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9-15 |
---|---|
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1999.12.19 주일설교 |
성탄의 계절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는 때입니다. 저 멀리 높은 하늘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구경하시는 하나님, 혹은 높은 데서 명령하시고 군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낮고 천한 우리 인생의 한 복판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에게서 큰 위로를 받는 계절입니다. 성탄 이전 우리들의 삶이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애쓰는 고달픈 삶이라면, 성탄절은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죄악 속에 뒹구는 우리들을 더럽다고 외면하지 않고, 온갖 시기와 질투, 탐욕과 갈등이 난무하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감사와 기쁨으로 맞이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진정 복된 계절, 은총의 계절, 복음의 계절입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에게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참다운 모습을 봅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고통받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보다도 더 낮은 곳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확인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상식적인 하나님 이해를 180도 뒤집어 놓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심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이 낮아짐으로 인해 인간들이 높아지는 역전을 가능하게 한 사건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를 수십 년 믿어도 이 간단하면서도 근본적인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을 저 먼 곳에 두고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 위에 군림하는 군주 같은 존재로 여깁니다. 우리는 말구유와 같이 낮은 데로 임하는 하나님,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지, 힘과 권위의 하나님에게서는 전혀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힘과 권위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릎은 꿇을지 모르나 마음을 열지는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의 자유와 자율을 억압하고 숭배를 강요하는 독재자 같은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합니다. 프로이드가 증언하는 대로 현대인은 정신적으로 아버지를 죽인 자들입니다. 아버지를 죽이고서 형제들끼리 부둥켜안고 약간의 죄의식을 않고 사는 자들입니다. 현대인들은 어머니 하나님, 자궁과 같이 자식을 감싸는 하나님은 믿어도, 가부장적 권위의 하나님은 이미 청산해 버린지 오래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를 도외시하고 이러한 가부장적 권위의 하나님, 군림하고 명령하는 하나님 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는 이러한 왜곡된 하나님 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면서도 예수가 보여주신 하나님의 인식에는 이르지 않고 스스로 만든 억압, 권위, 명령, 징벌, 강요, 심판, 공포의 하나님 상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이들에게 있어서 자유보다는 억압, 사랑보다는 두려움, 은총보다는 단죄, 용서보다는 심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인식하면 우리도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고 이러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또 다시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만만하게 우리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무서운 심판 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 이 면을 무시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크리스마스에는 자기를 낮추어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는 때이며, 우리에게 먼저 마음을 푸시고 악수를 청하시는 하나님, 먼저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에게서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인데도 왜인지 모르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고 예수의 삶과 죽음, 그의 행적과 말씀을 아무리 상고하고 되새겨도 그 때뿐이지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나에게서 멀어지고 예수는 나와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따지고 보면,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나와는 무관한 먼 곳, 먼 옛날의 인물이며,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리 한국인들하고는 전혀 다른 삶의 환경 속에서 살다가 가신 분입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유일회적이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보편적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라 해도 그것은 진정으로 나의 사건, 나에게 일어난 사건은 아닙니다. 예수 탄생이라는 엄청난 사건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IMF라는 사건은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재앙이기에 나의 사건이 되지만 - 그것도 내가 실직을 당하여 거리에 나 앉기 전에는 관념적이지만 - 먼 옛날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예수 사건은 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건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무리 위대한 삶을 사셨다 해도, 내가 예수처럼 되지 않는 한 그것은 나의 얘기는 아니며 그저 남의 얘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는 본받을 존재는 될지언정 나를 구원해주는 구주는 되지 못합니다. 아니, 예수가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나는 작아지고 초라해지며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되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식만 커질 뿐입니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 이야기가 가지는 신앙적 한계입니다. 역사적 예수는 결코 나를 구원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가 수백 번 세상에 태어나신다 해도 나의 삶을 바꾸어 놓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힘을 얻어 나도 예수처럼 살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기며 예수와 나와의 간격이 좁아지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교회의 화두는 단연 역사적 예수였습니다. 신비화된 예수, 신화화된 예수, 교리의 두터운 각질에 싸여 있던 예수를 끄집어내서 우리와 같은 문제를 안고 고민하면서 살다가 간 인간 예수를 만나는 체험은 실로 귀중한 일이며, 이것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특히 맹목적인 예수 숭배에 길들여진 한국 교회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임에 틀림없습니다. 더군다나 요즈음처럼 온 세상이 그야말로 예수 없는 성탄을 즐기고 있는 때, 예수는 온데 간데 없고 자기들끼리 성탄 분위기에 들떠 축제를 벌이는 때, 인간 예수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신 존재였나를 생생하게 상기하는 일은 실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신앙의 그리스도가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서 현재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지금 나의 삶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가 어떤 존재였나, 얼마나 훌륭한 존재였나 하는 질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예수는 어떻게 해서 예수가 되었느냐, 다시 말해 예수를 예수답게 만든 힘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며, 어떻게 해야 우리도 예수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냐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예수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귀가 닳게 들어도, 그것은 남의 예기일 뿐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삶을 논할 때 성령의 힘을 빌어서 그의 능력과 지혜를 설명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그가 처음부터 아예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겠습니까?
오늘 예수 탄생을 축하하며 기리는 크리스마스 예배에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2000년 전 저 먼 땅 팔레스타인에서 한 유태인 남성이 탄생한 사건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라는 점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2000년 전의 예수 사건이 지금 나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와 예수 사이에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져 그의 탄생이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역사적 예수, 유태인 예수는 오직 한 번만 이 땅 위에 임하셨고 오직 한 지역, 한 시대만을 살다가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나에게도 탄생하고 여러분에게도 탄생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 아니 기독교를 모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탄생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우리 영혼의 사건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우리 한국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저 먼 땅 팔레스타인에서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 나의 밖에서 일어난 외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영혼 안의 내적 사건입니다. 중세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라 부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고 탄생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우리 영혼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마태 복음서에 있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와 성령이 함께 활동해야만 가능합니다. 동정녀와 성령 가운데 하나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둘은 뗄 레야 뗄 수 없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순결한 동정녀에게만 임하고, 동정녀 마리아와 같이 순수한 영혼만이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동정녀 마리아가 되겠습니까? 니고데모가 한 질문처럼, 내가 나이가 50인데 어머니 배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나란 말입니까? 남자가 어떻게 여자가 되며, 결혼한 여자가 어떻게 순결한 처녀가 되겠습니까? 또 처녀들이라 해도 모두 마리아와 같은 순결한 영혼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동정녀 마리아가 되는 것은 육신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니고데모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했듯이, 우리도 성령의 도움으로 영적으로 순결한 처녀가 되어야만 예수를 잉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결하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깨끗하고 비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들의 마음이 비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주장을 떨쳐버리고 세상적 욕망을 비워야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수 있는 순결한 영혼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나의 의지, 나의 뜻, 나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 자리 잡으며, 하나님의 영이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저 멀리 높이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와는 처음부터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성령에 의해 동정녀의 몸에 기적적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것은 오직 예수에게만 일어났던 기적적 사건으로서 나와는 무관한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역사적 진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동정녀 탄생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며, 일어나야만 하는 보편적 사건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예수에게만 일어났던 어떤 기적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마태복음서와 사도신경의 이야기는 한 특별한 존재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를 위한 원형이 되는 이야기로서, 우리 모두를 위한 영적 진리, 보편적 진리를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하여야 할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며, 우리 모두의 영혼 안에 탄생하여야 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는 처음부터 예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진짜 탄생 이야기, 다시 말해 예수가 예수답게 되는 진짜 이야기는 말구유 이야기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오늘 읽은 세례자 요한과 광야의 예수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은 무척 의아해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예배인데 동방박사와 말구유, 천사들과 목자들은 어디로 가버리고 삭막한 광야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고요.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는 진짜 이야기는 오늘 읽은 세례자 요한과 광야의 예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별 차이가 없이 태어나셨던 예수, 사실 너무나도 별 볼일 없이 태어나셔서 그 고향도 족보도 모르게 태어나셨던 예수는 광야에서 요한을 만남으로 해서 그의 삶에 일대 전환을 체험하게 되었고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무슨 고민이 있어서 광야로 나아가서 요한의 민족 회개운동에 투신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가 광야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셨는지도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다른 기록들을 참조해 볼 때, 아마도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기도, 금식. 묵상에 전념하시면서 자신에게 일어날 삶의 일대 전환을 위한 영적 준비를 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다가 요한을 만나 극적인 회개의 경험과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자각하시고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빠 같은 은총의 존재로 인식해야 된다는 진리를 깨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6년간의 고행과 구도 생활 끝에 도를 깨친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낳은 진짜 처녀의 몸은 마리아가 아니라 텅 빈 광야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는 아무 것도 바랄 것 없고 의지할 것 없는 텅 빈 광야를 방황하면서 새로운 삶을 위해 자신을 철저히 비우는 훈련을 쌓았을 것이며 성령의 체험을 통해 확신과 권능을 얻으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동정녀나 광야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동정녀의 순결, 광야의 고적함은 마음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영적 공간입니다. 우리 마음을 비우는 일 외에 우리에게는 광야의 고적함도 없고 동정녀의 순수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마음을 철저히 비우고 또 비워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영혼의 광야, 우리 영혼의 동정녀에게서 탄생하도록 해야 하는 일입니다.
종교로서 기독교의 가장 큰 단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너무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우리와 격절된 존재로 타자화하며 마치 하나의 물체처럼 사물화 합니다. 그리스도를 타자로서 경배하고 찬양만 하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imitatio Christi) 노력은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할지는 몰라도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탄생시키고 키우는 일은 등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물론이요, 전 세계 기독교는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타자로 간주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찬양만 하던 맹목적 기독교에서 우리 모두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아들을 탄생시키는 영성의 기독교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길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없는 맹목적인 그리스도 찬양은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타자로서 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부처의 성품 즉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내 안에서 이 부처의 성품을 자각하고 기르면 누구나 부처가 됩니다. 그것이 見性이고 수도입니다. 기독교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각하고 실현하면 누구나 그리스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완전한 모상 그대로인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 영혼 안에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기독교나 불교나 다 시끄러운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탄절이나 불탄일이나 모두 요란한 경축행사로 시끄럽게 되었습니다. 내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수만 개의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하고 축하하는 것보다도 한 영혼에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고 소리만 요란한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요즈음 우리 종교계에 희망이 보이는 것은 아직 지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불교와 기독교간에 상호 이해와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금년 크리스마스에는 조계종 본부에서 안국동 거리에 성탄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걸겠다고 하니, 정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 현수막에는 아기 부처가 아기 예수를 환영하는 모습을 담을 것이라고 하니 아이디어가 참으로 좋습니다. 소 때를 몰고 방북하는 정주영씨의 아이디어만큼 참신한 것 같습니다. 수천 년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고 늙어빠진 퇴물과 같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두 종교, 제도화되고 교조화되고 경직되고 때묻은 두 종교의 병폐를 치료하는 길은 어쩌면 천진무구한 아기부처와 아기예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것이 아닌가 해석해봅니다. 사실, 탐욕과 거짓이 난무하는 인간 세계에서 아기예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아기부처뿐일 것입니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성품을 마음에 품고 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는 것 자체가 그 증거이고, 우리가 감히 그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우리 안에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낙심하고 때로는 절망하는 것도 결국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우리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자신 있고 대담하게 자기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 사도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욕은 내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로마 7:18-19)라고 고백하면서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입니까?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 주겠습니까?"(로마 7:24) 라고 탄식합니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모습은 우리의 위로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작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안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를 키워 가는 일입니다. 세상의 욕망이라는 가시덤불로 뒤덮여 질식하지 않도록 아기 예수를 보호하고, 우리에게 뿌려진 생명의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탐욕으로 고사되지 않도록 가꾸고 키워서 마침내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성찰하는 마음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도는 도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며 마음공부는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날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는 마음공부를 해서 우리 안에 잉태한 생명의 씨앗을 가꾸고 키워가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항시 해맑은 시로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이해인 수녀의 최근 시집가운데서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라는 시로써 기도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그리스도를 모실 빈집이 되고 싶은 마음,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해 아기 예수가 누울 빈 말구유처럼 자기 마음을 비우려는 기도인 것 같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예수를 수십 년 믿어도 이 간단하면서도 근본적인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을 저 먼 곳에 두고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 위에 군림하는 군주 같은 존재로 여깁니다. 우리는 말구유와 같이 낮은 데로 임하는 하나님,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지, 힘과 권위의 하나님에게서는 전혀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힘과 권위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릎은 꿇을지 모르나 마음을 열지는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의 자유와 자율을 억압하고 숭배를 강요하는 독재자 같은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합니다. 프로이드가 증언하는 대로 현대인은 정신적으로 아버지를 죽인 자들입니다. 아버지를 죽이고서 형제들끼리 부둥켜안고 약간의 죄의식을 않고 사는 자들입니다. 현대인들은 어머니 하나님, 자궁과 같이 자식을 감싸는 하나님은 믿어도, 가부장적 권위의 하나님은 이미 청산해 버린지 오래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를 도외시하고 이러한 가부장적 권위의 하나님, 군림하고 명령하는 하나님 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는 이러한 왜곡된 하나님 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면서도 예수가 보여주신 하나님의 인식에는 이르지 않고 스스로 만든 억압, 권위, 명령, 징벌, 강요, 심판, 공포의 하나님 상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이들에게 있어서 자유보다는 억압, 사랑보다는 두려움, 은총보다는 단죄, 용서보다는 심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인식하면 우리도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고 이러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또 다시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만만하게 우리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무서운 심판 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 이 면을 무시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크리스마스에는 자기를 낮추어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는 때이며, 우리에게 먼저 마음을 푸시고 악수를 청하시는 하나님, 먼저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에게서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인데도 왜인지 모르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고 예수의 삶과 죽음, 그의 행적과 말씀을 아무리 상고하고 되새겨도 그 때뿐이지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나에게서 멀어지고 예수는 나와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따지고 보면,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나와는 무관한 먼 곳, 먼 옛날의 인물이며,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리 한국인들하고는 전혀 다른 삶의 환경 속에서 살다가 가신 분입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유일회적이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보편적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라 해도 그것은 진정으로 나의 사건, 나에게 일어난 사건은 아닙니다. 예수 탄생이라는 엄청난 사건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IMF라는 사건은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재앙이기에 나의 사건이 되지만 - 그것도 내가 실직을 당하여 거리에 나 앉기 전에는 관념적이지만 - 먼 옛날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예수 사건은 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건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무리 위대한 삶을 사셨다 해도, 내가 예수처럼 되지 않는 한 그것은 나의 얘기는 아니며 그저 남의 얘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는 본받을 존재는 될지언정 나를 구원해주는 구주는 되지 못합니다. 아니, 예수가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나는 작아지고 초라해지며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되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식만 커질 뿐입니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 이야기가 가지는 신앙적 한계입니다. 역사적 예수는 결코 나를 구원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가 수백 번 세상에 태어나신다 해도 나의 삶을 바꾸어 놓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힘을 얻어 나도 예수처럼 살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기며 예수와 나와의 간격이 좁아지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교회의 화두는 단연 역사적 예수였습니다. 신비화된 예수, 신화화된 예수, 교리의 두터운 각질에 싸여 있던 예수를 끄집어내서 우리와 같은 문제를 안고 고민하면서 살다가 간 인간 예수를 만나는 체험은 실로 귀중한 일이며, 이것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특히 맹목적인 예수 숭배에 길들여진 한국 교회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임에 틀림없습니다. 더군다나 요즈음처럼 온 세상이 그야말로 예수 없는 성탄을 즐기고 있는 때, 예수는 온데 간데 없고 자기들끼리 성탄 분위기에 들떠 축제를 벌이는 때, 인간 예수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신 존재였나를 생생하게 상기하는 일은 실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신앙의 그리스도가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서 현재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지금 나의 삶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가 어떤 존재였나, 얼마나 훌륭한 존재였나 하는 질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예수는 어떻게 해서 예수가 되었느냐, 다시 말해 예수를 예수답게 만든 힘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며, 어떻게 해야 우리도 예수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냐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예수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귀가 닳게 들어도, 그것은 남의 예기일 뿐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삶을 논할 때 성령의 힘을 빌어서 그의 능력과 지혜를 설명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그가 처음부터 아예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겠습니까?
오늘 예수 탄생을 축하하며 기리는 크리스마스 예배에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2000년 전 저 먼 땅 팔레스타인에서 한 유태인 남성이 탄생한 사건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라는 점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2000년 전의 예수 사건이 지금 나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와 예수 사이에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져 그의 탄생이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역사적 예수, 유태인 예수는 오직 한 번만 이 땅 위에 임하셨고 오직 한 지역, 한 시대만을 살다가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나에게도 탄생하고 여러분에게도 탄생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 아니 기독교를 모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탄생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우리 영혼의 사건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우리 한국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저 먼 땅 팔레스타인에서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 나의 밖에서 일어난 외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영혼 안의 내적 사건입니다. 중세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라 부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고 탄생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우리 영혼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마태 복음서에 있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와 성령이 함께 활동해야만 가능합니다. 동정녀와 성령 가운데 하나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둘은 뗄 레야 뗄 수 없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순결한 동정녀에게만 임하고, 동정녀 마리아와 같이 순수한 영혼만이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동정녀 마리아가 되겠습니까? 니고데모가 한 질문처럼, 내가 나이가 50인데 어머니 배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나란 말입니까? 남자가 어떻게 여자가 되며, 결혼한 여자가 어떻게 순결한 처녀가 되겠습니까? 또 처녀들이라 해도 모두 마리아와 같은 순결한 영혼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동정녀 마리아가 되는 것은 육신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니고데모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했듯이, 우리도 성령의 도움으로 영적으로 순결한 처녀가 되어야만 예수를 잉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결하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깨끗하고 비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들의 마음이 비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주장을 떨쳐버리고 세상적 욕망을 비워야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수 있는 순결한 영혼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나의 의지, 나의 뜻, 나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 자리 잡으며, 하나님의 영이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저 멀리 높이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와는 처음부터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성령에 의해 동정녀의 몸에 기적적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것은 오직 예수에게만 일어났던 기적적 사건으로서 나와는 무관한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역사적 진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동정녀 탄생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며, 일어나야만 하는 보편적 사건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예수에게만 일어났던 어떤 기적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마태복음서와 사도신경의 이야기는 한 특별한 존재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를 위한 원형이 되는 이야기로서, 우리 모두를 위한 영적 진리, 보편적 진리를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하여야 할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며, 우리 모두의 영혼 안에 탄생하여야 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는 처음부터 예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진짜 탄생 이야기, 다시 말해 예수가 예수답게 되는 진짜 이야기는 말구유 이야기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오늘 읽은 세례자 요한과 광야의 예수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은 무척 의아해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예배인데 동방박사와 말구유, 천사들과 목자들은 어디로 가버리고 삭막한 광야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고요.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는 진짜 이야기는 오늘 읽은 세례자 요한과 광야의 예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별 차이가 없이 태어나셨던 예수, 사실 너무나도 별 볼일 없이 태어나셔서 그 고향도 족보도 모르게 태어나셨던 예수는 광야에서 요한을 만남으로 해서 그의 삶에 일대 전환을 체험하게 되었고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무슨 고민이 있어서 광야로 나아가서 요한의 민족 회개운동에 투신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가 광야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셨는지도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다른 기록들을 참조해 볼 때, 아마도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기도, 금식. 묵상에 전념하시면서 자신에게 일어날 삶의 일대 전환을 위한 영적 준비를 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다가 요한을 만나 극적인 회개의 경험과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자각하시고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빠 같은 은총의 존재로 인식해야 된다는 진리를 깨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6년간의 고행과 구도 생활 끝에 도를 깨친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낳은 진짜 처녀의 몸은 마리아가 아니라 텅 빈 광야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는 아무 것도 바랄 것 없고 의지할 것 없는 텅 빈 광야를 방황하면서 새로운 삶을 위해 자신을 철저히 비우는 훈련을 쌓았을 것이며 성령의 체험을 통해 확신과 권능을 얻으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동정녀나 광야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동정녀의 순결, 광야의 고적함은 마음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영적 공간입니다. 우리 마음을 비우는 일 외에 우리에게는 광야의 고적함도 없고 동정녀의 순수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마음을 철저히 비우고 또 비워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영혼의 광야, 우리 영혼의 동정녀에게서 탄생하도록 해야 하는 일입니다.
종교로서 기독교의 가장 큰 단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너무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우리와 격절된 존재로 타자화하며 마치 하나의 물체처럼 사물화 합니다. 그리스도를 타자로서 경배하고 찬양만 하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imitatio Christi) 노력은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할지는 몰라도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탄생시키고 키우는 일은 등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물론이요, 전 세계 기독교는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타자로 간주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찬양만 하던 맹목적 기독교에서 우리 모두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아들을 탄생시키는 영성의 기독교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길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없는 맹목적인 그리스도 찬양은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타자로서 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부처의 성품 즉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내 안에서 이 부처의 성품을 자각하고 기르면 누구나 부처가 됩니다. 그것이 見性이고 수도입니다. 기독교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각하고 실현하면 누구나 그리스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완전한 모상 그대로인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 영혼 안에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기독교나 불교나 다 시끄러운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탄절이나 불탄일이나 모두 요란한 경축행사로 시끄럽게 되었습니다. 내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수만 개의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하고 축하하는 것보다도 한 영혼에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고 소리만 요란한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요즈음 우리 종교계에 희망이 보이는 것은 아직 지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불교와 기독교간에 상호 이해와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금년 크리스마스에는 조계종 본부에서 안국동 거리에 성탄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걸겠다고 하니, 정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 현수막에는 아기 부처가 아기 예수를 환영하는 모습을 담을 것이라고 하니 아이디어가 참으로 좋습니다. 소 때를 몰고 방북하는 정주영씨의 아이디어만큼 참신한 것 같습니다. 수천 년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고 늙어빠진 퇴물과 같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두 종교, 제도화되고 교조화되고 경직되고 때묻은 두 종교의 병폐를 치료하는 길은 어쩌면 천진무구한 아기부처와 아기예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것이 아닌가 해석해봅니다. 사실, 탐욕과 거짓이 난무하는 인간 세계에서 아기예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아기부처뿐일 것입니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성품을 마음에 품고 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는 것 자체가 그 증거이고, 우리가 감히 그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우리 안에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낙심하고 때로는 절망하는 것도 결국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우리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자신 있고 대담하게 자기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 사도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욕은 내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로마 7:18-19)라고 고백하면서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입니까?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 주겠습니까?"(로마 7:24) 라고 탄식합니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모습은 우리의 위로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작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안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를 키워 가는 일입니다. 세상의 욕망이라는 가시덤불로 뒤덮여 질식하지 않도록 아기 예수를 보호하고, 우리에게 뿌려진 생명의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탐욕으로 고사되지 않도록 가꾸고 키워서 마침내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성찰하는 마음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도는 도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며 마음공부는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날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는 마음공부를 해서 우리 안에 잉태한 생명의 씨앗을 가꾸고 키워가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항시 해맑은 시로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이해인 수녀의 최근 시집가운데서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라는 시로써 기도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그리스도를 모실 빈집이 되고 싶은 마음,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해 아기 예수가 누울 빈 말구유처럼 자기 마음을 비우려는 기도인 것 같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