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전12:13-14 |
---|---|
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3년 7월 13일 주일2부설교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인간에게 확실한 세 가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이 요동하고 바뀌는 불확실성의 세계속에 살고 있습니다. 정치가 불확실하고 경제도 불확실하고 국제정세도 불확실합니다. 현재의 삶도 내일의 삶도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확실한 사실이 우리 각자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고, 둘째, 인생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고 세 번째,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한 부자가 저명한 학자를 찾았습니다. “내가 언젠가 세상을 떠날텐데 나의 묘비에 새겨넣을 좋은 말이 없을까요?” 그말을 듣고 학자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요.” 부자는 자기가 살아오면서 자랑스러웠던 이야기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 듣고 난 후에 학자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묘비에 이렇게 쓰시오. ‘태어났다. 살았다. 죽었다.“ 이것은 우스운 이야기 같으나 어쩌면 저마다 우리 모든 인생의 이력서가 아닐까요? 태어날때는 태어나고, 살때는 삶의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요, 죽을때는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이 세가지 사실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1. 우리가 태어나 살고 있다는 사실
첫째로, 우리가 태어나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 주목해야 됩니다.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무 의미와 가치없이 우연히 태어난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목적이 우리 인생에 있는 것인가? 이것을 알아야 현실적인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사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계셨다고 하니까 우리의 현실적인 삶은 현재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택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로 6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창세전에 보시고, 아시고, 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늘도 생기기전에 해와 달과 별들도 생기기전에 억겁만년전에. 모든 것이 아직 존재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택했다고 하니까 우리의 존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뿌리는 바람같이 왔다가 안개처럼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전에 삶의 뿌리가 뻗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흉악한 죄악입니다. 자살이나 낙태나 살인등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범죄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연히 온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해서 주신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3절 제 6계명에 "살인하지 말찌니라"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낙태된 아이들은 150만에서 200만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다고 작년 뉴스위크지에 보도되었습니다. 연간 낙태 건수가 여성인구가 6배나 더 많은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높아진 것은 우리나라에 성 도덕이 그만큼 문란하고 남아선호사상도 크나큰 영향을 미쳐서 이러한 살인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 대한 진노가 불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연간 무죄한 생명을 150만에서 200만을 죽인다니 이것 말로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목적있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우연히 태어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우리의 거할 처소가 있듯이, 하나님이 이 땅에 거하실 처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1절로 22절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의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우리 이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께 큰 슬픔이었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며 귀신의 거할 처소가 되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할 처소에 마귀와 귀신들이 거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2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했습니다.
안믿는 사람들의 속에는 공중 권세 잡은 악의 영이 거처로 삼고 와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슬픔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인생속에 마귀와 귀신들이 와서 그 안에 하나님은 그 박탈감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처소를 도로 회복하기 위해서 구속의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10절의 말씀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하나님 성전으로 회복하시고 하늘에 앉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보혈의 능력과 그 구원하시는 은혜를 통해서 우리속에는 모든 마귀를 다 쫓아 내고 그 속에 성령이 와서 거하시게 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로 4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택하여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를 상속자로 만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로 18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우주를 상속으로 받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잠시동안 신앙으로 말미암아 박해와 고난을 당하되 이것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낼 영광에 족히 비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찬미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6절에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지 않습니까? 몸을 찢고 피흘려 우리의 죄악을 다 청산하시고 용서와 의와 영광을 거져 주셨어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행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오직 믿음으로 이 영원한 구원을 주셨으니 이것을 영원토록 찬미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 36세의 송명희씨는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그녀가 태어날 때 의사가 집게로 뇌를 잘못 건드려 소뇌가 손상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일생동안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분유조차 제대로 먹을수가 없었습니다. 7살때까지 꼼짝없이 누워 지내야 했고 10살이 넘어서야 겨우 밥숟가락을 쥘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결핵으로 시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스러운 나머지 그녀는 자기가 태어난 것을 저주했습니다. 사춘기때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어왔던 그녀는 그냥 죽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7살 때 큰 결단을 했습니다. 이제 죽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죽어야겠다고 하루 5시간씩 목숨을 걸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그녀는 절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송명희씨는 성령으로 거듭난 삶의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땅에 그녀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친히 그녀 안에 거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송명희씨는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찬미하는 시인으로써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심령에 모신후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그는 『나』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습니다.
‘나 가진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하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는 그 억센 절망 가운데서 비로소 내가 비록 뇌성마비 환자이지만 하나님이 세상에 나를 두신 것은 하나님의 거처로 삼기 위해서 두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거처된 내가 하나님 모시고 원망, 불평하고 살아서는 되겠는가. 긍정적으로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다고 그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이렇게 훌륭한 시인이 되고 그가 지은 이 시가 온 성도들에게 찬송가로 불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것 아닙니다. 목적없이 태어난 것 압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산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사는 근본목적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삶의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둘째로, 우리 확실한 사건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사는 사람들은 그 누구를 불구하고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고난없이 살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타락이 이땅에 고난 가져왔고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난 인생은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로 19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얼마나 비극적인 선언인 것입니까? 벌써 운명적으로 고난을 품고 태어나서 살다가 죽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란 인생에게 운명지어진 것입니다.
욥기 5장 6절로 7에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여러분 모닥불에 불태워 보십시오. 불티가 더운 공기를 따라 하늘로 올라감 같이 인생은 누구를 불구하고 고난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후 죄없으신 분은 한 분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으나 고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땅에 태어난 사람은 사는 것이 생존경쟁의 투쟁이요, 고난인 것입니다. 널린 것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병든 것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또 죽음의 고통을 대해야 됩니다. 생로병사의 고난을 앉고 살아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인류 역사는 바로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한 왕이 신하들에게 인류역사를 기록해 오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이 부피가 두껍게 책을 써오자 “이것 너무 두꺼우니까 못읽겠다. 다시 써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줄여서 써오니까 “이것도 두껍다. 다시 써라” 세 번, 네 번 거듭해서 줄여서 쓰는 학자들은 나중에 단 한 장으로 역사를 줄여서 왕에게 드렸습니다. 왕이 받아서 보니까 그 위에 단 한마디 ‘고난의 역사’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역사를 줄이고 줄이고 줄이고 보니 결국 인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존재하는 이상 고통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고 살아야지 고난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다 당하는 것입니다.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것처럼 인간은 고난을 앉고 태어나서 고난중에 살다가 고난중에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아무리 원망, 불평, 탄식해봤자 고난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난속에 살면서 우리는 고난을 극복하고 이기고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극복하고 이기고 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고난을 극복하고 이길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오중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고난을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 이기게 하시려고 고난 당하신 것입니다. 그는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 당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했습니다. 죄악의 고난이 다가와도 예수님께서 죄를 짊어지고 용서와 의와 영광을 주셨으므로 예수님을 의지해서 죄를 이기고 죄를 또 이기고 죄를 또 이기고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속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었습니다.
마귀가 있는 것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수많은 귀신과 함께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괴로움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고통 가운데 예수님을 의지하고 기도와 믿음으로 마귀를 이기고 짓밟고 우리는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이 들지 않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 세상 어느곳에 가도 잘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병이 듭니다. 그 병든 것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병을 극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병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했으며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이 맞았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주신 약속을 부여잡고 거기에 의지하고 병과 싸워 병을 짓밟고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주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티끌처럼 저주가 득실거립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납니다. 어느곳에 가나 삶이 고달프고 괴로운 것은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했다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말했습니다. 저주가 현실인 것처럼 예수님이 속량하신 은혜도 현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우리는 저주를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죽음과 음부는 현실입니다. 안죽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죽음이 우리에게 폭풍우같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우리가 극복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서 다가오는 죽음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요 애통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도 현실이지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도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는 죄와 마귀와 세속과 질병과 저주와 죽음과 음부를 이길수 없어도 예수님을 의지하면 넉넉히 이기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평안과 희망과 행복과 기쁨을 얻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우리가 피할수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의지하고 고난을 우리는 극복해 나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고난을 대속해 주신 지식으로 마음에 무장을 하고 하나님의 대속하신 은혜를 알고 그것을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보고 믿고 구하고 입으로 담대히 시인하며 고난을 극복하고 싸워서 이기면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 위해서 이길수 있는 능력을 십자가에서 허락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으니 주의 이 극복할수 있는 은혜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마음속에 믿음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믿고 입술로 시인하며 매일매일 다가오는 고난을 예수 이름으로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해야 되실 것입니다.
나는 우리교회 나오는 한 부형님으로부터 은혜로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렸을때 가출해 아동보호소, 소년원을 전진하면서 성장했습니다. 나중에 제화 기술자로 일하면서 돈을 모아 제화점을 운영하다가 돈을 더 모으게 되자 맥주집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맥주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삽시간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뜩이나 부정적인 사고와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러한 일이 생기자 더욱 자신의 인생과 환경을 저주하며 수유리 시장 리어커 보관소에서 형편없는 생활을 하며 겨우 연명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침과 함께 코와 입에서 피가 나왔습니다. 깜짝놀라 결핵원을 찾아가니 중증 결핵이란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는 보건소에서 약을 타먹었는데 약이 독해서 위까지 손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포자기에 빠져 술을 마시게 되어 이 때문에 몸은 점점 더 피폐해 져서 극한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운명을 비관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과거에 제화공장의 동료로 싸움끝에 그를 공업용 가위로 찔러서 무려 64바늘이나 꾀매게 한 원수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여의도순복음교회 나와 예수 안에서 변화를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이 분을 꼭 전도해야 되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친구의 강력한 전도를 받고 우리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설교 말씀을 통해서 평생 그를 속박하고 있던 삶의 저주와 질병을 예수님이 이미 다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대속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주님을 의지하고 불철주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한 결과에 기적적으로 병을 고침받고 건강한 몸을 얻게 되고 하나님이 은총을 주셔서 새로운 꿈과 믿음으로 새 사업을 시작하여 지금은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고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고난에 짓밟혀 박살이 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고난을 극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난은 운명처럼 모든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음을 알고 이 지식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고난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셋째로, 한번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죽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영도 죽고, 육체도 죽은 아담과 그 후손인 인류들을 보십시오.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자마자 그 영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에덴에서 쫓겨 났지요. 육체는 930년 동안 살았습니다. 아담은 930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인생이 타락하고 죄가 관영하자 노아 홍수 이후로는 인간의 생명을 120세가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로는 120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세 시대에는 이제 70년 내지 80년 산다고 말했었습니다.
시편 90편 10절에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톨스토이는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큰일이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 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겨울이 오면 김장준비는 하는데 죽음이 다가오는데 죽음은 아랑곳없이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왜 내가 존재하는지 내가 어떤 소용이 있는지도 모른다. 단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모르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확실하게 죽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그는 모른다고 탄식을 한것입니다.
어떤 이가 한 평생을 70세로 잡고 계산을 해보니까 인생의 4분의 1은 23년 정도는 잠을 자고, 일하는 시간은 11년이고, 여가와 취미에 8년 보내고, 식사하는데 6년 걸리고, 세탁하고 옷입는데 5년 반이 걸리고, 교육받고 독서에 6년에 걸리고, 대화하는데 3년 걸리고, 하나님을 공경하는데는 겨우 반년밖에 보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일생이 이렇게 지나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수명을 비교해 보면요, 거북이는 200년, 앵무새는 140년, 매는 90년, 코끼리는 65년, 말은 62년, 뱀장어는 56년, 고양이는 39년, 고래는 37년, 개는 34년, 원숭이는 26년, 오리는 14년 사는데 그 중에 그래도 인간은 모세가 말한것처럼 70 아니면 80세까지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자가 72.1세, 여자가 79.5세입니다. 최장수국인 일본은 남자가 77.7세, 여자가 84.6세입니다. 현재 세계 평균 수명은 남자가 65세, 여자가 70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말한 것이 우리 생활속에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묘막측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비참하게 인간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장은 하루에 약 103,700번 뛰고, 혈액은 1억 7천만 마일을 달리고, 숨은 2만 3천번 쉬고, 몸세포는 33조개가 있으며, 뇌의 140억개의 신경세포가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신기하게 조밀하게 만들어진 인간도 별도리 없이 70이요, 80이 되면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죄의 값은 사망이라.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인간은 비참한 죽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이 죽음을 극복할 수 없나요? 확실한 사실은 죽음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우리를 이 죽음에서 살려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가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우리에게 살려주는 영이 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로 49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아담의 형상을 입었으나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어서 우리는 죽음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대왕이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을 3년 반동안에 많은 사람을 죽은 자에게서 살렸습니다. 회당장의 딸을 살렸으며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상여에 실려 가는 것을 상여의 뚜껑을 열고 살려 내었으며 죽은지 나흘되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 일으켰으므로 주님이 생명의 대왕인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또 주님은 친히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그 몸으로 생명의 왕되심을 증명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절로 4절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실력행사입니다. 남만 살린 것이 아니라 친히 당신이 우리 대신하여 죽음을 앉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만에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육체의 부활도 주십니다. 우리가 믿으면 영적으로 살뿐 아니라 장차 육체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5절로 26절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마지막 주님 오실 때 육체의 죽음은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절 50절로 57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 안에서 우리는 죽음을 이겼습니다. 부활과 영원한 천국이 우리의 것입니다.
다니엘서 12장 2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활의 날에 이런일이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5장 29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으며
요한계시록 22장 3절과 5절에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부흥사였던 무디 목사님. 그는 복음으로써 미국과 영국을 뒤흔들어 놓은 분입니다. 무디 목사님이 죽음이 임박한 것을 예감하고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날 신문에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거든 그 사실을 믿지 마시오. 그때는 지금 나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 있을 것이요, 흙으로 지은 옛 집에서 나와 더 높고 영원한 죄악이 접근하지 못하고 더럽힐수도 없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요. 나의 육신은 1837년에 태어났고 내 영혼은 1856년에 거듭났오. 육신은 죽을것이나 성령으로 난 생명은 영원히 살것이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님이 임종하시기 전에 자녀들이 둘러 있는데 잠깐 천국의 영광을 보셨다가 깨어나셨습니다. 그는 깨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세상은 떠나 가지만 천국이 내 앞에 열립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니다. 나는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옆에 서 계시는 것이 보이군요.” 그러자 무디 선생님의 자녀들이 “아닙니다. 아버지!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꿈을 꾸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무디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아니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 문에 들어서고 있다. 이것이 나의 승리. 오늘이 나의 대관식 날이다. 아~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그리고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평생에 주를 위해서 일한 그 위대한 주의 종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 자녀들 앞에서 뚜렷하게 하나님에 대한 천국에 대한 증거를 남기고 간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변함없는 세가지 사실 즉, 살고 있다는 것과 고난은 피할수 없다는 것과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이 사실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이 세 가지 사실을 다 이기시고 우리에게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주셨습니다.
전도서 12장 13절로 14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 삶의 현실도 이기고 고난도 이기고 죽음도 이기고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로 39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 삶도 이길수가 있고 고난도 극복할 수가 있고 죽음도 이기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다가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영원한 영광의 천국으로 들어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변화 무쌍한 세계 속에서도
확실한 사실은 태어났다는 것과 이 세상에 살면 고통이 있다는 것과
반드시 죽는다는 이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안태어 났으면 좋겠다고 해도 태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고난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은 고난은 있는 것입니다.
안죽으려고 해도 안죽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확실한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극복될 수 있사오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삶이 하나님이 도우려 영광스럽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고난은 변하여 승리가 되고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 되고 맙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 사랑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자나 깨나 예수 사람. 일어나나 앉으나 예수 사람. 먹으나 마시나 예수사랑.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을 얻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인간에게 확실한 세 가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이 요동하고 바뀌는 불확실성의 세계속에 살고 있습니다. 정치가 불확실하고 경제도 불확실하고 국제정세도 불확실합니다. 현재의 삶도 내일의 삶도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확실한 사실이 우리 각자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고, 둘째, 인생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고 세 번째,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한 부자가 저명한 학자를 찾았습니다. “내가 언젠가 세상을 떠날텐데 나의 묘비에 새겨넣을 좋은 말이 없을까요?” 그말을 듣고 학자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요.” 부자는 자기가 살아오면서 자랑스러웠던 이야기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 듣고 난 후에 학자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묘비에 이렇게 쓰시오. ‘태어났다. 살았다. 죽었다.“ 이것은 우스운 이야기 같으나 어쩌면 저마다 우리 모든 인생의 이력서가 아닐까요? 태어날때는 태어나고, 살때는 삶의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요, 죽을때는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이 세가지 사실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1. 우리가 태어나 살고 있다는 사실
첫째로, 우리가 태어나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 주목해야 됩니다.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무 의미와 가치없이 우연히 태어난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목적이 우리 인생에 있는 것인가? 이것을 알아야 현실적인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사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계셨다고 하니까 우리의 현실적인 삶은 현재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택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로 6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창세전에 보시고, 아시고, 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늘도 생기기전에 해와 달과 별들도 생기기전에 억겁만년전에. 모든 것이 아직 존재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아시고 택했다고 하니까 우리의 존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뿌리는 바람같이 왔다가 안개처럼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전에 삶의 뿌리가 뻗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흉악한 죄악입니다. 자살이나 낙태나 살인등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범죄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연히 온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해서 주신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3절 제 6계명에 "살인하지 말찌니라"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낙태된 아이들은 150만에서 200만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다고 작년 뉴스위크지에 보도되었습니다. 연간 낙태 건수가 여성인구가 6배나 더 많은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높아진 것은 우리나라에 성 도덕이 그만큼 문란하고 남아선호사상도 크나큰 영향을 미쳐서 이러한 살인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 대한 진노가 불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연간 무죄한 생명을 150만에서 200만을 죽인다니 이것 말로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목적있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우연히 태어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우리의 거할 처소가 있듯이, 하나님이 이 땅에 거하실 처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1절로 22절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의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우리 이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께 큰 슬픔이었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며 귀신의 거할 처소가 되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할 처소에 마귀와 귀신들이 거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2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했습니다.
안믿는 사람들의 속에는 공중 권세 잡은 악의 영이 거처로 삼고 와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슬픔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인생속에 마귀와 귀신들이 와서 그 안에 하나님은 그 박탈감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처소를 도로 회복하기 위해서 구속의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10절의 말씀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하나님 성전으로 회복하시고 하늘에 앉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보혈의 능력과 그 구원하시는 은혜를 통해서 우리속에는 모든 마귀를 다 쫓아 내고 그 속에 성령이 와서 거하시게 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로 4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택하여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를 상속자로 만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로 18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우주를 상속으로 받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잠시동안 신앙으로 말미암아 박해와 고난을 당하되 이것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낼 영광에 족히 비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찬미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6절에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지 않습니까? 몸을 찢고 피흘려 우리의 죄악을 다 청산하시고 용서와 의와 영광을 거져 주셨어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행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오직 믿음으로 이 영원한 구원을 주셨으니 이것을 영원토록 찬미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 36세의 송명희씨는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그녀가 태어날 때 의사가 집게로 뇌를 잘못 건드려 소뇌가 손상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일생동안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분유조차 제대로 먹을수가 없었습니다. 7살때까지 꼼짝없이 누워 지내야 했고 10살이 넘어서야 겨우 밥숟가락을 쥘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결핵으로 시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스러운 나머지 그녀는 자기가 태어난 것을 저주했습니다. 사춘기때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어왔던 그녀는 그냥 죽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7살 때 큰 결단을 했습니다. 이제 죽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죽어야겠다고 하루 5시간씩 목숨을 걸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그녀는 절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송명희씨는 성령으로 거듭난 삶의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땅에 그녀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친히 그녀 안에 거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송명희씨는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찬미하는 시인으로써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심령에 모신후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그는 『나』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습니다.
‘나 가진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하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는 그 억센 절망 가운데서 비로소 내가 비록 뇌성마비 환자이지만 하나님이 세상에 나를 두신 것은 하나님의 거처로 삼기 위해서 두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거처된 내가 하나님 모시고 원망, 불평하고 살아서는 되겠는가. 긍정적으로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다고 그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이렇게 훌륭한 시인이 되고 그가 지은 이 시가 온 성도들에게 찬송가로 불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것 아닙니다. 목적없이 태어난 것 압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산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사는 근본목적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삶의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둘째로, 우리 확실한 사건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사는 사람들은 그 누구를 불구하고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고난없이 살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타락이 이땅에 고난 가져왔고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난 인생은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로 19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얼마나 비극적인 선언인 것입니까? 벌써 운명적으로 고난을 품고 태어나서 살다가 죽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란 인생에게 운명지어진 것입니다.
욥기 5장 6절로 7에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여러분 모닥불에 불태워 보십시오. 불티가 더운 공기를 따라 하늘로 올라감 같이 인생은 누구를 불구하고 고난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후 죄없으신 분은 한 분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으나 고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땅에 태어난 사람은 사는 것이 생존경쟁의 투쟁이요, 고난인 것입니다. 널린 것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병든 것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또 죽음의 고통을 대해야 됩니다. 생로병사의 고난을 앉고 살아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인류 역사는 바로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한 왕이 신하들에게 인류역사를 기록해 오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이 부피가 두껍게 책을 써오자 “이것 너무 두꺼우니까 못읽겠다. 다시 써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줄여서 써오니까 “이것도 두껍다. 다시 써라” 세 번, 네 번 거듭해서 줄여서 쓰는 학자들은 나중에 단 한 장으로 역사를 줄여서 왕에게 드렸습니다. 왕이 받아서 보니까 그 위에 단 한마디 ‘고난의 역사’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역사를 줄이고 줄이고 줄이고 보니 결국 인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존재하는 이상 고통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고 살아야지 고난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다 당하는 것입니다.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것처럼 인간은 고난을 앉고 태어나서 고난중에 살다가 고난중에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아무리 원망, 불평, 탄식해봤자 고난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난속에 살면서 우리는 고난을 극복하고 이기고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극복하고 이기고 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고난을 극복하고 이길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오중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고난을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 이기게 하시려고 고난 당하신 것입니다. 그는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 당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했습니다. 죄악의 고난이 다가와도 예수님께서 죄를 짊어지고 용서와 의와 영광을 주셨으므로 예수님을 의지해서 죄를 이기고 죄를 또 이기고 죄를 또 이기고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속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었습니다.
마귀가 있는 것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수많은 귀신과 함께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괴로움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고통 가운데 예수님을 의지하고 기도와 믿음으로 마귀를 이기고 짓밟고 우리는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이 들지 않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 세상 어느곳에 가도 잘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병이 듭니다. 그 병든 것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병을 극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병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했으며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이 맞았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주신 약속을 부여잡고 거기에 의지하고 병과 싸워 병을 짓밟고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주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티끌처럼 저주가 득실거립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납니다. 어느곳에 가나 삶이 고달프고 괴로운 것은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했다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말했습니다. 저주가 현실인 것처럼 예수님이 속량하신 은혜도 현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우리는 저주를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죽음과 음부는 현실입니다. 안죽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죽음이 우리에게 폭풍우같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우리가 극복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서 다가오는 죽음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요 애통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도 현실이지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도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는 죄와 마귀와 세속과 질병과 저주와 죽음과 음부를 이길수 없어도 예수님을 의지하면 넉넉히 이기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평안과 희망과 행복과 기쁨을 얻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우리가 피할수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의지하고 고난을 우리는 극복해 나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고난을 대속해 주신 지식으로 마음에 무장을 하고 하나님의 대속하신 은혜를 알고 그것을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보고 믿고 구하고 입으로 담대히 시인하며 고난을 극복하고 싸워서 이기면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 위해서 이길수 있는 능력을 십자가에서 허락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으니 주의 이 극복할수 있는 은혜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마음속에 믿음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믿고 입술로 시인하며 매일매일 다가오는 고난을 예수 이름으로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해야 되실 것입니다.
나는 우리교회 나오는 한 부형님으로부터 은혜로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렸을때 가출해 아동보호소, 소년원을 전진하면서 성장했습니다. 나중에 제화 기술자로 일하면서 돈을 모아 제화점을 운영하다가 돈을 더 모으게 되자 맥주집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맥주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삽시간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뜩이나 부정적인 사고와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러한 일이 생기자 더욱 자신의 인생과 환경을 저주하며 수유리 시장 리어커 보관소에서 형편없는 생활을 하며 겨우 연명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침과 함께 코와 입에서 피가 나왔습니다. 깜짝놀라 결핵원을 찾아가니 중증 결핵이란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는 보건소에서 약을 타먹었는데 약이 독해서 위까지 손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포자기에 빠져 술을 마시게 되어 이 때문에 몸은 점점 더 피폐해 져서 극한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운명을 비관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과거에 제화공장의 동료로 싸움끝에 그를 공업용 가위로 찔러서 무려 64바늘이나 꾀매게 한 원수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여의도순복음교회 나와 예수 안에서 변화를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이 분을 꼭 전도해야 되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친구의 강력한 전도를 받고 우리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설교 말씀을 통해서 평생 그를 속박하고 있던 삶의 저주와 질병을 예수님이 이미 다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대속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주님을 의지하고 불철주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한 결과에 기적적으로 병을 고침받고 건강한 몸을 얻게 되고 하나님이 은총을 주셔서 새로운 꿈과 믿음으로 새 사업을 시작하여 지금은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고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고난에 짓밟혀 박살이 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고난을 극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난은 운명처럼 모든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음을 알고 이 지식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고난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셋째로, 한번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죽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영도 죽고, 육체도 죽은 아담과 그 후손인 인류들을 보십시오.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자마자 그 영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에덴에서 쫓겨 났지요. 육체는 930년 동안 살았습니다. 아담은 930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인생이 타락하고 죄가 관영하자 노아 홍수 이후로는 인간의 생명을 120세가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로는 120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세 시대에는 이제 70년 내지 80년 산다고 말했었습니다.
시편 90편 10절에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톨스토이는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큰일이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 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겨울이 오면 김장준비는 하는데 죽음이 다가오는데 죽음은 아랑곳없이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왜 내가 존재하는지 내가 어떤 소용이 있는지도 모른다. 단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모르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확실하게 죽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그는 모른다고 탄식을 한것입니다.
어떤 이가 한 평생을 70세로 잡고 계산을 해보니까 인생의 4분의 1은 23년 정도는 잠을 자고, 일하는 시간은 11년이고, 여가와 취미에 8년 보내고, 식사하는데 6년 걸리고, 세탁하고 옷입는데 5년 반이 걸리고, 교육받고 독서에 6년에 걸리고, 대화하는데 3년 걸리고, 하나님을 공경하는데는 겨우 반년밖에 보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일생이 이렇게 지나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수명을 비교해 보면요, 거북이는 200년, 앵무새는 140년, 매는 90년, 코끼리는 65년, 말은 62년, 뱀장어는 56년, 고양이는 39년, 고래는 37년, 개는 34년, 원숭이는 26년, 오리는 14년 사는데 그 중에 그래도 인간은 모세가 말한것처럼 70 아니면 80세까지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자가 72.1세, 여자가 79.5세입니다. 최장수국인 일본은 남자가 77.7세, 여자가 84.6세입니다. 현재 세계 평균 수명은 남자가 65세, 여자가 70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말한 것이 우리 생활속에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묘막측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비참하게 인간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장은 하루에 약 103,700번 뛰고, 혈액은 1억 7천만 마일을 달리고, 숨은 2만 3천번 쉬고, 몸세포는 33조개가 있으며, 뇌의 140억개의 신경세포가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신기하게 조밀하게 만들어진 인간도 별도리 없이 70이요, 80이 되면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죄의 값은 사망이라.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인간은 비참한 죽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이 죽음을 극복할 수 없나요? 확실한 사실은 죽음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우리를 이 죽음에서 살려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가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우리에게 살려주는 영이 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로 49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아담의 형상을 입었으나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어서 우리는 죽음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대왕이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을 3년 반동안에 많은 사람을 죽은 자에게서 살렸습니다. 회당장의 딸을 살렸으며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상여에 실려 가는 것을 상여의 뚜껑을 열고 살려 내었으며 죽은지 나흘되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 일으켰으므로 주님이 생명의 대왕인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또 주님은 친히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그 몸으로 생명의 왕되심을 증명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절로 4절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실력행사입니다. 남만 살린 것이 아니라 친히 당신이 우리 대신하여 죽음을 앉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만에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육체의 부활도 주십니다. 우리가 믿으면 영적으로 살뿐 아니라 장차 육체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5절로 26절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마지막 주님 오실 때 육체의 죽음은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절 50절로 57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 안에서 우리는 죽음을 이겼습니다. 부활과 영원한 천국이 우리의 것입니다.
다니엘서 12장 2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활의 날에 이런일이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5장 29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으며
요한계시록 22장 3절과 5절에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부흥사였던 무디 목사님. 그는 복음으로써 미국과 영국을 뒤흔들어 놓은 분입니다. 무디 목사님이 죽음이 임박한 것을 예감하고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날 신문에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거든 그 사실을 믿지 마시오. 그때는 지금 나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 있을 것이요, 흙으로 지은 옛 집에서 나와 더 높고 영원한 죄악이 접근하지 못하고 더럽힐수도 없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요. 나의 육신은 1837년에 태어났고 내 영혼은 1856년에 거듭났오. 육신은 죽을것이나 성령으로 난 생명은 영원히 살것이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님이 임종하시기 전에 자녀들이 둘러 있는데 잠깐 천국의 영광을 보셨다가 깨어나셨습니다. 그는 깨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세상은 떠나 가지만 천국이 내 앞에 열립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니다. 나는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옆에 서 계시는 것이 보이군요.” 그러자 무디 선생님의 자녀들이 “아닙니다. 아버지!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꿈을 꾸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무디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아니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 문에 들어서고 있다. 이것이 나의 승리. 오늘이 나의 대관식 날이다. 아~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그리고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평생에 주를 위해서 일한 그 위대한 주의 종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 자녀들 앞에서 뚜렷하게 하나님에 대한 천국에 대한 증거를 남기고 간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변함없는 세가지 사실 즉, 살고 있다는 것과 고난은 피할수 없다는 것과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이 사실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이 세 가지 사실을 다 이기시고 우리에게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주셨습니다.
전도서 12장 13절로 14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 삶의 현실도 이기고 고난도 이기고 죽음도 이기고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로 39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 삶도 이길수가 있고 고난도 극복할 수가 있고 죽음도 이기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다가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영원한 영광의 천국으로 들어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변화 무쌍한 세계 속에서도
확실한 사실은 태어났다는 것과 이 세상에 살면 고통이 있다는 것과
반드시 죽는다는 이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안태어 났으면 좋겠다고 해도 태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고난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은 고난은 있는 것입니다.
안죽으려고 해도 안죽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확실한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극복될 수 있사오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삶이 하나님이 도우려 영광스럽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고난은 변하여 승리가 되고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 되고 맙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 사랑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자나 깨나 예수 사람. 일어나나 앉으나 예수 사람. 먹으나 마시나 예수사랑.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을 얻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