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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수 없는 일

예레미야 최만자............... 조회 수 2355 추천 수 0 2008.02.15 13: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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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렘29:1-14 
설교자 : 최만자 원장 
참고 : 새길교회 
최근의 한총련 사태에 대하여 매우 상반된 시각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부 대학생들은 정부의 반응이 매우 잘못 된 것이며 비판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흥분하면서 한총련 학생들을 모조리 북한으로 보내야 한다며 학생들에 대하여 거센 비판을 합니다. 이런 상반된 반응들을 보며 그리고 지금의 이 시대를 생각하면서 여기에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고 봅니다. 무엇이 대학생들과 시민 사이를 이렇게 갈라놓았는가, 그리고 이렇게 서로가 다른 생각으로 팽팽히 나가서야 되겠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몇몇 언론인들이 상당히 객관적인 사고로 이 문제를 정리하려고 노력해 놓은 글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대중의 정서를 읽지 못하였고 또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비판하였으며, 정부에 대해서는 초강경 진압으로 학생들의 폭력을 자극하였고 아울러 폭력이 일어나기 전에 사태를 평화롭게 주선해 내지 못한 것과 한총련을 갑자기 이적성으로 몰아붙여 통일논의를 친북적 행위로만 간주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더욱이 초강경성 시위진압으로 고무총탄까지 사용하도록 한 것 등은 시위진압차원이 아니라 전쟁차원의 진압방식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고 또 공안법을 강화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편의 다른 언론들은 학생들의 폭력 사용을 크게 부각시켰고 그들의 친북적 행위를 지적하고 빨갱이로 비판하였습니다.
실로 오늘 우리의 사회는 학생 운동도 사양 산업이 되고 모든 진보적 논의들이 힘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더 이상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통일이니 민족이니 하는 문제에 관심도 없으며, 개인주의적 삶에 만족하고 몰입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제 투쟁의 시대는 가고 삶의 질을 논해야 하는 시민의 시대가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보적 논의들은 힘을 잃었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은 지가 제법 되었습니다. 70-80년대에는 흑백이 뚜렷하였고 불같이 인권문제를 주장하였으며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민주화도 많이 진척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모든 진보적 운동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노동자가 자살하였지만 지금은 중소기업 사장이 자살하게 되는 실정에 노동자 권익만이 문제가 아니라 중산층의 문제도 중요하게 보아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상황이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는 이 변화의 상황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상황의 변화에만 집중하여 학생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본질을 간과한다거나 진보적 논의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여 듣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룬 문민정부는 한마디로 기형적 민간정권 수립인데다가 그나마 형식과 절차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민주주의의 기본적 법제도의 변화는 없고 오히려 퇴행적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의사민주주의적 성격을 가짐으로 앞으로 역사지향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여지가 큽니다. 이 기형적 민간정부 아래서 양극적 대립구도가 끝나고 다양한 생활적 요구가 반영되는 각론적 주제들이 논의되면서 시민운동 시대가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지간한 문제들은 그래도 이만하면 민주화된 것이다 라고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보적 논의들만 힘을 잃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현재 처하여 있는 분단의 현실 안에서 통일과 관련된 논의들은 사회주의의 실패라는 결론에 힘입어 더욱 강경한 제재를 받고 진보적 통일 논의들이 기가 죽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동구권의 변혁은 우리에게 언뜻 사회주의는 패배하였고 자본주의가 인류사회를 살게 하는 경제체제이며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쉽게 내리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이것은 이념대립이 첨예한 분단 국가인 우리사회에서는 지금까지 진보적 의식에서 민주화와 통일논의를 이끌어온 집단의 공론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여건에서 지금의 우리사회는 어떤 정신적 공황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가치의 기준도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신학에서도 소위 진보적 주장을 하던 민중신학도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으며, 민중신학은 이제 끝이 났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역사적 과정 안에서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런 정신적 공황에서 벗어나 거듭남을 위한 새로운 지향이 필요합니다. 80년대 사회과학적 접근이 회복하고자 하였던 본질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구체적 현실적 전망을 가지고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기를 적극적으로 극복해 내고 체제와 가치 구조를 변화시켜 21세기를 위한 인간해방, 자연해방, 생명해방의 이념과 이론을 찾을 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선 살펴본다면 오늘 우리의 현실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있는 것은 우리가 어느 상황에서건 멈출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민중신학적으로 표현하여 본다면 민중신학이 그 역사적 소명을 끝내었고 진보적 논의들이 더 이상 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문제는 오히려 민중신학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결코 버릴 수 없는 원칙들을 확인함으로서 극복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자, 민중이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주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언제나 약자의 편에, 눌린 자의 편에 서시는 분이시라는 믿음과 눌린 자의 눈으로 신앙하고 세상을 보는 일입니다. 이 일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원칙에 설 때 시대와 상황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때이고 그 원칙이 살아있고, 주장되어야 하며 그러한 삶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된 것은 바로 이 원칙에서 솟아나는 힘 때문일 것입니다.
동시에 대안을 생각하는 맥락에서 70-80년대를 반성해 보건데 우리는 체제 저항적 투쟁에 집중한 나머지 인간 내면성의 문제는 들여다보지 못하였습니다. 외적 조건만 변화되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의 내면적 문제가 주제로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건설보다는 비판을 역사적 소명으로 여겼던 시대에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은 왜소하였습니다. 인간의 내면문제라는 것이 단순히 낭만적 개인주의적 인간 이해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성을 지향하면서 사회와 역사 안에 살아 있으며 그 중심이 되는 것으로, 인간의 내면을 향한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민중을 압박하는 구조에는 대항하며 비판하고 투쟁하여 왔는데, 민중자체의 복과 안녕을 위한 메시지는 부족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체가 민중이라고 하면서 민중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대상으로만 보았지 그들의 마음에 담긴 이야기가 중심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오히려 3박자 축복을 따라 갔고 거기서 갈증을 풀었습니다. 우리의(중산층, 기성교회, 지식층) 언어가 그랬고 삶이 그랬고 태도가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 내어야 할 샬롬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고달픈 일상 자체, 장바닥에서 '골라 골라'를 소리치며 하루를 사는 그들의 일상의 중요함과 그들 내면을 풍성하게 해 줄 메시지들이 우리에게 있었습니까? 아이를 허리춤에 차고 옥수수 광주리를 이고 다니는 아낙의 행복을 위한 메시지가 무엇이어야 했습니까? 사람들의 고달픈 삶 속에서 배어져 나오는 소리들은 제쳐놓고서 우리들 중심으로만 말하여 온 것에 대하여 우리는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반성은 70-80년대 이루어온 진보적 논의들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이 시점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새롭게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해 내기 위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성서 본문인 예레미야 예언자의 이야기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를 산 예언자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국을 건설하여 국토를 확장하였고 무역을 넓혀 강대국으로 자랐지만, 정치적 내부 분열로 인하여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남왕국 유대만 남게 됩니다. 이 때의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을 오가며 조공을 바친다던가 아니면 자주를 위하여 소국가들과 연합군을 이룬다던가하는 상황을 반복하였고 그 와중에 국가는 쇠잔하여 갔으며 정권은 계속 암투에 의하여 찬탈되고 살해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왕국도 계속되는 강대국의 압력에 조공을 바치며 유지되는 상황이었지만 기원전 622년 요시아왕이 국가 쇄신을 위해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앗수르의 신과 우상을 제거하는 등 종교개혁을 실시하고 자주국가를 위해 혼신을 다했습니다. 이 때는 앗수르가 몰락해 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앗수르의 세력과 간섭은 앗수르의 신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게 하였고 야훼가 제 2의 신이 되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소와 제의를 새롭게 하는 등 국가 재확립을 이루어 나갑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앗수르를 도우려는 이집트와의 전쟁을 하던 므깃도에서 요시야왕이 전사하고 맙니다. 그 후로 왕국은 지극한 혼란에 빠지고, 이집트와 앗수르 뒤에 일어난 바빌론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다가 결국은 바빌론에 의해 침공 당하고 597년 유대의 지도층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이 포로민에게 594년에 쓴 예레미야의 편지의 일부입니다. 당시 나라는 두 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강대국의 힘을 입고서라도 나라의 자치권을 찾아야 한다는 자치주의자(이들은 친 이집트파였고)와 강대국에 의존하면서 공존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공존주의자들(이들은 친 바벨론파) 간의 대립이 극단적이었습니다. 자치주의자는 국가가 약한 이유를 바빌론과 유대간의 갈등으로 보았고, 공존주의자는 대다수 민중의 이익이 대립되는 계급간의 갈등 문제를 혼란의 요인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의 입장과 그의 본문에 나타난 편지 내용이 주목됩니다. 예레미야는 민중의 이익에 서서 주장합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하여 당하게 될 커다란 비극을 미리 보았고 그들이 당할 고난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래를 담당할 작은 공동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빌론에 저항하지 말고 굴복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포로지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경험하도록 일상적인 삶에 충실하라고 권유합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권유와 태도는 많은 비난을 받았고, 감옥살이와 도망쳐 다녀야 하는 고난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의 언행을 친 바빌론적 입장에서 해석하느냐 친 이집트적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 랍비 엘리 비젤은 예레미야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이 후기 친 바빌론자에 의한 편집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을 접어두고 또 그리고 예레미야의 이 편지가 오늘 우리들의 상황과 결코 일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의 편지 맥락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럼에도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찾아본다면 개혁을 성공하지 못한 한 국가의 운명 앞에서 여전히 미래 역사를 책임지고 살아나가야 하는 민족의 상황 -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여 어느 것이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공백상태의 상황 - 에서 최선의 방향을 전하는 말로써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몇 가지 점은 첫째 그가 미래의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일상적 삶을 성실히 수행하는데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루하루의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오늘을 그 미래에 앞당겨 사는 희망 속에 사는 그런 삶입니다. 일상적 삶은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 일상적 삶의 소중함으로 인하여 미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의 역사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쌓아나가는 그리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사는 삶에서 오는 안정과 여유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개혁의 과정에서 우리가 상실한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보시켜 놓았던 많은 것들, 서정적 인간, 삶의 질, 규범적이고 명분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지혜로운 것들의 회복입니다. 전쟁으로 폐허된 국토를 번영과 안정으로 이끌고자 하는 예언자의 소망은 포로생활일지언정 그들 일상적 삶에서 만들어내는 여유 그리고 샬롬의 맛을 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건 삶의 기본적 행복을 유지하는 것과 그것을 민족의 미래역사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민족과 국가 속에서 언제나 현존해 있고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와 구원을 지금의 일상적 삶의 현실과 연결시킨 것은 새롭게 주목할 부분입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포로민들의 삶은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고 비교적 독자적 생활이 가능하였으며 집과 토지를 소유하고 지위도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으로 봅니다(소수민족의 반발을 막기 위한 강대국의 정책으로). 물론 그 안에 저항과 투쟁과 소요가 있었고 처형을 당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이렇게 생존하여 왔고 생명을 유지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추방되어 사는 그 동족에게 야훼의 샬롬을 약속하면서 힘을 주고 이상적 삶을 중요하게 살도록 권유하였던 것입니다(백성 중에는 포로민의 생활을 비관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함).
다음으로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예레미야는 70년 후를 위하여 작은 공동체를 생존시키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대가 나라를 회복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때를 70년 후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적자 하나냐는 2년 후로 보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하나냐의 주장이 성취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불가능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그와 같은 권유,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지속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권유는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람이 역사에 의해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단순하게 그리고 인간적으로 오히려 그 역사에 작용할 수 있도록 행동하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일들을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권고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가치 기준과 신앙의 참된 변화가 내면의 변혁을 토대로 할 때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계약법에 의거하여 나라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제 그 법은 돌판에 새기는 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30-31장의 내용들이 이런 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보적 논의가 힘을 잃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역사가 창출되게 하기 위하여 예레미야의 상황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가 보여주는 방법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미래 역사를 위하여 삶을 사랑할 줄 아는 그 삶에 배는 인간의 내면을 사랑할 줄 아는 훈련을 하는 일입니다. 70년 안(이 숫자는 가까운 미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에 통일이 이루어질 때 그 역사를 담당할 공동체의 그루터기를 만드는 일, 미래 역사를 담당할 작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70년 후의 우리 나라 주역들을 위한 준비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 앞에서 언급하였던 그 멈출 수 없는 원리들을 적용시켜 나가면서 사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또 우리에게 빌붙어 사는 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 자기나라를 이끌어 갈 주역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일상적 삶이 샬롬으로 이루어지도록 돕는 일 등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멈출 수 없는 일은 인간의 내면을 풍성하게 하는 일, 더욱이 약자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을 맡을 미래의 역사의 주인공을 위해 훈련하는 일입니다. 미래의 역사(다른 말로 하면 변혁 또는 개혁을)를, 멈출 수 없는 원리들을 담아내는 일상적 삶의 가치와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과 안목, 그것이 오늘 우리의 맥락에서 중요한 교훈으로 예레미야로부터 조명되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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