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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6: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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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경숙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 |
오늘의 말씀 이사야 6장 6-10절은 이사야 소명설화의 마지막 단락 부분에 들어 있습니다. 이사야 소명설화는 예언자들의 소명설화 중 하늘 천상회의에서 예언자로 소명을 받는 아주 대표적인 유형에 속합니다. 천상에 계신 하나님과 윤창하는 스랍들 앞에서 이사야가 예언자로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명양식은 에스겔서에도 등장하는데 이런 양식은 고대 근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과의 단독 대화를 통해 소명을 받고, 또 많이 망설이고 주저하는 예레미야나 모세의 소명사건과는 크게 다른 것이 특징입니다. 이사야는 스랍에 의해 숯으로 입이 정화된 후 자발적으로 기꺼이 예언자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를 묻는 하나님의 질문에 이사야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요"라고 예언자직을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이사야 6장 6-10절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면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는 못한다'라고 일러라. 그리고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를 향한 하나님의 그러한 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언자로서 나아가 활동하려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던 이사야도 이런 내용에 적이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당분간' 혹은 '잠시'라는 것이 아니라 "성읍이 황폐하고 주민이 없고 집마다 비고 밭도 황무지가 되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성서 본문의 내용은 우리를 몹시 당혹스럽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언자들의 사명과 여기에 나타나는 이사야의 소명 내용이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자 파송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 듣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겠습니까? 이사야서를 편집한 사람도 이 점이 몹시 어색했던지 13절에 다시 거룩한 남은 자, 그루터기에 대한 희망적 내용을 삽입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신약성서의 기자들도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 몹시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신약성서에 여러 번(마가 4:12, 마태 13:14-15, 누가 8:10, 사도 28:26-27, 요한 12:40) 인용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인식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 기자들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 구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사야의 본문 의도와는 크게 벗어나는 해석입니다. 신약성서가 구약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예로 꼽힐 수 있는 그런 예입니다. 가령 마태복음 13장 16절을 보면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6장 6-10절의 내용은 이렇게 이방인과 기독교인들을 나누어 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단락의 내용을 신학자들은 '완악의 신학', '완고함의 신학' 또는 '강팍함의 신학'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이사야가 활동 말기에 자신의 활동을 되돌아보고 회상하면서 쓴 소명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사야는 6장에서 자신이 어떻게 예언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면서 동시에 자신의 활약이 완전 실패로 돌아갔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예언자로서의 활동이 완전한 좌절이었음을 실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자신은 이러한 완전한 좌절과 실패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풀이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좌절이 있을 수 있겠으며, 자신의 소명 안에 그런 하나님의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이렇게 소명설화를 남겼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아주 비관적입니다. 인류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 같은 것을 꺽어버리기 아주 좋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귀절은 신학적으로는 대단히 소중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 신학이나 루터의 의인론 같은 "하나님의 은총만으로!"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완악함'을 깊이 통찰한 결과에서 나온 신학으로 여겨집니다.
제가 이 본문을 오늘 택하게 된 것은 노태우 사건을 보면서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과 오늘날의 우리 민족이 매우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2주일 이상이나 이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하는 완악한 백성임이 선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수대교, 삼풍상가 등의 대형 붕괴사고들은 서로 연결된 것이었으며, 미리 계획된 것이었고,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소위 정치 지도자들과 재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웠으니 말입니다. 백담사 행의 참담한 사건에서도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이러한 현상들은 슬프게도 노태우씨 개인의 부도덕 때문에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안고 있던 병리현상들의 표출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부끄럽습니다. 황금 만능주의, 다른 사람만 비판할 뿐 자신은 돌아보지 못하는 자만감, 돈과 권위 앞에 무조건 숙이는 우리의 궁색함, 무한경쟁 무한경쟁 하면서 승자와 패자로만 세상을 보는 단세포적 사고 등이 바로 이런 현상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고 본 그 완악함이 우리 속에 잔뜩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회를 보나 학교를 보나 돈, 돈, 승리, 승리 구호에 정신이 현란해질 뿐입니다. 보기는 보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둔감하고 완악한 파멸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우리 민족이 아닌가 싶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완악한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셨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지만 그들을 버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언자 파송은 이사야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이들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으며 또 배반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질타하시고 꾸짖으셨지만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나 모두 성서는 죄에 빠져드는 인간의 의지보다 이를 용서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더 크다는 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유대 랍비 가운데 한 분은 죄 쪽으로 기울려는 저울을 수평 내지는 구원 쪽으로 기울도록 가진 사람들이 실제로 많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의지를 이사야 이후 계속 예언자를 보내신 사건에서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사건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계속 죄에 빠져들고 예언자를 거부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보다 이들을 깨닫게 하고 듣고 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더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죄 편에 설 것인가? 좌절할지라도 살아 계신 사랑의 하나님 편에 설 것인가? 완악한 백성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고난의 수수께끼 속에서도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편에 설 것인가를 성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네 아우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귀한 존재임을 깨닫고 우리의 존엄성을 증거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구하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큰 불행한 사건을 체험하고 나면 이를 그냥 남의 이야기로 두지 않고 민족 전체의 일로 함께 느끼고, 하나님께 함께 부르짖고, 이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들으며 신학적 해답을 찾고, 이를 제의화하여 예배 때마다 이를 반복하고, 이를 세계적 사건으로 공유화 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너무 국수주의적으로 나가는 것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우리도 이 큰 비극적 사건을 그냥 '노태우 이야기'로 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이야기'로 삼아야 하고, 함께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며 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신학화하는 작업을 하고, 이를 은혜와 구원의 사건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부디 이번 사건에서 우리는 참담한 느낌을 떨쳐버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건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역사를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는 완악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깨닫는 구원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이 성서 본문의 내용은 우리를 몹시 당혹스럽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언자들의 사명과 여기에 나타나는 이사야의 소명 내용이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자 파송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 듣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겠습니까? 이사야서를 편집한 사람도 이 점이 몹시 어색했던지 13절에 다시 거룩한 남은 자, 그루터기에 대한 희망적 내용을 삽입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신약성서의 기자들도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 몹시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신약성서에 여러 번(마가 4:12, 마태 13:14-15, 누가 8:10, 사도 28:26-27, 요한 12:40) 인용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인식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 기자들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 구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사야의 본문 의도와는 크게 벗어나는 해석입니다. 신약성서가 구약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예로 꼽힐 수 있는 그런 예입니다. 가령 마태복음 13장 16절을 보면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6장 6-10절의 내용은 이렇게 이방인과 기독교인들을 나누어 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단락의 내용을 신학자들은 '완악의 신학', '완고함의 신학' 또는 '강팍함의 신학'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이사야가 활동 말기에 자신의 활동을 되돌아보고 회상하면서 쓴 소명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사야는 6장에서 자신이 어떻게 예언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면서 동시에 자신의 활약이 완전 실패로 돌아갔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예언자로서의 활동이 완전한 좌절이었음을 실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자신은 이러한 완전한 좌절과 실패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풀이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좌절이 있을 수 있겠으며, 자신의 소명 안에 그런 하나님의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이렇게 소명설화를 남겼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아주 비관적입니다. 인류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 같은 것을 꺽어버리기 아주 좋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귀절은 신학적으로는 대단히 소중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 신학이나 루터의 의인론 같은 "하나님의 은총만으로!"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완악함'을 깊이 통찰한 결과에서 나온 신학으로 여겨집니다.
제가 이 본문을 오늘 택하게 된 것은 노태우 사건을 보면서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과 오늘날의 우리 민족이 매우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2주일 이상이나 이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하는 완악한 백성임이 선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수대교, 삼풍상가 등의 대형 붕괴사고들은 서로 연결된 것이었으며, 미리 계획된 것이었고,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소위 정치 지도자들과 재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웠으니 말입니다. 백담사 행의 참담한 사건에서도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이러한 현상들은 슬프게도 노태우씨 개인의 부도덕 때문에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안고 있던 병리현상들의 표출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부끄럽습니다. 황금 만능주의, 다른 사람만 비판할 뿐 자신은 돌아보지 못하는 자만감, 돈과 권위 앞에 무조건 숙이는 우리의 궁색함, 무한경쟁 무한경쟁 하면서 승자와 패자로만 세상을 보는 단세포적 사고 등이 바로 이런 현상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고 본 그 완악함이 우리 속에 잔뜩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회를 보나 학교를 보나 돈, 돈, 승리, 승리 구호에 정신이 현란해질 뿐입니다. 보기는 보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둔감하고 완악한 파멸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우리 민족이 아닌가 싶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완악한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셨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지만 그들을 버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언자 파송은 이사야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이들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으며 또 배반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질타하시고 꾸짖으셨지만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나 모두 성서는 죄에 빠져드는 인간의 의지보다 이를 용서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더 크다는 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유대 랍비 가운데 한 분은 죄 쪽으로 기울려는 저울을 수평 내지는 구원 쪽으로 기울도록 가진 사람들이 실제로 많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의지를 이사야 이후 계속 예언자를 보내신 사건에서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사건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계속 죄에 빠져들고 예언자를 거부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보다 이들을 깨닫게 하고 듣고 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더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죄 편에 설 것인가? 좌절할지라도 살아 계신 사랑의 하나님 편에 설 것인가? 완악한 백성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고난의 수수께끼 속에서도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편에 설 것인가를 성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네 아우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귀한 존재임을 깨닫고 우리의 존엄성을 증거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구하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큰 불행한 사건을 체험하고 나면 이를 그냥 남의 이야기로 두지 않고 민족 전체의 일로 함께 느끼고, 하나님께 함께 부르짖고, 이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들으며 신학적 해답을 찾고, 이를 제의화하여 예배 때마다 이를 반복하고, 이를 세계적 사건으로 공유화 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너무 국수주의적으로 나가는 것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우리도 이 큰 비극적 사건을 그냥 '노태우 이야기'로 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이야기'로 삼아야 하고, 함께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며 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신학화하는 작업을 하고, 이를 은혜와 구원의 사건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부디 이번 사건에서 우리는 참담한 느낌을 떨쳐버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건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역사를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는 완악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깨닫는 구원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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