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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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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종수 목사 |
참고 : | 사이버신학교 |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삶의 실존에 주신 가장 큰 복은 진리를 믿음으로구원을 얻고 영적 자유를 얻는 것이다.(요14:6, 살후2:13, 요8:32, 롬8:2,요8:36) 우리는 이 두가지의 은혜를 항상 공유하고자 하나 시대와 환경따라 변화하였음을 보게 된다.세상의 가치관 변화에 따른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성경이 주려는 본질적인 은총에 대한 불신의 결과다.
진리가 주고자 하는 참된 자유의 개념이 무엇인가?
진리가 되는 성경은 철학적 사유의 상대적 이념이 아니라 신의 절대적 가치로이성적으로 조종하기에는 불가항적인 불변적 가치이다.따라서 진리는 철학이나시대에 변화하고 적응하고자 하는 인간의 삶과 현실에 용의주도하게 협조하는것이 아니다.
종교개혁(宗敎改革)이란 말은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다.진리 운동이다.사람의 판단과 가치는 결국 진리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없는 철학적 판단과 가치들의 부정(不淨)함과 혼미(昏迷)함 그리고 저속(低俗)함에 대한 반성으로 절대적 가치, 진리에로 회귀하게 되는 개혁(reformation)을 가장 신성하게 여기고이성(理性)의 대변혁이자 신의 은총으로 고백하게 된다.(딤후 3:7-9,고후5:17,골3:10) 진리가 개인적 영혼과 사회와 역사에 끼치는 주된 역할은 하나님 자신의 선포와 언약적 복음을 통한 인생의 구원과 삶의 거룩한 변화이다.
성경의 이해는 역사 속에 수많은 관념의 해석 차이로 복음 사상의 다양한 편견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곡해 및 세상을 향한 교회의 목적이 진리의 본래 의도를 벗어나서 문화 속으로 침륜(沈淪)되게 하였다.
빌라도가 주님께'진리가 무엇이냐?'(요18:38) 하고 질의한 원문을 살펴보면,진리(ajlhvqeia)의 단어에 정관사(oJ)가 없다(What is truth?). (Tiv ejstin ajlhvqeia) 그러니까 제대로 질문을 정중히 하려면 그(the)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했다.
진리는 예수님이시다.또한 하나님의 사상이다.특별계시인 성경은 활자화 된 진리다. 진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생으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 보편 진리의 목적에서 빗나간 주장은 우선적으로 이단이라한다.(요14:6, 롬2:2, 시119:160, 엡1:13)
이성주의적 성경관은 성경 진리가 어떻게 보인다는 것을 설명하고 계시적 성경관은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라 하는가를 듣는 것이다. 구원과 역사적 개량의기독교 문화 운동은 성경관 따라 그 영향력이 달라진다. 진리를 지구촌의 상황에 토착화하면 문화적 종교가 되고 성경의 본래 중심이 아전인수로 해석되어진다.
진리의 인본화는 사상이라 할만한 학문적 도구에 의하여 발표되기 전에 태초부터 원죄 이후로 작용하는 사단의 거짓된 유혹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함에 꾸물대거나 반역까지 하는 죄악성이 나타났다.그렇게 일찍부터 인생의 죄와 부도덕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거부한 결과로서 점점 완악해져버렸다.참 진리는 참 자유를 주신다. 하나님의 진리를 벗어나서 인간에게는 공포와 혼란이 왔고 땅도 저주를 받는 결과를 얻었다.(창3:8,17)
오늘을 사는 우리도 역시 참 자유, 지구촌 삶의 목표라 할 행복을 위해 유대인들의 질문처럼(눅18:18)인간의 노력을 다하고자 온갖 지성과 과학적 방법을 동원한다.그러면서도 참된 영혼의 자유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다. 지구촌의 온갖 불안 속에 기독교 종교사회가 세상으로부터 굴욕을 받기까지 실추된 근본원인이 무엇일까?
진리를 찾아 세상을 비춰야하는 교회의 특수한 임무가 어떻게 표현되었기에 이토록 혼란에 빠져 유럽과 서구의 교회사상 몰락과 함께 한국교회도 성장이 멈추고 대형교회의 부흥과 소규모의 여러 교회가 힘들어지면서 겪는 이상한 현상,그리고 뚜렷한 교회 사회적 범죄들은 무엇으로 변명해야 할까?
역사를 평할 때 우리는 그 시대의 흥망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기 쉽다.삶의질적 요소에 도덕성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모든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멸망은 한마디로 도덕적 타락이 원인이었다.하지만 참다운 역사의평은 하나님의 말씀이 척도가 되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시대에는 행복했다고 자평하지만 오래되지 않은 후대(後代)가 행복함이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화의 가치 속에 행복해함은 진리로 조
명할 때 그것은 자기 최면화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세상적으로 보통 행복해하는 정서는 정상적인 정신의 세계가 아니다. 조금 지나면 후회가 그림자처럼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행복은 나중에 후회되지 않는 것이 드물다. 행복했다는 지난 역사의 평가는 거의 허무와 후회로 갈무리된다.(전1:2,사48:22, 렘6:14)
진리의 규명은 이성의 한계로 때로는 미흡한 교리를 만들거나 신학적 형용에착오를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공경심과 구원 얻은중생자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교회의 본질적인 지상 목표에 동조하는 것은 많은 신학이나 교육이 필요치 않다. 4복음서 정도의 통독과 감동만으로도 성도의생활에 큰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본다.
또한 구약시대에도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나 신약의 12사도와 여러 제자들을 세우시며 가르치시고 능력을 주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나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교회의 존재와 그 운영을 위한 사역자를 세우시고(계1:20)각양의 은사를 주사 진리로 규명된 사상을 반영해나가는데 활동하게 하셨다. 즉 일반 성도들은약간의 교육에 적응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전문성있는 교육을 받은 지도자를 통하여 진리의 사람답게 사는 법에 대해 충분히 가르침을 받게 하신다.
교회 지도자도 일반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교육관이 설정된다.물론 전문성이 없는 평신도이지만 가끔 잘못된 교육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 가진 성경 지식과 성령의 바른 영감으로 인해 거부할 수도 있다.그러나 보통 교회 교육자이면 월등히 진리 규명을 위한 신학수업이 되어 있기 때문에 평신도는 염려치 않아도 될것이다.
한데, 이단적 신학을 통하여 교육자 자신도 잘못인줄 모른 상태에서 교육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단적사상을 가르치는 자와 교육을 받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마7:22-23, 딤후4:3)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의 전반적인 그리고 세밀하게 성경을 해석하여 교리를 아침마다 외워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진리가 요구하는 바가 아니다. 여러말씀의 궁극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함을 얻고 죄 사함의 확신과영생을 취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요20:31)
진리가 세상에 임하여 우리 역사의 지평에서 세속의 역사와 대조적으로 숨길을보여준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지상 초림을 통해 헤롯과 예루살렘이 흥분한 것과그 공생애 3년 간의 역사에서 유대인의 외식적 신앙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스스로의 갈등 그리고 로마 통치 하에서 천국에 대한 역설적 이슈는 로마인과 유대인 전체를 당황케 했다.
속사도 시대가 지나자 곧장 신비주의로 몬타너스의 오해와(1) 콘스타틴의 정치적 소용에(2)기인한 기독교 자유화에 따른 인본사상의 출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달았다. 수백 년 간을 믿고 고백하던 예수님에 대해 '예수는 누구신가?'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규명이 수없이 논의되고(3)결국 중세기로 오면서 성경을 아예 읽지도 말 것을 강요당하는 사태가 생기기도 했다. 문예부흥과함께 이성주의적 가치판단의 기준은 성경해석에 인본화(人本化)에 불을 질렀다.
교황의 정치적인 자유의 억압에서 성경적 복음이 주는 가치관으로 제도에서는벗어났지만 이성적(理性的)인 사유(思惟)의 자유는 영혼을 묶어버리는 무서운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부터 서구로 이어지는 인본적 성경관은 전 세계 신학의 조류(潮流)를뒤엎었다.마침내 높은 곳에 계시던 하나님을 이웃집 가까이 모시게 된 듯 태초뱀이 유혹할 때 금령의 실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리라는 예언에 걸려든 사람처럼(창3:5) 이상한 기쁨을 여러 학문의 도구로 미친 듯이 붓으로 갈겨댄 것이다.
아직 경건이 무엇인지 확인 절차가 남은 채 감성적인 데 정렬을 쏟는 CCM을 부는 잘못된 어떤 청년들의 춤처럼 인문화된 신학은 성령이 주는 것 같지 않은다른 기쁨으로 중생치 못한 지식의 교만을 온 세상에 내뿜게 되었다.
해방신학과 상황윤리신학의 대두와 함께 포스터모드니즘의 자율가치관에 맞물려 이제 종교다원화 시대가 도착했다.종말론적으로 살피건대 이런 영적 혼란의가중됨은 말세 현상이다. 우리는 다시 진리의 정의를 정립해야 할 시기에 왔다.
그래서 성경관의 재확립이 필요한 시기라 여긴다. 성경의 진리 규명은 진리가주고자 하는 참된 자유의 개념을 확인하게 한다.
즉 오늘의 신학적 사상은 참된 기쁨과 영적 자유의 개념을 희석하여 무엇이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행복인지 아니면 문화에 대한 적응으로서의 안도감이나 시대에 걸맞은 정서상의 행복감인지 분별할 수 없게 하였다.
단면적인 예로, 주일에 불신자 손님이 찾아왔는데, 그룰 위해 식사대접이나 다과를 준비하려 할때 상업적 행위를 통해서라도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런 방식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참 자유함이라 여기는 자도 있고, 혹은주일에 대한 개념이 상업적 거래를 거부함이 참된 성도의 영적 자유함으로 알고 그 영적 자유의 보존과 유지를 위하여 손님에게 조심스러운 신앙적 양심을설명한 후 거저 집에 있는 물 한잔 정도로 대접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 양자간의 진리를 가진 자로서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하려할 때,먼저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의 요소는 둘 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우선적으로 전자는 진리를 가진 자의 유연성을 보게 되고 후자는 교리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음을 본다. 자유함이나 영적 평안은 앞서 생각한 바대로 이성주의적 판단으로 살아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진정한 영적 기쁨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실제 교회생활 중에 이 두경우의 사람들을 쉽게 대조적으로 만나 볼 수있다. 그런데 앞서 유연성 있게 대처하는 성도는 대체로 처세술이 밝다고 보아진다. 후자는 경직되게 보인다. 문제는 진리가 주는 자유함의 진위를 가리는데있다. 어떻게 자유할까? 그리고 그 자유함을 어떻게 표현하고 간직하는 것일까? 다양한 정서의 차이를 인정하자면 그다지 문제될 바 아니지만 사회 앞에 교회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으로서 의무가 될 때는 어떤 기준이 설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학의 측면과 교단의 이념이 함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참된 자유는 자유의 개념이 바로 서지 못한 인간에게서는 정답이 나올 수 없다. 오직 참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 통로는 진리 안에서 얻는다는 성경의 교시(敎示)와 전통적인 바른신앙의 특성대로 삶으로써 얻어진다.(요14:27, 약3:17)
자유의 개념을 이성(理性)에 호소하려면 진리운운하면서 특별히 개혁이라는 과제를 놓고 고민할 이유가 없어진다. 가령 다리 밑에 사는 걸인의 아들이 저 만치 보이는 동네의 집이 불타고 있을 때,'아버지 우리는 불이날 집이 없어서 좋다'고 하고, 아비는 자식의 말에 불편함이 없이'너의 아비 덕인 줄 알라'고 하였다면 과연 이 거지 부자(父子)간의 영적 자유함을 우리가 참된 자유라 할 수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질의 얼마로 행복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아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한 사람 앞에 설 때 초라해지는 불행감을 얻는다. 이런 식의 오해 속에 인생은 하나님 없이 행불행을 오가며 인생을 이해하려 하는 자체가 불행이고 기실 참된자유와 영적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운데서 엉뚱한 행복감의 오해의 연속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눅18:18, 마19:22)
참된 자유의 내용은 무엇인가?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자유의 개념은 환경적 요소에 안정감을 갖는 정도를 참자유라 하지 않는다. 구약에 믿음의 선진들이나 신약도 참된 자유함을 누린사람들은 삶의 과정 자체가 상대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숱한 고난의 연속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자유를 노래할 수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아브라함이 고향 친척을 떠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나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는 온갖 시련이 따랐고 무슨 일이든 순조롭게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모세의 고난은 스스로
취한 영적 자유로움의 선택이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의 저항도 하나님의선택이 주는 자유함으로 생긴 용맹이며 능력이었다.(단3:18)
신약의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핍박을 받아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갇혔을 때 진리가 주는 참 자유는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간단하다. 삶의 목적이 분명하고가치 이념이 진리 안에서 굳세게 잡혀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빌립보 감옥에갇혔어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세상 속에 살 때 환난을 겪어야하겠지만환난 자체에 시간의 역사가 멈추지 못함은 우리들이 받은 진리의 궁극목표가 소망 가운데서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영생복락이 있기 때문에 시험 중에도 욥처럼 찬양하게 된다.
베드로가 옥중에서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소망을 가진 자의 역사의식이며 자유함이었다.(행12:6) 말씀에 붙들려 생애를 말달리듯이 열심을 다해 복음 전파에 헌신한 바울의 독신 생활은 취미가 아니라 복음사상이 준 놀라운 능력에 사로잡힌바 되어 세상의 적절한 필요의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고전7:32-33)
역대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순교까지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진리가 거침없이 그들을 지배했기에 고난 중에도 평강의 노래를 했고 진리가 주는 참 자유를 만끽했던 사람들이다.(행5:41,행 20:24) 결코 그들이 헌신(獻身)한 삶은 억지가 아니었으며 스스로 기뻐하는 가운데 취한 삶의 양식이었다. 만약 그들이이 세속화 된 시대에 산다해도 결코 우리들처럼 적절한 문화의 혜택이 주는 안전함의 유익성을 우리같이 크게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문화주의적 행복론은 사상과 이데올로기로 제도화 속에서 세상에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결국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도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가운데 더 이상 관념적 삶의 방식을 찾을 길 없는벽에 직면했다.911사태와 대형 지진 등의 파괴로 믿을 수 없는 과학의 한계 속에 막연하게라도 진보를 꾀하던 노력도 없어지고 마치 마약자의 무질서한 언행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현대인들의 정서는 매우 위험하다. 이런 정서에서 나오는 신비주의가 종교계나 사회전반에 만연해가고 있다 사람이 안정될 때는 결코 신비주의가 나오지 않는다.(4)
포스터모더니즘의 자율적 가치관과(5) 프리메이션의 세계적 지배의 꿈이나(6)종교의 다원화 그리고 진리의 상징화로 한국교회의 대형화추세는 우리 속에 참자유가 사라진 것을 표시하고 있다. 세인들의 가시적인 요청에 부응키 위한 방법론적 표현은 기독교 사상의 본질에서 벗어난 형식에 치우치게 되어 실패하고살아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이성주의의 관념이 비웃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초기 기독교의 의문은 기독론이었고 중세기를 오면서 칼빈의 하나님의 주권적사상이 대두되면서 기독교 신학의 정립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원론과 이론적인교훈은 결국 다시 바리새인들의 종교 활동과 비슷하게 제도와 교리 속에 묻혀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자유함에 갈급할 때 웨슬레와 같은 종들을 통하여 영성의 활성화를 보여주셨다.
20세기 신학의 실패는 제도화 된 교회 역사의 운영에 따른 상황화에 주력한 것이라 본다.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계명의 강령이며 기독교 신앙의 온전함을 사랑으로 완성해야 하는데 교회 사회는 사회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극복하게 조정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수많은 분파로 세상으로 하여금 복음의 관문 앞에서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런 광고문도 있다.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드릴 것입니다' 이런 광고가 있을 수있는 것인가? 얼마나 교파가 많아서 혼란했으면 이런 광고마저 버젓이 거리에붙어 있을까?
이단교도 많이 있다고 해서 무슨 경쟁사 어조로 우리 교회만 옳다는 광고를 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 끌어 모으기 위한 혈안으로 인해 교회가 함께 혐오 받을소리를 맘대로 퍼뜨린 것이다.
우리는 진리가 주는 평안을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모두 경험을 한 성도들이다.(계2:17) 사단이 주는 체질적인 이기심과 세속적 가치에 대한 유혹 등으로 진리가 주고자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연약한 의지로 인해 여러 번혼란을 겪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된 속죄와 성령의자유를 세속 문화의 능력에 뒤질 수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이 귀중한 참 자유의 영을 보존하고 발휘하려면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성경은 잘 가르쳐 준다.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는 말은 참자유를 주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속의 문화주의의 멍에를 메지 말라함이요,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했다.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한 말은 곧 기독교인이 받은 참 자유의 유용성을 말해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이를테면 빕립은 예언하는 딸 넷이 있었고 계시를 받기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고난 당할 것을 예언하였거나 만류했을 가능성이 많고 가이사랴에 머물 때 선지자 아가보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화를 입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의 반응은 오늘의 계시주의 환상주의자들과 다르다.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라고 했다.
물량주의와 신비주의의 영합으로 기복신앙이 정착화 되어버린 한국의 문화화된교회의 모습에서 우리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의 본래 모습을 좌초해버렸다. 과연 고난받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언제 다시 인정하고 회복할 가능성이 있을까?순교적 신앙은 율법주의로 치부되었고 경건과 겸손은 약자의 소관으로 밀려나갔다. 그래서 교회의 승리도 결국 세상에서 말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대체하고 신앙(信仰)을 신념(信念)으로 왜곡시키고 말았다.
예배도 주일축제예배라고도 하며 성도는 잘살고 행복해야 하나님을 잘 믿는 결과라 가르친다.그러나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렇게 문화적으로 부유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언제라도 교회 안에는 가난한 자가 많다.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마치 물질과 환경의 발전이나 재물과 건강에 중점을 둔다. 그렇지 못한 상태의 교인은 저주를 받았거나 믿음이 약한 자로 밀려 나간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희미하게 기억되게 한 진리의 참 자유는 결코 사람의 사고(思考)나 풍요한 문화에서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유지 방법도 무슨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지금의 제도화와 문화주의는 중세기의 교황제도와 큰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살아 계신 주께서는 진리로 주시고자 하는 참 자유를 경건한 종들에게 주시고 있다. 언제나 역사 속에 참 자유를안고 참된 행복으로 살다 간 종들이 있었다.(히11:38)
지금도 우리에게 이미 약속하신 진리를 통한 참된 자유는 실현되고 있다. 이성의 과학화로 세상을 인본적인 사유로 살려고 하면 절대로 진리가 주는 참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진리가 주는 자유의 개념은 온전히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진리에 충실할 때 획득되어진다.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는 생활화는 우리로 하여금 옛처럼 고난의 길을 안내하게 될 것이나 참된자유를 반드시 얻게 하실 것이다.
목회자의 방침이나 성도들이 요구하는 교회의 문화적 요청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거룩한 특성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이 시대에도 이기게 하시는 귀한 신앙적 처세를 발견하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목회를 누려야 할 것이다.
성도들도 종교인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종교 이상의 무엇이며 진리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이상의 무엇이기에(요14:27)우리는기도와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세상과 다른 차원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기억해야 한다.(삼상15:22)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참된 종의 입장을 고수할 때 머물게 될 것이다.현대교회의 신학적 문제는 살기 위해 혹은 살아 남기위해 성도들의 영을 강하게 하기위한 신념주의로 신앙을 이해시키려 하고 있다.메시지와 여러 교회당의 갖춤이나 행사의 문화적성향을 통하여 이목을 끄는 것 등 이벤트식의 동원 패턴은 결코 성령의 지도라 할 수 없다.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시끄러운 단체로 인식하고 있다. 왜 이렇게 폄하하고 있을까?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을 힘있게 믿고 찬양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전할 진리를 시끄러운 소리와 문화의 통로로 들려줘야 감동이 되는 것인가?고요한 가운데서 사람들을 감동시킨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은 방법이 잘못되었던가? 사랑을 광고함으로 표시하는 것인가?필리핀의 어떤 도시를 기독교로정복한 어떤 여 지도자가 있다. 그녀의 말은 한국 선교처럼 '교회당을 짓는 것이 복음의 활동이 아니라 사랑을 심어야 한다'라고 했다.
예배 전에 준비찬양(?) 같은 것 없이 묵상을 한시간 하는 교회도 있다. 예배를간략하게 하고자 하는 시대에 주일 설교를 2시간씩 하는 교회도 있다.대형교회인데도 스크린의 영상 없이 설교하는 교회도 있다.대형교회를 신축하면서 식당을 없애버린 교회도 있다.큰 교회를 시무하다가 작은 규모의 교회를 스스로 찾아 나서는 목회자도 있다. 교회가 자신들의 불의함으로 혼란을 겪게 하는 장로도 있고 목회자도 있으나 평생 신비체험이 없어도 일생을 충성되게 사는 집사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무슨 환상의 체험을 해야사랑의 헌신자가 되는가? 돈 많은 사람이 교회를 대표할 때 세상이 감동하는가? 큰 예배당을 지어 대형교회를 하니까 한국사회가 성령의 불길로 충만한가?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찬양한다고 비지땀을 흘리며 광란할 때 저 불신자들이 참 듣기 좋아 감동 받고 교회를 오던가,아니면 이웃으로부터 진정을 받아곤란을 겪은 바가 많은가?
진리가 주는 자유함은 결코 무절제함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참 자유는 영적이며 속으로 불길처럼 뜨거운 사랑과 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을 향하여 교양과 지성을 다해서 살기 원한다.그리고 절제한다.영적 은혜의 충만으로 받은 참된 자유는 세상의 영혼들을 섬기기 위해 목소리 하나에도 종이 되어 살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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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7년경 프리기아의 몬타너스 (Montanus) : 본래 이교도였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156년부터 활동한 사람,막시밀라와 프리스킬라(프리스카) 두 여선지자가 참여했는데, 둘 다 남편을 떠나 몬타누스에게 와서 일함,신천지의 이만희처럼 그도 14장에 약속된 보혜사(保惠師)인 성령이 자기에게 임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재림 시한과 장소를 설정하여 페푸자(Pepuza) 근처의 들판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예언했던 이단이다.
(2)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독실한 기독교인,황제 자신은 40세 되어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불렀고 사망 직전에 세례(침례)를 받았다.AD313년에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사형을 금지하였다.
(3)기독론의 정통과 이단의 대조 :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이'동일'(Homoousios)하다는 표현은 정통이고'유이'(Homoiousios)를 주장하면(아리안주의) 이단이다.
(4)일제 때나 6.25동란 이후 혼란한 시기에 이단이 속출했다. 최근 한국교회는신비주의 이단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교회는 현재 부흥이 아니라 영적혼란을 겪고 있다는 증거이다.
(5)포스트(post)는 '벗어나다(脫), 해체시키다'의 뜻을 가진 접두사,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던(modern)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주의, 즉 탈근대주의.
(6)프리메이슨이란 8세기부터 중세 11~14 세기까지의 성과 신전을 건설하던 건축가들을 일컫는 말이었다(Freemason,자유석공조합).“메이슨”이란 말의 어원은 이태리어의 벽돌(Messe)이라는 단어에 기초를 두고 있다.
1717년 영국에서 근대적인 프리메이슨이 탄생,1733년에는 126개 지부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박애정신 즉'형제애를 그 근본구조로 하는 이상적인 사회조직의 현실화'라는 목표 제시, 그들의 정신은 유럽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종교 등 전 분야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이후 프리메이슨 비밀결사는 유럽대륙뿐만 아니라 미국, 아시아 등지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Red Cross 프리메이슨 사이트: http://www.albertpikedemolay.org/redcross/일루미나티('빛을 준다, 빛으로부터 온 것')는 1776년 5월 1일 독일 바이에른지방에서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이름의 의미는 '사탄을 알게된 최초의 사람(thefirst man to know the Superiors)에 의해 창설되었다. 약관 27세의 나이에 인골슈타트대학의 법학부장, 세계정복을 위한 신세계질서를 자유 평등 박애를 기
본이념으로 하는 인본주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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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주고자 하는 참된 자유의 개념이 무엇인가?
진리가 되는 성경은 철학적 사유의 상대적 이념이 아니라 신의 절대적 가치로이성적으로 조종하기에는 불가항적인 불변적 가치이다.따라서 진리는 철학이나시대에 변화하고 적응하고자 하는 인간의 삶과 현실에 용의주도하게 협조하는것이 아니다.
종교개혁(宗敎改革)이란 말은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다.진리 운동이다.사람의 판단과 가치는 결국 진리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없는 철학적 판단과 가치들의 부정(不淨)함과 혼미(昏迷)함 그리고 저속(低俗)함에 대한 반성으로 절대적 가치, 진리에로 회귀하게 되는 개혁(reformation)을 가장 신성하게 여기고이성(理性)의 대변혁이자 신의 은총으로 고백하게 된다.(딤후 3:7-9,고후5:17,골3:10) 진리가 개인적 영혼과 사회와 역사에 끼치는 주된 역할은 하나님 자신의 선포와 언약적 복음을 통한 인생의 구원과 삶의 거룩한 변화이다.
성경의 이해는 역사 속에 수많은 관념의 해석 차이로 복음 사상의 다양한 편견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곡해 및 세상을 향한 교회의 목적이 진리의 본래 의도를 벗어나서 문화 속으로 침륜(沈淪)되게 하였다.
빌라도가 주님께'진리가 무엇이냐?'(요18:38) 하고 질의한 원문을 살펴보면,진리(ajlhvqeia)의 단어에 정관사(oJ)가 없다(What is truth?). (Tiv ejstin ajlhvqeia) 그러니까 제대로 질문을 정중히 하려면 그(the)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했다.
진리는 예수님이시다.또한 하나님의 사상이다.특별계시인 성경은 활자화 된 진리다. 진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생으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 보편 진리의 목적에서 빗나간 주장은 우선적으로 이단이라한다.(요14:6, 롬2:2, 시119:160, 엡1:13)
이성주의적 성경관은 성경 진리가 어떻게 보인다는 것을 설명하고 계시적 성경관은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라 하는가를 듣는 것이다. 구원과 역사적 개량의기독교 문화 운동은 성경관 따라 그 영향력이 달라진다. 진리를 지구촌의 상황에 토착화하면 문화적 종교가 되고 성경의 본래 중심이 아전인수로 해석되어진다.
진리의 인본화는 사상이라 할만한 학문적 도구에 의하여 발표되기 전에 태초부터 원죄 이후로 작용하는 사단의 거짓된 유혹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함에 꾸물대거나 반역까지 하는 죄악성이 나타났다.그렇게 일찍부터 인생의 죄와 부도덕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거부한 결과로서 점점 완악해져버렸다.참 진리는 참 자유를 주신다. 하나님의 진리를 벗어나서 인간에게는 공포와 혼란이 왔고 땅도 저주를 받는 결과를 얻었다.(창3:8,17)
오늘을 사는 우리도 역시 참 자유, 지구촌 삶의 목표라 할 행복을 위해 유대인들의 질문처럼(눅18:18)인간의 노력을 다하고자 온갖 지성과 과학적 방법을 동원한다.그러면서도 참된 영혼의 자유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다. 지구촌의 온갖 불안 속에 기독교 종교사회가 세상으로부터 굴욕을 받기까지 실추된 근본원인이 무엇일까?
진리를 찾아 세상을 비춰야하는 교회의 특수한 임무가 어떻게 표현되었기에 이토록 혼란에 빠져 유럽과 서구의 교회사상 몰락과 함께 한국교회도 성장이 멈추고 대형교회의 부흥과 소규모의 여러 교회가 힘들어지면서 겪는 이상한 현상,그리고 뚜렷한 교회 사회적 범죄들은 무엇으로 변명해야 할까?
역사를 평할 때 우리는 그 시대의 흥망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기 쉽다.삶의질적 요소에 도덕성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모든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멸망은 한마디로 도덕적 타락이 원인이었다.하지만 참다운 역사의평은 하나님의 말씀이 척도가 되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시대에는 행복했다고 자평하지만 오래되지 않은 후대(後代)가 행복함이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화의 가치 속에 행복해함은 진리로 조
명할 때 그것은 자기 최면화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세상적으로 보통 행복해하는 정서는 정상적인 정신의 세계가 아니다. 조금 지나면 후회가 그림자처럼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행복은 나중에 후회되지 않는 것이 드물다. 행복했다는 지난 역사의 평가는 거의 허무와 후회로 갈무리된다.(전1:2,사48:22, 렘6:14)
진리의 규명은 이성의 한계로 때로는 미흡한 교리를 만들거나 신학적 형용에착오를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공경심과 구원 얻은중생자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교회의 본질적인 지상 목표에 동조하는 것은 많은 신학이나 교육이 필요치 않다. 4복음서 정도의 통독과 감동만으로도 성도의생활에 큰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본다.
또한 구약시대에도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나 신약의 12사도와 여러 제자들을 세우시며 가르치시고 능력을 주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나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교회의 존재와 그 운영을 위한 사역자를 세우시고(계1:20)각양의 은사를 주사 진리로 규명된 사상을 반영해나가는데 활동하게 하셨다. 즉 일반 성도들은약간의 교육에 적응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전문성있는 교육을 받은 지도자를 통하여 진리의 사람답게 사는 법에 대해 충분히 가르침을 받게 하신다.
교회 지도자도 일반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교육관이 설정된다.물론 전문성이 없는 평신도이지만 가끔 잘못된 교육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 가진 성경 지식과 성령의 바른 영감으로 인해 거부할 수도 있다.그러나 보통 교회 교육자이면 월등히 진리 규명을 위한 신학수업이 되어 있기 때문에 평신도는 염려치 않아도 될것이다.
한데, 이단적 신학을 통하여 교육자 자신도 잘못인줄 모른 상태에서 교육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단적사상을 가르치는 자와 교육을 받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마7:22-23, 딤후4:3)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의 전반적인 그리고 세밀하게 성경을 해석하여 교리를 아침마다 외워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진리가 요구하는 바가 아니다. 여러말씀의 궁극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함을 얻고 죄 사함의 확신과영생을 취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요20:31)
진리가 세상에 임하여 우리 역사의 지평에서 세속의 역사와 대조적으로 숨길을보여준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지상 초림을 통해 헤롯과 예루살렘이 흥분한 것과그 공생애 3년 간의 역사에서 유대인의 외식적 신앙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스스로의 갈등 그리고 로마 통치 하에서 천국에 대한 역설적 이슈는 로마인과 유대인 전체를 당황케 했다.
속사도 시대가 지나자 곧장 신비주의로 몬타너스의 오해와(1) 콘스타틴의 정치적 소용에(2)기인한 기독교 자유화에 따른 인본사상의 출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달았다. 수백 년 간을 믿고 고백하던 예수님에 대해 '예수는 누구신가?'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규명이 수없이 논의되고(3)결국 중세기로 오면서 성경을 아예 읽지도 말 것을 강요당하는 사태가 생기기도 했다. 문예부흥과함께 이성주의적 가치판단의 기준은 성경해석에 인본화(人本化)에 불을 질렀다.
교황의 정치적인 자유의 억압에서 성경적 복음이 주는 가치관으로 제도에서는벗어났지만 이성적(理性的)인 사유(思惟)의 자유는 영혼을 묶어버리는 무서운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부터 서구로 이어지는 인본적 성경관은 전 세계 신학의 조류(潮流)를뒤엎었다.마침내 높은 곳에 계시던 하나님을 이웃집 가까이 모시게 된 듯 태초뱀이 유혹할 때 금령의 실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리라는 예언에 걸려든 사람처럼(창3:5) 이상한 기쁨을 여러 학문의 도구로 미친 듯이 붓으로 갈겨댄 것이다.
아직 경건이 무엇인지 확인 절차가 남은 채 감성적인 데 정렬을 쏟는 CCM을 부는 잘못된 어떤 청년들의 춤처럼 인문화된 신학은 성령이 주는 것 같지 않은다른 기쁨으로 중생치 못한 지식의 교만을 온 세상에 내뿜게 되었다.
해방신학과 상황윤리신학의 대두와 함께 포스터모드니즘의 자율가치관에 맞물려 이제 종교다원화 시대가 도착했다.종말론적으로 살피건대 이런 영적 혼란의가중됨은 말세 현상이다. 우리는 다시 진리의 정의를 정립해야 할 시기에 왔다.
그래서 성경관의 재확립이 필요한 시기라 여긴다. 성경의 진리 규명은 진리가주고자 하는 참된 자유의 개념을 확인하게 한다.
즉 오늘의 신학적 사상은 참된 기쁨과 영적 자유의 개념을 희석하여 무엇이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행복인지 아니면 문화에 대한 적응으로서의 안도감이나 시대에 걸맞은 정서상의 행복감인지 분별할 수 없게 하였다.
단면적인 예로, 주일에 불신자 손님이 찾아왔는데, 그룰 위해 식사대접이나 다과를 준비하려 할때 상업적 행위를 통해서라도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런 방식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참 자유함이라 여기는 자도 있고, 혹은주일에 대한 개념이 상업적 거래를 거부함이 참된 성도의 영적 자유함으로 알고 그 영적 자유의 보존과 유지를 위하여 손님에게 조심스러운 신앙적 양심을설명한 후 거저 집에 있는 물 한잔 정도로 대접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 양자간의 진리를 가진 자로서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하려할 때,먼저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의 요소는 둘 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우선적으로 전자는 진리를 가진 자의 유연성을 보게 되고 후자는 교리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음을 본다. 자유함이나 영적 평안은 앞서 생각한 바대로 이성주의적 판단으로 살아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진정한 영적 기쁨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실제 교회생활 중에 이 두경우의 사람들을 쉽게 대조적으로 만나 볼 수있다. 그런데 앞서 유연성 있게 대처하는 성도는 대체로 처세술이 밝다고 보아진다. 후자는 경직되게 보인다. 문제는 진리가 주는 자유함의 진위를 가리는데있다. 어떻게 자유할까? 그리고 그 자유함을 어떻게 표현하고 간직하는 것일까? 다양한 정서의 차이를 인정하자면 그다지 문제될 바 아니지만 사회 앞에 교회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으로서 의무가 될 때는 어떤 기준이 설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학의 측면과 교단의 이념이 함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참된 자유는 자유의 개념이 바로 서지 못한 인간에게서는 정답이 나올 수 없다. 오직 참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 통로는 진리 안에서 얻는다는 성경의 교시(敎示)와 전통적인 바른신앙의 특성대로 삶으로써 얻어진다.(요14:27, 약3:17)
자유의 개념을 이성(理性)에 호소하려면 진리운운하면서 특별히 개혁이라는 과제를 놓고 고민할 이유가 없어진다. 가령 다리 밑에 사는 걸인의 아들이 저 만치 보이는 동네의 집이 불타고 있을 때,'아버지 우리는 불이날 집이 없어서 좋다'고 하고, 아비는 자식의 말에 불편함이 없이'너의 아비 덕인 줄 알라'고 하였다면 과연 이 거지 부자(父子)간의 영적 자유함을 우리가 참된 자유라 할 수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질의 얼마로 행복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아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한 사람 앞에 설 때 초라해지는 불행감을 얻는다. 이런 식의 오해 속에 인생은 하나님 없이 행불행을 오가며 인생을 이해하려 하는 자체가 불행이고 기실 참된자유와 영적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운데서 엉뚱한 행복감의 오해의 연속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눅18:18, 마19:22)
참된 자유의 내용은 무엇인가?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자유의 개념은 환경적 요소에 안정감을 갖는 정도를 참자유라 하지 않는다. 구약에 믿음의 선진들이나 신약도 참된 자유함을 누린사람들은 삶의 과정 자체가 상대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숱한 고난의 연속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자유를 노래할 수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아브라함이 고향 친척을 떠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나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는 온갖 시련이 따랐고 무슨 일이든 순조롭게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모세의 고난은 스스로
취한 영적 자유로움의 선택이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의 저항도 하나님의선택이 주는 자유함으로 생긴 용맹이며 능력이었다.(단3:18)
신약의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핍박을 받아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갇혔을 때 진리가 주는 참 자유는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간단하다. 삶의 목적이 분명하고가치 이념이 진리 안에서 굳세게 잡혀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빌립보 감옥에갇혔어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세상 속에 살 때 환난을 겪어야하겠지만환난 자체에 시간의 역사가 멈추지 못함은 우리들이 받은 진리의 궁극목표가 소망 가운데서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영생복락이 있기 때문에 시험 중에도 욥처럼 찬양하게 된다.
베드로가 옥중에서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소망을 가진 자의 역사의식이며 자유함이었다.(행12:6) 말씀에 붙들려 생애를 말달리듯이 열심을 다해 복음 전파에 헌신한 바울의 독신 생활은 취미가 아니라 복음사상이 준 놀라운 능력에 사로잡힌바 되어 세상의 적절한 필요의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고전7:32-33)
역대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순교까지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진리가 거침없이 그들을 지배했기에 고난 중에도 평강의 노래를 했고 진리가 주는 참 자유를 만끽했던 사람들이다.(행5:41,행 20:24) 결코 그들이 헌신(獻身)한 삶은 억지가 아니었으며 스스로 기뻐하는 가운데 취한 삶의 양식이었다. 만약 그들이이 세속화 된 시대에 산다해도 결코 우리들처럼 적절한 문화의 혜택이 주는 안전함의 유익성을 우리같이 크게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문화주의적 행복론은 사상과 이데올로기로 제도화 속에서 세상에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결국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도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가운데 더 이상 관념적 삶의 방식을 찾을 길 없는벽에 직면했다.911사태와 대형 지진 등의 파괴로 믿을 수 없는 과학의 한계 속에 막연하게라도 진보를 꾀하던 노력도 없어지고 마치 마약자의 무질서한 언행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현대인들의 정서는 매우 위험하다. 이런 정서에서 나오는 신비주의가 종교계나 사회전반에 만연해가고 있다 사람이 안정될 때는 결코 신비주의가 나오지 않는다.(4)
포스터모더니즘의 자율적 가치관과(5) 프리메이션의 세계적 지배의 꿈이나(6)종교의 다원화 그리고 진리의 상징화로 한국교회의 대형화추세는 우리 속에 참자유가 사라진 것을 표시하고 있다. 세인들의 가시적인 요청에 부응키 위한 방법론적 표현은 기독교 사상의 본질에서 벗어난 형식에 치우치게 되어 실패하고살아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이성주의의 관념이 비웃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초기 기독교의 의문은 기독론이었고 중세기를 오면서 칼빈의 하나님의 주권적사상이 대두되면서 기독교 신학의 정립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원론과 이론적인교훈은 결국 다시 바리새인들의 종교 활동과 비슷하게 제도와 교리 속에 묻혀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자유함에 갈급할 때 웨슬레와 같은 종들을 통하여 영성의 활성화를 보여주셨다.
20세기 신학의 실패는 제도화 된 교회 역사의 운영에 따른 상황화에 주력한 것이라 본다.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계명의 강령이며 기독교 신앙의 온전함을 사랑으로 완성해야 하는데 교회 사회는 사회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극복하게 조정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수많은 분파로 세상으로 하여금 복음의 관문 앞에서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런 광고문도 있다.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드릴 것입니다' 이런 광고가 있을 수있는 것인가? 얼마나 교파가 많아서 혼란했으면 이런 광고마저 버젓이 거리에붙어 있을까?
이단교도 많이 있다고 해서 무슨 경쟁사 어조로 우리 교회만 옳다는 광고를 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 끌어 모으기 위한 혈안으로 인해 교회가 함께 혐오 받을소리를 맘대로 퍼뜨린 것이다.
우리는 진리가 주는 평안을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모두 경험을 한 성도들이다.(계2:17) 사단이 주는 체질적인 이기심과 세속적 가치에 대한 유혹 등으로 진리가 주고자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연약한 의지로 인해 여러 번혼란을 겪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된 속죄와 성령의자유를 세속 문화의 능력에 뒤질 수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이 귀중한 참 자유의 영을 보존하고 발휘하려면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성경은 잘 가르쳐 준다.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는 말은 참자유를 주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속의 문화주의의 멍에를 메지 말라함이요,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했다.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한 말은 곧 기독교인이 받은 참 자유의 유용성을 말해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이를테면 빕립은 예언하는 딸 넷이 있었고 계시를 받기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고난 당할 것을 예언하였거나 만류했을 가능성이 많고 가이사랴에 머물 때 선지자 아가보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화를 입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의 반응은 오늘의 계시주의 환상주의자들과 다르다.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라고 했다.
물량주의와 신비주의의 영합으로 기복신앙이 정착화 되어버린 한국의 문화화된교회의 모습에서 우리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의 본래 모습을 좌초해버렸다. 과연 고난받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언제 다시 인정하고 회복할 가능성이 있을까?순교적 신앙은 율법주의로 치부되었고 경건과 겸손은 약자의 소관으로 밀려나갔다. 그래서 교회의 승리도 결국 세상에서 말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대체하고 신앙(信仰)을 신념(信念)으로 왜곡시키고 말았다.
예배도 주일축제예배라고도 하며 성도는 잘살고 행복해야 하나님을 잘 믿는 결과라 가르친다.그러나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렇게 문화적으로 부유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언제라도 교회 안에는 가난한 자가 많다.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마치 물질과 환경의 발전이나 재물과 건강에 중점을 둔다. 그렇지 못한 상태의 교인은 저주를 받았거나 믿음이 약한 자로 밀려 나간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희미하게 기억되게 한 진리의 참 자유는 결코 사람의 사고(思考)나 풍요한 문화에서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유지 방법도 무슨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지금의 제도화와 문화주의는 중세기의 교황제도와 큰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살아 계신 주께서는 진리로 주시고자 하는 참 자유를 경건한 종들에게 주시고 있다. 언제나 역사 속에 참 자유를안고 참된 행복으로 살다 간 종들이 있었다.(히11:38)
지금도 우리에게 이미 약속하신 진리를 통한 참된 자유는 실현되고 있다. 이성의 과학화로 세상을 인본적인 사유로 살려고 하면 절대로 진리가 주는 참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진리가 주는 자유의 개념은 온전히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진리에 충실할 때 획득되어진다.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는 생활화는 우리로 하여금 옛처럼 고난의 길을 안내하게 될 것이나 참된자유를 반드시 얻게 하실 것이다.
목회자의 방침이나 성도들이 요구하는 교회의 문화적 요청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거룩한 특성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이 시대에도 이기게 하시는 귀한 신앙적 처세를 발견하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목회를 누려야 할 것이다.
성도들도 종교인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종교 이상의 무엇이며 진리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이상의 무엇이기에(요14:27)우리는기도와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세상과 다른 차원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기억해야 한다.(삼상15:22)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참된 종의 입장을 고수할 때 머물게 될 것이다.현대교회의 신학적 문제는 살기 위해 혹은 살아 남기위해 성도들의 영을 강하게 하기위한 신념주의로 신앙을 이해시키려 하고 있다.메시지와 여러 교회당의 갖춤이나 행사의 문화적성향을 통하여 이목을 끄는 것 등 이벤트식의 동원 패턴은 결코 성령의 지도라 할 수 없다.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시끄러운 단체로 인식하고 있다. 왜 이렇게 폄하하고 있을까?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을 힘있게 믿고 찬양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전할 진리를 시끄러운 소리와 문화의 통로로 들려줘야 감동이 되는 것인가?고요한 가운데서 사람들을 감동시킨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은 방법이 잘못되었던가? 사랑을 광고함으로 표시하는 것인가?필리핀의 어떤 도시를 기독교로정복한 어떤 여 지도자가 있다. 그녀의 말은 한국 선교처럼 '교회당을 짓는 것이 복음의 활동이 아니라 사랑을 심어야 한다'라고 했다.
예배 전에 준비찬양(?) 같은 것 없이 묵상을 한시간 하는 교회도 있다. 예배를간략하게 하고자 하는 시대에 주일 설교를 2시간씩 하는 교회도 있다.대형교회인데도 스크린의 영상 없이 설교하는 교회도 있다.대형교회를 신축하면서 식당을 없애버린 교회도 있다.큰 교회를 시무하다가 작은 규모의 교회를 스스로 찾아 나서는 목회자도 있다. 교회가 자신들의 불의함으로 혼란을 겪게 하는 장로도 있고 목회자도 있으나 평생 신비체험이 없어도 일생을 충성되게 사는 집사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무슨 환상의 체험을 해야사랑의 헌신자가 되는가? 돈 많은 사람이 교회를 대표할 때 세상이 감동하는가? 큰 예배당을 지어 대형교회를 하니까 한국사회가 성령의 불길로 충만한가?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찬양한다고 비지땀을 흘리며 광란할 때 저 불신자들이 참 듣기 좋아 감동 받고 교회를 오던가,아니면 이웃으로부터 진정을 받아곤란을 겪은 바가 많은가?
진리가 주는 자유함은 결코 무절제함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참 자유는 영적이며 속으로 불길처럼 뜨거운 사랑과 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을 향하여 교양과 지성을 다해서 살기 원한다.그리고 절제한다.영적 은혜의 충만으로 받은 참된 자유는 세상의 영혼들을 섬기기 위해 목소리 하나에도 종이 되어 살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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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7년경 프리기아의 몬타너스 (Montanus) : 본래 이교도였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156년부터 활동한 사람,막시밀라와 프리스킬라(프리스카) 두 여선지자가 참여했는데, 둘 다 남편을 떠나 몬타누스에게 와서 일함,신천지의 이만희처럼 그도 14장에 약속된 보혜사(保惠師)인 성령이 자기에게 임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재림 시한과 장소를 설정하여 페푸자(Pepuza) 근처의 들판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예언했던 이단이다.
(2)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독실한 기독교인,황제 자신은 40세 되어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불렀고 사망 직전에 세례(침례)를 받았다.AD313년에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사형을 금지하였다.
(3)기독론의 정통과 이단의 대조 :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이'동일'(Homoousios)하다는 표현은 정통이고'유이'(Homoiousios)를 주장하면(아리안주의) 이단이다.
(4)일제 때나 6.25동란 이후 혼란한 시기에 이단이 속출했다. 최근 한국교회는신비주의 이단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교회는 현재 부흥이 아니라 영적혼란을 겪고 있다는 증거이다.
(5)포스트(post)는 '벗어나다(脫), 해체시키다'의 뜻을 가진 접두사,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던(modern)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주의, 즉 탈근대주의.
(6)프리메이슨이란 8세기부터 중세 11~14 세기까지의 성과 신전을 건설하던 건축가들을 일컫는 말이었다(Freemason,자유석공조합).“메이슨”이란 말의 어원은 이태리어의 벽돌(Messe)이라는 단어에 기초를 두고 있다.
1717년 영국에서 근대적인 프리메이슨이 탄생,1733년에는 126개 지부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박애정신 즉'형제애를 그 근본구조로 하는 이상적인 사회조직의 현실화'라는 목표 제시, 그들의 정신은 유럽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종교 등 전 분야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이후 프리메이슨 비밀결사는 유럽대륙뿐만 아니라 미국, 아시아 등지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Red Cross 프리메이슨 사이트: http://www.albertpikedemolay.org/redcross/일루미나티('빛을 준다, 빛으로부터 온 것')는 1776년 5월 1일 독일 바이에른지방에서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이름의 의미는 '사탄을 알게된 최초의 사람(thefirst man to know the Superiors)에 의해 창설되었다. 약관 27세의 나이에 인골슈타트대학의 법학부장, 세계정복을 위한 신세계질서를 자유 평등 박애를 기
본이념으로 하는 인본주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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