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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5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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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길희성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 |
Bernard Byffet,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 1951
요즈음은 눈을 뜨고 사는 것이 괴롭다고 말합니다. 산들이 녹색 옷으로 갈아입고 사방에 꽃이 만발하는 생명의 계절 아름다운 봄이건만, 텔레비전만 틀었다 하면 보이는 전쟁의 참상이 우리 마음의 평정을 앗아가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폐허가 된 도시와 건물들, 나뒹구는 시체들과 신음하는 부상병들 그리고 아무 영문도 모르고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이라크 어린이들과 양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루 세끼 편안하게 밥을 먹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미안하고 죄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이 끔찍한 살육전을 수행하고 있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리고 역사를 주관한다고 믿는 하나님은 이 무고한 생명들의 처절한 절규 앞에서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것일까, 물음에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이런 처참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위로와 희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의 괴로움만 더해 줍니다
이런 역사의 도덕적 부조리에서 오는 괴로움을 피하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예 눈과 귀를 막고 사는 일이며, 또 하나는 눈과 귀가 없는 신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눈과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남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나만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옛날 사람들은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남의 나라, 먼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을 터이니 그만큼 마음이 편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기 집 안방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속속들이 알고 사는 현대인은 괴롭습니다. 어쩌면 너무 많이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듣고 사는 우리 현대인들은 하나님처럼 전능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하나님의 전지성에는 제법 근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전지성이 우리의 괴로움을 더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과 귀를 막고 살지 못한다면, 눈과 귀가 없는 신을 믿기라도 하면 그나마 괴로움이 덜 할 터인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도 할 수가 없어 더 괴롭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비극과 인간들이 지르는 비명과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철학자들의 신을 믿는 것이 아니며, 역사의 소용돌이와 소란과는 아예 무관하게 영혼의 내면에서만 빛을 발하는 신비주의자들의 신을 믿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의 부조리와 비극에 눈과 귀를 막고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성서의 하나님은 고통스러운 역사의 피안,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저편에 홀로 계시는 존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울부짖는 탄식을 들으시고 그들을 강대국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신 하나님이시며, 2,000년 전 로마의 압제에 신음하던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시어 부조리한 역사의 현장에서 치욕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는 역사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역사에 눈을 감고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 전쟁의 와중에서 고통당하고 신음하는 무고한 생명들의 모습에 함께 안타까워하시고 괴로워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우리 역시 함께 괴로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앙인의 도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역사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오늘날 두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에 개입하며 역사를 인도하는 하나님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무신론이며, 다른 하나는 신을 믿기는 믿되, 역사와는 무관한 초역사적 혹은 탈 역사적 신, 시간과 역사의 피안에 있는 신을 참다운 신으로 믿는 신비주의적 영성입니다. 과연 이 둘이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요? 엄청난 역사의 참상과 고통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과연 우리는 정말 무신론자가 되든지 아니면 신비주의로의 도피를 선택해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우선, 무신론적 선택을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이런 엄청난 역사의 부조리와 고난을 지켜만 보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도 않고, 설령 존재한다 해도 나는 못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까뮈나 싸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사상가들이 택한 길입니다. 싸르트르의 소설『페스트』에 나오는 휴머니스트 의사와 같이, 그저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살릴 수 있으면 다행이지, 엄청난 전염병의 재앙 앞에서 하나님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과 항변이 생각납니다. 사실, 욥의 날카로운 질문과 거센 항변은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하고 애매하게 끝납니다. 친구들의 위로를 마다하고 집요하게 항변하던 욥은 그만 엄청난 하나님의 권위 앞에 질려 결국 항변을 포기하고 맙니다. 네까짓 것이 뭔데 감히 너의 좁다란 이성으로 하나님께 따지려 들며 송사를 벌이는가 하는 엄포에 욥은 그만 항변의 의지를 접고 맙니다. 사도 바울도 토기장이 이론으로 이와 비슷한 논변을 전개합니다. 토기들이 자기를 왜 이렇게 못 생기게 만들었느냐고 토기장이에게 불평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권위주의 식 논변은 더 이상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죽을 땐 죽더라도 할 말은 하고 죽겠다는 것이 현대인들의 오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욥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느냐고 항변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왜 그러면 안 되는가(Why not?)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의로운 자가 고난을 받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이 질문은 대답하기 더 어렵습니다. 욥이 그렇게 집요하게 항의하는 것도 결국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은 본래부터 부조리한 것이고, 인생에 도덕적 질서나 의미 같은 것은 본래부터 없는 것인데, 무슨 항변을 한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보면, 욥은 사실상 하나님께 항의하면서도 암묵적으로는 하나님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항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기에 항변하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이 세상과 인생에 도덕적 의미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도전입니다. 나아가서, 그나마도 원망하고 항의할 하나님이라도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지 묻게 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망할 대상도 없고 항의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유태인들이 600만이 참살당하는 엄청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겪고도, 유태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며 살 수는 있어도 결코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고 고백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나는 까뮈 같이 철저한 무신론자이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존엄성을 지키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무척 존경할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못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 도덕적 질서와 위미가 없다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고, 이 세계 자체에, 인생 자체에 도덕적 의미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학생 때부터 가졌던 도스토예프스키 적 사고이며,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직도 이 문제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상, 현대 윤리학은 하나님 없는 시대에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 성숙한 윤리를 주장하고, 하나님 없어도 우리가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온갖 궤변을 다 동원해서 설명하지만, 나에게는 하나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현대 윤리학은 실패했다는 것이 나의 판단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덕적 용기를 가지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기독교 하나님 신앙을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도 유교의 하늘에 대한 신앙, 도덕적 형이상학과 세계관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고통에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신을 믿는 신비주의는 해결책이 됩니까? 인생은 어차피 고통의 바다이고 역사란 어차피 미련한 중생들의 욕망과 무지가 빚어내는 악순환일 뿐이니, 역사에서 무슨 의미를 찾고 무슨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아예 포기하고 오직 인간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거기서 꺼지지 않는 빛,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평안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의 하나님만 붙잡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인은 피곤하고 지쳐서 요가나 무슨 명상법을 통해 영적 위안과 평안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영성의 부활, 그리고 이에 수반하는 영성의 상업화까지 일어나고 있을 정도입니다. 바깥세상은 어둡기만 하고 역사는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내 마음만은 내가 다스려 평화를 맛보겠다는 생각입니다. 나의 현상적 자아는 고통을 당하고 유혹을 당하지만 나의 본질적 자아, 나의 심층적 자아, 나의 참 자아는 이 세상의 풍파와 역사의 소용돌이를 이겨내는 부동의 보루라는 생각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의 눈에는 탐욕과 죄악의 악순환인 인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역사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진작 포기해야 할 역사를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집착하고 있는 미련한 중생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비주의자들은 역사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역사적 신앙이야 말로 서양의 지나친 역사주의적 사고를 낳았고 오늘의 모든 역사적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이라고까지 비판합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신비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역사로부터 도피하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신비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더 어려운 문제, 저 절실한 문제는 어떻게 나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이 엄청난 역사의 부조리 앞에서 어떻게 인생의 도덕적 의미를 긍정하고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회와 역사 문제를 제쳐놓고 나 개인의 행복과 마음의 평화가 궁극적 목표라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마음이 아무리 평안해도, 여기저기서 무고하게 고통당하는 자들의 탄식이 그치지 않는 이 세상과 인생에 과연 도덕적 의미가 존재하는 것인지, 그래서 우리가 도덕적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살만한 곳인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난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저 운 나쁜 놈은 고생만 하다가 처참하게 죽는 것이고, 운 좋은 놈들은 호의호식하는 것이 인생인지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쓸 데 없는 질문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열심히 투쟁하여 좋은 세상 만들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과거에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며, 그들의 억울한 인생은 누가 보상해줄 것인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나의 이 알량한 '세상 걱정'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는 네 안에서 시작된다, 너부터 잘 하라는 틱 낫 한 스님의 말이 옳은 얘기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생 자체가 부조리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세상이 근심하기 전에 먼저 근심해야 하고, 세상이 기뻐한 연후에 기뻐한다."는 말을 중국 여행 중 어느 명필가가 누각에 새긴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걱정하는 유가적 '우환의식'이 잘 나타나 있으며, 이것이 유교의 좋은 점입니다. 유가들은 그래서 도가적 은둔주의나 불가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고통으로 차 있는데,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무신론도 신비주의도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죽으나 사나 성서적 신앙인 역사의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 고통스럽고 불의한 역사를 껴안고 고민하시는 하나님, 탐욕과 죄악으로 얼룩진 추하고 지저분한 인간 역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래도 건져보려고 씨름하시는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역사 저편에서 눈과 귀를 막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몸소 처절한 역사의 현장에 오셔서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나님, 우리 인간들과 함께 역사의 탁류에 몸을 더럽히고 흙탕물 속에서 함께 뒹구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희망을 걸고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말대로,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의 삶에 役事하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싸우면서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편 가르시는 '유치하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하나님을 우리는 아직도 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 속의 하나님,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을 가장 괴롭히는 큰 문제가 바로 무고한 자들의 고난의 문제입니다. 문제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이러한 무고한 생명들의 비탄을 듣지 않으시는지요? 저들의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운이 나빠서 저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일까요?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어찌하여 선한 자들의 고통을 방치하신단 말입니까? 예수님 자신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하나님께 항변하셨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도덕적 질서와 의미라는 것이 과연 존재합니까?
예부터 이러한 인생의 비극과 도덕적 부조리를 설명하고 그 가운데서도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지만, 이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오늘 아침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대고(vicarious suffering) 사상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무고한 자들의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대고'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대신 받는 고난이란 뜻으로서, 저들의 억울한 고난은 저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죄, 우리의 죄 때문이며, 저들이 받는 고통은 사실은 내가, 우리가 받아야 하는 고통으로서, 저들은 나 때문에,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무고한 자들의 고난은 바로 나를 위한 고난이며, 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며, 나대신 받는 고난이라는 고백적 언어입니다. 우리가 받을 고난을 그리스도가 대신 받았으니, 그리스도는 scapegoat, 희생양, 속죄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고 사상이며, 이것이 무고한 자의 고난을 해석하는 기독교의 기본 시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억울한 고통이 그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아마도 인간이 깨달은 가장 숭고한 진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난 주간을 앞두고, 오늘 이것을 집중적으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대고 사상의 원천 중 하나가 이사야 53장의 말씀입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유대교에서는 여기서 '그'를 고난의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하는 말로 해석하지만, 기독교에서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해석해 왔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고난뿐만 아니라, 마태 26장에 최후심판의 이야기에서처럼, 세상에서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모든 억울한 자들, '지극히 작은 자'들(목마른 자, 주린 자, 병들은 자, 감옥에 갇힌 자)의 고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지극히 작은 자들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희생이며, 그들은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진 '희생양' 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동물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 제물로 바치고 죄 사함을 받는다고 믿었던 구약 시대의 관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의 말씀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라는 생각은 뚜렷하지 않고, 우리가 받을 고난과 형벌을 대신 받는다는 대고의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대고〉와 〈대속〉은 오늘의 본문에서나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별되는 것이 좋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나 예수님 자신의 사상으로 볼 때나 대속 사상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속 신앙은 잘 이해해야지 자칫하면 엉뚱한 결과, 비도덕적이고 비신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 혹은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듯 들어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는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속죄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갈 데 없는 죄인임을 고발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면치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진로를 피하려면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며,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인 된 인간을 위해 '속죄 제물'로 내주셨다고 바울을 말합니다(로마3:25).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의 피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구원론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해석을 할 때, 그는 이미 예수의 십자가를 둘러싼 구체적 상황과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도외시 하고, 자기 자신의 극단적 죄의식과 구약적 희생양의 개념을 빌어서 십자가의 은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마치 자기 아들을 속죄양으로 죽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인간을 용서하시는 '가혹한' 존재로 오해하게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아무 죄 없는 자기 아들 예수에게 담당하게 하는 공정하지 못한 하나님으로 오해하게 만들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현대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사상이고,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로 삼고서야 진노가 풀리는 하나님은 예수님 자신이 이해한 하나님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하나님은 누구든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용서의 조건이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더군다나 피의 대가, 죄 없는 가여운 동물의 피를 요구하는, 더군다나 사랑하는 자기 아들의 피를 요구하시는 분은 더욱 아닙니다. 탕자의 비유가 말해주듯이, 가산을 말아먹은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하나님, 아니 돌아오기 전부터 이미 용서하시고 학수고대 돌아만 와다오 노심초사 기다리는 분입니다. 바울의 대속론은 오늘날 반드시 재평가되고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의 대속론은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와 그렇지 않은 불쌍한 민중들을 구별하지 않는 무차별적인 대속론이라는 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해방시키고 구하려 했던 역사의 무고한 희생자들과, 그들을 괴롭히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가해자를 구별하지 않고, 비울은 둘을 뭉뚱그려 일반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든 인간의 죄 값을 치르는 속죄의 제물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녕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것인지, 그리고 '우리'라고 할 때 과연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면서 그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 그 의미를 대속론(속죄론) 보다는 대고론으로 해석하고자 하며, 대고론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무고하게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작은 그리스도들, 무명의 그리스도들의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점검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선 '우리'라는 말을 가해자와 희생자로 나누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가해자와 희생자 모두를 위해 죽으셨지만, 그 의미는 각기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해자의 경우, 예수님을 비롯한 의인들의 고난과 죽음은 명백히 가해자들의 죄 때문입니다. 이때 '죄 때문이다'는 말은 죄를 사하여주기 위해라는 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가해자들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그의 죽음의 가해자였습니까? 본디오 빌라도로 대표되는 로마 당국자요 유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친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용기가 없어서 침묵했던 말없는 다수일 것입니다. 오늘의 가해자는 누구입니까? 지금도 권력을 움켜쥐고 무고한 백성을 억압하는 사람들, 기득권층, 교회와 교권을 이득의 수단으로 챙기는 사람들이 오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자들. 석유를 탐내는 자들, 군수업자들, 전쟁특수를 노리는 자들, 전후복구의 이권을 노리는 자들입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우리 한국 사람들도 물론 들어 있습니다. 파병을 결정하고 전후 복구사업의 특수를 노리고 있는 기업들, 그리고 거기서 혜택을 볼 우리 모두도 가해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우리 때문이며, 오늘도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가해자들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해자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즉 정작 가해자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그가 대신 받았다는 의미에서 가해자들을 위한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가해자들의 죄를 사한다는 뜻에서 가해자들을 위한 죽음은 아닙니다. 가해자들이 죄 사함을 받고자 하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면 되지, 예수님의 피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사하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죽음이라고 말할 때, 먼저 우리가 가해자에 속하는지 피해자에 속하는지를 냉정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위한 죽음'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가해자에 속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죄의 고백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무수히 많은 의로운 자들, 무고한 자들이 나 같은 사람 때문에 고난당하고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받을 형벌을 그들이 대신 받고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사53: 4)
그렇다고 가해자들의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대고가 대속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를 위한 대속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가 나의 죄 값을 치렀으니 이제 됐다고 안이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십자가의 은총은 가해자들에 의해 이렇게 희화화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후 얼마 안 가서, 그의 비극적 죽음은 탈역사화되고 탈맥락화되어, 일반적이고 무차별적인 속죄론으로 둔갑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가해자들에게 쉽게 면죄부를 주는 식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가해자와 희생자를 가리지 않는 교회의 무차별적 속죄론은 이렇게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죄 없는 민중들, 무고한 자들, 예수의 죽음에 아무 죄도 없는 민중들을 무조건 죄인으로 만들어 도매금으로 속죄의 대상으로 정죄했습니다. 힘이 없고 죄 없는 민중을 힘 있고 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률적으로 죄인 취급을 해 버린 것이 전통적인 속죄론의 맹점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자기와 같은 피해자들, 희생자들을 위해 사시다가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지,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대속론으로 예수의 죽음을 보면, 가해자의 경우나 희생자의 경우 어느 것도 제대로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해자들의 잘못으로 인한 죽음이며, 그것이 가해자들을〈위한〉죽음이려면, 가해자들은 대속론을 들먹일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무고한 자들의 고난이 가해자인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한 대고였음을 인정하고, 뒤늦게나마 그리스도의 고난과 무고한 희생자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뉘우치는 자세이며 참다운 구원의 길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 비로소 가해자들도 떳떳하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의인들의 죽음만 대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억울한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난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대고가 됩니다. 가해자에게는 그들 때문에 대신 당하는 고난이니까 대고이며, 같은 무고한 피해자 혹은 희생자들에게도 대고가 됩니다. 마치 무리를 대신해서 사자 밥이 된 사슴처럼. 그들은 자기와 마찬가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가해자들에게나 피해자들에게나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았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모두가 이 무고한 자들의 고난에 감사해야 합니다. 빚을 진 것입니다. 특히 가해자들은 참회하고 늦게나마 그들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아주 특별한 의미로 우리 모두를 위한 고난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선, 역사를 통해 무고한 고난을 받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역사 저편에서 팔짱끼고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에 참여하여 함께 고통을 받는 동고하시는(compassion) 하나님입니다. 마치 엉망이 된 이 세상, 부조리한 역사에서 고통 받는 자들에게 사과라도 하시듯, "미안하게 됐다, 잘 못 했다, 내가 책임지겠다, 나를 먼저 벌하라, 그리고 나를 용서하라"고 호소라도 하시듯, 말없이 십자가에 달린 자기 아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풀어줍니다.
십자가는 성육신 사건의 연장입니다. 성육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서 이 죄악 세상에 오셨다면,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악의 극치를 몸소 겪으시고 희생자가 되신 사건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희생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풀어주십니다. 사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용서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나는 모른다, 나는 책임 없다, 너희 인간들이 책임지라"고 발뺌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고소하고 고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에 아무 말 없이, 아무 힘없이 달려 계시는 그 분을 그들이 어떻게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원망하겠습니까?
고통 받는 하나님,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신 하나님 앞에서, 역사의 희생자들만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완악한 마음도 녹아집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죄를 고발만 하시던 하나님이 이제 스스로 먼저 고통을 자취하시는 것을 보고, 가해자들도 마음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의 잘 못을 벌로 다스리는 대신 스스로 자청해서 벌을 받는 사랑 앞에서, 아무리 나쁜 학생이라도 결국 감복하고 뉘우치지 않을 수 없듯이, 가해자들도 이제 십자가의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모른다, 나는 죄 없다"고 끝까지 우기던 완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형벌을 자청하는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가해자와 희생자 모두를 구원하는 묘약입니다. 정녕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신 최후의 사랑의 묘약이고 비상 처방입니다. 스스로 고통을 지심으로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인간다운 삶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해자들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뉘우쳤다면, 가해자들은 지금까지 누렸던 특권과 기득권을 청산하고 이제부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내 대신 남이 졌던 고난을 이제 스스로 담당해야만 합니다. 고통을 분담하되 지금까지보다 더 많이 해야 공평합니다. 누렸던 것 이상으로 보상해야 합니다. 뻔뻔한 신자, 얌체 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앞으로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빚 진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명상하는 주간입니다. 이라크 어린이들의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일주일을 보내야 합니다. 묵상의 필수적 요소는 나는 가해자와 희생자 중 어디에 속하는가를 먼저 성찰하는 것입니다. 막연히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실감 나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가해자라 생각된다면, 그리스도는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내가 그를 죽인 것이라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삶에서 내가 누리는 기득권으로 인해 힘이 없는 자들이 착취당하고 괴로움을 당했다면, 나는 예수님과 이라크 어린이들의 고난에 책임이 있으며, 아직도 치러야 할 죄 값, 형벌이 남아 있다는 심정으로 남은 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그리고 역사상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의 고난에 평생 빚진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 고난주간에 가해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감히 나는 가해자가 아니고 무고한 피해자라고 말하겠습니까?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도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남을 위한 고난, 남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 하지만, 정작 그들의 억울한 인생을 누가 보상해 주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한 자는 그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하지만, 가해자들에게는 공짜 부활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한 번도 져 보지 못한 자, 자기 잘못을 한 번도 진정으로 뉘우쳐 보지 못한 자, 억울한 고난이 무엇인지 모르며 억울한 눈물을 한 번도 흘려보지 못한 자, 그런 사람들에게 단지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활이 약속된다면, 그것은 싸구려 은총, 엉터리 구원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활의 동참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우리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는 신앙공동체임을 믿으며"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003년도 춘계 일요신학강좌
"구약의 말씀, 영성적 읽기"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의 2003년도 춘계 일요신학강좌가 다음과 같이 개최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주제: 구약의 말씀, 영성적 읽기
강사: 왕대일(감신대 교수, 구약학)
기간: 2003년 4월 6일(일)~6월 8일(일)
매주 일요일 오전 9:45~11:00
장소: 강남청소년회관 1층 강당
* 수강료 없음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사무실: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05-9 삼흥빌딩 1212호
전화: 555-6959
홈페이지: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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