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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욘12:3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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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이곤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0.9.24 주일설교 |
지금으로부터 만 55년전, 우리는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의 감격을 맛보면서 기뻐 어찌할 줄을 몰라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또한 동시에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총뿌리를 겨누는 적대관계가 되는 슬픔도 가졌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진지 반세기를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우리는 비록 피를 나눈 한 형제 한 민족이면서도 서로들 한 치도 물러 설 수 없는 적대관계를 가지고서 살아 왔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어리석기 한량없는 광대 짓거리를 해 온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은 광대 짓거리에도 그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인양 생각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철주야, 동족을 효과적으로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살아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모두들 죄인들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변명을 한다 할지라도 영락없이 우리들은 반드시 회개하여야 할 죄인들입니다. 우리 손에는 동족살해의 피가 여전히 묻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민족주의"라는 이념과 "국토방위"라는 현실을 구실 삼아 우리 자신을 변명하려는 것은 참으로 낯 간지러운 위선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효과적 살생능력을 가진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최고 두뇌를 가진 최고 인력을 동원해 왔고 천문학적인 숫자의 예산을 살상무기의 생산에 쏟아 부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이 참으로 어리석은 광대놀음이라고는 할지라도, 끊어진 경의선을 잇고 접근이 금지된 영공과 영해를 모두 개방하여 남북 간에 막힌 모든 통로들이 모두 열리도록 하는 이 모든 일들 속에 만일 우리의 심중 깊은 곳에서의 참회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동족애가 작용한다면, 비록 만시지탄의 안타까움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매우 희망적인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일들이 또 다시 어떤 정치인들의 정치적 계략과 정략을 달성하기 위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이루어진다면, 어김없이 우리는 또 다시 과거의 그 뼈아픈 비극을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물려 주는 매우 잘못된 결과를 가져 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된 참회와 진실된 동족애가 없이는 한 민족의 평화와 구원 그리고 통일을 이룩할 수는 없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 주장입니다. 성서의 가르침들과 예언자들의 경고들이 말할려는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요나 이야기는 사람이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이나 있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나와서 구제 불가능한 악의 도성인 니느웨 선교에 성공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하여, 그 기상천외의 기적 이야기 때문에 매우 유명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사흘 동안 무덤에 있다가 부활하셨던 그 기적에 비유함으로서, 이 기적을 단순한 "기적"으로가 아니라 시대를 분별케 하는 하나의 "표징"(sign)으로서만 해석하였는데, 이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의 세계에서는 이 요나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욱 중요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요나 이야기는 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문"이라는 제 이차적 자료를 제외한다면, 세 토막의 이야기를 합성한 예언서적 성격의 문학작품입니다. 첫째 토막의 이야기는 요나가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니느웨 선교를 받아 들이지 않고 도망하다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큰 풍랑에 막혀 바다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고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던 큰 물고기에게 삼키움을 받게 되었다는 줄거리의 이야기입니다. 둘째 토막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서 읽은 부분으로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으로부터 토해 냄을 받고 하나님의 재 명령을 받자, 마지못해, 니느웨 선교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과 이러한 매우 소극적인 요나의 선교에도 불구하고 니느웨가 예상 밖으로 기적처럼 회개를 하자 저 악한 도성 니느웨도 감히 심판의 재앙을 피할 수 있었고 또 구원함도 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토막의 이야기는 니느웨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받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생각하는 요나를 긍휼의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교훈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택한 부분은 이 세 이야기들 중에서 둘째 토막의 이야기입니다. 즉 입니다.
거기, 니느웨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나고 있었습니다. 이 기적을 두고서 어떤 성서해석가들은 이라고 까지 부릅니다만, 참으로 상상키 어려운 기적이 거기 니느웨 성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동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제국으로 알려진 저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도성의 사람들이 저 요나의 마지 못해 외친 지극히 소극적인 외침 만을 듣고서도 즉각 회개를 하고 금식을 선포 하였으며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천민에 이르기까지, 아니, 마굿간의 가축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요나서 3장 3-4절에 의하면, 걸어서 사흘이나 걸리는 이 큰 성읍을 요나는 단 하루 밖에 돌아 다니지 아니 하였고 그 하루 동안에 행한 선교의 말씀도 또한 하루 내내 외쳤다는 것이 고작해서 히브리 말로 겨우 "다섯 마디 말" 뿐인 라는 말만을 외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보면, 는 인간 사회에서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가 타락한 다음 낙원을 상실한 이래로, 인간 회개 운동이라는 것은 그토록 많은 세월과 그토록 많은 성현들과 그토록 많은 예언자들과 그토록 많은 종교운동가들을 통하여 전개되어 왔지만,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주사위까지도 던저 졌지만,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인간 회개 운동 만은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묻혀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어디 회개하는 사람이 있어야 말을 하지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회개하기가 힘든 동물입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이러한 목이 곧은 인간현실을 감안할 때, 특히 저 중동세계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제국,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백성들의 그 포악하였던 과거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정말, 요나의 저 다섯 마디 정도의 짧은 경고 말씀 만으로서 감히 저 수십만(요나 4:11 참조)의 니느웨 시민이 일시에 일어나 회개하는 "거국적" 회개를 단행하였었다고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가 세기적 기적이라고 할만큼 놀라운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그 기적이 그 무슨 물고기 뱃 속에서 삼일 간이나 지내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나와 성공적으로 예언활동을 하였다는 그런 그 기상천외의 사건과 연계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세기적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세기적 기적"이라고 할만한 이 는 과연 어떻게 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혹자는 생각하기를, 물고기 뱃 속에 있었을 때 요나의 몸에 배었던 물고기 위액의 그 지독히 역겨운 냄새가 니느웨 사람들의 코를 놀라게 하여 그것이 요나의 물고기 뱃속의 그 경험을 니느웨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로 믿도록 하였고 그것이 또한 그들에게 큰 회개의 각성을 일으키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에도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치만, 그러나, 만에 하나, 요나가 그러한 기상천외의 기적담을 물고기 위액 냄새를 풍기면서 그의 선교의 메시지를 선전하였다면, 십중팔구, 요나는 저 똑똑하고 지적 수준이 높은 강대제국의 니느웨 시민들로부터 "허황된 거짓 말로 사람을 홀리는 음흉한 마술사나 미친 무당"이라는 취급을 받고 당장에 쫓겨 났을 것임이 확실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이가 생각하였듯이, 요나의 경고 말씀인,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는 독기서린 말씀의 그 섬뜩한 위협이 니느웨 시민에게 놀라운 경각심을 자극시켰으리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그러한 견해도 또한 전혀 맞지 않는 추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보다 더 강도 높은 심판경고를 니느웨 백성은 수없이 들어 온 악명(惡名) 높은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니느웨의 회개"라는 이 놀라운 기적을 창출해 내게 하였던 것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본문 5절의 서두에서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봐이야아미누 벨로힘)라는 동기부여적인 말을 앞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데 이 말이 바로 다름 아닌 그들의 회개를 충동한 동기와 이유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놀라운 영감의 충동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예언이 진실되다고는 결코 믿지 아니 하였습니다. 또는 요나의 위협이 너무 강도가 높아서 그 때문에 니느웨 백성이 그것을 두려워 하였던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요나의 기적담을 듣고 그 기적 이야기에 현혹되었던 것은 더 더욱 아니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전향적(轉向的)인 깨달음과 믿음 때문에 니느웨가 회개를 하였던 것이라고 우리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이 감히 에 대한 믿음 때문에 저토록 놀라운 거국적인 회개를 단행하였다는 우리의 본문 5절의 주장은 그렇게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제국은 역사적으로 한번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멸하였던 대표적인 민족이 바로 앗수르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사람들이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감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며 또 그 믿음 때문에 감히 저 포악한 민족인 니느웨 사람들이 저토록 놀라운 "회개"를 단행할 수 있었다는 말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늘 읽은 우리의 본문, 즉 요나서 3장만 가지고서는 충분히 설명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문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서 전체를 통하여 우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서 전체가 설명하여 증언하고 있는 그 "하나님"은 놀라웁게도 우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능히 제시해 줄 수 있을 만큼 매우 분명하고도 일관되게 다음 세 가지로 설명되어 있음은 우리에게는 놀라움 중의 놀라움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1)첫째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과는 불공대 천지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셔서 저 니느웨 사람들도 또한 구원하시려 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2)둘째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의 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애가 풍성하여 재앙 받을자를 가엾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3)세째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용서와 구원을 베푸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가슴에 회개의 불을 붙인 발화점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정말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지내다 온 기적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아니 하였습니다. 따라서, 요나의 말씀선포가 능변(能辯)이었느냐 눌변(訥辯)이었느냐 하는 것도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아니 하였습니다. 오직 문제가 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공대 천지 원수인 앗수르 사람에게도, 즉 앗수르와 같은 악명 높은 민족에게도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또 그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신다는 그 경이적인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니느웨 땅에, 감히 유대민족을 대표하는 요나가, "진리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예언자 요나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저 철천지 원수인 니느웨 땅에 등장하였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 무슨 요나가 실제로 물고기 뱃속에 있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거나, 요나의 메시지가 설득력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중요한 것이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악명 높은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생명구원도 또한 선민 이스라엘의 생명구원과 꼭 같이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성취시키려고 하시는 그 은혜와 긍휼의 신, 그러므로,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재앙 받을 자를 가엾게 여겨서 그를 기어이 구원하시려 하시는 그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사실이 바로 니느웨 백성에게는 이었던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특히 요나서 마지막 장인 제4장에서 야훼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예언자인 요나의 강경한 반대와 저항을 받으면서도, 심지어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장 3절과 8절)라고 하는 일종의 자살협박성을 지닌 도전까지 받으면서 까지도 니느웨 백성을 측은히 여기고 구원하시려 하시는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이 바로 다름 아닌 니느웨 백성에게는 결정적인 전향적 사건이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바로 여기서 구제불능의 그들에게도! 이 있다는 복음적 현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즉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확신을 니느웨 사람들은 여기서 비로소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은 이렇게 하여 결코 하나의 단순한 기상천외의 기적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시대를 분별하여 구원받는 지혜를 얻게 해 주는 하나의 "징표(sign)"가 되었던 것입니다!! 회개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 악한 세대에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자가,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 온 하늘의 "징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악하고 음난한 세대가 표징을 구하나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보여 줄 것이 없다. 아니, 요나의 표징 이외에는 다른 아무 표징도 더 이상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단언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 그러므로, 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할지라도, 또 우리 손에 살인의 피가 아무리 많이 묻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근본적으로 돌아서서 회개만 하면 우리 같은 사람도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징표가 바로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나 사건을 해석하는 결론부에서 말씀하시기를, 라고 결론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치하게도 무엇인가 좀 안다고 하여 그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날, 니느웨 사람들로부터 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무슨 신앙생활을 조금 열심히 하였다고 하여 ,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헌금 좀 하였다고 하여 ,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지도자 노릇 좀 하였다고 하여 , 우리는 마지막 날, 저 니느웨 사람들로부터 조차도 라고 하는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는 구원의 길에 관한 하나의 확실한 역할을 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도 또한 와 같은 회개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 그것을 또한 우리에게 강력히 요구하는 그런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요나의 징표가 또한 오늘의 우리 한국 현실을 위한 "평화 통일의 징표"가 되리라는 것을 과연 "그 누가 알겠습니까?"Who knows?
우리가 비록 경상도니 전라도니 해서 서로 갈라져서 반목하는 삶을 사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는 할지라도, 이남이니 이북이니, 우익이니 좌익이니, 보수니 진보니, 가진 자니 못 가진 자니 하면서 서로 나누어져서 적대관계를 가지고 아웅다웅해 온 참 못난 자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각자 자신의 이기주의라는 사슬을 용감히 끊어 버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왔던 그 악한 길과 그 강포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혹!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우리에게도 "평화 통일"이라는 기쁜 소식을 안겨 주시게 될지 과연 누가 알겠습니까?(Who knows?)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남북으로 갈라진지 반세기를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우리는 비록 피를 나눈 한 형제 한 민족이면서도 서로들 한 치도 물러 설 수 없는 적대관계를 가지고서 살아 왔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어리석기 한량없는 광대 짓거리를 해 온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은 광대 짓거리에도 그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인양 생각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철주야, 동족을 효과적으로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살아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모두들 죄인들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변명을 한다 할지라도 영락없이 우리들은 반드시 회개하여야 할 죄인들입니다. 우리 손에는 동족살해의 피가 여전히 묻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민족주의"라는 이념과 "국토방위"라는 현실을 구실 삼아 우리 자신을 변명하려는 것은 참으로 낯 간지러운 위선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효과적 살생능력을 가진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최고 두뇌를 가진 최고 인력을 동원해 왔고 천문학적인 숫자의 예산을 살상무기의 생산에 쏟아 부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이 참으로 어리석은 광대놀음이라고는 할지라도, 끊어진 경의선을 잇고 접근이 금지된 영공과 영해를 모두 개방하여 남북 간에 막힌 모든 통로들이 모두 열리도록 하는 이 모든 일들 속에 만일 우리의 심중 깊은 곳에서의 참회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동족애가 작용한다면, 비록 만시지탄의 안타까움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매우 희망적인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일들이 또 다시 어떤 정치인들의 정치적 계략과 정략을 달성하기 위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이루어진다면, 어김없이 우리는 또 다시 과거의 그 뼈아픈 비극을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물려 주는 매우 잘못된 결과를 가져 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된 참회와 진실된 동족애가 없이는 한 민족의 평화와 구원 그리고 통일을 이룩할 수는 없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 주장입니다. 성서의 가르침들과 예언자들의 경고들이 말할려는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요나 이야기는 사람이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이나 있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나와서 구제 불가능한 악의 도성인 니느웨 선교에 성공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하여, 그 기상천외의 기적 이야기 때문에 매우 유명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사흘 동안 무덤에 있다가 부활하셨던 그 기적에 비유함으로서, 이 기적을 단순한 "기적"으로가 아니라 시대를 분별케 하는 하나의 "표징"(sign)으로서만 해석하였는데, 이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의 세계에서는 이 요나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욱 중요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요나 이야기는 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문"이라는 제 이차적 자료를 제외한다면, 세 토막의 이야기를 합성한 예언서적 성격의 문학작품입니다. 첫째 토막의 이야기는 요나가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니느웨 선교를 받아 들이지 않고 도망하다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큰 풍랑에 막혀 바다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고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던 큰 물고기에게 삼키움을 받게 되었다는 줄거리의 이야기입니다. 둘째 토막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서 읽은 부분으로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으로부터 토해 냄을 받고 하나님의 재 명령을 받자, 마지못해, 니느웨 선교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과 이러한 매우 소극적인 요나의 선교에도 불구하고 니느웨가 예상 밖으로 기적처럼 회개를 하자 저 악한 도성 니느웨도 감히 심판의 재앙을 피할 수 있었고 또 구원함도 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토막의 이야기는 니느웨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받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생각하는 요나를 긍휼의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교훈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택한 부분은 이 세 이야기들 중에서 둘째 토막의 이야기입니다. 즉 입니다.
거기, 니느웨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나고 있었습니다. 이 기적을 두고서 어떤 성서해석가들은 이라고 까지 부릅니다만, 참으로 상상키 어려운 기적이 거기 니느웨 성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동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제국으로 알려진 저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도성의 사람들이 저 요나의 마지 못해 외친 지극히 소극적인 외침 만을 듣고서도 즉각 회개를 하고 금식을 선포 하였으며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천민에 이르기까지, 아니, 마굿간의 가축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요나서 3장 3-4절에 의하면, 걸어서 사흘이나 걸리는 이 큰 성읍을 요나는 단 하루 밖에 돌아 다니지 아니 하였고 그 하루 동안에 행한 선교의 말씀도 또한 하루 내내 외쳤다는 것이 고작해서 히브리 말로 겨우 "다섯 마디 말" 뿐인 라는 말만을 외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보면, 는 인간 사회에서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가 타락한 다음 낙원을 상실한 이래로, 인간 회개 운동이라는 것은 그토록 많은 세월과 그토록 많은 성현들과 그토록 많은 예언자들과 그토록 많은 종교운동가들을 통하여 전개되어 왔지만,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주사위까지도 던저 졌지만,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인간 회개 운동 만은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묻혀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어디 회개하는 사람이 있어야 말을 하지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회개하기가 힘든 동물입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이러한 목이 곧은 인간현실을 감안할 때, 특히 저 중동세계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제국,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백성들의 그 포악하였던 과거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정말, 요나의 저 다섯 마디 정도의 짧은 경고 말씀 만으로서 감히 저 수십만(요나 4:11 참조)의 니느웨 시민이 일시에 일어나 회개하는 "거국적" 회개를 단행하였었다고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가 세기적 기적이라고 할만큼 놀라운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그 기적이 그 무슨 물고기 뱃 속에서 삼일 간이나 지내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나와 성공적으로 예언활동을 하였다는 그런 그 기상천외의 사건과 연계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세기적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세기적 기적"이라고 할만한 이 는 과연 어떻게 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혹자는 생각하기를, 물고기 뱃 속에 있었을 때 요나의 몸에 배었던 물고기 위액의 그 지독히 역겨운 냄새가 니느웨 사람들의 코를 놀라게 하여 그것이 요나의 물고기 뱃속의 그 경험을 니느웨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로 믿도록 하였고 그것이 또한 그들에게 큰 회개의 각성을 일으키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에도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치만, 그러나, 만에 하나, 요나가 그러한 기상천외의 기적담을 물고기 위액 냄새를 풍기면서 그의 선교의 메시지를 선전하였다면, 십중팔구, 요나는 저 똑똑하고 지적 수준이 높은 강대제국의 니느웨 시민들로부터 "허황된 거짓 말로 사람을 홀리는 음흉한 마술사나 미친 무당"이라는 취급을 받고 당장에 쫓겨 났을 것임이 확실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이가 생각하였듯이, 요나의 경고 말씀인,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는 독기서린 말씀의 그 섬뜩한 위협이 니느웨 시민에게 놀라운 경각심을 자극시켰으리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그러한 견해도 또한 전혀 맞지 않는 추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보다 더 강도 높은 심판경고를 니느웨 백성은 수없이 들어 온 악명(惡名) 높은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니느웨의 회개"라는 이 놀라운 기적을 창출해 내게 하였던 것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본문 5절의 서두에서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봐이야아미누 벨로힘)라는 동기부여적인 말을 앞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데 이 말이 바로 다름 아닌 그들의 회개를 충동한 동기와 이유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놀라운 영감의 충동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예언이 진실되다고는 결코 믿지 아니 하였습니다. 또는 요나의 위협이 너무 강도가 높아서 그 때문에 니느웨 백성이 그것을 두려워 하였던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요나의 기적담을 듣고 그 기적 이야기에 현혹되었던 것은 더 더욱 아니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전향적(轉向的)인 깨달음과 믿음 때문에 니느웨가 회개를 하였던 것이라고 우리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이 감히 에 대한 믿음 때문에 저토록 놀라운 거국적인 회개를 단행하였다는 우리의 본문 5절의 주장은 그렇게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제국은 역사적으로 한번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멸하였던 대표적인 민족이 바로 앗수르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사람들이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감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며 또 그 믿음 때문에 감히 저 포악한 민족인 니느웨 사람들이 저토록 놀라운 "회개"를 단행할 수 있었다는 말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늘 읽은 우리의 본문, 즉 요나서 3장만 가지고서는 충분히 설명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문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서 전체를 통하여 우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서 전체가 설명하여 증언하고 있는 그 "하나님"은 놀라웁게도 우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능히 제시해 줄 수 있을 만큼 매우 분명하고도 일관되게 다음 세 가지로 설명되어 있음은 우리에게는 놀라움 중의 놀라움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1)첫째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과는 불공대 천지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셔서 저 니느웨 사람들도 또한 구원하시려 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2)둘째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의 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애가 풍성하여 재앙 받을자를 가엾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3)세째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용서와 구원을 베푸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가슴에 회개의 불을 붙인 발화점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정말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지내다 온 기적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아니 하였습니다. 따라서, 요나의 말씀선포가 능변(能辯)이었느냐 눌변(訥辯)이었느냐 하는 것도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아니 하였습니다. 오직 문제가 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공대 천지 원수인 앗수르 사람에게도, 즉 앗수르와 같은 악명 높은 민족에게도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또 그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신다는 그 경이적인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니느웨 땅에, 감히 유대민족을 대표하는 요나가, "진리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예언자 요나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저 철천지 원수인 니느웨 땅에 등장하였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 무슨 요나가 실제로 물고기 뱃속에 있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거나, 요나의 메시지가 설득력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중요한 것이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악명 높은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생명구원도 또한 선민 이스라엘의 생명구원과 꼭 같이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성취시키려고 하시는 그 은혜와 긍휼의 신, 그러므로,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재앙 받을 자를 가엾게 여겨서 그를 기어이 구원하시려 하시는 그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사실이 바로 니느웨 백성에게는 이었던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특히 요나서 마지막 장인 제4장에서 야훼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예언자인 요나의 강경한 반대와 저항을 받으면서도, 심지어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장 3절과 8절)라고 하는 일종의 자살협박성을 지닌 도전까지 받으면서 까지도 니느웨 백성을 측은히 여기고 구원하시려 하시는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이 바로 다름 아닌 니느웨 백성에게는 결정적인 전향적 사건이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바로 여기서 구제불능의 그들에게도! 이 있다는 복음적 현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즉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확신을 니느웨 사람들은 여기서 비로소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은 이렇게 하여 결코 하나의 단순한 기상천외의 기적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시대를 분별하여 구원받는 지혜를 얻게 해 주는 하나의 "징표(sign)"가 되었던 것입니다!! 회개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 악한 세대에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자가,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 온 하늘의 "징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악하고 음난한 세대가 표징을 구하나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보여 줄 것이 없다. 아니, 요나의 표징 이외에는 다른 아무 표징도 더 이상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단언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 그러므로, 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할지라도, 또 우리 손에 살인의 피가 아무리 많이 묻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근본적으로 돌아서서 회개만 하면 우리 같은 사람도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징표가 바로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나 사건을 해석하는 결론부에서 말씀하시기를, 라고 결론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치하게도 무엇인가 좀 안다고 하여 그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날, 니느웨 사람들로부터 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무슨 신앙생활을 조금 열심히 하였다고 하여 ,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헌금 좀 하였다고 하여 ,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지도자 노릇 좀 하였다고 하여 , 우리는 마지막 날, 저 니느웨 사람들로부터 조차도 라고 하는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는 구원의 길에 관한 하나의 확실한 역할을 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도 또한 와 같은 회개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 그것을 또한 우리에게 강력히 요구하는 그런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요나의 징표가 또한 오늘의 우리 한국 현실을 위한 "평화 통일의 징표"가 되리라는 것을 과연 "그 누가 알겠습니까?"Who knows?
우리가 비록 경상도니 전라도니 해서 서로 갈라져서 반목하는 삶을 사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는 할지라도, 이남이니 이북이니, 우익이니 좌익이니, 보수니 진보니, 가진 자니 못 가진 자니 하면서 서로 나누어져서 적대관계를 가지고 아웅다웅해 온 참 못난 자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각자 자신의 이기주의라는 사슬을 용감히 끊어 버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왔던 그 악한 길과 그 강포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혹!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우리에게도 "평화 통일"이라는 기쁜 소식을 안겨 주시게 될지 과연 누가 알겠습니까?(Who kn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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