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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호1: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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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상태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2005.11. 6 주일설교 |
호세아 1:8~10, 로마서 8:12~17
오늘 설교 제목이 ‘왜 믿느냐고 물으면’인데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한테 “왜 하나님을 믿느냐?” 하고 물으면, 대부분 “구원받기 위해서” 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간다. 그래서 믿는다.” 라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당연한 이유라고 대부분 생각을 합니다.
이 대답이 결코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보수적인 믿음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저 또한 그런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고 하면,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에게 아이가 둘 있습니다. 큰 아이가 아들인데요. 대학 2학년에 다니다 이번 학기에 휴학을 하고 군대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이는 딸아이인데, 지금 고3 수험생입니다.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어렸을 때는 특히나 이 딸아이가 재롱을 많이 떨었습니다. (키우는 재미는 딸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제 목에 매달리면서 잘 하던 말이 있습니다. “아빠, 난 아빠가 좋아.” 그 때 제가 “그래, 아빠가 왜 좋으니?”하고 물으면,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고 분명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빠가 맛있는 거 많이 사 주잖아. 아빠가 장난감 많이 사 주잖아.”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서 조금은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 놈, 너 사실은 아빠보다, 맛있는 게 좋은 거구, 장난감이 좋은 거로구나.” 아이나 아빠나 다 어리고 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깊은 사랑보다 부모가 사주는 장난감, 맛있는 거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처음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그 무엇에 관심이 집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마치 엄마 아빠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당연히 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걸 당연히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 욕심대로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잘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남편 사업 잘되게 해 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들, 대학에 꼭 들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 잘 하니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큰 복을 내려주실 지도 몰라.” 라는 생각에 복권을 사 놓고 일등 당첨되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정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면 안 될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라면,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떼를 쓰고 매달린다고 해서 옳고 그르고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들어준다면 그런 분은 하나님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런 식의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신앙이 자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쉽게 흔들리게 됩니다. 바람잘 날 없는 거죠.
“왜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가 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대답은 “잘 살기 위해 믿는다” 라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바로 살기 위해서, 잘 살고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이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고 조르기만 합니다. 해 주면 좋아하고, 안 해 주면 싫어합니다. 단순하죠. 그러나 아이가 커갈수록, 엄마 아빠에 대한 이해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과자 사주고, 장난감 사줘서 좋은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의 사랑과 보호 속에 산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의 애정 어린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철이 들수록, 엄마 아빠와 속깊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엄마 아빠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순종하는 걸 배웁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아이는 부모 말씀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보편적으로 유익하며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더욱 더 깨닫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며 자라다 보면,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임을 깨달을 때가 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자동차를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 운전합니다. 가고 싶으면 엑셀레이터를 밟고, 서고 싶으면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거꾸로 하면 큰일납니다. 자동차의 매뉴얼대로 운전을 해야 자동차가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컴퓨터를 사용할 때도, 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해야 컴퓨터로부터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잘 살고, 행복하게 살려면, 세상을 있게 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몇 가지 매뉴얼을 주셨습니다. 자연이라는 매뉴얼, 양심이라는 매뉴얼, 그리고 성서라는 매뉴얼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흐름과 이치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늘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자 애쓰면 어느덧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라는 매뉴얼이 문제입니다. 책으로서의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와 논리라는 그릇에 생명의 양식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릇을 씹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양식을 먹어야 되는데, 우리 한국교회에는 그릇을 씹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문자에 매이지 말고 그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차 말씀드리듯이 성서가 말하는 중심 메시지는 경천애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 때, 사람이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서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가면, 마침내 복이 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그 대가를 받게 됩니다. 부모 말씀 잘 듣는 아이가 결국은 잘 됩니다. 시척하면 대들고 불효하는 아이가, 그 사람 됨됨이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다가 어느 순간에 부모의 가르침이 간섭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은총 안에서 자라다 보면, 하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자유로운 삶에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의 삶을 자유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살고,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온전히 성숙해 지면, 이 두 번째 단계의 믿음도 넘어서게 됩니다. 이 단계에 있는 분들은 “잘 살기 위해서,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 무엇을 위해서” 등등의 모든 조건들을 뛰어 넘어, 그냥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니까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습니까? 부모가 잘 해주시건 못해 주시건,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건 당연한 도리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라도 제 부모에게 효도할 줄 모르는 자식은 불효자식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낳아주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생명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게 된 것은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다른 종교 전통에서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인 ‘아버지(어버이) 하나님’으로 만나지만, 동양에서는 도(道), 혹은 법(法)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신학자는 ‘궁극적 실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인식과 표현은 각기 다르더라도 우리는 홀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있게 하는 한 근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내 생명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그 근원, 그 궁극자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근원이요 궁극자되시는 분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어버이)’로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우리 모두를 품어주시는 엄마요 아빠되시는 하나님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자식이 조건없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게 당연하듯이, “나를 구원해 주시니까, 영생을 주시니까, 천국 보내 주시니까, 혹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내가 잘 되니까….” 그런 모든 조건을 초월해서, 그냥 사람이 하나님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 그것이 이 단계에 들어선 믿음의 선각자들이 가진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갖게 되면, 반석 위에 선 신앙이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용돈 많이 주셔서 좋다”라고 생각하는 자식은 아버지가 용돈 안주시면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니까 좋다”라고 생각하는 자식은 용돈을 주시건 안주시건 똑같이 좋습니다. 조건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리기 때문에 “엄마 이거 해 줘, 아빠 저거 해 줘” 하고 매달리는 건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서까지 “엄마가 뭐 해 줄래나? 아빠가 뭐 해 주실래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으면 참 딱한 일입니다.
성년이 되면 생각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이 못난 자식 키우느라고 그렇게 애쓰신 우리 부모님,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생각이 달라져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성숙되어 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우리 주님 말씀대로 빛과 소금이 되어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게 하는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게 우리 신앙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믿음, 온전한 삶을 사시는 우리 새길 교우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 설교 제목이 ‘왜 믿느냐고 물으면’인데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한테 “왜 하나님을 믿느냐?” 하고 물으면, 대부분 “구원받기 위해서” 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간다. 그래서 믿는다.” 라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당연한 이유라고 대부분 생각을 합니다.
이 대답이 결코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보수적인 믿음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저 또한 그런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고 하면,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에게 아이가 둘 있습니다. 큰 아이가 아들인데요. 대학 2학년에 다니다 이번 학기에 휴학을 하고 군대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이는 딸아이인데, 지금 고3 수험생입니다.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어렸을 때는 특히나 이 딸아이가 재롱을 많이 떨었습니다. (키우는 재미는 딸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제 목에 매달리면서 잘 하던 말이 있습니다. “아빠, 난 아빠가 좋아.” 그 때 제가 “그래, 아빠가 왜 좋으니?”하고 물으면,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고 분명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빠가 맛있는 거 많이 사 주잖아. 아빠가 장난감 많이 사 주잖아.”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서 조금은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 놈, 너 사실은 아빠보다, 맛있는 게 좋은 거구, 장난감이 좋은 거로구나.” 아이나 아빠나 다 어리고 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깊은 사랑보다 부모가 사주는 장난감, 맛있는 거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처음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그 무엇에 관심이 집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마치 엄마 아빠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당연히 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걸 당연히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 욕심대로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잘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남편 사업 잘되게 해 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들, 대학에 꼭 들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 잘 하니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큰 복을 내려주실 지도 몰라.” 라는 생각에 복권을 사 놓고 일등 당첨되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정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면 안 될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라면,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떼를 쓰고 매달린다고 해서 옳고 그르고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들어준다면 그런 분은 하나님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런 식의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신앙이 자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쉽게 흔들리게 됩니다. 바람잘 날 없는 거죠.
“왜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가 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대답은 “잘 살기 위해 믿는다” 라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바로 살기 위해서, 잘 살고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이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고 조르기만 합니다. 해 주면 좋아하고, 안 해 주면 싫어합니다. 단순하죠. 그러나 아이가 커갈수록, 엄마 아빠에 대한 이해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과자 사주고, 장난감 사줘서 좋은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의 사랑과 보호 속에 산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의 애정 어린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철이 들수록, 엄마 아빠와 속깊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엄마 아빠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순종하는 걸 배웁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아이는 부모 말씀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보편적으로 유익하며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더욱 더 깨닫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며 자라다 보면,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임을 깨달을 때가 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자동차를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 운전합니다. 가고 싶으면 엑셀레이터를 밟고, 서고 싶으면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거꾸로 하면 큰일납니다. 자동차의 매뉴얼대로 운전을 해야 자동차가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컴퓨터를 사용할 때도, 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해야 컴퓨터로부터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잘 살고, 행복하게 살려면, 세상을 있게 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몇 가지 매뉴얼을 주셨습니다. 자연이라는 매뉴얼, 양심이라는 매뉴얼, 그리고 성서라는 매뉴얼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흐름과 이치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늘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자 애쓰면 어느덧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라는 매뉴얼이 문제입니다. 책으로서의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와 논리라는 그릇에 생명의 양식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릇을 씹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양식을 먹어야 되는데, 우리 한국교회에는 그릇을 씹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문자에 매이지 말고 그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차 말씀드리듯이 성서가 말하는 중심 메시지는 경천애인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 때, 사람이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서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가면, 마침내 복이 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그 대가를 받게 됩니다. 부모 말씀 잘 듣는 아이가 결국은 잘 됩니다. 시척하면 대들고 불효하는 아이가, 그 사람 됨됨이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다가 어느 순간에 부모의 가르침이 간섭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은총 안에서 자라다 보면, 하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자유로운 삶에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의 삶을 자유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살고,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온전히 성숙해 지면, 이 두 번째 단계의 믿음도 넘어서게 됩니다. 이 단계에 있는 분들은 “잘 살기 위해서,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 무엇을 위해서” 등등의 모든 조건들을 뛰어 넘어, 그냥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니까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습니까? 부모가 잘 해주시건 못해 주시건,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건 당연한 도리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라도 제 부모에게 효도할 줄 모르는 자식은 불효자식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낳아주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생명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게 된 것은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다른 종교 전통에서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인 ‘아버지(어버이) 하나님’으로 만나지만, 동양에서는 도(道), 혹은 법(法)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신학자는 ‘궁극적 실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인식과 표현은 각기 다르더라도 우리는 홀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있게 하는 한 근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내 생명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그 근원, 그 궁극자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근원이요 궁극자되시는 분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어버이)’로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우리 모두를 품어주시는 엄마요 아빠되시는 하나님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자식이 조건없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게 당연하듯이, “나를 구원해 주시니까, 영생을 주시니까, 천국 보내 주시니까, 혹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내가 잘 되니까….” 그런 모든 조건을 초월해서, 그냥 사람이 하나님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 그것이 이 단계에 들어선 믿음의 선각자들이 가진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갖게 되면, 반석 위에 선 신앙이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용돈 많이 주셔서 좋다”라고 생각하는 자식은 아버지가 용돈 안주시면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니까 좋다”라고 생각하는 자식은 용돈을 주시건 안주시건 똑같이 좋습니다. 조건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리기 때문에 “엄마 이거 해 줘, 아빠 저거 해 줘” 하고 매달리는 건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서까지 “엄마가 뭐 해 줄래나? 아빠가 뭐 해 주실래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으면 참 딱한 일입니다.
성년이 되면 생각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이 못난 자식 키우느라고 그렇게 애쓰신 우리 부모님,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생각이 달라져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성숙되어 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우리 주님 말씀대로 빛과 소금이 되어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게 하는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게 우리 신앙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믿음, 온전한 삶을 사시는 우리 새길 교우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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