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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나에게 누구였던가

빌립보서 한완상............... 조회 수 2055 추천 수 0 2008.06.30 10: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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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2:6-11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1999.12.5 주일설교 
요즘 저는 상지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한 뒤 진흙 속 깊이 묻혀있는 진주를 발견하는 놀라움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얼마전 총학생회장단이 저를 찾아와 돈 천만원을 수줍어하면서 겸손하게 내 놓았습니다.

"총장님, 저희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장학금을 모아 여기 1000만원 가져왔습니다. 우리보다 어려운 학우들을 위해 써 주십시오"

저는 어리둥절했습니다. 라는 대자보가 여기 저기 걸려있는 살벌한 한국의 여러 대학들을 보아 온 저로서는 상지대학 학생 간부들의 이 같은 헌금을 받고 정말 어리둥절해 졌습니다. 일찍 관안산 기슭에서 보지 못했던 광경을 원주의 치악산 자락에서 보게되니 더욱 놀라웠습니다. 교육이 마땅히 가르치고 길러내야 할 흐뭇한 인간이 바로 이런 젊은이들이로구나 하고 감동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자기를 비워 남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마음, 바로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실천한 예수의 젊은이들입니다. 그들이 교회를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의 삶을 알게 모르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을 과녁삼아 악착같이 출세를 향해 내달려 온 젊은이들, 이른바 일류대학에 다니는 젊은이들 속에서 이같은 흐뭇한 감동을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저로서는 이번 이 일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체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젊은이들의 행동 속에서 바로 예수의 젊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세기가 저물어 갑니다. 아니 한 천년이 지고 있습니다. 이번 성탄절은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예수의 의미, 예수 오심의 의미를 올곧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뜻을 제대로 깨닫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 자신의 신앙 역정을 되돌아보면 예수의 모습이 여러가지로 달라져 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기야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니고 있던 예수 상은 역사적 예수 (또는 부활이전의 예수)가 아니라 부활 이후의 예수인 그리스도 상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상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앙과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예수 역시 우리를 감동시키고 오늘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성탄절에 우리는 만 볼 것이 아니라 를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저 자신이 지녔던 여러가지 다른 예수상에 대해 증언하고 싶습니다. 대체로 그리스도 이미지는 분명했으나, 예수 이미지는 희미했습니다. 하기야 예수와 그리스도가 섞여 있는채, 그리스도 중심으로 예수를 이해했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던가? 이 질문은 하나님은 저에게 어떤 분이었던가 라는 질문과 겹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저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이미지와 예수의 이미지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왔습니다.
초등학교까지 하나님은 저에게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잘못하면 저를 대번에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무서운 심판주로 하나님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지옥 불에 대한 공포가 클 수록 하나님은 더욱 무서운 공포의 심판주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신비하고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어릴 때 본 예수 영화에서 예수님은 항상 얼굴 없는 분이셨고, 무서우리만큼 신비한 분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감히 가까이 접근해 갈 수 없는 분, 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하나님 이미지는 저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하지 않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지요. 지옥 불에 떨어져서는 안되니까 말입니다.
중 고등학교 때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구세주였습니다. 통상적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예수 상이지요. 교리가 강조하는 예수 상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메시지가 바로 이러한 예수 이미지를 간결하게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의 역사적 의미는 숨겨지고, 보혈의 신학적 의미는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는 저 높은 곳에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거룩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저의 세속적 욕망간에 충돌이 심각해졌습니다. 주로 새로 눈뜨게 된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과 경건한 신앙간의 충돌이기도 했습니다. 몸과 마음간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거룩 거룩하신 주님 앞에 너무나 불결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에 대한 불만도 쌓여 갔습니다. 이때 저의 기도는 대체로 이러했습니다.

"주여, 당신과 같이 거룩 거룩해 질 수 있고, 당신이 계신 저 높은 곳을 날마다 경건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소서"

새벽 기도에 열심히 나가게 된 것도 이같은 간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지냈던 갈등과 고뇌를 그대로 이월 받으면서 저의 대학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될 무렵 새로운 고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세상 만사를 당신의 섭리에 따라 착착 진행시키시는 분이라면, 인간의 자유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각본에 따라 진행된다면, 인간의 자유는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왜 아담과 이브가 뱀의 꾀임에 빠지도록 했는가! 그래 놓고 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무자비하게 쫓아냈는가!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를 나쁘다고 정죄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는 하나님 섭리 드라마(또는 구속사의 드라마)에서 그에게 배정된 악역을 너무나 멋지게 해 낸 인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된 드라마에서 그는 악역상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저는 이같은 고민을 하면서 저의 자유가 정말 거추장스럽고 짐스럽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이 자유가 저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자유로 활용되기 때문에 괴롭기도 했습니다. 자유를 선용하지 못했던 자신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자유를 주시면서 책벌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병 주고 약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뒤 곧 거추장스러운 나의 자유가 하나님의 사랑과 이어진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 그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바라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에게만 자유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셨다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사랑하셨기에 그들을 동물이나 기계로 만들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당신의 형상 곧 자유롭고 아름다운 인격체로 지으셨습니다. 물론 이 자유는 책임을 지는 자유까지 포함된 것이지요.
저는 이 같은 자유를 활용해 더 높은 저 곳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계속 새벽기도에 나갔으며, 교회의 온갖 역할들을 마다하지 않고 그것을 맡아 열심히 일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교장, 학생회 간부, 성가대원, 성가대 지휘 등 교회가 시키는 일은 모두 즐겁게 감당하려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음에 드는 소녀를 보면 대번에 내 몸의 시선은 저 거룩 거룩한 곳에서 저 세속적인 욕망으로 곤두박질하곤 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저는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라고 신음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모두 이겨내셨으나, 나는 조그마한 시험도 이겨낼 수 없는 초라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 때까지도 예수님은 너무나 거룩하게 우뚝 서 계신 분이시기에 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신 듯 했습니다. 이때 속으로 혼자 "예수님은 광야에서 왜 여성의 유혹은 받지 않으셨을까?"라고 되뇌었습니다.
1957년 군에 입대했습니다. 춥고 배고픈 군대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부패, 부정, 위선, 배고픔, 고달픔 속에서 내가 믿었던 예수님은 큰 힘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너무 멀리 계셨고, 또 거룩 거룩하신 분이라,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 허기진 배를 안고 떨고 있던 육군 사병에게는 예수님이 너무 초월해 계셨습니다.
1960년 초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수퍼스타 예수와 히피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체국 벽보에 부착되어 있는 수배자 사진에 나타난 범죄인처럼 취급되었던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급진적 비동조자(radical non-conformist) 예수는 곧 반 자본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반전논자이기도 했습니다. 온갖 위선과 부정의 제도에 화살을 쏘아대는 변혁가이기도 했습니다. 마침 제가 다녔던 Emory대학교에는 反神 신학자 알타이저(Altizer) 교수가 있었는데, 그는 월남전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기독교 예수께서 맹렬한 반공주의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이같은 저의 예수 상은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서야 냉전체제를 옹호하는 세속적 근본주의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핍박하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 모교에 돌아와 교수생활을 시작하면서, 벌거벗은 군사통치의 권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에게는 정치적 해방자 예수상이 몸과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때 읽은 젤롯당에 관한 브랜든(Brandon)교수의 책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유신체제가 들어서서 인권탄압이 본격화되고 학원의 자율과 학문의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해방자 예수는 민중 예수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저에게 큰 힘이 되셨고 소망이 되셨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저 낮은 곳, 민중의 삶 속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창비 잡지에 실린 것도 이때였습니다.
저와 같은 지식인들이 유신체제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되자, 민중 예수는 더욱 가까이 저의 삶에 와 닿았습니다. 1976년 2월 서울대학교에서 추방된 뒤 저는 들판에서 예수님을 항상 만날 수 있었습니다. 란 책이 나온 것은 이때이며,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커미셔너로 부름받아 해방자 예수, 민중 예수를 더 많이 배우게 된 것도 이때입니다. 민중과 함께 고통 당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 예수임을 느끼고 그 분을 더욱 가까이 모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80년 그 짧은 서울의 봄 기간에 저는 서울대에 복직되었으나, 또다시 신군부에 의해 동지들과 함께 일망타진 당했습니다. 지하 2층에서 지옥 심문 당하면서 저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갈릴리에 오신 예수께서 남산 지하실에도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형 집행정지로 출옥한 뒤 얼마 있다가 미국에서 망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뿌리뽑힌 몸으로 살면서 저는 초대교회 집사 스데반을 성령을 통해 응원하신 서 계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저 같은 뿌리뽑힌 망명자를 응원하시기 위해 앉아 계시지 않고 벌떡 일어서시면서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강력하게 응원하시느라 벌떡 일어서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바로 사랑의 주님이었습니다.
그뒤 귀국했습니다. 복직되었습니다. 그리고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통일 부총리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냉전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총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들판에서 외롭고 괴롭게 군사정권에 대항하며 싸울 때 받았던 공격과 비난보다 더 강렬하고 음흠한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부 종합청사 높은 자리에서 저는 들판 낮은 곳에 서 있을 때보다 더 불안했습니다. 더 외롭고 더 괴로웠습니다. 정부 안팎의 냉전 세력들의 공략이 참으로 드세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비록 교회는 저에게 큰 힘이 되지 못했으나, 저는 샬롬(평화)의 예수에게 더욱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터운 냉전 빙벽을 깨고 그것을 녹이는 하나님의 평화가 따뜻한 햇살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평화의 강물이 저 한강물과 저 대동강물처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게 하기 위해 의 햇볕정책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참담했었지요. 그럴수록 예수는 저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처음으로 예수 세미나의 활동을 세계적 시사 주간지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의 정직하고 용기있는 역사적 예수의 재발견은 저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해 주고 있으며, 저의 신학적 시야를 더욱 넓혀주고 있습니다.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자궁처럼 체휼( 恤)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바로 그분을 직접 체험하신 예수님께서 라고 를 선포하셨음을 기쁨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영적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셨기에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실천은 저 멀리 초월자로 게시면서 거룩 거룩하신 심판주로 우리에게 무섭게 군림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해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그들간의 관계 속에서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계심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같은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이요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이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론에서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그의 편지에 나오는 예수는 역사적 실존 인물 예수가 아니라 부활 후의 예수 곧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그리스도론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 예찬론에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뚜렷하게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 참으로 기쁩니다. 정말 반가운 크리스마스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저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역사적 예수는 역사 현실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체험하신 영적 존재이시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바로 하나님의 본체(本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활 후의 예수 곧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놀라운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부활 후 예수)께서는 결코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여기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자기를 열고 비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易之思之, 易地感之, 易地行之 하시면서 열린 밥상 공동체를 여시고 무상의 치료를 행하시어 민중의 아픔을 덜어주신 그 감동적인 예수의 모습 말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는 종인 체 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종 자체가 되셨습니다. 종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음식만 먹고 마신 것이 아니라 희망과 사랑, 고뇌와 아픔을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셨기에 독식하고, 독선하고, 독주했던 기득권 층에 의해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삶이었습니다.
바로 이같이 스스로를 비워 종이 되어 남을 섬기셨기에 놀라운 반전(反轉)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높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뛰어난 이름을 얻으시고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높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는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지금 저에게 아주 가까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 저 멀리 계셨던 무서운 초월자, 거룩 거룩하신 심판 주 하나님이 이제는 보잘것없는 저의 삶 속으로 들어와 계십니다. 함께 아파하시는 분의 모습으로 저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바로 이같은 분이 이천년 전 저 유대 땅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어찌 그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허나 더욱 더 기쁜 소식은 바로 그 분께서 매일 매 순간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고 계시다는 체험입니다. 그러기에 크리스마스는 항상 저희들 속에서 끊임없이 축하되어야 합니다. 그 분이 말구유에까지 내려 오셨기에, 오늘도 우리의 처절한 현실 속에 내려 오셔서 자궁처럼 참께 아파하시기에,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더 높이고 싶은 것입니다. 저 낮은 곳으로 사람으로 내려 오셨기에 저희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본체로 기꺼이 더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쁨의 반전을 불러일으키는 감동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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