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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1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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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원장 |
참고 : | 새길교회 |
오늘은 교회력에 따르면 마르틴 루터가 시작하였던 종교개혁 482주년을 기념하는 종교개혁 기념주일 입니다. 이 종교개혁 기념 주일에 [절망과 희망]이란 주제를 잡은 것은 개혁이란 가장 절망적 상태에서 새로운 희망을 주는 멸망과 구원의 메시지가 동시에 있다고 생각하여서입니다. 1517년의 종교개혁도 교권의 절대 신성화에 사람들이 압박을 받고 인권을 빼앗겨 암흑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절망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오히려 희망으로 급진적 전환을 이룬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 상황도 교회는 극도로 부패하고 무능해 졌으며, 개혁은 커녕 백해무익한 당리당략적 지리한 싸움만을 일삼는 정치권에 대한 실망으로 허탈한 좌절감에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희망이 우리에게 있을 것인가를 찾는 마음으로 절망과 희망을 같이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1517년의 종교개혁을 교회사의 1차 종교개혁이라고 보면서 기독교의 종교개혁적 급격한 전환의 역사를 짚어 본다면 2차 종교개혁은 1960년대의 기독교 세속화 신학의 물결이라 할 수 있으며 3차 종교개혁은 20세기말에 진행되고 있는 크다란 신학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종교개혁은 신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권과 교권이 일치된 중세의 신 중심 신앙은 실지로는 교권에 의한 인간 억압, 비인간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이 종교개혁은 르네상스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 물결은 곧 교권화된 신중심 사상으로부터의 인간 회복운동이었습니다. 초자연적인 것들이 거부되고 인간 본래적 본성과 능력을 회복시키는 운동이 전체 삶과 문화로 표출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예로 들어 본다면 이 그림이 이전과 차이를 가지고 르네상스의 대표적 작품으로 이해되는 것은 예수의 뒷배경을 자연의 태양 빛이 비쳐드는 창문으로 표현한 것에 있습니다. 중세의 모든 성화에서 예수는 그의 신성을 강조하는 둥그렇게 둘린 후광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표현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런 르네상스운동의 영향을 배경으로 하면서 신권으로 정당화한 교권에 도전하고 그 교권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여 모두가 스스로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열었습니다.
1960년대의 2차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제2 바티칸 공의회와 개신교의 WCC 신학에서 모두 표현되어졌습니다. 이 2차 종교개혁의 전환은 이전까지의 교회와 세상에 대한 관계이해를 완전히 뒤바꾸는 사고의 변화를 요청하는 것으로서 그때까지 교회는 거룩한 곳,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노아의 방주 같은 곳 그러므로 교회안에 있어야만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세상은 죄악이 가득찬 멸망할 곳이며 속된 곳이므로 성도들은 속히 그 세상으로부터 도망하여 교회안으로 들어 와야만 한다는 식의 성과 속, 영과 육 등으로 세계를 이분화 시키는 사고로부터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며 하나님이 그 안에서 직접 선교하고 계시는 곳으로서 교회는 그 세계를 위하여 일하고 가꾸고 돌보며 그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는 새로운 이해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3차 종교개혁은 온 지구와 우주의 생명의 차원을 구원의 영역에 포괄하는 개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WCC 차원에서 논의된 정의 평화 신학에 창조질서의 보존(JPIC)이라는 주제가 포괄되면서 핵의 위협, 지구의 온난화, 공해의 무서운 폐해, 생태계의 멸종 위기 등 사회정의와 세계평화와 함께 생태학적 과제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내용이 되어야 하며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됨을 밝혀 온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고백하기를 핵탄두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전되어 있고 가난한 나라의 농부가 땀흘려 지은 농산물을 정작 그들은 먹지 못하고 미국 같은 부자나라의 사람들에게 80% 이상 수출되는 현실에서, 그리고 생태계가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졌다는 것, 신학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였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물의 중심에 두고 정복하고 다스리라 한 명려이 생태계 파멸을 초래하게 했다는 자책적 성서해석도 나오게 되었으며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몸이다]라고 선포하면서 우주 만물안에 편재하신 하나님을 찾게되었고 온 생명 중심적 신앙을 가지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태도임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소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지금 우리는 또다시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앞에 서 있으며 이 현실은 JPIC 신학의 보다 심화되고 확장된 논의를 요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21세기의 변화는 소위 지구화, 정보화, 첨단의 과학 기술화로 인한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세계가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메가트랜드적 사고나 테크노피아적 전망을 가진 이들은 세계화란 인류가 한 촌락같이 연결되고 연합되는 긍정적 진행이며 정보화도 인간 삶에 큰 유익을 주며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여 장수하게 하는 등 유익한 현상이라고 낙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결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도 않으며 유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 것입니다. 오히려 고통과 위협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합니다.
먼저 세계화 혹은 지구화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이 현상은 인간사회를 결국 빈부의 극심한 격차로 벌여 놓게 되고 극단적 삶의 질의 차이와 깊은 갈등과 소외를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게 될 것으로 봅니다. 한스 피터 마르틴과 하랄드 슈만이 쓰고 한국의 강수돌 교수가 번역한 [세계화의 덫]이란 책을 보면 이에 관련된 상세한 논의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앞으로의 사회를 라고 표현하는데 21세기에는 노동 가능한 인구 중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데 문제가 없으며 나머지 80%는 놀아야만 하는데 이 실업자들은 생존경쟁에 극심히 시달려야 하고 소외감과 자아 존엄성의 상실 등으로 고통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20%의 잘사는 사람들이 나머지를 먹여 살려야 하거나 아무튼 누군가 보살펴야 하는데 종교단체나 기관들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보상을 받거나 거리 청소를 하거나 가정부를 하여 생계를 이어나가는 상태가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문제는 '밥을 먹을 수 있느냐, 아니면 먹히느냐'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극심한 빈부의 격차에 의한 갈등과 고통이 있는가 하면 또하나의 문제는 지구 시장화는 새로운 세계적 금력의 지배구조를 만들어 금융자본의 축적이 늘어나 투기성 높은 국제금융세력들이 주식시장과 외환시장, 채권시장 등을 투기성으로 조정하여 가난한 나라들이 경제위기에 몰리고, 뿐만아니라 이 경제세력이 과학기술과 합세하여 경영의 첨단기법을 초국적 기업이 장악하게 되어 제3세계권은 철저히 여기에 예속된다는 사실입니다. 다국적 기업은 정보통신, 가상의 산업, 전자산업을 장악하면서 지구적 차원에서 과학기술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전자기술시대를 열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의 빌미를 가진 지역들이 군사시장이 되어 경제력이 전쟁의 배후가 될 것이며 전쟁, 폭력이 계속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강화되어야 할 사회보장제도는 오히려 약화되고 사회 보장서비스 또한 시장에 맡겨지며, 사회정의와 사회안전을 위한 사회운동은 도리어 약화될 것이라고 본다. 국제관계는 이제 이념적 국가간의 갈등이 아니라 세계기업들에 의해 세계 경제적 갈등으로 표출됩니다. 더우기 인간의 정신생활과 문화생활에도 심각한 충격을 주게되고 도덕적 정신적 가치나 삶의 방향들도 시장에 의해 결정되며 경쟁논리에 의해 상업화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시장화는 지구 생명에도 희생을 갖게하는데 생명계에 대한 정책이 생태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하지만 시장 논리가 지배하게 되면 그 결집이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보화 사회에 대한 전망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정보과학은 컴퓨터의 눈부신 발전과 보급의 확대로 인류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모두 알고 있는데 인간두뇌의 논리적 사고를 수행할 수 있는 기계가 만들어 지고 인터넷의 발전과 멀티미디어가 가미된 새로운 통신수단으로 자리 잡았는데 이 정보 기술이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지만 그러나 동시에 정보 독점에 따른 국가 혹은 인종간의 격차, 사생활 침해, 컴퓨터 만능에 의한 인간 소외, 컴퓨터 과실로 인한 혼란과 인공재앙, 매우 지능적인 컴퓨터 범죄, 컴퓨터 중독에 의한 정신질환등 문제도 야기 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말합니다. 특히 정보를 독점한 사회와 집단의 세계지배가 이루어질 것이며 정보의 힘이 약한 사회와 집단은 예속될 것입니다.
과학 기술 문명의 극한적 발달은 생명공학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 시킵니다. 과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생명공학의 발전이 1970년대 유전자 재조합의 실용화 단계에 도달하였고 유전공학은 생명체의 형질과 기능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함으로서 생명체를 개조하거나 새로 만들수 있게 하고 인간이 원하는 특정 형질의 인조생물의 대량생산을 목표로하고 있습니다. 농작물과 가축의 품종개량, 고가의 의약품의 대량생산을 통한 식량난 해소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물론 지향합니다. 1990년 부터 진행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인체내 유전자 위치를 알아내어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고, 유전자 분자배열을 밝혀내어 인체의 신비를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이 계획이 완성되면 기존의 의학과 약학도 큰 혁명기를 맞을 것이며 사회에 충격도 클 것이라고 합니다. 생물복제의 문제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식량증산, 멸종위기의 동믈보존, 장기이식, 유전병 치료등 유용한 점 때문에 첨단 과학 기술이 발전하지만 인간사회는 이로 인해 정신적 혼란과 충격을 갖게되며 인간 존엄성에 손상을 입고 윤리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인간이 아닌 맞춤인간의 탄생 가능성까지 나간 유전공학은 복제인간보다 더 큰 문제를 유발하게 될 것이며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비추어 보면 어떤 형태로든 맞춤인간을 활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위험성은 이들이 인류의 생태계에 주는 영향의 문제로 전 인류 혹은 전체 생명의 생존에 위협을 주는 문제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고통의 예상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절망해야하고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희망을 가질 가능성은 과학, 정보, 경제세력의 권력을 가진자들의 손과 마음에 달려 있게 된 현실인 것 같습니다. 20%가 80%와 철저하게 나누는 삶의 윤리를 가질 때, 첨단 과학 기술이 오직 생명과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만 사용 하여야 한다는 공존의 윤리를 가지고 있어야만 위기를 극복 할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가치를 주는 것이 종교로부터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종교는 이 세상에 생명중심의 가치 창출과 공존의 윤리를 지향하는 도덕적 정의를 세울 수 있는 중대한 역할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인류 역사 그 어느때 보다도 종교는 중요한 영역이요 크다란 책임을 갖는 자리에 위치하였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는 영성이 중요하게 다루어 질 것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보 기술이나 과학 기술에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연결하고 실현하려는 신앙의 노력이 진행되어야 하며, 대안적인 질서, 이에 대한 저항질서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청은 과학자들에 의해서도 제기 되었습니다. 1999년 6월에 개최된 세계 과학회의에서는 과학자만 아니라 정부 대표, 기업가, 시민 대표 등2000여명이 모여 논의했는데 과학의 발전 방향, 과학과 환경, 과학응용의 윤리적 기준, 과학지식의 공유문제 등 과학발전과 관련된 폭 넓은 주제로 토의하고 합의된 내용을 토대로 과학과 과학지식 이용에 대한 선어과 행동지침이 채택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세계공동의 문제로 21세기 인류를 위협하는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이 공동의 사회의식을 위한 확고한 가치와 이념을 종교에서 제시해 주기를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나누는 삶의 윤리, 혼자로서 살수 없고 함께라야 살수 있다는 공존의 윤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이 우선한다는 생명중심의 가치와 윤리가 제시되고 실천되어야 만 우리는 이제 생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존재의 새로움의 문제, 열린 존재, 생명을 사랑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일이 오늘 우리의 중심과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성서 이사야 11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본문의 기록자로 보는 예루살렘 이사야는 기원전 740년대에 활동한 유다 출신 예언자입니다. 이사야가 위임 받은 일은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완전한 멸망을 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이 아시리아에게 완전 초토화되어 멸망당하고, 남왕국 유다도 732년에는 스스로 봉신국이 되었고, 후에 701년에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그 강대국에게 침략당하는 것을 살아서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앗시리아와 이집트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이쪽 저쪽으로 옮겨가며 국제외교 정치를 하고 국가의 운명을 강대국의 세력에 빌붙어서 존속시키려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는 민족 최대의 절망을 경험하면서 예언활동을 한 예루살렘 이사야는 이미 그 멸망을 예언하였지만 왕들은 그를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왕국 모두의 멸망을 예언선포하면서 그 멸망의 근본원인을 통치자들의 부패한 정치 특히 가난한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패망의 원인이라고 확실하게 지적합니다. 그리고 왕권들이 부와 권력을 단시간 내에 획득하고 축적하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그것을 성취해 내는 그 부패성 때문이라고 합니다(1:12-17, 3:13-15, 5:1-7, 8-10). 더우기 이 지도자들의 죄악은 외세 앞에 풍전등화 같은 민족의 운명앞에서도 권력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권력 암투를 행한 유혈의 죄라고 합니다(1:15, 5:7).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독특하고 그리고 명확한 분석은 국가의 멸망이나 위기의 요인을 사회적 부패, 특히 야웨 하나님이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요구한 명령을 무시한 것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외부적인 운명이 외세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회정의를 세우고 평등하게 살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곧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력와 그들과 동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이를 야휘즘이라 하겠는데- 이것을 지도층들이 포기한 것에 민족의 패망이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지도자들에게서 마음이 변화되고 따라서 의미있는 개혁이 단행되리라는 전망을 거의 혹은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가 왼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의 예언자적 사역 시작 초에 친아시리아 왕인 아하즈를 상대하는데 이사야는 유다가 국제정치에 가담하지 말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편협한 종교적 판단으로 이해되거나 극단적인 유토피아적 견해라고 이해되기도 하지만 예언자는 종교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정치적으로도 실제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철저히 신정정치적 이해를 가졌으며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은 야훼의 뜻을 실행하는 것에 두었습니다. 그 실행이 바로 국가최대 이익이 되고 백성의 완전한 복지를 이룩하게 되는 길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유다에게 옳은 일이란 대외 문제에서의 중립적 입장 견지와 아울러 국내에서의 강력한 사회정의 추구라고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빈곤하게 되고 사취를 당하는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제의적 개혁을 통하여 바로 잡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 제의를 통한 개혁이나 국가적 병폐들의 실질적인 치유책이 종교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종교와 정치 모두의 야휘즘을 이행하고 있지 않는 부패함을 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이 멸망 후에도 살아남아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남은자들의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유토피아적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희망적인 미래가 있다면 부패하고 잘못된 기존의 국가구조가 완전히 붕괴된 후에야 비로소 실현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관싱있게 보는 부분은 이 새로운 세상의 도래가 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새로운 왕의 출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진 통치자는 신실하며 공정성을 가진 거룩한 왕입니다. 2절부터 3-4절에 이르고 있는 하나님의 영에 의한 통치의 내용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재판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재판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하며 잔인한 자를 치고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신실과 공의의 다스림으로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와 평등의 세상을 지향하여 통치하는 일은 결국에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구원을 받는 이상적 평화의 세상을 도래시킨다는 것입니다.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을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는 세상, 암소와 곰이 벗이 되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의 구명에서 장난하는 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완전한 공존의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다윗왕조가 결코 이러한 비유에 부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이제 하나님은 완전한 새 출발점을 다시 결정하고 계심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동물과 이렇게 완전한 평화를 이룬다는 사상은 이사야 65장과 호세아 2장에서 짧게 언급 되었을 뿐 별로 나타나지 않는 사상입니다. 9절에서 '야훼를 아는 지식이 온땅에 충만하다'는 표현은 온 세상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하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 질 때 공의와 신실한 나라가 운영되고 온 땅에 평화가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표현한다고 보겠습니다. 곧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영을 가진자의 통치에 의하여 세상에 완전한 공존이 이루어지며 평화의 세상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요구하는 공존의 윤리적 가치의 제시는 바로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한 새로운 인간성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차 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찬 사람들의 세상, 곧 신실과 공의를 수행하는 윤리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이 되어야만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빈부 격차의 심화와 생명의 존엄이 위협받는 시대에 갖게되는 우리의 절망감 앞에 민족의 처절한 절망을 예언하면서도 새날의 희망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희망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사건의 때마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되었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진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낙원적 세상, 그리고 그의 통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하고 신실하고 공의로운 통치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곧 우리의 희망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의 삶에서 그 희망은 구체화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길교회는 오늘의 세상에 절망에서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구 지식인 신지식인이 다 모인 집단인 이 교회가 시대적 신앙의 가치를 창출해 내고 실천하는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20%에 해당하는 우리들로서 단순한 선교 봉사의 차원으로 만족한다면 희망의 개혁을 이루는 길에는 들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새길교회 속에 어떻게 희망을 구체화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하는 과제를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1517년의 종교개혁을 교회사의 1차 종교개혁이라고 보면서 기독교의 종교개혁적 급격한 전환의 역사를 짚어 본다면 2차 종교개혁은 1960년대의 기독교 세속화 신학의 물결이라 할 수 있으며 3차 종교개혁은 20세기말에 진행되고 있는 크다란 신학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종교개혁은 신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권과 교권이 일치된 중세의 신 중심 신앙은 실지로는 교권에 의한 인간 억압, 비인간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이 종교개혁은 르네상스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 물결은 곧 교권화된 신중심 사상으로부터의 인간 회복운동이었습니다. 초자연적인 것들이 거부되고 인간 본래적 본성과 능력을 회복시키는 운동이 전체 삶과 문화로 표출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예로 들어 본다면 이 그림이 이전과 차이를 가지고 르네상스의 대표적 작품으로 이해되는 것은 예수의 뒷배경을 자연의 태양 빛이 비쳐드는 창문으로 표현한 것에 있습니다. 중세의 모든 성화에서 예수는 그의 신성을 강조하는 둥그렇게 둘린 후광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표현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런 르네상스운동의 영향을 배경으로 하면서 신권으로 정당화한 교권에 도전하고 그 교권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여 모두가 스스로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열었습니다.
1960년대의 2차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제2 바티칸 공의회와 개신교의 WCC 신학에서 모두 표현되어졌습니다. 이 2차 종교개혁의 전환은 이전까지의 교회와 세상에 대한 관계이해를 완전히 뒤바꾸는 사고의 변화를 요청하는 것으로서 그때까지 교회는 거룩한 곳,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노아의 방주 같은 곳 그러므로 교회안에 있어야만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세상은 죄악이 가득찬 멸망할 곳이며 속된 곳이므로 성도들은 속히 그 세상으로부터 도망하여 교회안으로 들어 와야만 한다는 식의 성과 속, 영과 육 등으로 세계를 이분화 시키는 사고로부터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며 하나님이 그 안에서 직접 선교하고 계시는 곳으로서 교회는 그 세계를 위하여 일하고 가꾸고 돌보며 그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는 새로운 이해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3차 종교개혁은 온 지구와 우주의 생명의 차원을 구원의 영역에 포괄하는 개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WCC 차원에서 논의된 정의 평화 신학에 창조질서의 보존(JPIC)이라는 주제가 포괄되면서 핵의 위협, 지구의 온난화, 공해의 무서운 폐해, 생태계의 멸종 위기 등 사회정의와 세계평화와 함께 생태학적 과제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내용이 되어야 하며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됨을 밝혀 온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고백하기를 핵탄두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전되어 있고 가난한 나라의 농부가 땀흘려 지은 농산물을 정작 그들은 먹지 못하고 미국 같은 부자나라의 사람들에게 80% 이상 수출되는 현실에서, 그리고 생태계가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졌다는 것, 신학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였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물의 중심에 두고 정복하고 다스리라 한 명려이 생태계 파멸을 초래하게 했다는 자책적 성서해석도 나오게 되었으며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몸이다]라고 선포하면서 우주 만물안에 편재하신 하나님을 찾게되었고 온 생명 중심적 신앙을 가지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태도임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소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지금 우리는 또다시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앞에 서 있으며 이 현실은 JPIC 신학의 보다 심화되고 확장된 논의를 요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21세기의 변화는 소위 지구화, 정보화, 첨단의 과학 기술화로 인한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세계가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메가트랜드적 사고나 테크노피아적 전망을 가진 이들은 세계화란 인류가 한 촌락같이 연결되고 연합되는 긍정적 진행이며 정보화도 인간 삶에 큰 유익을 주며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여 장수하게 하는 등 유익한 현상이라고 낙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결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도 않으며 유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 것입니다. 오히려 고통과 위협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합니다.
먼저 세계화 혹은 지구화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이 현상은 인간사회를 결국 빈부의 극심한 격차로 벌여 놓게 되고 극단적 삶의 질의 차이와 깊은 갈등과 소외를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게 될 것으로 봅니다. 한스 피터 마르틴과 하랄드 슈만이 쓰고 한국의 강수돌 교수가 번역한 [세계화의 덫]이란 책을 보면 이에 관련된 상세한 논의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앞으로의 사회를 라고 표현하는데 21세기에는 노동 가능한 인구 중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데 문제가 없으며 나머지 80%는 놀아야만 하는데 이 실업자들은 생존경쟁에 극심히 시달려야 하고 소외감과 자아 존엄성의 상실 등으로 고통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20%의 잘사는 사람들이 나머지를 먹여 살려야 하거나 아무튼 누군가 보살펴야 하는데 종교단체나 기관들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보상을 받거나 거리 청소를 하거나 가정부를 하여 생계를 이어나가는 상태가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문제는 '밥을 먹을 수 있느냐, 아니면 먹히느냐'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극심한 빈부의 격차에 의한 갈등과 고통이 있는가 하면 또하나의 문제는 지구 시장화는 새로운 세계적 금력의 지배구조를 만들어 금융자본의 축적이 늘어나 투기성 높은 국제금융세력들이 주식시장과 외환시장, 채권시장 등을 투기성으로 조정하여 가난한 나라들이 경제위기에 몰리고, 뿐만아니라 이 경제세력이 과학기술과 합세하여 경영의 첨단기법을 초국적 기업이 장악하게 되어 제3세계권은 철저히 여기에 예속된다는 사실입니다. 다국적 기업은 정보통신, 가상의 산업, 전자산업을 장악하면서 지구적 차원에서 과학기술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전자기술시대를 열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의 빌미를 가진 지역들이 군사시장이 되어 경제력이 전쟁의 배후가 될 것이며 전쟁, 폭력이 계속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강화되어야 할 사회보장제도는 오히려 약화되고 사회 보장서비스 또한 시장에 맡겨지며, 사회정의와 사회안전을 위한 사회운동은 도리어 약화될 것이라고 본다. 국제관계는 이제 이념적 국가간의 갈등이 아니라 세계기업들에 의해 세계 경제적 갈등으로 표출됩니다. 더우기 인간의 정신생활과 문화생활에도 심각한 충격을 주게되고 도덕적 정신적 가치나 삶의 방향들도 시장에 의해 결정되며 경쟁논리에 의해 상업화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시장화는 지구 생명에도 희생을 갖게하는데 생명계에 대한 정책이 생태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하지만 시장 논리가 지배하게 되면 그 결집이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보화 사회에 대한 전망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정보과학은 컴퓨터의 눈부신 발전과 보급의 확대로 인류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모두 알고 있는데 인간두뇌의 논리적 사고를 수행할 수 있는 기계가 만들어 지고 인터넷의 발전과 멀티미디어가 가미된 새로운 통신수단으로 자리 잡았는데 이 정보 기술이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지만 그러나 동시에 정보 독점에 따른 국가 혹은 인종간의 격차, 사생활 침해, 컴퓨터 만능에 의한 인간 소외, 컴퓨터 과실로 인한 혼란과 인공재앙, 매우 지능적인 컴퓨터 범죄, 컴퓨터 중독에 의한 정신질환등 문제도 야기 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말합니다. 특히 정보를 독점한 사회와 집단의 세계지배가 이루어질 것이며 정보의 힘이 약한 사회와 집단은 예속될 것입니다.
과학 기술 문명의 극한적 발달은 생명공학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 시킵니다. 과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생명공학의 발전이 1970년대 유전자 재조합의 실용화 단계에 도달하였고 유전공학은 생명체의 형질과 기능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함으로서 생명체를 개조하거나 새로 만들수 있게 하고 인간이 원하는 특정 형질의 인조생물의 대량생산을 목표로하고 있습니다. 농작물과 가축의 품종개량, 고가의 의약품의 대량생산을 통한 식량난 해소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물론 지향합니다. 1990년 부터 진행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인체내 유전자 위치를 알아내어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고, 유전자 분자배열을 밝혀내어 인체의 신비를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이 계획이 완성되면 기존의 의학과 약학도 큰 혁명기를 맞을 것이며 사회에 충격도 클 것이라고 합니다. 생물복제의 문제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식량증산, 멸종위기의 동믈보존, 장기이식, 유전병 치료등 유용한 점 때문에 첨단 과학 기술이 발전하지만 인간사회는 이로 인해 정신적 혼란과 충격을 갖게되며 인간 존엄성에 손상을 입고 윤리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인간이 아닌 맞춤인간의 탄생 가능성까지 나간 유전공학은 복제인간보다 더 큰 문제를 유발하게 될 것이며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비추어 보면 어떤 형태로든 맞춤인간을 활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위험성은 이들이 인류의 생태계에 주는 영향의 문제로 전 인류 혹은 전체 생명의 생존에 위협을 주는 문제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고통의 예상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절망해야하고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희망을 가질 가능성은 과학, 정보, 경제세력의 권력을 가진자들의 손과 마음에 달려 있게 된 현실인 것 같습니다. 20%가 80%와 철저하게 나누는 삶의 윤리를 가질 때, 첨단 과학 기술이 오직 생명과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만 사용 하여야 한다는 공존의 윤리를 가지고 있어야만 위기를 극복 할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가치를 주는 것이 종교로부터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종교는 이 세상에 생명중심의 가치 창출과 공존의 윤리를 지향하는 도덕적 정의를 세울 수 있는 중대한 역할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인류 역사 그 어느때 보다도 종교는 중요한 영역이요 크다란 책임을 갖는 자리에 위치하였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는 영성이 중요하게 다루어 질 것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보 기술이나 과학 기술에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연결하고 실현하려는 신앙의 노력이 진행되어야 하며, 대안적인 질서, 이에 대한 저항질서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청은 과학자들에 의해서도 제기 되었습니다. 1999년 6월에 개최된 세계 과학회의에서는 과학자만 아니라 정부 대표, 기업가, 시민 대표 등2000여명이 모여 논의했는데 과학의 발전 방향, 과학과 환경, 과학응용의 윤리적 기준, 과학지식의 공유문제 등 과학발전과 관련된 폭 넓은 주제로 토의하고 합의된 내용을 토대로 과학과 과학지식 이용에 대한 선어과 행동지침이 채택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세계공동의 문제로 21세기 인류를 위협하는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이 공동의 사회의식을 위한 확고한 가치와 이념을 종교에서 제시해 주기를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나누는 삶의 윤리, 혼자로서 살수 없고 함께라야 살수 있다는 공존의 윤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이 우선한다는 생명중심의 가치와 윤리가 제시되고 실천되어야 만 우리는 이제 생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존재의 새로움의 문제, 열린 존재, 생명을 사랑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일이 오늘 우리의 중심과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성서 이사야 11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본문의 기록자로 보는 예루살렘 이사야는 기원전 740년대에 활동한 유다 출신 예언자입니다. 이사야가 위임 받은 일은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완전한 멸망을 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이 아시리아에게 완전 초토화되어 멸망당하고, 남왕국 유다도 732년에는 스스로 봉신국이 되었고, 후에 701년에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그 강대국에게 침략당하는 것을 살아서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앗시리아와 이집트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이쪽 저쪽으로 옮겨가며 국제외교 정치를 하고 국가의 운명을 강대국의 세력에 빌붙어서 존속시키려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는 민족 최대의 절망을 경험하면서 예언활동을 한 예루살렘 이사야는 이미 그 멸망을 예언하였지만 왕들은 그를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왕국 모두의 멸망을 예언선포하면서 그 멸망의 근본원인을 통치자들의 부패한 정치 특히 가난한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패망의 원인이라고 확실하게 지적합니다. 그리고 왕권들이 부와 권력을 단시간 내에 획득하고 축적하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그것을 성취해 내는 그 부패성 때문이라고 합니다(1:12-17, 3:13-15, 5:1-7, 8-10). 더우기 이 지도자들의 죄악은 외세 앞에 풍전등화 같은 민족의 운명앞에서도 권력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권력 암투를 행한 유혈의 죄라고 합니다(1:15, 5:7).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독특하고 그리고 명확한 분석은 국가의 멸망이나 위기의 요인을 사회적 부패, 특히 야웨 하나님이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요구한 명령을 무시한 것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외부적인 운명이 외세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회정의를 세우고 평등하게 살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곧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력와 그들과 동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이를 야휘즘이라 하겠는데- 이것을 지도층들이 포기한 것에 민족의 패망이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지도자들에게서 마음이 변화되고 따라서 의미있는 개혁이 단행되리라는 전망을 거의 혹은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가 왼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의 예언자적 사역 시작 초에 친아시리아 왕인 아하즈를 상대하는데 이사야는 유다가 국제정치에 가담하지 말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편협한 종교적 판단으로 이해되거나 극단적인 유토피아적 견해라고 이해되기도 하지만 예언자는 종교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정치적으로도 실제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철저히 신정정치적 이해를 가졌으며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은 야훼의 뜻을 실행하는 것에 두었습니다. 그 실행이 바로 국가최대 이익이 되고 백성의 완전한 복지를 이룩하게 되는 길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유다에게 옳은 일이란 대외 문제에서의 중립적 입장 견지와 아울러 국내에서의 강력한 사회정의 추구라고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빈곤하게 되고 사취를 당하는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제의적 개혁을 통하여 바로 잡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 제의를 통한 개혁이나 국가적 병폐들의 실질적인 치유책이 종교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종교와 정치 모두의 야휘즘을 이행하고 있지 않는 부패함을 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이 멸망 후에도 살아남아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남은자들의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유토피아적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희망적인 미래가 있다면 부패하고 잘못된 기존의 국가구조가 완전히 붕괴된 후에야 비로소 실현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관싱있게 보는 부분은 이 새로운 세상의 도래가 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새로운 왕의 출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진 통치자는 신실하며 공정성을 가진 거룩한 왕입니다. 2절부터 3-4절에 이르고 있는 하나님의 영에 의한 통치의 내용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재판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재판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하며 잔인한 자를 치고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신실과 공의의 다스림으로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와 평등의 세상을 지향하여 통치하는 일은 결국에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구원을 받는 이상적 평화의 세상을 도래시킨다는 것입니다.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을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는 세상, 암소와 곰이 벗이 되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의 구명에서 장난하는 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완전한 공존의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다윗왕조가 결코 이러한 비유에 부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이제 하나님은 완전한 새 출발점을 다시 결정하고 계심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동물과 이렇게 완전한 평화를 이룬다는 사상은 이사야 65장과 호세아 2장에서 짧게 언급 되었을 뿐 별로 나타나지 않는 사상입니다. 9절에서 '야훼를 아는 지식이 온땅에 충만하다'는 표현은 온 세상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하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 질 때 공의와 신실한 나라가 운영되고 온 땅에 평화가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표현한다고 보겠습니다. 곧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영을 가진자의 통치에 의하여 세상에 완전한 공존이 이루어지며 평화의 세상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요구하는 공존의 윤리적 가치의 제시는 바로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한 새로운 인간성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차 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찬 사람들의 세상, 곧 신실과 공의를 수행하는 윤리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이 되어야만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빈부 격차의 심화와 생명의 존엄이 위협받는 시대에 갖게되는 우리의 절망감 앞에 민족의 처절한 절망을 예언하면서도 새날의 희망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희망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사건의 때마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되었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진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낙원적 세상, 그리고 그의 통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하고 신실하고 공의로운 통치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곧 우리의 희망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의 삶에서 그 희망은 구체화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길교회는 오늘의 세상에 절망에서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구 지식인 신지식인이 다 모인 집단인 이 교회가 시대적 신앙의 가치를 창출해 내고 실천하는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20%에 해당하는 우리들로서 단순한 선교 봉사의 차원으로 만족한다면 희망의 개혁을 이루는 길에는 들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새길교회 속에 어떻게 희망을 구체화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하는 과제를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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