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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전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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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홍순택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6.1.8주일설교 |
전도서 1:8~11, 고린도후서 5:18
오늘 말씀증거의 제목을 “해 아래 사는 것”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표준새번역에서 “이 세상”에 해당하는 부분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해 아래”라고 합니다. 옛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에서 해는 가장 높은 곳에 오르니 ‘해 아래’는 즉, 이 세상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알기 쉽게 의역하여 “이 세상”이라고 했고 공동번역도 살짝 의역하여 “하늘 아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반면 개역성경은 “해 아래”라고 직역하여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저는 개역성경의 번역을 따라 “해 아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해 아래 사는 것”이란 쉽게 이해 안 되는 제목은 결국 “이 세상에 사는 것”이라는 단순한 뜻입니다.
2006년도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습니다. 1년이 보통 52주이니 이제 갓 시작한 2006년 새해가 벌써 52분의 1이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2006년 한 해, 이제 52분의 51 남았습니다. 올 한해도 지난해처럼 금방 지나가버리겠지요? 시간은 이렇게 빨리 가는 것인가 봅니다. 한참 어린 나이지만 한 해 한 해 나이테가 더해질수록 “세월이 화살같이 지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점점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며칠 전 말씀증거를 준비하면서 성경을 폈습니다. 무작정 펼쳐 뒤적이다 눈을 멈추었는 데 하필 전도서, 그 중에서도 오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제멋대로 성경읽기를 또 한 번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읽었습니다. 슬쩍슬쩍 말씀을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참 안 어울리는 말씀이구나.”
여러 굴곡으로 가득찼던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새해의 희망과는 거리가 먼 맥 빠지게 하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까요. 아무리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아봐야 다 거기서 거기다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습니다. 게다가 눈을 조금만 위로 올리면 전도서의 맨 앞부분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유명한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
사람들은 보통 새해를 맞이하면서 희망을 품습니다. 새해에는 지난해와 달리 무언가 좀 더 기쁜 일이 많아지기를, 무언가 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빕니다. 좀 더 건강하게 한 해를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직장이나 학교나 사회에서 무언가 좀 더 성취하고 성장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난해 실수와 잘못이 있었다면 새해에는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 땅의 경제사정이 나아져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이 좀 더 나아지기를, 여러 고통받는 사람들이 좀 더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마음으로나마 빕니다. 나아가 이 세계에 전쟁과 기아가 그치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빕니다.
‘새 해’라고, 새로운 해라고 이름 붙이듯이 우리는 다가오는 한 해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새해를 맞는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전도서 기자는 이런 “좀 더 나아지길 원하는 생각”, “새롭게 변하길 원하는 바램”, “진보하길 원하는 희망”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말을 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것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라고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말씀을 얼핏 읽으며 처음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안 어울리는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 더 읽다보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직 어려 그렇지 어떤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며 이런 생각, 전도서의 내용과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전도서의 기록에 따르면 전도서를 쓴 ‘지혜자’는 아마도 인생의 끝자락에 이 글을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지혜자는 아마도 상당히 높은 신분과 재력과 학식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져볼 것 다 가져보고 해볼 것 다 해보고 공부할 것 넘치게 해 본 사람 말입니다.
풍요와 낙관주의는 역설적이게도 풍요에 대한 부정과 염세주의를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양 근대역사에서 계몽주의가 절정에 다다른 후 염세주의가 깃든 낭만주의가 풍미했던 것이나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룬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서 1960~70년대에 반문명적이기까지 한 히피 문화가 번성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바라는 풍요와 번영, 여유로움과 안정이 가져다주는 장점이 많겠지만 인간이라는 신묘한 존재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차원을 가진 종교적 존재이기 때문에 풍요와 번영, 여유와 안정감이 쌓아올리는 높은 산이 만들어내는 그늘진 골짜기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간 후에 오는 허탈감과, 인간이란 정녕 성취와 번영을 위해 모두 매진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왕자로서 부족함 모르고 지내던 싯다르타가 모든 것을 내버리고 담을 넘어 고통스럽고 고독한 구도의 길을 떠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실 때 하신 말씀인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지난해를 회고하고 새해를 전망하는 순간에 전도서 기자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지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1:8) 아무리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는 눈, 아무리 들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귀라는 욕망을 품고 있는 인간의 노력에 경종을 울리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생각은 보통 연륜이 쌓인 어르신들 중에서 하시게 되는 것 같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겪어보며 이런 저런 일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맛본 분들이 오랜 경험과 성찰 끝에 얻게 되는 통찰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도서의 성찰이 허무주의와 비관으로 귀결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경험 짧은 저로서는 잘 이해하기 어렵고 표현하기도 어렵지만 보통의 허무주의나 비관과는 무언가 다른 것 같습니다. 아무리 헛되다고 많이 외칠지라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지라도 전도서가 말하는 것은 진정한 허무와 비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불가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긍정과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라는 부정을 거치면서 모든 고정관념과 편견, 투사된 욕망들을 털어낸 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며 산과 물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새로운 긍정의 단계에 이르고 결국 세계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말이듯이, 전도서의 말씀도 얼핏 보기에는 부정적이고 염세적이며 “인생 뭐 있어? 그냥 사는 거지”라는 체념조의 투정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천천히, 깊이 들여다본다면 해 아래 사는 것,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화두와 같은 말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이 세상을 자신의 마음대로만, 자신의 기대대로만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을, 내 바램과 기대에 맞추어 하나님을 자동판매기 마냥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지혜자의 충격요법이 바로 전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정 해 아래 세상을 운영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고, 해 아래 세상의 미래를 여는 존재는 역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해 아래 사는 것,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나의 바램과 나의 기대와 우리들의 도덕과 관습, 가치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바벨탑의 욕심을 버리고 진정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도서 기자의 글쓰기 전략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 끝에 오늘의 전도서 말씀이 “아,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잘 어울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말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시간이 더 흐르면 좀 더 알게 되겠거니 하고 기대할 뿐입니다.
지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전도서의 말씀을 읽으며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며 반성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품어야 할 진정한 희망은 무엇인지…. 그 반성과 희망이 결국은 나의 욕망을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런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때로는 어떤 이들에게는 폭력으로 작용하는 가치체계와 관습을 그대로 옹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런지, 나아가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의 정의라는 거룩한 장신구를 빌려 붙이고 나와 우리 사회의 욕망을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의 새해 희망과 바램들을 다시 돌아봐야겠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는 데, 저도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나의 욕망과 바램과 고정관념과 습관들을 버리고, 해 아래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빌어봅니다. 그것이 바로 해 아래에서 진정으로 잘 사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 말씀증거의 제목을 “해 아래 사는 것”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표준새번역에서 “이 세상”에 해당하는 부분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해 아래”라고 합니다. 옛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에서 해는 가장 높은 곳에 오르니 ‘해 아래’는 즉, 이 세상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알기 쉽게 의역하여 “이 세상”이라고 했고 공동번역도 살짝 의역하여 “하늘 아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반면 개역성경은 “해 아래”라고 직역하여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저는 개역성경의 번역을 따라 “해 아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해 아래 사는 것”이란 쉽게 이해 안 되는 제목은 결국 “이 세상에 사는 것”이라는 단순한 뜻입니다.
2006년도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습니다. 1년이 보통 52주이니 이제 갓 시작한 2006년 새해가 벌써 52분의 1이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2006년 한 해, 이제 52분의 51 남았습니다. 올 한해도 지난해처럼 금방 지나가버리겠지요? 시간은 이렇게 빨리 가는 것인가 봅니다. 한참 어린 나이지만 한 해 한 해 나이테가 더해질수록 “세월이 화살같이 지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점점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며칠 전 말씀증거를 준비하면서 성경을 폈습니다. 무작정 펼쳐 뒤적이다 눈을 멈추었는 데 하필 전도서, 그 중에서도 오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제멋대로 성경읽기를 또 한 번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읽었습니다. 슬쩍슬쩍 말씀을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참 안 어울리는 말씀이구나.”
여러 굴곡으로 가득찼던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새해의 희망과는 거리가 먼 맥 빠지게 하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까요. 아무리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아봐야 다 거기서 거기다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습니다. 게다가 눈을 조금만 위로 올리면 전도서의 맨 앞부분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유명한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
사람들은 보통 새해를 맞이하면서 희망을 품습니다. 새해에는 지난해와 달리 무언가 좀 더 기쁜 일이 많아지기를, 무언가 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빕니다. 좀 더 건강하게 한 해를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직장이나 학교나 사회에서 무언가 좀 더 성취하고 성장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난해 실수와 잘못이 있었다면 새해에는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 땅의 경제사정이 나아져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이 좀 더 나아지기를, 여러 고통받는 사람들이 좀 더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마음으로나마 빕니다. 나아가 이 세계에 전쟁과 기아가 그치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빕니다.
‘새 해’라고, 새로운 해라고 이름 붙이듯이 우리는 다가오는 한 해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새해를 맞는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전도서 기자는 이런 “좀 더 나아지길 원하는 생각”, “새롭게 변하길 원하는 바램”, “진보하길 원하는 희망”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말을 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것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라고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말씀을 얼핏 읽으며 처음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안 어울리는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 더 읽다보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직 어려 그렇지 어떤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며 이런 생각, 전도서의 내용과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전도서의 기록에 따르면 전도서를 쓴 ‘지혜자’는 아마도 인생의 끝자락에 이 글을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지혜자는 아마도 상당히 높은 신분과 재력과 학식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져볼 것 다 가져보고 해볼 것 다 해보고 공부할 것 넘치게 해 본 사람 말입니다.
풍요와 낙관주의는 역설적이게도 풍요에 대한 부정과 염세주의를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양 근대역사에서 계몽주의가 절정에 다다른 후 염세주의가 깃든 낭만주의가 풍미했던 것이나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룬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서 1960~70년대에 반문명적이기까지 한 히피 문화가 번성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바라는 풍요와 번영, 여유로움과 안정이 가져다주는 장점이 많겠지만 인간이라는 신묘한 존재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차원을 가진 종교적 존재이기 때문에 풍요와 번영, 여유와 안정감이 쌓아올리는 높은 산이 만들어내는 그늘진 골짜기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간 후에 오는 허탈감과, 인간이란 정녕 성취와 번영을 위해 모두 매진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왕자로서 부족함 모르고 지내던 싯다르타가 모든 것을 내버리고 담을 넘어 고통스럽고 고독한 구도의 길을 떠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으실 때 하신 말씀인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지난해를 회고하고 새해를 전망하는 순간에 전도서 기자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지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1:8) 아무리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는 눈, 아무리 들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귀라는 욕망을 품고 있는 인간의 노력에 경종을 울리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생각은 보통 연륜이 쌓인 어르신들 중에서 하시게 되는 것 같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겪어보며 이런 저런 일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맛본 분들이 오랜 경험과 성찰 끝에 얻게 되는 통찰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도서의 성찰이 허무주의와 비관으로 귀결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경험 짧은 저로서는 잘 이해하기 어렵고 표현하기도 어렵지만 보통의 허무주의나 비관과는 무언가 다른 것 같습니다. 아무리 헛되다고 많이 외칠지라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지라도 전도서가 말하는 것은 진정한 허무와 비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불가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긍정과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라는 부정을 거치면서 모든 고정관념과 편견, 투사된 욕망들을 털어낸 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며 산과 물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새로운 긍정의 단계에 이르고 결국 세계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말이듯이, 전도서의 말씀도 얼핏 보기에는 부정적이고 염세적이며 “인생 뭐 있어? 그냥 사는 거지”라는 체념조의 투정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천천히, 깊이 들여다본다면 해 아래 사는 것,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화두와 같은 말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이 세상을 자신의 마음대로만, 자신의 기대대로만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을, 내 바램과 기대에 맞추어 하나님을 자동판매기 마냥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지혜자의 충격요법이 바로 전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정 해 아래 세상을 운영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고, 해 아래 세상의 미래를 여는 존재는 역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해 아래 사는 것,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나의 바램과 나의 기대와 우리들의 도덕과 관습, 가치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바벨탑의 욕심을 버리고 진정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도서 기자의 글쓰기 전략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 끝에 오늘의 전도서 말씀이 “아,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잘 어울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말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시간이 더 흐르면 좀 더 알게 되겠거니 하고 기대할 뿐입니다.
지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전도서의 말씀을 읽으며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며 반성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품어야 할 진정한 희망은 무엇인지…. 그 반성과 희망이 결국은 나의 욕망을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런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때로는 어떤 이들에게는 폭력으로 작용하는 가치체계와 관습을 그대로 옹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런지, 나아가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의 정의라는 거룩한 장신구를 빌려 붙이고 나와 우리 사회의 욕망을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의 새해 희망과 바램들을 다시 돌아봐야겠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는 데, 저도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나의 욕망과 바램과 고정관념과 습관들을 버리고, 해 아래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빌어봅니다. 그것이 바로 해 아래에서 진정으로 잘 사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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