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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미6: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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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03.11.16 |
미가서 1장1절에 보면 미가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와 남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 모두를 대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의 입장과 대비시켜본다면 서울과 평양 양측을 모두 포괄하는 예언이라는 뜻인데, 이는 곧 그의 활동 영역이 상당히 광범위하다는 것이
겠지요. 그가 활동한 시기는 BC 8세기와 7세기에 걸쳐 있는데, 이 기간 중에 북이스라엘에 앗시리아의 이해서 멸망했으며 남유다도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가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었다고 책망합니다. 이제 이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죄에 빠진 이들은 어떻게 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인지 모릅니다. 그 문제를 두고 이제 미가와 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우선 6,7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예배,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방식을 두 가지 전통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이며, 다른 하나는 이교적 전통입니다. "높이 계시는 하느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화려한 종교 의식의 이면
번제, 송아지, 수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바치는 동물이었습니다. 이들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종교의식은 상징으로서 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이런 의식을 화려하게 거행했습니다. 송
아지가 죽을 때 내는 울음과 비명, 피비린내, 향, 거룩하게 만들어진 제복을 입고 의식을 거행하는 제사장,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그 종교 의식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흡사 신이 강림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성공회,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의 종교의식은 우리 개신교회에 비해서 훨씬 세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개신교회도 이런 종교의식을 건전한 차원에서 좀더 발전시켜야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런 일정한 의식을 통해서 깊은 종교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 생활이 없는 제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마 절에서 드리는 예불도 역시 로마 가톨릭의 미사 못지 않게 이런 종교적 의식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발전되어 있을 것입니다. 새벽 3,4시에 일어나 아침을 알리는 북을 치고, 대웅전에 모여 함께 불경을 외우는 모습은 그 의미를 충분히 모르는 사람에게도 어떤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의식이 종교경험의 본질을 심화시켜나갈 수도 있지만 자칫 그런 의식 자체에 매몰되어 버릴 위험성도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식은 우리에게 매우 감각적으로 작용하지만 본질은 은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종교의 본질은 외면한 채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에만 치우치게 됩니다. 속이 부실하면 겉이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미가의 표현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몇 천 마리의 수양을 통해서 제사 드리
는 모습을 말입니다.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간의 경건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강림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이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면죄부 사건을 일으키면서도 로마 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생각을 하며, 러시아의 짜르 정권 시대에 민중들이 생존의 위험에 처해있는 상태에서도 정교회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종교의식을 극도로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듯 종교의식만 확대 재생산되고 그 본질이 축소됨으로써 유럽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러시아에서는 볼쉐비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학적인 삶
그런데 본질은 외면하고 대신 겉모양에 치중하는 상태가 극단화되면 자학적인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학적으로 종교의식을 발전시키는 일은 이스라엘 근동의 여러 종교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지만 근동의 종교는 사람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게 사람의 마음을 훨씬 자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전통, 즉 이스라엘의 제사행위인 동물을 바치는 것이나 이교의 제사행위인 사람을 바치는 일은 고대의 종교적 의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그 흔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차원에서 이런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겉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매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교육에서부터 집 장만이나 살아가는 과정 전체가 남에게 얼마나 그럴듯하게 보이는가에 치우쳐 있습니다. 제가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삶의 영역에 삶의 본질이 아니라 흡사 정신병자의 영혼을 지배하는 악령처럼 삶의 껍질만 득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심해질 경우에는 틀림없이 자학적인 데까지 이르게됩니다. 수능 학생들이 목숨을 끊고,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하고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걸고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은 삶의 본질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실 자학입니다. 이는 흡사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상태와 똑같습니다.
불안
고대나 현대 가릴 것 없이 우리는 왜 이렇게 겉모양에 치우치다가 결국 자학적인 차원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키에르케골의 표현을 빌리면 '불안'이 그 바록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불안의 뿌리는 곧 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기
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 이 죽을죄를 벗으려면..." 삶의 토대가 허술하면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포장으로 둘러싸여도 결국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본질과 연결되지 않은 종교와 삶은 아무리 화려한 의식으로 감추려고 해도 허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본질로부터 벗어난 것이 죄이며, 그것으로 인해서 불안하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 불안을 해결해보려고 하다가 자기 자식을 바칠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치열한 종교행위 앞에서 할말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무슨 힘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에 저토록 열렬하게, 또는 자학적으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요즘 새삼스럽게 한국교회 안에 새벽기도회 열풍이 불었습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사랑의 교회'는 새벽 2시부터 7시까지 연이어 드리는 새벽기도회 신자들로 인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이라는 새벽기도회 슬로건을 보고 그게 다 수능시험을 코앞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그것만으로 모두 해석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수양 몇 천 마리'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에 집중되고 있는 사람과 돈과 시간의 양은 엄청납니다. 이런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면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그런 열광적 현상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열광이 오히려 반(反)그리스도적인 결과로 나타난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이렇듯 도에 넘치는 종교적 열성은 그들이 갖고 있는 '불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한민족이 숙명처럼 안고 있는 '한'이 그것일 수도 있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서울 강남에서 부동산 투기를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부도덕성에 대한 '불안'일 수도 있고, 또는 교회에서 거의 세뇌 당하듯이 들어온 도적주의적 설교로 인해서 형성된 무의식적인 '불안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불안을 극도의 종교적 열성으로 벗어나려는 심리가 오늘의 치열한 종교적 열광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교회는 자칫 이런 인간의 '불안'을 이용하려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교회에 묶어놓으려고 합니다.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예수 잘 믿어야한다고 떠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유치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즉 그런 두려움
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말이 통합니다.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듦으로써 어떤 반응을 요구하는 종교는 사이비입니다. 설령 인간이 죄 의식으로 인해서 불안한 게 어쩔 수 없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실존적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불안을 자극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해결책도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본질을 망각하고 그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하거나 자학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수양 몇 천 마리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식을 바쳐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
미가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수양 몇 천 마리나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8절에 그 길이 세 가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들어서 잘 아는 일이지만 이것보다는 오히려 번제, 송아지, 자식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번제와 송아지로 해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미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질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예언자들의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인생경험이나 심리상태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니라 진리의 영에게 자기를 열어놓음으로써 생명의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을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길은 아주 특별한 게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첫째는 정의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정의 문제를 얼마나 철저하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긴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입을 열 때마다 정의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전혀 정의롭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사회 정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용어로 말하자면 자기 집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의 순간을 순전히 자기 자신을 성취하는 기회로만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정의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라는 말과 자기 성취감이라는 말을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작용하는 인간의 심리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게 이기심과 자기를 성취하려는 욕망을 구분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비슷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도덕적이고 계몽된 사회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교묘한 방식으로 사회정의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라크 파병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의 기준에서 판단합니다. 국제 정의가 아니라 국익이 우선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국익우선주의라고 말하면 대개가 동의합니다. 이런 국익이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단지 경제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에 생각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사회 정의가 아니라 국익의 차원에서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아마 노 대통령이 정의를 이 나라의 최고 가치로 본다고 말한다면 지지도가 10%대로 떨어지고 말겠지요. 정의를 말하려면 일단 경제적으로 조금 못살게 되더라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을 전제하는 것인데, 이런 상태를 받아들일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요?
둘째는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각주에 보면 이 구절은 "한결같은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해설되어 있습니다. 뭉뚱그림으로 다시 해석한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할 줄 알고 더 나아가 주변의 모든 세계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삶을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은총'의 세계에 들어가야만 가능합니다. 자기에게서 성취된 일을 자기의 능력으로, 자기가 잘난 증거로 생각하는 한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교양으로 감사하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은덕에 보답하는 일은 자기의 삶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이해에서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 중심에서 은총 중심으로, 물질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때만 가능합니다. 지나치게 화려한 종교의식과 자학적인 행동으로 빠져든 이유가 인간의 불안 때문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종교는 이 불안이 아니라 은총을 계기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야 건강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자기와 주변의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야말로 철이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버릴까 불안해서 부모에게 의지한다면 그 관계가 정상은 아닙니다. 비록 자신에게 부족한 게 많지만 그래도 부모의 사랑을 의지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바른 관계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두 번째 일은 종교적으로 유별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삶을 은총으로 인식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는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실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일도 이 셋째의 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은총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알아들을 만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약간 애매합니다. 보통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교회에 잘 나와
서 예배드리고 봉사생활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미 앞서 번제, 송아지, 헌금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씀을 미루어보면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여기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얼추 비슷한 설명이라도 드려야겠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도, 하이덱거의 존재와 동행한다는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소극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 자기를 비우고 절대적인 생명의 영이 활동하게 하는 것, 이런 데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말입니다. 거꾸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이란 자기가 보기에 그럴듯한 것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땅을 넓히고 재물을 쌓아둘 창고를 늘리는 것에 자기의 삶을 묶어두는 것이 말입니다. 이렇듯 자기를 절대화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첫 번째로 제시된 정의를 실천하기 마련이며, 둘째로 제시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일상과 예배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가 결론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결국 예배는 우리의 일상에서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제, 송아지, 수양 몇 천 마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만을 생각했지만 미가는 그게 아니라 일상에서 정의로우며, 은총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일상이 예배로 승화되어야 하고, 예배가 곧 일상에서 현실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을 법적인 차원에서 구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으며, 바울도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정한 형식의 예배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것대로 의미가 있습니다만, 이 일정한 형식의 예배는 반드시 일상의 예배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일상의 예배를 담아내지 못하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서술하고 있는 9절 이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가는 이런 일상의 예배를 정의로운 삶으로 제시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일상의 예배가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로 승화되어야 할는지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2003.11.16
겠지요. 그가 활동한 시기는 BC 8세기와 7세기에 걸쳐 있는데, 이 기간 중에 북이스라엘에 앗시리아의 이해서 멸망했으며 남유다도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가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었다고 책망합니다. 이제 이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죄에 빠진 이들은 어떻게 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인지 모릅니다. 그 문제를 두고 이제 미가와 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우선 6,7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예배,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방식을 두 가지 전통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이며, 다른 하나는 이교적 전통입니다. "높이 계시는 하느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화려한 종교 의식의 이면
번제, 송아지, 수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바치는 동물이었습니다. 이들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종교의식은 상징으로서 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이런 의식을 화려하게 거행했습니다. 송
아지가 죽을 때 내는 울음과 비명, 피비린내, 향, 거룩하게 만들어진 제복을 입고 의식을 거행하는 제사장,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그 종교 의식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흡사 신이 강림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성공회,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의 종교의식은 우리 개신교회에 비해서 훨씬 세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개신교회도 이런 종교의식을 건전한 차원에서 좀더 발전시켜야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런 일정한 의식을 통해서 깊은 종교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 생활이 없는 제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마 절에서 드리는 예불도 역시 로마 가톨릭의 미사 못지 않게 이런 종교적 의식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발전되어 있을 것입니다. 새벽 3,4시에 일어나 아침을 알리는 북을 치고, 대웅전에 모여 함께 불경을 외우는 모습은 그 의미를 충분히 모르는 사람에게도 어떤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의식이 종교경험의 본질을 심화시켜나갈 수도 있지만 자칫 그런 의식 자체에 매몰되어 버릴 위험성도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식은 우리에게 매우 감각적으로 작용하지만 본질은 은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종교의 본질은 외면한 채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에만 치우치게 됩니다. 속이 부실하면 겉이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미가의 표현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몇 천 마리의 수양을 통해서 제사 드리
는 모습을 말입니다.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간의 경건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강림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이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면죄부 사건을 일으키면서도 로마 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생각을 하며, 러시아의 짜르 정권 시대에 민중들이 생존의 위험에 처해있는 상태에서도 정교회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종교의식을 극도로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듯 종교의식만 확대 재생산되고 그 본질이 축소됨으로써 유럽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러시아에서는 볼쉐비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학적인 삶
그런데 본질은 외면하고 대신 겉모양에 치중하는 상태가 극단화되면 자학적인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학적으로 종교의식을 발전시키는 일은 이스라엘 근동의 여러 종교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지만 근동의 종교는 사람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게 사람의 마음을 훨씬 자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전통, 즉 이스라엘의 제사행위인 동물을 바치는 것이나 이교의 제사행위인 사람을 바치는 일은 고대의 종교적 의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그 흔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차원에서 이런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겉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매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교육에서부터 집 장만이나 살아가는 과정 전체가 남에게 얼마나 그럴듯하게 보이는가에 치우쳐 있습니다. 제가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삶의 영역에 삶의 본질이 아니라 흡사 정신병자의 영혼을 지배하는 악령처럼 삶의 껍질만 득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심해질 경우에는 틀림없이 자학적인 데까지 이르게됩니다. 수능 학생들이 목숨을 끊고,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하고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걸고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은 삶의 본질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실 자학입니다. 이는 흡사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상태와 똑같습니다.
불안
고대나 현대 가릴 것 없이 우리는 왜 이렇게 겉모양에 치우치다가 결국 자학적인 차원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키에르케골의 표현을 빌리면 '불안'이 그 바록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불안의 뿌리는 곧 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기
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 이 죽을죄를 벗으려면..." 삶의 토대가 허술하면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포장으로 둘러싸여도 결국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본질과 연결되지 않은 종교와 삶은 아무리 화려한 의식으로 감추려고 해도 허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본질로부터 벗어난 것이 죄이며, 그것으로 인해서 불안하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 불안을 해결해보려고 하다가 자기 자식을 바칠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치열한 종교행위 앞에서 할말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무슨 힘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에 저토록 열렬하게, 또는 자학적으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요즘 새삼스럽게 한국교회 안에 새벽기도회 열풍이 불었습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사랑의 교회'는 새벽 2시부터 7시까지 연이어 드리는 새벽기도회 신자들로 인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이라는 새벽기도회 슬로건을 보고 그게 다 수능시험을 코앞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그것만으로 모두 해석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수양 몇 천 마리'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에 집중되고 있는 사람과 돈과 시간의 양은 엄청납니다. 이런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면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그런 열광적 현상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열광이 오히려 반(反)그리스도적인 결과로 나타난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이렇듯 도에 넘치는 종교적 열성은 그들이 갖고 있는 '불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한민족이 숙명처럼 안고 있는 '한'이 그것일 수도 있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서울 강남에서 부동산 투기를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부도덕성에 대한 '불안'일 수도 있고, 또는 교회에서 거의 세뇌 당하듯이 들어온 도적주의적 설교로 인해서 형성된 무의식적인 '불안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불안을 극도의 종교적 열성으로 벗어나려는 심리가 오늘의 치열한 종교적 열광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교회는 자칫 이런 인간의 '불안'을 이용하려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교회에 묶어놓으려고 합니다.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예수 잘 믿어야한다고 떠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유치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즉 그런 두려움
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말이 통합니다.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듦으로써 어떤 반응을 요구하는 종교는 사이비입니다. 설령 인간이 죄 의식으로 인해서 불안한 게 어쩔 수 없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실존적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불안을 자극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해결책도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본질을 망각하고 그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하거나 자학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수양 몇 천 마리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식을 바쳐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
미가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수양 몇 천 마리나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8절에 그 길이 세 가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들어서 잘 아는 일이지만 이것보다는 오히려 번제, 송아지, 자식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번제와 송아지로 해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미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질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예언자들의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인생경험이나 심리상태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니라 진리의 영에게 자기를 열어놓음으로써 생명의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을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길은 아주 특별한 게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첫째는 정의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정의 문제를 얼마나 철저하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긴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입을 열 때마다 정의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전혀 정의롭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사회 정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용어로 말하자면 자기 집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의 순간을 순전히 자기 자신을 성취하는 기회로만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정의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라는 말과 자기 성취감이라는 말을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작용하는 인간의 심리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게 이기심과 자기를 성취하려는 욕망을 구분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비슷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도덕적이고 계몽된 사회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교묘한 방식으로 사회정의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라크 파병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의 기준에서 판단합니다. 국제 정의가 아니라 국익이 우선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국익우선주의라고 말하면 대개가 동의합니다. 이런 국익이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단지 경제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에 생각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사회 정의가 아니라 국익의 차원에서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아마 노 대통령이 정의를 이 나라의 최고 가치로 본다고 말한다면 지지도가 10%대로 떨어지고 말겠지요. 정의를 말하려면 일단 경제적으로 조금 못살게 되더라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을 전제하는 것인데, 이런 상태를 받아들일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요?
둘째는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입니다. 각주에 보면 이 구절은 "한결같은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해설되어 있습니다. 뭉뚱그림으로 다시 해석한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할 줄 알고 더 나아가 주변의 모든 세계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삶을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은총'의 세계에 들어가야만 가능합니다. 자기에게서 성취된 일을 자기의 능력으로, 자기가 잘난 증거로 생각하는 한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교양으로 감사하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은덕에 보답하는 일은 자기의 삶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이해에서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 중심에서 은총 중심으로, 물질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때만 가능합니다. 지나치게 화려한 종교의식과 자학적인 행동으로 빠져든 이유가 인간의 불안 때문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종교는 이 불안이 아니라 은총을 계기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야 건강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자기와 주변의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야말로 철이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버릴까 불안해서 부모에게 의지한다면 그 관계가 정상은 아닙니다. 비록 자신에게 부족한 게 많지만 그래도 부모의 사랑을 의지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바른 관계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두 번째 일은 종교적으로 유별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삶을 은총으로 인식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는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실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일도 이 셋째의 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은총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알아들을 만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약간 애매합니다. 보통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교회에 잘 나와
서 예배드리고 봉사생활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미 앞서 번제, 송아지, 헌금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씀을 미루어보면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여기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얼추 비슷한 설명이라도 드려야겠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도, 하이덱거의 존재와 동행한다는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소극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 자기를 비우고 절대적인 생명의 영이 활동하게 하는 것, 이런 데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말입니다. 거꾸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이란 자기가 보기에 그럴듯한 것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땅을 넓히고 재물을 쌓아둘 창고를 늘리는 것에 자기의 삶을 묶어두는 것이 말입니다. 이렇듯 자기를 절대화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첫 번째로 제시된 정의를 실천하기 마련이며, 둘째로 제시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일상과 예배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가 결론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결국 예배는 우리의 일상에서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제, 송아지, 수양 몇 천 마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만을 생각했지만 미가는 그게 아니라 일상에서 정의로우며, 은총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일상이 예배로 승화되어야 하고, 예배가 곧 일상에서 현실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을 법적인 차원에서 구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으며, 바울도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정한 형식의 예배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것대로 의미가 있습니다만, 이 일정한 형식의 예배는 반드시 일상의 예배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일상의 예배를 담아내지 못하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서술하고 있는 9절 이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가는 이런 일상의 예배를 정의로운 삶으로 제시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일상의 예배가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로 승화되어야 할는지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200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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