서조차도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마치 순례자들의 고백처럼 오히려 많은 고통을 통해 더욱더 하느님께 다가가게 되는, 고통 속에서도 평온에 이르게 되는 역설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 더 다가가기 위해 일부러 고통을 자초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으니 굳이 고통을 벗어나려고 애쓰지 마시구료. 좋은 선물이잖소?” 하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나 사회구조적으로나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단순한 사회사업, 복지사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에덴의 인간, 고통을 모르는 행복한 인간의 삶을 되찾기 위한 선교, 하느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순례자도 고통이 즐거워서 성지로 여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고통의 조건들이겠지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누구도 고통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고통은 피할 수 없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고통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며 분노하게 만들고 주저앉게 만듭니다. 이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어떻게 고통에 쓰러지지 않고 하느님을 발견하며 평온에 이를 수 있을까요.

시편 131편은 다른 몇 편의 시편과 함께 히브리어로 “계단”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어를 제목으로 갖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성서는 이를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라고 번역했지요. 시편 131편은 순례자가 긴 여정의 끝자락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시온성의 계단을 오르며 부르는 노래들 중의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드디어 눈앞에 보이는 성전, 이제 계단 몇 개만 올라가면 목적지에 이르게 됩니다. 가장 거룩한 곳, 하느님께서 친히 계시는 그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 동안 겪었던 모든 어려움들과 기쁨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겠지요. 하느님이 없다고 여겨지는 고통의 순간에서도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현존을 느끼려했던 순례자라면 그 순간은 매우 특별할 것입니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이 노래를 부르는 순례자. 힘든 여정을 마치고 목적지에 다다랐기에 환희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시편 131편을 지은 순례자는 승리와 환희의 노래가 아닌 평온의 노래, 고요와 침묵의 노래를 부릅니다. 거대한 교향곡의 대단원을 포르테시모가 아닌 피아니시모로 끝맺습니다.

* 시편 131:1-2

1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2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고통의 순간들을 거치며 그는 정련되고 정화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많은 부분이 바로 우리 자신과 인간 사회의 교만과 욕심으로 인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이런 깨달음은 그저 현실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순응하라는 패배주의는 아닐 것입니다. 시편 131편과 함께 읽히는 집회서 3장 21-25절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령한 일에 전념하라”는 명령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염세적이고 체념적인 것으로까지 보이는『전도서』도 ‘오로지 여호와가 한 분 하느님이신 줄 알고 사람의 의무를 다하라’는 적극적인 행동윤리를 제시하며 끝을 맺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시편 131편의 깨달음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본질을 벗어나는 교만함과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런 교만함과 욕심으로 인해 오는 고통들은 고통이 아니라 나 자신의 덧없는 교만함과 욕심의 불순물을 정련해내는 연단의 불이라고 깨달은 것이 아닐까요. 시편 131편의 기자는 순례 기간 동안 겪는 고통들 속에서 단순히 고통을 벗어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곰씹고 고통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에게 귀 기울였기에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아닐까요. 이런 마음으로 고통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고통이 우리의 좌절과 분노를 키우는 독이 되기보다는 우리의 영혼을 고양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 평온에 이르는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무고한 자들의 고통, 인간다운 삶의 조건도 갖추지 못한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은, 어찌 보면 부르조아적인 시선으로 보기는 어려운, 아니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일 것입니다. 무고한 자들, 가난한 자들의 고통은 서둘러 덜어줘야 할 짐이지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보라고 하며 위로만 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늘 고통과 함께하고 있는 무고한 자들, 가난한 자들이 고통을 적게 누리는 사람들보다 더 고통을 솔직히 대면하고 하느님께 물으며 자신들이 가진 적은 욕심마저도 더 살피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시편 131편을 지은이가 이르른 평온은 그저 다 잘 되고 다 풍족하고 다 무난하기에 도달한 매끈한 평온은 아닙니다. 고통을 대면하며 나를 씻어내고 하느님께 귀 기울이며 얻어낸, 상처의 흔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은 드리지만 전 아직 제 인생에 불현듯 찾아오는 고통과 어떻게 지내야할 지 잘 모릅니다. 그저 피하고만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시편 131편의 지은이처럼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생전에 그런 깨달음을 얻는다면 더 좋겠지만 이 세상 순례를 마치는 그날, 죽음의 순간에라도 시편 기자가 얻은 평온에 이르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평온에 이를 수 있을 지 구체적인 방법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평온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길 원합니다. 인간의 교만과 욕심이 쌓아올린 세상의 두터운 벽을 성령께서 꿰뚫고 오시어 제 맘에 찾아오시길 기도 드립니다.

마치며
부족한 말씀증거를 마치며 중세 이슬람 신비주의자인 잘랄룻딘 루미의 시를 한 편 읽어드리겠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여관과 같습니다.
   매일 아침 새 손님이 찾아옵니다.
   기쁨, 우울, 비열.
   때로 순간의 깨달음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손님.
   모두를 환영하고 대접하십시오.
   비탄의 무리가 당신의 집을 거칠게 휩쓸고, 가구를 부수더라도,
   모든 손님을 극진히 대하십시오.
   그러면 그 손님들이 당신을 새로운 기쁨으로
   깨끗하게 씻어줄 것입니다.
   어두운 생각, 수치, 원한을 웃음으로 맞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집에 초대하십시오.
   누가 오더라도 감사하십시오.
   그들 모두는 저 너머로 당신을 안내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기도
사랑의 하느님. 다가오는 고통 속에서, 이 세상의 두터운 교만과 욕심의 벽을 꿰뚫고 오시는 성령의 음성에 우리가 귀 기울이게 해 주십시오. 또한 고통 중에 처한 이웃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애쓰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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