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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방법으로서의 예수 스캔들

마태복음 천세영............... 조회 수 1931 추천 수 0 2008.07.11 13: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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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1:2-6 
설교자 : 천세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0.3.12 주일설교 

1. 우리는 늘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갈증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그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자신의 애인이 진짜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짐짓 사랑을 하지 않는 것처럼 괜히 짜증도 내고 일부러 다른 여자를 내놓고 만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사기극을 벌여 놓고는 자기 애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완상 형제님께서 즐겨 쓰는 결혼 주례사 주제라고 하지요) 자기에게 사랑을 고백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정말 짓궂은 연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들을 내 삶에서 또 식구들과 친구들의 삶에서 또 영화와 연속극에서 늘 대합니다. 그리고 가슴아프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진실한 사랑을 오해하고 영영 못 만나고 마는 불행한 일도 직접 겪기도 하고 또 보기도 합니다. 여러분 잠깐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혹시 그런 오해 때문에 참 사랑을 떠나 보낸 적은 없으십니까? 혹시 지금 그런 위기에 빠져 있다면 정말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얘기는 예수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해 쓴 교육방법이 사랑에 근거하고 있음을 좀더 쉽게 생각하고 풀어보기 위해 만들어낸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증언하고자 하는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이니 필리아적 사랑이니 혹은 플라토닉 러브니 하는 약간 고상한 냄새를 풍기는 그런 사랑보다는 에로스로서의 사랑을 말하고자 합니다. 에로스 하면 생각나는 것들은 아마 에로 영화 혹은 육체적 사랑 정도로 아가페 같은 것들에 비하면 어딘지 천하게 들리는 생각들입니다.
사실 에로스는 소크라테스가 제일 좋아했던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편 고르기아스(Gorgias)에서 자신이 알키비아데스와 철학이라는 두 애인에게 사랑에 푹 빠졌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의 사랑은 에로스이지요.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게 된 죄목의 하나에는 그리스 청년들을 현혹시켰다는 죄가 끼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철학에로 초대하였는데 초대하는 방법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소크라테스가 청년들과 동성애를 하였다는 야담까지 있었습니다.
도대체 소크라테스는 왜 굳이 에로스라는 말로 지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려고 했을까요? 대개 그 이유는 지식과 철학에 대한 열정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던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에는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에로스의 탄생 신화가 나옵니다. 에로스는 풍부의 신 포로스와 결핍의 신 페니아 사이에 난 자식이라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에로스는 겉모습은 한없이 추하고 무식하지만 그 안에는 지고지순의 미와 지식을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항상 아름다움과 유식함을 갈구하지만 늘 그것들을 잡았다하면 이내 놓쳐 버리는 안타까움을 안고 살아야만 합니다. 상사병에 걸려있는 연인을 생각하면 딱 맞을 겁니다. 소크라테스를 지적으로 사랑했던 알키비아데스는 이 욕망을 ‘마치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힌 광신자처럼 가슴이 뛰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라 하였고 또, ‘뱀에 물린 것보다 더 지독한 고통’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불행한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왔는데도 사랑의 고백을 못 털어놓습니다. 고백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 고백은 자신의 온 삶을 던진 진실한 고백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연인은 놀랍게도 사랑의 고백이 거짓인지 참인지를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 적어도 두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함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 하나는 사랑을 구하는 연인의 에로스적 열정과 고통이 있어야 하겠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온 몸과 삶을 던져서라도 얻고 싶은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조건이 갖추어지기가 그리 흔하고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은 그런 사랑의 고통과 기쁨을 다 얻은 경험을 소유했기를 바랍니다.

2. 소크라테스는 노예소년에게 어려운 기하학을 가르쳐주면서 바로 이러한 에로스를 실천했다고 합니다. 소년에게 기하학은 아름다운 연인으로 비유됩니다. 과연 노예소년은 이쁜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기하학을 연인 삼아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기하학은 전혀 섹시하지도 않고 돈이 많지도 않고 마음이 곱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의 특유한 교육방법을 동원하여 마침내 노예소년이 기하학을 사랑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노예소년은 기하학을 훌륭하게 배웠고 마침내는 靑出於藍하여 소크라테스보다 더 훌륭한 기하학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노예소년의 그 후의 얘기는 대화편에 나오지는 않아서 상상해보았습니다. 또 이 대목에서는 지난 수련회에서 한인철 목사님이 읽어준 요한복음의 구절도 생각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예수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다는 얘기 말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도 그런 말 아니겠어요?
소크라테스가 이 때 사용한 교육방법을 흔히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아이를 출산하는 일이 철학과 기하학이라는 연인이라면 산모는 노예 소년인 셈입니다. 산파는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아닙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조연입니다. 아카데미조연상이 있는 까닭은 주연 못지 않게 조연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훌륭한 조연 산파는 어느 새인가 주인공의 한쪽인 해산과 기하학 그 자체로 산모에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산파는 멋진 한판의 사기극을 벌리기 시작합니다. 우선 산파는 자꾸만 산모에게 별 일 아니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자기 같이 못생기고 힘없고 가냘픈 사람도 쉽게 한 일이라고 안심을 시킵니다. 잠깐 산모는 속고 맙니다. 그래 그 정도쯤이야! 애 낳는 일이 별거인가 합니다. 일단 산모가 안심을 하고 나면 산파는 그렇게 낳은 아이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를 슬쩍슬쩍 흘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귀가 솔깃해지고 급기야는 애를 낳고야 말겠다는 열정에 휩싸입니다. 산파는 이렇게 정작 자기는 애 낳는 일에 직접적인 참여는 않으면서도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냅니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노예 소년에게 다가가기로 마음을 먹고 한낮 무지랭이 못생긴 배불뚝이에 불과한 촌로로 자신을 위장합니다. 그래서 노예소년도 소크라테스에게 차츰차츰 친근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점차 소크라테스에 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면 소크라테스 안에 감추인 보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자기도 그런 보물쯤 가질 수 있으려니, 별거 아니구나, 소크라테스 같은 보잘것없는 노인도 하는데 뭐, 하면서 용기를 냅니다. 그러나 어디 그게 그렇게 쉽습니까? 한두 번 해보다 ‘에이, 관두고 말지 뭐.....’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데 가만 놓아두지를 않지요. 또 유혹을 해댑니다. 에로스의 탄생 신화를 다시 기억해 보세요. 천성적으로 결핍과 풍요의 한 중간에서 끝없는 갈증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증과 긴장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이 장면에서의 핵심이지요.

3.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교수법을 만들어냈고 실천했습니다. 그 이후 많은 선생님들이 이 방법을 따르려고 합니다. 교육학의 최고 원전이지요. 물론 선생님들만의 교범이 아닙니다. 연인들도 그러하고 자식을 기르는 부모도 그러합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관계와 더 나아가서는 만물과의 관계도 그러할 것입니다. 거지 왕자의 얘기를 생각해보십시오. 거지로 변한 왕자는 궁궐 밖 세상에서 이쁜 소녀를 만납니다. 그러나 딜레마는 그 소녀와 사랑을 맺으려면 거지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소녀가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거지 왕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후 자기가 사랑한 소년이 거지가 아닌 왕자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자기에게 너무 벅찬 상대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왕자가 자신같이 천한 사람을 희롱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백 번 양보해 생각해도 잘해야 동정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아! 이 거지 왕자는 어떻게 해야 이 소녀로부터 사랑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그나마 소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다해도 그것이 진실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혹 자기가 가진 권력과 명예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마치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오병이어의 마술로 먹여준 떡과 고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소녀의 입장도 생각해봅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은 일이 내게 벌어졌는데 정말로 저 왕자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나는 정말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닌 왕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과연 손을 내밀면 영영토록 왕자님께서는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아아! 나는 어떻게 그것을 확인한다는 말인가?

4. 이제 이쯤 했으면 우리의 주 예수님의 얘기로 돌아가도 되겠지요.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가 자신이 고대하고 있던 바로 그 사람, 바로 그 구세주인가를 물었지요. 예수는 대답합니다. ‘나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여기서 걸려 넘어진다는 것은 개역 성경에는 실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실족 또는 걸려 넘어진다는 말은 스캔들의 번역어이며, 스캔들의 히브리 원어는 스캔들롱입니다. 스캔들롱은 돌뿌리라는 뜻인데, 이는 길 가운데 놓여 있는 걸려 넘어지기 쉬운 길 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골길에 질경이 풀을 묶어 놓고는 아이들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난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왜 그 결초보은이라는 고사성어 생각나지요). 못된 스캔들이었던 셈이군요. 스캔들은 흔히 매우 곤란한 구설수, 혹은 남을 곤궁에 빠뜨리는 추문을 말합니다. 작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그러니까 누군든지 스캔들에 연루되면 실족하고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하나의 스캔들이었습니다. 예수가 구세주인 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것입니다. 예수는 너희가 내가 행한 여러 이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실족한다면 너희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복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스캔들로 다가온 얘기는 복음서 이곳 저곳에서 나옵니다. 사실은 복음서 그 자체가 모두 예수 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 13장 55-57절에서 보면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수군대는 얘기가 있지요. “이 사람이 누구냐,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데 이 사람의 이 모든 능력이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이냐?” 하면서 예수를 배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배척했다는 말도 걸려 넘어졌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마치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당차게 자신의 사역을 계속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스캔들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가장 크게 넘어진 사람들은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레위인들이며 그 다음은 유대인들일 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도 지금 그 스캔들에 쌓여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새길 식구들이 요즈음 역사적 예수 공부에 작은 열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 열병은 더욱 더 큰 스캔들로 발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그저 평범한 목수였고 때로는 술주정뱅이 먹보였고 거리의 부랑아들과 어울려 다니는 불량청년이기도 했습니다.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라니요? 그래도 우리는 교회를 다니니까 적어도 의식의 세계에서는 믿고 있지만 프로이드가 밝혀낸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믿고 있을까요? 믿고 있는 의식은 수면 위에 떠 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정작 무의식의 세계가 빙산의 본체입니다. 그러니 무의식에서조차 그러니까 꿈에서 잠꼬대를 할 만큼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교회 안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공부하는 역사적 예수를 들려주면 ‘그러면 그렇지!’ 하고 무릎을 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두 예수와 더불어 대 사기단이 되고 말겠지요? 실제로 저는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교회를 가정의 평화를 위해 다니신다는 선배 교수님께서 그랬습니다. “그 책 나도 읽었는데, 만약 교회가 그렇게 가르쳤다면 기독교가 이만큼 컷겠어?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해서 사기를 쳐야할 걸!” 했습니다.

5. 예수는 왜 이렇게 골치 아픈 스캔들을 우리 앞에 감추어 놓았을까요? 교우님들께서는 눈치를 채셨겠지요? 제가 앞에서 왜 장황하게 소크라테스의 사기극과 에로스의 불행한 운명을 얘기했는지 말입니다. 예수는 분명 저희에게는 엄청난 패러독스입니다. 예수는 한편으로 우리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얼굴을 직접 보면 우리가 죽어야만 하는 절대자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와 똑 같은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훌륭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친한 친구이며 종이기까지 합니다. 우리와 같이 술 취하고 노래하고 노동하는 인간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처럼 죄를 지었다는 얘기는 없어서 저는 약간 의문입니다. 어쩌면 예수도 우리처럼 죄도 짓지 않았을까요? 이건 정말 불경의 극치가 될지도 모르고 죽어 마땅할 죄를 제가 지금 범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감히 그런 상상까지 해봅니다.
복음서에서 증언되는 예수의 생애를 생각해봅시다. 영광된, 사실은 영광될 것도 없는 탄생 설화가 잠깐 나오고 한참 지나서 서른 지난 청년 예수, 그리고 겨우 3년간의 공생애만 나옵니다. 그 방황의 어린시절과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어떻게 보냈을까 궁금해집니다. 역사적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혹시 복음서의 공백기를 연구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젊은 시절 온갖 못된 짓은 다 하고 돌아다닌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드디어 야곱이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여 환도뼈가 빠지는 아픔을 겪고 새 사람이 되었듯이 예수도 세례자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을 때 젊은 날의 방황을 겪고 무언가 새로운 빛을 보고 탈출구를 찾은 것은 아닐까요? 공생애의 첫 번째 일이 광야에서의 세 가지 시험으로 시작되는데 그 안에는 어쩌면 지난 30년 세월이 압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돈도 찾아보았고 권력도 찾아보았고 명예도 찾아보았는데도 그곳에 구원이 없고 하나님이 없었던 것이지요. 재미나게도 얼마 전 한완상 형제님께서 증언하였듯이 여자로부터의 시험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하는 일은 그리 죄 되는 일은 아닌가 봅니다. 왜 그 불륜과 로맨스에는 본질적 차이는 없고 입장의 차이만 있다잖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예수는 여자 문제만은 깨끗했던 모양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왕 모범을 보이시려면 그 분야에서도 멋진 교훈을 저희에게 남겼어야 마땅한데 말입니다. 그래야 같이 한판 어울려 흐드러지게 놀아볼 친구로 삼을 수 있을텐데......

6.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는 어느 순간 갑자기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영광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물위를 걷는가 하면 38년 된 중풍 환자를 일으켜 세우지요. 간음한 여자를 훌륭한 변론으로 구하는가하면 자만에 빠진 부자 청년에게 뼛속을 후비는 복음으로 회심을 요구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요 성경에 쓰여진 말씀대로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는 그냥 우리와 같은 수준의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이 친구가 발을 닦아준다기에 아, 그 친구 기특하구만, 튀는 데가 있어, 그랬더니 그게 아니었구만. 그런 깨달음은 나도 그리 해보려니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린 다음이었습니다. 젊은 날의 그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인지 큰 변화를 겪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순간순간 놀라 자빠지게 합니다. 우선 먼저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마술사 같은 기적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는 우리에게 가끔 희망을 줍니다.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도 매우 쉬워 보이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끝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번 해보려고 했습니다. 새벽기도회도 참석하고 십일조도 내고 지나가는 거지에게 동전닢 구제도 해보았고 크리스마스 때면 고아원과 장애인 숙소를 찾아가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희망을 꺽지 않고 예수를 따라 다녀보기로 했습니다. 최소한 그가 하늘에 축사하고 부풀려 놓은 떡과 고기 부스러기만 해도 나에게는 충분했기 때문이지요. 뭔가 찜찜한 구석은 있지만 그렇게 따라 다녀보기로 했습니다.

7. 그런데 정작 밤길은 캄캄해지고 도처에 돌뿌리들은 숭숭 나와있었습니다. 스캔들 더미가 눈앞에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그 친구 예수가 어느 날 갑자기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처에서 ‘거봐라, 그 친구가 밤낮 거짓말하고 희한한 마술 같은 것을 사람들을 모이게 하더니만 결국 그리 되고 말았지’ 하며 놀려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믿었던 친구 유다가 꾀가 유달리 많다 싶더니만 냉큼 일러바치고는 거액의 상금을 받아 챙겼다는 소문도 들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친했다고 한 베드로도 아예 모른다고 딱 잡아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무언가 마지막 한 판이 남아있을테지. 영화 스팅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멋진 포카드가 잡히겠지 하며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저 그렇게 맥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얘기를 들으니 재미났습니다.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고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합니다. 시체가 없어지고 말았으니 그런 추측도 가능하다 싶었습니다.

8. 다시 긴 외로움이 찾아왔습니다. 도대체 그 친구는 무엇이었을까? 귀신에 홀려 산 삼년 같기도 하고 한 낮의 꿈같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진정으로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했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이제 사실을 말하자면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하는 편이 옳습니다. 물론 형식론적으로 말해서는 얼마든지 그 친구의 기억을 싹 없애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꿀맛을 본 벌이 계속해서 꽃을 찾듯이 그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해도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드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 옳습니다. 언젠가 길희성 형제님께서 말씀을 증거하면서 이미 우리는 다시 가지 못할 길을 건너오고야 말았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탓을 하려면 운명이나 탓해야 할까요? 이미 나는 그 사람과의 사랑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어쩌다 그런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지요.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언제부터 그리 되었는가를...... 몇 가지 환상적인 기적 때문이었는가? 뭐 그런 거라면 세상에 널려있는 것이 마술사들이요, 또 요즘 같이 돈만 있다면 얼마든 얻을 수 있는 것인데, 또 내가 그런 속된 것들을 사랑할 수는 없지 않는가?

9. 오늘 제가 교우 여러분들과 정작 얘기하고픈 것은 바로 이 비밀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무엇에 반해서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런 스캔들에 빠져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노예소년과 알키비아데스를 홀렸던 것과 예수가 우리를 홀린 것은 어딘지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소크라테스는 그래도 책에라도 쓰여 있는 지식으로 홀린 데 비해, 예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양식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 홀렸으니 예수가 훨씬 어려운 일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생명의 양식은 처음부터 생명의 양식으로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낮추어 산파가 산모를 안심시키듯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간접전달 방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이나 수학과 같은 지식을 가르칠 때 글과 말을 가지고 가르치고 시험보고 하는 방식을 직접전달 방식이라 하는데 비해, 학생들이 직접 해보고 스스로 문제를 풀어볼 수 있도록 교사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도와주는 방식을 간접전달 방식이라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이러한 교수법을 지식의 구조를 가르치는 방법이라고 하기도 하고 발견학습법(huristic method)이라고도 합니다. 흔히 교사가 솔선 수범해야 한다는 말, 학생 중심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직접 답을 가르쳐 주지 않고도 학생이 스스로 알아서 답을 찾게 하는 방법입니다. 학생은 자기도 모르게 어느 새인가 진리를 터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위기를 겪으면서도 진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삭지 않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방법론에 관한 한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예수는 가장 어려운 삶의 진리를 가장 쉽게 가르쳐 주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몸으로 보여주었고 급기야는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에 예수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말로 가르친 것이 아니고 몸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자신이 가르친 방식으로 증거하라고 합니다. 예수 따르미의 생활 방식을 직접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고 또 어쩌면 그보다 더 훌륭한 모습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바랄 것입니다. 사실상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테레사 수녀와 간디가 그 예이고 부처님과 공자님이 그 예일 것입니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새길 교우 여러분이 모두 그런 분들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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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누가복음 껍데기 신앙은 가라 : 위대한 대화자 예수 눅10:26;36  한완상 형제  2008-07-09 1924
1119 미가 사람 냄새 미6:6-8  유승원 교수  2008-07-09 2272
1118 마태복음 예수님의 뜻 마25:35-40  박옥진 자매  2008-07-09 3466
1117 요한계시 바벨론의 멸망 계18장  강종수 목사  2008-07-06 2120
1116 호세아 묵은 땅을 기경하라 호10:12  김남준 목사  2008-07-01 3875
1115 누가복음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눅19:46  김남준 목사  2008-07-01 2467
1114 마가복음 그리스도의 탄생 막1:9-15  길희성 형제  2008-06-30 1815
1113 요한복음 나누어 갖는 힘 요5:6-9  조혜자 자매  2008-06-30 1627
1112 빌립보서 예수는 나에게 누구였던가 빌2:6-11  한완상 형제  2008-06-30 2055
1111 예레미야 하나님의 뜻과 자원봉사 렘9:23-24  이강현 형제  2008-06-30 2438
1110 골로새서 복음의 소망에서 골1:15-23  성해용 목사  2008-06-30 2009
1109 말라기 하나님의 이름 말4:2  최성규 목사  2008-06-22 2741
1108 스가랴 여호와의 집을 건축하라 슥1:16-17  한태완 목사  2007-11-10 2172
1107 하박국 희망-하나님의 인간사 개입의 가능성 합3:17-19  최만자 원장  2004-02-12 2965
1106 하박국 없을지라도 합3:17-19  이재철 목사  2008-12-05 3008
1105 하박국 감사의 근거 합3:17-19  강종수 목사  2008-11-16 2531
1104 미가 삭개오 집에 임한 구원 미19:8-10  김경재 목사  2008-04-02 2139
1103 미가 미3:5-8  장경동 목사  2008-03-10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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