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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영성

미가 김기동............... 조회 수 1784 추천 수 0 2008.09.02 17: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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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미6:6-8 
설교자 : 김기동 자매 
참고 : 새길교회 2005.11.27 주일설교 
 미가 6:6~8, 마태복음 5:23~24

우리는 오늘로 4주째 새로운 의식순서를 가지고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예배하는 순서가 예배의 목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의식을 새로 계획하면서 예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배의식을 새로 만드는 작업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진정한 예배란 무엇인가 또 생각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은 낯설었던 우리의 예배의식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조금 제 이야기부터 할까 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어렸을 적 충청도 어느 작은 마을에서 자랐는데 그곳은 김씨 집성촌이었고 할아버지는 그 마을 어른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설날에 돌아가셨는데 교회에 다니셨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만 마을에서 유일하게 읍내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이 거의 모두 친척이었고 제사는 곧 마을제사였다고 합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이면 부정탄다고 마을 문을 닫고는 마을 출입을 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아버지는 마을 제사가 있는 날이면 개구멍을 통해 몰래 빠져나와 교회에 가곤 했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아버지는 대학 때 친구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아버지에게 간장과 술을 한 컵씩 놓고는 어느 것을 마시겠냐고 할 때 간장을 원샷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30이 되던 해 정치학을 공부하던 아버지는 길을 바꿔 신학교로 갔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주일날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아직도 일요일이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강요되었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도 일요일이라고 부르면 어색합니다. 달력에는 일요일이라고 적혀있지만, 저는 절대 일요일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날, 주일은 온전히 예배드리는 날이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어렸을 적 그게 그리 어렵거나 문제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교회 가면 선생님과 친구들과 재미있었고, 또 공부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단지 한 가지 재미없는 것은 아무것도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일날 무엇인가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은 주일을 범하고 주일성수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거의 주일 예배를 빠진 기억이 없습니다. 아이 낳고 병원에 있었을 때를 제외하곤 소위 주일을 범한 적은 거의 없으니까요. 주일날에는 잘 아프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아파도 죽지 않을 정도면 교회에는 꼭 갔어야 했습니다. 주일 날 아침,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가느냐 마느냐라고 재고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주일성수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습니다. 주일날 아침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범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철이 들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내 머리는 자유롭게 사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주일성수해야 되는, 그렇지 않을 경우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주일성수의 외골수적 신앙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근본주의적 청교도 정신으로 중무장한 미국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사고와 생활 방식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에 기준하여 신앙생활의 준거를 몇 가지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주일성수라는 겁니다. 주일성수하면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이고, 구원받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이고 결국 벌을 받게 되어 잘 살 수 없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책망하고 저주하기까지 했던 바리새파가 별 겁니까? 이렇게 자신들이 세운 원칙을 마치 무슨 하늘에게 떨어진 지고지순 불변의 철칙인 양 내세운 이들이겠지요. 그런데 우습게도 이렇게 강요된 사고가 100년도 훨씬 지난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을 옥죄고 있고,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저는 스스로 교회를 선택해 본 적도 별로 없고, 또 한 번 자의든 타의든 교회를 선택하면 그곳이 제 교회인 줄 알고 다녔기 때문에 2월에 새길교회 나온 이후 아주 낯설고 곤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또 오시지요?” 이젠 새길교회에서의 이 질문의 의미를 아니까 이젠 저도 자연스럽게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만,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제가 한 번도 교회 안에서 가져보지 못했던 이방인의 느낌을 갖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내가 이때껏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신앙의 의지적 측면을 다시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의 신앙적 경험의 토대가 다릅니다만 내가 다녀야 할 교회를 선택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만은 아니구나 새삼 느끼게 된 것입니다.

누가 오라고 강권하지 않았는데, 예배당으로 보이지도 않는 이곳에 우리는 왜 추운 아침을 가르고 모여 이렇게 예배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특징은 안정성과 안주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기보다 무엇이 없다고 말하기를 즐겨하니까요. 건물도 없고, 목사도 없고, 제도도 거부하고,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이곳을 예배처소로 정해놓고 예배하기 위해 모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결국은 개인의 결단과 신앙에서 기인하는 것임에도, 여전히 이곳에서 개인으로 흩어지기보다 공동체로 모이기를 원하고 예배하기를 원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도대체 우리의 신앙에, 우리의 결단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예수는 항상 우리의 삶에 동행하고 함께 하시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데 왜 우리는 하필 한 장소를 정하고 한 시간을 정하여 함께 모여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고 있습니까? 예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 교회를 표현할 때 구구한 설명보다 한마디로 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평신도 공동체.’ 이건 단순히 교회의 계급적 제도를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 사는 사람의 모습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배가 아닌 평등의 구조로서, 나만의 삶이 아닌 이웃을 바라보고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로서, 예수가 이 땅에서 보여준 참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바로 그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의지와 뜻을 함께 하는 공동체인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는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와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장이 됩니다. 권력을 지향하며 탐욕 가운데 인간성의 상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세상 한가운데서, 섬기고 나누므로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고, 정의를 외치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품고 함께 살고자 하는 결단이 결코 나 자신의 절대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진정한 겸손과 섬김의 삶을 배우는 장이 바로 우리의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그렇기에 예배한다는 것은 그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예배는 거룩합니다. 거룩은 속과의 구별을 뜻하는 것으로, 더럽고 악한 이 세상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영역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거룩을 공간적 개념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베드로 성당에는 민소매옷을 입으면 들어갈 수 없고, 본당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에 예배 이외에 다른 짓을 했다가는 큰일 나는 곳이라고들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예배의 거룩성은 예배당의 거룩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구별된 것으로 드리는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 기쁨으로 찬양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결단으로 그 삶을 정결케 하는 것이기에 예배는 거룩합니다.

거룩한 예배라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너무 거룩성을 강조한 나머지, 사람들은 거룩한 교회, 예배 그리고 세속에서의 삶이라는 이분법을 낳게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배는 분명 거룩하게 보이게 드리는데, 예배당을 나오기만 하면 그 거룩성을 벗어 버리고 철저한 세속의 삶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교회의 삶, 세상의 삶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정확하게 구별하게 한 것은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무엇인가 생각하게 해줍니다. 제사로 드리는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이었습니다. 어떤 제물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그가 정성으로 예배하는가가 달려있기도 했습니다. 일 년 된 송아지, 수천마리의 양, 엄청나게 많은 올리브 기름, 급기야는 맏아들, 자신의 몸, 그 당시 정말 좋은 제물로 여겼던 것들이 다 언급되고 있습니다. 시편50편에 보면 이러한 것들에 대해 요즈음 말로 하면 너희들 참 웃긴다라고 비웃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인데 뭐가 부족해서 그런 것들을 원한단 말인가라고 말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러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공의를 실천하고, 인자(헤세드)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는 불의를 행하고, 미워하고, 용서할 줄 모르며, 하나님은 그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시라고 성전에 가두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제물만 좋은 것으로 준비해서 간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예배하다가 형제자매에게 잘 못한 것이 생각나면 우선 가서 화해하고 예배하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예배하다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요? 예배는 삶과 구별되게 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바로 그 삶의 한 복판에서 과거를 돌이켜 기억하고 미래의 참된 삶을 시작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말씀의 신학이 대두하고, 천주교의 미사가 너무 형식적이라고 비판하는 가운데 개신교 예배는 말씀 선포를 중심으로 하는 의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현상은 우리 개신교 예배의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교가 시작하기 전에 들어오고, 설교를 끝날 때까지 다 듣기만 하면 마치 다 예배드린 양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50년대 이후 예배의식이 단순히 형식인 것만이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그 깊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권위로 감싸여서 예배는 마치 설교 전 준비하는 순서, 설교 후 마무리하는 순서 등의, 그야말로 형식적인 의식이었던 것을 넘어서 예배의 전체적 가치와 의미를 중시하는 의식으로,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새롭게 찾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전통적으로 예배순서는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평신도들은 그 의미를 상실한 채,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말씀의 청중으로, 수동적인 순종과 헌신만이 강요되기가 일쑤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는 새로운 예배의식도 이러한 생각과 같은 맥락에서 시도되었습니다. 새로운 예배의식은 4가지의 의의를 기본으로 했습니다. 첫째 보는 예배, 즉 강단과 청중석이 분리되어 수동적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능동적으로 응답하고 반응하는 예배가 되고자 했습니다. 둘째, 교인이니까 마땅히 드리는 의무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공동체가 다함께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살아있는 예배가 되고자 했습니다. 셋째 말씀증거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모든 예배 의식 순서가 예배의 상징으로 회복되는 예배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증거를 통하여 복음을 수동적으로만 듣는 복음의 소비자가 아니라, 예배를 통해 스스로 결단하고 예수따르미로서 새롭게 결단함으로써 세상에서 ‘복음의 창조자’가 되는 예배가 되고자 했습니다.

예배는 모두 5개의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도와 명상을 위한 연주 이후, 징울림 3번은 하나님의 초대와 성령의 임재를 알리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첫 번째 마당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시편말씀과 찬송을 통한 경배의 장입니다. 그리고 3마당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예배경험을 상징합니다.〈고백과 회복〉은 과거의 삶을 예배 안에서 돌아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회복의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장입니다. 특히 이 부분은 공동기도를 통해 개인적인 죄의 고백과 용서보다는 사회의 복잡한 그물망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악의 문제를 고백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모습으로 회복됨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으로 평화의 인사는 바로 여기에서 지금 그 회복의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입니다.〈말씀과 은혜〉는 말씀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현재 안에서 새롭게 경험하는 마당이고,〈결단과 헌신〉은 이제 올 시간 안에서 지금 경험한 회복과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단하고, 이제 세상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나아가는 마당입니다. 징울림 3번은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소리입니다. 마지막으로〈공동식탁의 사귐〉은 식탁교제가 진정한 나눔과 이웃섬기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장이기에 예배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사실 예배의식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예배의식은 언제나 매너리즘의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예배가 형식화되지 않고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은 예배하는 자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준비된 예배라도 예배하는 자의 온전한 드림이 없다면 예배는 그 의미를 상실케 됩니다. 하지만 예배의 영성은 그것을 넘어섭니다.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불의와 악이 판치는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에게 희망을 걸겠다는 고백,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주면 얻게 된다고 급기야는 죽기까지 온 세상의 고통을 안고 가는 예수를 따르겠다는 고백이 예배시간만의 립서비스가 아닐 때, 그러한 삶이야말로 살아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 예배를 통해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임을 확인하게 하시어 감사드립니다. 먼저 공동체의 하나됨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일 년 전 오늘 우리 곁을 떠난 서문자 자매의 가족들이 우리 공동체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공동체 되길 원합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를 기대하면서 그의 겸손과 섬김을 통해 세상에 희망을 주는 등불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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