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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재판 하나님의 심판

요나 한인섭............... 조회 수 3065 추천 수 0 2007.12.19 23: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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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4:1-11 
설교자 : 한인섭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솔로몬의 지혜를 대변해주는 재판 중에 생모확인 사례가 있습니다. 어느 날 두 여자가 솔로몬왕 앞에 와 다투었습니다. 두 여자가 거의 동시에 아이를 낳았는데, 사흘째 밤에 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죽은 아이를 둔 여자는 다른 여자의 산 아이와 죽은 아이를 바꿔치기 했고, 그로 인해 분쟁이 생겨났습니다. 그 분쟁은 결국 왕에게까지 왔습니다. 솔로몬은 "살아 있는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생모는 마음이 불붙는 듯하여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어도 좋으니, 제발 죽이지는 말아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습니다. 다른 여자는 "어차피 내 아이도 네 아이도 안될 테니 차라리 나누어 가지자"고 말하였습니다. 드디어 왕은 "살아 있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아이를 양보한 여자에게 주어라"고 판결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내린 판결을 전해 듣고는 그 현명함에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현명함은 성경 여기저기서 보여집니다. 우선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신이 무엇을 원하는가 물어오자 지혜로운 마음을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많은 송사를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기 때문입니다. 장수와 부귀영화, 큰 권세를 꿈꾸지 않고 백성을 현명하게 다스리기에 골몰하는 모습, 그리고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 분쟁의 처리에 있어 높은 지혜가 필요함을 솔로몬은 알았습니다. 정적을 거꾸러뜨리는 술수와 권력을 구하지 않고, 백성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한 점에서 솔로몬은 오늘날까지 훌륭한 지도자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이 사건의 원고와 피고 모두 최하층 창녀의 신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그들의 이야기를 남김없이 듣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압적.권위적 심문방법이나 재판진행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되고 있는데, 먼 고대의 지존한 국왕이 최하층 여자들의 분쟁에 깊이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 또한 대단히 탁월하게 보여집니다. 판단을 함에 있어 어떤 불가사의한 방법이나 어려운 방법을 구사하지 않고, 두 여자의 마음이 자연히 드러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진실이 저절로 떠오르고, 허위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어낸 점에서 지혜와 정의를 겸비한 성군임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이 판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칼을 들고 아이를 반쪽으로 나누는 방법은 그 목적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솔로몬의 관심은 진실과 정의의 확립에 있지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눈을 가리고 칼을 든 차가운 정의의 여신을 연상시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통스러웠을 생모의 '불붙는 듯한 마음'을 잠시나마 다시 한번 유린하는 방법을 구사하는 것은 잔혹한 느낌마저 줍니다. 생모가 아닌 여자도 원래부터 나빴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여자도 자신의 아이를 불과 삼일만에 잃었던 여자인데, 솔로몬의 시험에 걸려 어린아이를 반쪽으로 나누자고 말하는 사악한 여자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분쟁의 해결 과정에서 불필요한 상처를 추가한 셈입니다. 생모도 왕의 현명한 판결에 감격했겠지만, 자신의 아이에게 잠시라도 가해졌을 지도 모를 위해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자신에게 내려진 판결 내용을 알았다면 솔로몬을 찬양하는 마음으로만 가득 찼을 지 의문입니다.
(14세기 중국설화는 다른 방법이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유사한 사건에서 재판관인 관리는 분필로 원을 그린 다음 아이의 양손을 두 여자가 나누어 잡게 하고는 아이를 빨리 원 밖으로 끌어내는 쪽이 아이의 임자라고 말합니다. 한 여자는 아이를 힘껏 잡아당기고, 다른 여자는 당기다 놓아버립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같았습니다. 이 쟁탈전에서 앞의 여자는 아이를 차지하는 데 관심이 있고, 뒤의 여자는 아이의 안녕에 관심이 있습니다. 누가 진짜 엄마인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재판에서 진실의 확인 방법으로 솔로몬이 구사한 방법은 시험재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재판이라 함은 양 당사자에게 시험문제를 내어 거기에 통과하는 자를 승리자로 하는 재판방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방법은 솔로몬의 현명함을 예증하기 위해 쓰여지지만 사실상 진실 확인방법으로 결정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정답인지 아닌지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대단히 자의적.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후 이러한 시험 재판방식이 역사 속에서 神判의 남용사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같은 시험문제를 두 번 내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그때그때 계속 문제를 고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식 재판은 솔로몬의 위대성을 드러낼 수는 있겠지만, 의미 있는 선 판례로 기능할 수 없으며 타인이 쉽사리 모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솔로몬의 재판을 보고 백성들이 두려워하였다고 쓰여 있지, 그러한 지혜를 갖춘 솔로몬을 참으로 존경하고 사랑하였다고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의 아픔에 공감하고 상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마음가짐이 바탕에 없으면, 상대방으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은 될지 몰라도 존경과 사랑을 얻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솔로몬 정도의 지혜와 겸손함을 갖춘 지도자들을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그 이상의 것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로몬같이 현명한 왕도 부지불식간에 불필요한 상처를 만들어 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재판은 솔로몬의 지혜를 입증하는 사건으로 인용되고 있지만, 사실상 인간 지혜의 한계를 보여주는 반면사례로 인용될 수도 있으리라 보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의 재판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 대답을 얻기 위해 요나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서는 어릴적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재미와 교훈을 겸비한 멋진 이야기입니다. 다른 예언서처럼 장중한 톤으로 압박하지 않으며, 욥기처럼 심오한 철학적 대화로 읽는 이들을 주눅들게 하지 않고, 4장에 불과한 소품 속에 온갖 드라마를 연출합니다. 전체 줄거리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앞부분은 요나 개인에게 내린 계시에 대한 거역과 참회 그리고 구원의 이야기이며, 뒷부분은 요나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백성 및 군주의 참회와 용서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개인과 집단의 죄악-참회-용서와 구원의 이야기는 여기서 대단히 압축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요나의 예언을 필요로 했던 시대 상황과 그 속에서 한 예언자의 몸부림에 대한 이해로부터 말을 풀어가고 싶습니다.
요나서에는 어떤 전제적인 해설 없이 하나님의 계시가 들려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1:2). 니느웨는 어떤 도시입니까?. 당시 중동의 패권을 잡았던 앗시리아(앗수르)의 수도이며, 세계 제1의 대도시였습니다. 앗시리아는 세계 최초의 철기문명국가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이스라엘(북)과 유다(남)로 분단되어 있던 나라 중 이스라엘을 우수한 병기로 단숨에 무찌르고,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포위 압박하면서 하나님을 조롱하던 그러한 나라였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를 공격한 앗수르에 대한 인과응보의 징벌을 예고한 것이며, 실상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려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세속적 행복을 약속하는 것과 거리가 멀 가능성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예언자는 참으로 어두운 시대에 질식된 목소리에 대신하여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어쩔 수 없이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언하는 행위는 대단히 고통스럽고 투옥과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대국의 죄악을 책망하고 멸망을 예언하는 행위는 당시에는 곧 죽음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대단히 직선적 행동파인 요나는 니느웨의 반대편인 닷시스로 가서 배를 타다 폭풍을 만나 물고기에게 집어 삼키우고, 그 물고기의 뱃속 곧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서 비로소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설정한 관계를 요나는 스스로 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감싸고 회개를 통해 관계를 회복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같은 명령이 요나에게 임합니다. 요나에게는 이제 다른 선택의 길이 없습니다. 외치고 죽으나 고래뱃속 같은 데서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니느웨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가장 힘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거친 베옷을 입고 참회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니느웨 왕의 자세입니다. 3장 7-9절에 나오는 왕의 명령은 이렇습니다. 1)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말 것. 2)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굵은 베옷을 입고 참회할 것. 3)모두 각기 이제껏 행한 악행과 폭력을 버릴 것. 4)하나님이 뜻을 돌이키고 진노를 그치도록 간구할 것 등입니다. 그리고 손수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자기와 자기민족이 믿지도 않는 신의 경고를 받아들여, 금식하고 참회하는 모습, 그것도 회개의 정도가 말과 태도로서뿐 아니라 모든 행동의 변화로 이끄는 계기로 삼는 모습은 정말로 놀라운 모습입니다. 더구나 사람은 물론 짐승에게까지 참회를 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정도의 참회는 물고기 뱃속에서의 요나의 참회와 같은 수준이라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모세 시대의 애굽 바로의 강팍함(이것이 지배국가 군주의 일반적 태도일 텐데)과는 천양지차의 대조를 이룹니다.
참회와 동시에 악행에서 벗어나는 니느웨 백성과 왕의 태도를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의 손길을 거둡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를 매우 싫어하고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왜? 히브리 백성들을 살육하고 영토를 유린했던 압제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속시원한 멸망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요나가 기대하는 하나님 상은 잘못을 끝까지 추궁하는 복수의 여신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선택한 예언자답게 하나님이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을 것을 알고 불평합니다. 요나가 토로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아마도 하나님의 진면목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가볍게 내리지 않는 하나님"(4:2) 이십니다. 여기서 의미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애(사랑)는 풍부하면서 분노는 더디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저울은 복수의 여신이나 정의의 여신의 저울과는 달리 한쪽이 매우 기울어져 있는 저울이며, 그 저울도 당사자의 진정 어린 참회 앞에는 작동하지 않는 저울입니다.
그러한 속성을 알면서도 요나는 혹시 심판을 내리지나 않을까 기대하면서 니느웨 성밖 동편 언덕에 올라가서 그 도시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봅니다. 다음에 우리는 요나의 불만 어린 질문을 무자비하게 꺽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대합니다. 대신 하나님은 요나가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요나 스스로 수긍할 수 있도록 합니다. 즉 요나의 초막 위에 박 넝쿨을 준비하여 그늘을 만들어주고 다시 그 박 넝쿨을 시들게 만듭니다. 직선적인 요나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뜨거워 죽겠다는 불평을 합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답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육방법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면서도 하나님은 마지막 의인까지 다 구한 후에 멸망의 징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한 한 도시의 초토화식 멸망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 즉 어린이나 정신장애자까지 자신이 창조하고 배양한 하나님, 인간뿐 아니라 육축의 생명까지 아끼는 하나님, 노하기는 더디 하고 사랑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모습이라면 무차별의 멸망을 야기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안이숙 여사의 {죽으면 죽으리라}를 보면, 일제가 회개하지 않으면 유황불이 내려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요나의 니느웨 멸망에 대한 예언처럼 참다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전쟁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 지도자들이 이 예언을 받아들여 회개할 리 없었습니다. 이것이 니느웨의 백성과 군주와 일본의 지도층의 차이일 것입니다. 그 결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유황불의 지옥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유황불 경고의 결과물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시민들이 일본 전범들의 죄를 대신해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원자탄 투하가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수많은 생명과 육축까지 아끼는 하나님의 대리행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재판과 하나님의 심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진실을 밝혀내어 엄정한 정의를 집행하였습니다. 대신 승/패를 명확히 가름으로써 패자에게 고통을 더하였고, 승자에게도 잠재적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는 니느웨 백성과 국왕의 구원, 그리고 요나의 구원이었습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이전보다 쇄신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결정적인 전제는 하나님의 경고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고, 그 재앙을 막기 위해 모두가 말과 행동으로 참회하며, 그 참회는 모든 생명체에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노하기는 더디 하시고 인애하심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참뜻은 승패를 명확히 가르는 냉혹한 정의보다는 하나님과 사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람과 육축간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통한 평화에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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