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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삽시다

요한복음 유해룡 목사............... 조회 수 2146 추천 수 0 2008.07.16 21:5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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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3:1-17 
설교자 : 유해룡 목사 
참고 : 새길교회 2000.8.20 주일설교 
오늘의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1. 주님은 이 마지막 순간에 왜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
2. 우리는 어떻게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3. 섬김의 참 목적은 무엇인가?

1. 주님은 이 마지막 순간에 왜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
이러한 질문이 나오게 된 것은 본문 1절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알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무슨 말을 한다면 그것은 유언이 되는 것이요. 이 때 무슨 행동을 한다면 그것 역시 유언적인 행동이 됩니다.
저 자신 예수님의 이러한 유언적인 행동을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이라면 그 동안 털어놓지 못한 보다 심오하고 비밀스런 말씀이나 진리를 털어놓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 동안 감추어 두셨던 하늘나라에 대한 더 분명한 비밀을 드러내시든지, 혹은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 간다든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제자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므로 잘 준비해야 한다든지 등의 좀더 그럴듯한 메시지를 남길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평범하고 심지어는 진부하게 느끼기까지 하는 이런 행동을 그런데 이 중대한 순간에 하시다니!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이 말씀이 조금씩 깨달아 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얼마나 아느냐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면서 사는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 우리는 배우고 또 배웁니까? 왜 우리는 거듭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결국 그렇게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직장이, 우리의 가정이 더욱 척박해지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배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배운대로 살지 않는데 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대로 하면 '섬김의 삶'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문제는 왜 점점 더 심각해져 갑니까? 가정에 불화가 일어나고 깨어지게 될 때, 당사자들은 성격의 문제를 가장 큰 문제로 꼽고 있지만, 사실은 섬김의 문제입니다. 본래 가정의 최소단위인 부부는 서로 완전히 다른 남남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격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지요. 그것도 모르고 만났다면 그것은 잘못 만난 만남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쟁탈전으로부터 비롯된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의 정치적인 현실도 그렇습니다. 작금 총선을 앞두고 낙선운동이 되느니 안되느니 하는 법리논쟁이나 정당간의 다툼도 섬김의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가 권력쟁탈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실은 인지하면서도,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진심으로 국민을 섬기고 봉사하는 자리라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어제오늘이 아니고 우리 역사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풍토입니다.
섬기는 자의 명칭 자체가 무엇인가 잘못된 느낌이 듭니다. 매우 관료적이고 권위적입니다. 大統領(전체를 다스리고 명령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나 長官(길게 벼슬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봅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president --사회자, 교통정리자(Mr. President, 동등한 위치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 sales외교를 하는 부쉬 전대통령, 망치를 잡은 카터 전대통령, 스포츠 해설을 하는 레이건 전대통령등), 장관은 minister(혹은 secretary)로 이는 섬기는 자, 봉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때로 섬기는 일과 봉사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권위가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 권위를 섬기는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당리당략과 소아적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기에 혼란과 부패가 일어납니다.
이 사회 곳곳에 뿌리박혀 있는 혼란과 부패가 만연하는 그 현장 속에는 더 이상 말하는 것이 진부할 정도로 곳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보고 더욱 좌절하고 슬픔을 느낍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도 "섬김의 삶"이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서로 눈치를 보며 적당히 섬김과 높임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 뱃속 깊이 자리잡고 있기에 우리는 서로 서로를 만나는 것이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피곤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2. 왜 주님은 발씻는 일을 선택하셨는가?
당시 유대사회는 서열대로 발을 씻는 풍습이 있었습니다(물부족 때문). 종이 있으면 종에게 자기들의 발을 내밀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종이 있을리 없지요. 그래서 제자들 사이에는 발씻는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 다툼이 일어나곤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주 누가 큰자냐 라는 논쟁을 자주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투었습니다. 길 가다가도 툭하면 누가 크냐라는 논쟁을 벌이곤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하는 그 순간에도 수위권 쟁탈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은 단호하게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야고보와 요한이 조용히 예수님께 찾아 주님이 영광 중에 있을 때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전해들은 나머지 제자들은 얼마나 분노했을까요? 주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르면서 구하는구나 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막 10: 35-38). 사실 누가 우리 중에 첫째가 되고 누가 그 다음 자리이냐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일을 우리는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누가 큰 자냐 라는 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을 것입니다. 작은 자는 큰 자의 발을 씻어야 하고, 작은 자는 큰 자보다 무엇이든지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발을 씻을 때면, 늘 남이 씻고 난 더러운 물로 발을 씻어야 하고 모든 뒷 처리는 낮은 자에 몫이었을 것입니다. 누가 그런 궂은 일을 좋아하겠습니까?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기를 결심하셨습니다. 당신이 그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도 장로님들에는 수석장로, 안수 집사님들 중에는 수석 안수집사, 권사님들 중에서 수석권사 등등의 서열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누가 정해주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서열이 생겨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여 주신대로라면 스스로 서열상 앞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즉 손에 수건을 들고, 빗자루를 드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3. 어떻게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 동안의 나의 가르침은 도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내가 언제까지 참으리요. 괘씸한 녀석들'이라고?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 반대의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저들이 아직 받은 사랑이 부족해서 그렇지. 사랑을 쏟아 붓다 보면 언젠가는 깨달아지는 날이 있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본문 1절에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절에는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지금은 모르나 이 후에는 알리라.'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의 발을 제일먼저 씻기셨을까요? 상상컨대 깨닫지 못하는 가룟유다의 발을 먼저 씻기시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면서 이 후에는 깨닫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입니다. 주님은 결코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서 분노하거나 증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겸손히 인내하시면서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향한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향한 미련이 남아있다고 보여집니다. 흔히 말하듯이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팔 운명을 타고난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듭 가룟유다가 이미 본색을 드러내기 이전에 마귀가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했고, 그리고 그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끝까지 거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를 구체적으로 섬기시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 안에 섬기는 일꾼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없는 것은 내가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그 동안 충분히 섬김을 받아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섬기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 동안 충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부터 섬기는 삶을 실천하면 우리의 사회, 교회, 가정은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섬기는 삶을 시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후에는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을 만나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섬기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 일인지를 모른 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는 것과 행할 수 있다는 것과는 언제나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지 많이 받아 본 사람만이 많이 줄 수 있습니다. 많이 섬김을 받아본 사람만이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은 진리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나는 신세대에게 우리는 그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청소년들을 언뜻 보기에는 버릇없는 아이들처럼 보이나, 때가 되면 매우 정의롭고 용기있는 행동을 하는 것을 봅니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결국 자기 살길만을 찾습니다. 위험에 처하면 용기를 잃고 때로 비굴해집니다.

4. 두 가지 유형의 사람: 가룟유다와 베드로.
1)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받고 사랑을 배반하는 삶의 유형입니다. 사랑을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챙기후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지요.
2) 두 번째 유형은 베드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발을 씻겨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제안에 대해서 '절대불가'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본문에 보면 강한 어조를 쓰고 있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제법 양심이 살아있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말하자면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받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염치없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는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는 말이지요.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세도 지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갚을 필요도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깨끗하고 정당한 듯 보이지만 내심은 상당히 교만한 사람이요, 마음이 굳은 사람입니다. 종종 나는 자수성가했다는 사람을 만나는데, 사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 세상에 누가 혼자 힘으로 성공을 일구어 낸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서로 서로 등을 기대면서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등을 만들어 준 이유가 그렇습니다. 두 등을 마주 대하면 앞뒤로 모두 볼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나로 하여금 사람되게 하고 행복하게 하도록 수많은 사람들을 나에게 보내어 섬기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스스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예를들면 태양이 떠오름을 보면서 밝음과 따스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만물과 나를 위해서 어김없이 일해 주시는구나 라는 감격을 해 본적이 없습니까? 정말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일을 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 17)". 십자가의 사건은 더욱 구체적으로 나를 섬기신 삶입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다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년 간에 쌓여진 눈치로 얼마든지 예수님의 행동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는 것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을 받아보아야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주님의 의도였습니다.

5. 발을 씻기라고 명하신 주님의 참 의도는 무엇인가?
17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것이 주님이 이 일을 행하신 참 의미입니다. 섬김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게 보이나, 오히려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더 피곤한 법입니다. 그 내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있습니다. 늘 섬김을 기대하며 살지만 누가 그렇게 쉽게 섬겨주려 합니까? 아예 섬기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편안해지고, 관대해집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측면에서든지 덕을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 보십시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 집에서 누가 마음 편하게 많은 효용성을 누리면서 사는가요?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이지요. 왜냐하면 이제까지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섬김에 삶에 익숙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 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안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수위권 쟁탈전이라고 생각하면 갈등과 불화와 분쟁은(결혼초기의 삶)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섬김의 쟁탈전을 벌일 수 있다면, 그 곳에는 평화와 행복과 기쁨이 흐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참 행복의 길을 주님께서 여러분 앞에 던져 놓았는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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