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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0:4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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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태연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1.1.21 주일설교 |
"소리는 빛보다 아름다워!
-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법인 등록에 부쳐"
조 태연 목사(이화여자대학교)
소경의 고백
설교하기 위해 교회에 가려고 아침 일찍 택시를 잡았습니다. 기사 옆자리엔 한 분이 더 앉아있었는데, 교대하러 가는 길이라 하였습니다. 잠깐이지만, 우리 셋이는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며 가고 있었습니다. 전철역이 가까워 돈을 꺼내려 하는데, 이게 왠 일입니까? 지갑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양복을 갈아입고 온 거예요. "어떡하나? 설교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오는데...." 요금은 천 오백 원 가량 나왔는데, 코트 주머니 속에는 손으로 가만히 세어보니 동전만 아홉 개 남았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이거라도 드리고 양해를 구할까?" "그러면 전철은 또 어떻게 타지?" "어차피 죄송한 것 양해를 크게 구함이 어떨까?" 말씀을 드리니, 두 분 기사 양반 선뜻 용납해주는 거예요.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창피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와중에 900원을 꼬옥 손에 쥐고 택시를 내렸습니다. 그 중 600원으로 전철을 탔습니다. 남은 300원으로 마을버스를 타면 교회까지는 제 시간에 무사히 갈 수 있습니다. 알뜰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안전하게 전철을 탔습니다. 긴 이동을 위해 편안한 자리도 잡았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도 설교 원고는 한 번 더 보면서 가야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갸륵한 생각으로 가방을 여는데, 이게 왠 일입니까? 지갑이 거기 있는 거예요.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지갑이 없을 때보다 호흡이 더 가빠지는 거예요. 얼마나 당혹스럽고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걸 이야기하는 제 심정을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십니까? 어쩌면 이렇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까?"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하시면서 그들의 눈멀음을 실랄하게 비판하신 적이 있는데(막 8:18. 참조, 4:12), 예수의 그 실랄한 공격이 바로 나를 두고 이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그날 아침, 눈이 있어도 무엇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아니, 이날 이때까지, 인생의 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만 살아왔습니다.
이 아침, 한 소경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함께 읽으신 본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마지막 기적 이야기입니다. 물론, 소경을 온전케 하는 치유의 기적입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그 거룩한 분노와 성전에서의 폭력 그리고 갈보리산 위에서의 처참한 죽음이 발생하는 마지막 한 주간 그 폭풍의 전야(前夜)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소경입니다. 치유가 전적으로 소경 자신의 의지를 따라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52절 상반절에는 치유의 말씀이 아니라 소경의 믿음에 대한 확증이 나옵니다. 예수의 이름이 여섯 차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도 오직 거지의 관점에서 이야기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아니라 바디매오와 그의 투쟁이 이 단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의 이야기 구조는 예수의 행위와 가르침보다는 시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바디매오의 간절한 자기투쟁을 강조합니다.
50절에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에게 나아가기 전에 겉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습니다. 거지들은 구걸할 때 시혜품을 받기 위해 자신의 겉옷을 앞에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 거지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예수께 달려가기 위해 벗어 던집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거지 편에서 지극히 고조된 감정의 표시입니다(왕하 7:15, 참조).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자신의 유일한 생의 수단을 던져버리는 동작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탈피하되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생(生)을 접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입니다.
새길교회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아침 함께 읽으신 오늘의 이야기를 나는 한 평생을 소경으로 살아온 저 자신의 이야기로 여러분께 들려드리려 합니다. 한 소경의 자전적 이야기로 들어보십시오.
걸인(乞人)의 일상(日常)
예루살렘으로 가던 예수와 제자들은 어느덧 여리고에 도달하였다. 요르단 저지대의 오아시스에 있는 도시였다. 해면보다 250 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한 여리고는 종려나무의 도시이다. 신약성서 시대의 여리고는 구약 시대보다 조금 남쪽에 있었다. 헤롯의 건축사업으로 생겨난 결과였다. 그가 이 곳에 겨울 궁전을 짓고, 이를 중심으로 경마장과 원형 경기장 등을 건축하는 등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는 30여 킬로미터 넘게 떨어졌고 길은 사나왔으니, 성도(聖都) 예루살렘에 당도하기까지는 꼬박 하룻길 거리였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마지막' 도시였다. 그만큼 가깝고 그렇게 마지막이었는지라, 거지들에게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덕 있는 순례객이나 여행객들로부터 자비를 구할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길을 걷는 자들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자들 가운데 있었다. 디매오의 아들이라며 사람들은 나를 "바디매오"라 불렀다. 하지만 여느 거지들과도 달리 나는 앞을 보지 못했다. 장님이었던 것이다. 어찌하랴. 한 사람이 앞을 보고 못 보고 하는 것이 나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체험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듣는 것' 뿐이며 '만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러운 자라 하며 몸의 접촉을 꺼렸다. 꺼림칙하다며 극단적으로 멀리했다. 무엇 하나 만질 수도 없었다. 아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따뜻한 보듬는 손길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다. 마음껏 만질 수 있고 또 나를 만져주는 것은 그저 누더기 겉옷뿐이었다. 신(神)께 벌받은 탓이라며 사람들은 나를 멸시하였다. 신의 저주를 온 몸에 지고 그렇게 나는 한평생을 살아왔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인생, 그것이 전부였다. 듣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리 밖에는 세상이 없었다. 사람이 다가오고 지나는 것은 소리를 통해 알았다. 목숨을 부지할 길이라고는 구걸뿐이었다. 여리고를 나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앉아 있는 일 그리고 구걸하는 일, 그것만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그렇다. 목숨을 구걸하며 그렇게 살아왔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신마저 버린 이 저주받은 인생을 나 자신인들 사랑할 수 있으랴. 하루하루 목숨을 구걸하는 일상이란, 매일매일 연명하는 것이며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었다. 일상은 잿빛으로 가득하였다. 아니, 온통 주검의 색깔뿐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죽음이 내게 있을까. 여느 때처럼, 가느다란 지팡이에 의지하여 여리고를 나왔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험하게 굽이치는 산모퉁이를 수없이 돌고 높은 산등성이를 여러 번 넘어야 한다 하였다. 예루살렘까지는 꼬박 하룻길인 데다 중간엔 아무런 마을도 없는지라, 순례객들은 언제나 아침 일찍 순례길을 출발하는 법이었다. 아니, 먼동이 트기도 전에 여리고를 빠져나오는 법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여느때처럼, 말라비틀어진 막대기에 의지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으로 향하였다. 길가의 늘 앉던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이상 46절).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순례객도 하루하루 늘어가고 있었다. 자연, 구걸하는 이들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더 많은 발자국 소리를 듣겠지. 다윗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이니 저들의 발걸음은 얼마나 경건할까. 이집트에서 조상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뵈러 가는 자들이니, 우리를 향한 저들의 마음은 야훼를 닮아 구원으로 가득할까? 아니면, 내 몸을 저주한 야훼처럼 또 그를 섬기는 모든 사람들처럼 나를 멸시하고 내 몸을 저주할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은 유난히도 많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겉옷을 벗어 주욱 앞에 앉았다. "야훼의 구원이여! 당신의 자비여!" 이 옷안에는 순례객들의 자비와 야훼의 구원이 담길까? 아니면, 그 안에는 언제나 저주받은 몸만이 있었던 것처럼 몸둥이 만한 모멸과 저주만이 담긴 채 돌아올까? 인생의 살아보지 못한 순간들이 늘 벅찬 희망으로 가득한 법은 아니다. 아니, 저주받은 잿빛 인생들에게는 오히려 체념과 절망이 익숙한지도 모를 일이다. 수많은 발자국의 소리가 멀리서 다가와 예루살렘 쪽으로 이내 사라져갔다. 먼지만 일으킬 뿐 겉옷은 그냥 그대로였다. "조금 있으면 이 소리도 끊기겠지."
고함 속의 고요
겉옷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즈음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의 소리는 달랐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리로 오는 듯하였다. 곁에서 목숨을 구걸하던 이가 말하였다. 오고 있는 자가 예수라 하였다.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채 그가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 소리는 내게 구원일까? 아니면, 여느때처럼 저주일까? 하지만 이들마저 지나치면 벗어놓은 이 옷 속엔 신의 저주와 인간의 모멸만 남고 말겠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힘을 다해 고함을 쳤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이상 47절).
그러나 이 자들도 여느 행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사탄에게 대하듯 저들은 나를 저주하였다(마가에서 에피티마오 라는 말은 "저주하다"라고 번역함이 더 적합하다). 뿐만 아니라 내게 침묵을 강요하였다(1장 25절 등을 보면, 소리의 억제는 마귀에게만 하는 행위이다. 물론 나중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말이다). 참을 수 없었다. 또 하루가 이렇게 마감하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더욱 고함을 질러댔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또 하루가 마감하듯 내 인생 전체가 저주와 모멸로 점철하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가 예수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필사(必死)의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여!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상 48절).
. . . . . .
순간, ... 모든 것이 멎어버렸다. 지나가는 순례객들의 발걸음도 멈추었고 저들의 발자국 소리도 멎어버렸다. 죽어가던 나의 고함이 그 분의 귀에 들린 것일까.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정지된 이 '순간'의 정적 속에 나즈막히 인자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를 부르라." 목소리 사나운 나의 그 큰 '고함'에 비하면 그 분의 인자한 음성은 '고요' 그 자체였다. 하늘도 멈추어버린 정적 속에 그 분의 고요와 나의 고함은 그렇게 공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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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저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따뜻함을 흉내냈는지, 저들은 내게로 와 가까이에서 말을 걸었다. "안심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49절). 나를 향한 저들의 멸시와 저주가 인정과 따듯함으로 바뀐 것이다. 아, 처음이었다. 저들이 내 몸을 만지고 보듬진 않았을지라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내게 말을 건네며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멀리서 들려온 그 분의 인자한 음성을 듣고 이 자들의 이렇게 따뜻함을 만지는 찰나, 이 짧은 순간에, 내 인생에는 조금씩 빛이 스미고 있었다. 내게는 세상이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지체함 없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겉옷을 팽개친 채 나는 나를 부르시는 그 분께로 달려갔다. 아니, 돌진하였다. 그리곤 그 분 발 앞에서 허물어졌다. "당신께서 나를 부르시니, 내가 ... 내가 당신께 왔나이다. 당신께서 마음을 여시니 나도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이렇게 나신(裸身)이 되어 당신 앞에 있나이다"(이상 50절).
예의 고요한 목소리로 그 분이 내게 물었다. "무엇을 원하느냐?"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듣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 아니,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듣는 엄마의 소리였다: "아가, 무엇을 해줄까?" 이 감동의 순간, 내 속 깊이 있던 내 소리가 나도 모르게 그 분의 음성과 교호(交互)하였다. "아아, 볼 수만! 볼 수만 있다면!!" 조금의 꾸밈이나 가식이 없는 순수 그 자체의 소리였다. 그 분은 내게 참 인간이 되는 '새 길'을 열어 주었다. 세상이 환하게 밝아오듯, 내 인생의 뜨락엔 감당치 못하게 부신 빛이 비쳐오고 있었다(51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오, 놀라운 기적이었다! 내가 사람들을 의심하고 야훼께 대하여 회의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그는 나의 그 의심과 회의를 믿음이라 불러주었다. 그러니 저주의 하나님이 변하여 구원의 하나님이 되었다. 오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그 순간 내게는 세상이 보이길 시작했다. 늘 곁에 있었지만 처음으로 보는 걸인들의 휘둥그레진 얼굴들! 나를 멸시하다가 태도를 바꾸어 따뜻하게 다가오던 이 이름 없는 자들의 표정 없는 얼굴들! 그리고,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내 눈이 열리듯 나를 향해 세상도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겉옷을 내버리듯, 내 몸에 형적처럼 남아있던 신의 저주도 사라졌다. 이제는 생(生) 안에 야훼의 자비와 은총만이 가득하다.
예수는 내게로 가라 하나 신의 은총을 입은 이는 갈 수 없었다. 어차피 저주받고 쓸모 없던 인생, 차라리 오라 하면 따르고 싶었다! 아니, 신의 저주가 온 몸을 휘감았던 나같은 이를 구원하신 그 분와 함께 있고팠다! 주검의 수많은 잿빛 인생들에게 생명을 일깨우고팠다! 인생의 진정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에게 광명한 세상을 열어가시는 당신을, 끝내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가는 곳이 예루살렘이든 죽음의 골짜기든 그 어디든 상관없이 말이다. 새로운 길과 따름의 그 결단이, 거룩한 분노와 폭력 그리고 처참한 죽음만이 기다리는 폭풍의 전야(前夜)일지라도 말이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52절).
빛으로의 초대
1. 누가 소경인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복음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소경 이야기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도 하나의 상징입니다. 마가는, 아무리 건강하고 또 훌륭한 자라도 인생의 진정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일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문학가 마가는 제일 먼저 제자들을 희생물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복음을 철저한 비극으로 만든 것입니다. 새 길을 제시하려는 예수는 마침내 죽지만 제자들은 끝내 깨닫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당신께서 걸으시는 새 길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의 소경 됨을 꾸짖으십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막 8:17-18). 그 틈에 소경은 예수께 치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육신이 온전한 자들에게 묻습니다: "소경은 과연 누구인가? 인생의 진정 중차대한 것을 보지 못하는 너희가 소경이 아니냐?" 육신이 온전한 열두 명 남성 제자들을 마가가 앞 못 보는 장님으로 그려내듯, 세상의 모든 이들이 소경임을 마가는 폭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소경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소경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의도를 보지 못하고 인생의 더욱 중차대한 것에 눈을 감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보다도 돈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을 집착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나은 이를 향하여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불공정하고 무모한 비양심적 행위를 일삼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 땅의 불행한 자나 경쟁력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선입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맘모니즘의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뜻없이 경쟁과 경쟁자 죽이기에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로 소경 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장님들입니다! 결단코 그러합니다! 소경임을 거부하는 자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세상의 모든 이들이 어김없이 소경인데, 누구든 자신만은 아니라 하면 더욱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우리의 부패한 사회야말로, 사탄적 카오스의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2. 복된 소리(福音) 그리고 새 길
새길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마가의 예수 이야기는 과연 '소리의 이야기'입니다. 회개의 촉구로써 가치의 대전환을 부르짖던 세례 요한이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존재하였다면(막 1:2-4), 이 소리를 '듣고' 진정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는 이윽고 하늘로부터 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1:11). 그가 드디어 '소리'를 얻은 것입니다. 요한이 광야의 소리로 존재한 것처럼, 하늘의 소리를 얻은 예수는 세상에 소리로 존재했습니다. 그리하여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인은 예수의 소리를 '듣고' 대문을 박차고 나가 예수를 만지고 몸의 구원을 얻었다(5:27).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의 소리를 '듣고' 예수와 논쟁을 벌인 후 예수를 이긴 후 딸의 온전함을 이루어냅니다(7:25).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만난 바 여리고의 그 소경 바디매오도 예수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찬란한 빛을 얻습니다(10:47). 모든 이들이 그 소리를 '들음으로써' 스스로 나음을 얻고 온전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소리로 존재하셨기 때문인지, 현대 신약학은 복음을 "예수 이야기"라고 정의합니다. 예수 이야기는 복음이며, 복된 소리 곧 좋은 소리(Good News)입니다. 모든 예수 이야기 곧 예수 담론이야말로 복음입니다.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새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경이었다가 광명한 빛을 얻은 바디매오는, 오늘의 현대인들도 이 소리를 들으면 동일한 치유와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를 만난 성서의 많은 인물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예수의 이야기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 10:14-17). 구원하는 힘이 예수의 이야기 곧 복음에 있는 것은, 복음의 새 길을 제시하신 예수의 방식이야말로 생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3. 소리는 빛보다 아름답다!
예수의 길을 따르며 예수의 새 길을 제시하려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이제 소경은 물음을 바꿉니다: "우리들 자신이 소리일 순 없을까? 빛으로의 초대를 위하여 '소리'가 될 순 없을까?"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의 교우 여러분, 어두운 세상에서 소경된 모든 이들에게, 소리는 빛보다 아름답습니다. 소리가 빛보다 귀한 것은, 무엇을 볼 수 없는 소경에게 소리가 광명한 빛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탄적 카오스의 어둠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예수 복음의 새 길을 제시하기란, 우리가 예수의 소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첫째,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교회 내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교회 밖으로는 우리 사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둘째, 오직 예수의 방식 곧 예수의 길만이 복음의 새 길이며 교회와 인류의 살 길임을 믿고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만이 길이라 하면 기독교 이천 년을 지배해온 배타적 기독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방식 곧 예수의 길이라 하는 것입니다. 맘모니즘의 세상에서, 빵을 가리켜 당신의 몸이라며 세상의 빵으로 만인의 밥으로 존재하셨던 예수의 삶과 그분의 방식(길)이 우리의 새 길임을 확신하고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소리로 존재하는 것이란 스스로 '소리'였던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지나치게 경직되고 제도화되어 화석처럼 굳어버린다면, 결단코 이천 년 기독교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와 예수 이야기로 돌아가자는 것은 새롭게 예수를 만나는 이들의 뒤늦은 자구책입니다. 새 천 년 기독교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경직된 제도와 물음 없는 맹신이 빚은 자기 모순의 이 눈멀음으로부터 스스로 놓이고 세상을 풀어주는 것은, 좋은 소리였던 예수께로 돌아가 그 길의 정직한 증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위하여, 자신의 겉옷을 내어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겉옷은 거지에게 생계 수단이자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life style)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옛 시대의 낡은 구습"을 벗어버리고, 심지어 그 소경처럼 지금껏 살아온 생(生)조차도 포기하는 결단으로써, 복음의 새 길을 열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세상에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이 탄생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리는 빛보다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법인 등록에 부쳐"
조 태연 목사(이화여자대학교)
소경의 고백
설교하기 위해 교회에 가려고 아침 일찍 택시를 잡았습니다. 기사 옆자리엔 한 분이 더 앉아있었는데, 교대하러 가는 길이라 하였습니다. 잠깐이지만, 우리 셋이는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며 가고 있었습니다. 전철역이 가까워 돈을 꺼내려 하는데, 이게 왠 일입니까? 지갑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양복을 갈아입고 온 거예요. "어떡하나? 설교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오는데...." 요금은 천 오백 원 가량 나왔는데, 코트 주머니 속에는 손으로 가만히 세어보니 동전만 아홉 개 남았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이거라도 드리고 양해를 구할까?" "그러면 전철은 또 어떻게 타지?" "어차피 죄송한 것 양해를 크게 구함이 어떨까?" 말씀을 드리니, 두 분 기사 양반 선뜻 용납해주는 거예요.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창피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와중에 900원을 꼬옥 손에 쥐고 택시를 내렸습니다. 그 중 600원으로 전철을 탔습니다. 남은 300원으로 마을버스를 타면 교회까지는 제 시간에 무사히 갈 수 있습니다. 알뜰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안전하게 전철을 탔습니다. 긴 이동을 위해 편안한 자리도 잡았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도 설교 원고는 한 번 더 보면서 가야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갸륵한 생각으로 가방을 여는데, 이게 왠 일입니까? 지갑이 거기 있는 거예요.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지갑이 없을 때보다 호흡이 더 가빠지는 거예요. 얼마나 당혹스럽고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걸 이야기하는 제 심정을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십니까? 어쩌면 이렇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까?"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하시면서 그들의 눈멀음을 실랄하게 비판하신 적이 있는데(막 8:18. 참조, 4:12), 예수의 그 실랄한 공격이 바로 나를 두고 이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그날 아침, 눈이 있어도 무엇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아니, 이날 이때까지, 인생의 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만 살아왔습니다.
이 아침, 한 소경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함께 읽으신 본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마지막 기적 이야기입니다. 물론, 소경을 온전케 하는 치유의 기적입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그 거룩한 분노와 성전에서의 폭력 그리고 갈보리산 위에서의 처참한 죽음이 발생하는 마지막 한 주간 그 폭풍의 전야(前夜)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소경입니다. 치유가 전적으로 소경 자신의 의지를 따라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52절 상반절에는 치유의 말씀이 아니라 소경의 믿음에 대한 확증이 나옵니다. 예수의 이름이 여섯 차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도 오직 거지의 관점에서 이야기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아니라 바디매오와 그의 투쟁이 이 단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의 이야기 구조는 예수의 행위와 가르침보다는 시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바디매오의 간절한 자기투쟁을 강조합니다.
50절에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에게 나아가기 전에 겉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습니다. 거지들은 구걸할 때 시혜품을 받기 위해 자신의 겉옷을 앞에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 거지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예수께 달려가기 위해 벗어 던집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거지 편에서 지극히 고조된 감정의 표시입니다(왕하 7:15, 참조).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자신의 유일한 생의 수단을 던져버리는 동작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탈피하되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생(生)을 접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입니다.
새길교회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아침 함께 읽으신 오늘의 이야기를 나는 한 평생을 소경으로 살아온 저 자신의 이야기로 여러분께 들려드리려 합니다. 한 소경의 자전적 이야기로 들어보십시오.
걸인(乞人)의 일상(日常)
예루살렘으로 가던 예수와 제자들은 어느덧 여리고에 도달하였다. 요르단 저지대의 오아시스에 있는 도시였다. 해면보다 250 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한 여리고는 종려나무의 도시이다. 신약성서 시대의 여리고는 구약 시대보다 조금 남쪽에 있었다. 헤롯의 건축사업으로 생겨난 결과였다. 그가 이 곳에 겨울 궁전을 짓고, 이를 중심으로 경마장과 원형 경기장 등을 건축하는 등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는 30여 킬로미터 넘게 떨어졌고 길은 사나왔으니, 성도(聖都) 예루살렘에 당도하기까지는 꼬박 하룻길 거리였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마지막' 도시였다. 그만큼 가깝고 그렇게 마지막이었는지라, 거지들에게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덕 있는 순례객이나 여행객들로부터 자비를 구할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길을 걷는 자들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자들 가운데 있었다. 디매오의 아들이라며 사람들은 나를 "바디매오"라 불렀다. 하지만 여느 거지들과도 달리 나는 앞을 보지 못했다. 장님이었던 것이다. 어찌하랴. 한 사람이 앞을 보고 못 보고 하는 것이 나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체험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듣는 것' 뿐이며 '만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러운 자라 하며 몸의 접촉을 꺼렸다. 꺼림칙하다며 극단적으로 멀리했다. 무엇 하나 만질 수도 없었다. 아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따뜻한 보듬는 손길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다. 마음껏 만질 수 있고 또 나를 만져주는 것은 그저 누더기 겉옷뿐이었다. 신(神)께 벌받은 탓이라며 사람들은 나를 멸시하였다. 신의 저주를 온 몸에 지고 그렇게 나는 한평생을 살아왔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인생, 그것이 전부였다. 듣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리 밖에는 세상이 없었다. 사람이 다가오고 지나는 것은 소리를 통해 알았다. 목숨을 부지할 길이라고는 구걸뿐이었다. 여리고를 나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앉아 있는 일 그리고 구걸하는 일, 그것만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그렇다. 목숨을 구걸하며 그렇게 살아왔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신마저 버린 이 저주받은 인생을 나 자신인들 사랑할 수 있으랴. 하루하루 목숨을 구걸하는 일상이란, 매일매일 연명하는 것이며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었다. 일상은 잿빛으로 가득하였다. 아니, 온통 주검의 색깔뿐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죽음이 내게 있을까. 여느 때처럼, 가느다란 지팡이에 의지하여 여리고를 나왔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험하게 굽이치는 산모퉁이를 수없이 돌고 높은 산등성이를 여러 번 넘어야 한다 하였다. 예루살렘까지는 꼬박 하룻길인 데다 중간엔 아무런 마을도 없는지라, 순례객들은 언제나 아침 일찍 순례길을 출발하는 법이었다. 아니, 먼동이 트기도 전에 여리고를 빠져나오는 법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여느때처럼, 말라비틀어진 막대기에 의지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으로 향하였다. 길가의 늘 앉던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이상 46절).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순례객도 하루하루 늘어가고 있었다. 자연, 구걸하는 이들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더 많은 발자국 소리를 듣겠지. 다윗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이니 저들의 발걸음은 얼마나 경건할까. 이집트에서 조상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뵈러 가는 자들이니, 우리를 향한 저들의 마음은 야훼를 닮아 구원으로 가득할까? 아니면, 내 몸을 저주한 야훼처럼 또 그를 섬기는 모든 사람들처럼 나를 멸시하고 내 몸을 저주할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은 유난히도 많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겉옷을 벗어 주욱 앞에 앉았다. "야훼의 구원이여! 당신의 자비여!" 이 옷안에는 순례객들의 자비와 야훼의 구원이 담길까? 아니면, 그 안에는 언제나 저주받은 몸만이 있었던 것처럼 몸둥이 만한 모멸과 저주만이 담긴 채 돌아올까? 인생의 살아보지 못한 순간들이 늘 벅찬 희망으로 가득한 법은 아니다. 아니, 저주받은 잿빛 인생들에게는 오히려 체념과 절망이 익숙한지도 모를 일이다. 수많은 발자국의 소리가 멀리서 다가와 예루살렘 쪽으로 이내 사라져갔다. 먼지만 일으킬 뿐 겉옷은 그냥 그대로였다. "조금 있으면 이 소리도 끊기겠지."
고함 속의 고요
겉옷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즈음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의 소리는 달랐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리로 오는 듯하였다. 곁에서 목숨을 구걸하던 이가 말하였다. 오고 있는 자가 예수라 하였다.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채 그가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 소리는 내게 구원일까? 아니면, 여느때처럼 저주일까? 하지만 이들마저 지나치면 벗어놓은 이 옷 속엔 신의 저주와 인간의 모멸만 남고 말겠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힘을 다해 고함을 쳤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이상 47절).
그러나 이 자들도 여느 행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사탄에게 대하듯 저들은 나를 저주하였다(마가에서 에피티마오 라는 말은 "저주하다"라고 번역함이 더 적합하다). 뿐만 아니라 내게 침묵을 강요하였다(1장 25절 등을 보면, 소리의 억제는 마귀에게만 하는 행위이다. 물론 나중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말이다). 참을 수 없었다. 또 하루가 이렇게 마감하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더욱 고함을 질러댔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또 하루가 마감하듯 내 인생 전체가 저주와 모멸로 점철하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가 예수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필사(必死)의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여!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상 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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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 모든 것이 멎어버렸다. 지나가는 순례객들의 발걸음도 멈추었고 저들의 발자국 소리도 멎어버렸다. 죽어가던 나의 고함이 그 분의 귀에 들린 것일까.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정지된 이 '순간'의 정적 속에 나즈막히 인자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를 부르라." 목소리 사나운 나의 그 큰 '고함'에 비하면 그 분의 인자한 음성은 '고요' 그 자체였다. 하늘도 멈추어버린 정적 속에 그 분의 고요와 나의 고함은 그렇게 공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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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저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따뜻함을 흉내냈는지, 저들은 내게로 와 가까이에서 말을 걸었다. "안심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49절). 나를 향한 저들의 멸시와 저주가 인정과 따듯함으로 바뀐 것이다. 아, 처음이었다. 저들이 내 몸을 만지고 보듬진 않았을지라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내게 말을 건네며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멀리서 들려온 그 분의 인자한 음성을 듣고 이 자들의 이렇게 따뜻함을 만지는 찰나, 이 짧은 순간에, 내 인생에는 조금씩 빛이 스미고 있었다. 내게는 세상이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지체함 없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겉옷을 팽개친 채 나는 나를 부르시는 그 분께로 달려갔다. 아니, 돌진하였다. 그리곤 그 분 발 앞에서 허물어졌다. "당신께서 나를 부르시니, 내가 ... 내가 당신께 왔나이다. 당신께서 마음을 여시니 나도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이렇게 나신(裸身)이 되어 당신 앞에 있나이다"(이상 50절).
예의 고요한 목소리로 그 분이 내게 물었다. "무엇을 원하느냐?"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듣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 아니,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듣는 엄마의 소리였다: "아가, 무엇을 해줄까?" 이 감동의 순간, 내 속 깊이 있던 내 소리가 나도 모르게 그 분의 음성과 교호(交互)하였다. "아아, 볼 수만! 볼 수만 있다면!!" 조금의 꾸밈이나 가식이 없는 순수 그 자체의 소리였다. 그 분은 내게 참 인간이 되는 '새 길'을 열어 주었다. 세상이 환하게 밝아오듯, 내 인생의 뜨락엔 감당치 못하게 부신 빛이 비쳐오고 있었다(51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오, 놀라운 기적이었다! 내가 사람들을 의심하고 야훼께 대하여 회의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그는 나의 그 의심과 회의를 믿음이라 불러주었다. 그러니 저주의 하나님이 변하여 구원의 하나님이 되었다. 오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그 순간 내게는 세상이 보이길 시작했다. 늘 곁에 있었지만 처음으로 보는 걸인들의 휘둥그레진 얼굴들! 나를 멸시하다가 태도를 바꾸어 따뜻하게 다가오던 이 이름 없는 자들의 표정 없는 얼굴들! 그리고,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내 눈이 열리듯 나를 향해 세상도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겉옷을 내버리듯, 내 몸에 형적처럼 남아있던 신의 저주도 사라졌다. 이제는 생(生) 안에 야훼의 자비와 은총만이 가득하다.
예수는 내게로 가라 하나 신의 은총을 입은 이는 갈 수 없었다. 어차피 저주받고 쓸모 없던 인생, 차라리 오라 하면 따르고 싶었다! 아니, 신의 저주가 온 몸을 휘감았던 나같은 이를 구원하신 그 분와 함께 있고팠다! 주검의 수많은 잿빛 인생들에게 생명을 일깨우고팠다! 인생의 진정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에게 광명한 세상을 열어가시는 당신을, 끝내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가는 곳이 예루살렘이든 죽음의 골짜기든 그 어디든 상관없이 말이다. 새로운 길과 따름의 그 결단이, 거룩한 분노와 폭력 그리고 처참한 죽음만이 기다리는 폭풍의 전야(前夜)일지라도 말이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52절).
빛으로의 초대
1. 누가 소경인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복음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소경 이야기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도 하나의 상징입니다. 마가는, 아무리 건강하고 또 훌륭한 자라도 인생의 진정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일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문학가 마가는 제일 먼저 제자들을 희생물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복음을 철저한 비극으로 만든 것입니다. 새 길을 제시하려는 예수는 마침내 죽지만 제자들은 끝내 깨닫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당신께서 걸으시는 새 길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의 소경 됨을 꾸짖으십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막 8:17-18). 그 틈에 소경은 예수께 치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육신이 온전한 자들에게 묻습니다: "소경은 과연 누구인가? 인생의 진정 중차대한 것을 보지 못하는 너희가 소경이 아니냐?" 육신이 온전한 열두 명 남성 제자들을 마가가 앞 못 보는 장님으로 그려내듯, 세상의 모든 이들이 소경임을 마가는 폭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소경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소경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의도를 보지 못하고 인생의 더욱 중차대한 것에 눈을 감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보다도 돈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을 집착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나은 이를 향하여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불공정하고 무모한 비양심적 행위를 일삼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 땅의 불행한 자나 경쟁력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선입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맘모니즘의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뜻없이 경쟁과 경쟁자 죽이기에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로 소경 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장님들입니다! 결단코 그러합니다! 소경임을 거부하는 자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세상의 모든 이들이 어김없이 소경인데, 누구든 자신만은 아니라 하면 더욱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우리의 부패한 사회야말로, 사탄적 카오스의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2. 복된 소리(福音) 그리고 새 길
새길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마가의 예수 이야기는 과연 '소리의 이야기'입니다. 회개의 촉구로써 가치의 대전환을 부르짖던 세례 요한이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존재하였다면(막 1:2-4), 이 소리를 '듣고' 진정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는 이윽고 하늘로부터 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1:11). 그가 드디어 '소리'를 얻은 것입니다. 요한이 광야의 소리로 존재한 것처럼, 하늘의 소리를 얻은 예수는 세상에 소리로 존재했습니다. 그리하여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인은 예수의 소리를 '듣고' 대문을 박차고 나가 예수를 만지고 몸의 구원을 얻었다(5:27).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의 소리를 '듣고' 예수와 논쟁을 벌인 후 예수를 이긴 후 딸의 온전함을 이루어냅니다(7:25).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만난 바 여리고의 그 소경 바디매오도 예수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찬란한 빛을 얻습니다(10:47). 모든 이들이 그 소리를 '들음으로써' 스스로 나음을 얻고 온전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소리로 존재하셨기 때문인지, 현대 신약학은 복음을 "예수 이야기"라고 정의합니다. 예수 이야기는 복음이며, 복된 소리 곧 좋은 소리(Good News)입니다. 모든 예수 이야기 곧 예수 담론이야말로 복음입니다.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새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경이었다가 광명한 빛을 얻은 바디매오는, 오늘의 현대인들도 이 소리를 들으면 동일한 치유와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를 만난 성서의 많은 인물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예수의 이야기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 10:14-17). 구원하는 힘이 예수의 이야기 곧 복음에 있는 것은, 복음의 새 길을 제시하신 예수의 방식이야말로 생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3. 소리는 빛보다 아름답다!
예수의 길을 따르며 예수의 새 길을 제시하려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이제 소경은 물음을 바꿉니다: "우리들 자신이 소리일 순 없을까? 빛으로의 초대를 위하여 '소리'가 될 순 없을까?"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의 교우 여러분, 어두운 세상에서 소경된 모든 이들에게, 소리는 빛보다 아름답습니다. 소리가 빛보다 귀한 것은, 무엇을 볼 수 없는 소경에게 소리가 광명한 빛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탄적 카오스의 어둠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예수 복음의 새 길을 제시하기란, 우리가 예수의 소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첫째,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교회 내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교회 밖으로는 우리 사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둘째, 오직 예수의 방식 곧 예수의 길만이 복음의 새 길이며 교회와 인류의 살 길임을 믿고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만이 길이라 하면 기독교 이천 년을 지배해온 배타적 기독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방식 곧 예수의 길이라 하는 것입니다. 맘모니즘의 세상에서, 빵을 가리켜 당신의 몸이라며 세상의 빵으로 만인의 밥으로 존재하셨던 예수의 삶과 그분의 방식(길)이 우리의 새 길임을 확신하고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소리로 존재하는 것이란 스스로 '소리'였던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지나치게 경직되고 제도화되어 화석처럼 굳어버린다면, 결단코 이천 년 기독교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와 예수 이야기로 돌아가자는 것은 새롭게 예수를 만나는 이들의 뒤늦은 자구책입니다. 새 천 년 기독교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경직된 제도와 물음 없는 맹신이 빚은 자기 모순의 이 눈멀음으로부터 스스로 놓이고 세상을 풀어주는 것은, 좋은 소리였던 예수께로 돌아가 그 길의 정직한 증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위하여, 자신의 겉옷을 내어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겉옷은 거지에게 생계 수단이자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life style)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옛 시대의 낡은 구습"을 벗어버리고, 심지어 그 소경처럼 지금껏 살아온 생(生)조차도 포기하는 결단으로써, 복음의 새 길을 열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세상에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이 탄생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리는 빛보다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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