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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원

사도행전 최현섭............... 조회 수 1460 추천 수 0 2008.07.24 21: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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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40-41 
설교자 : 최현섭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1.3.4 주일설교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는 예배에 전임 교육부장이니 설교를 맡아 달라는 우정원 현임 교육부장님의 명을 받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사정을 뻔히 알면서 거절을 하면, 그렇게 야속하고 얄미울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터라 아무 소리도 못하고 수락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졸업과 입학을 동시에 축하하는 예배에 맞는 말씀을 찾기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절기상 3.1절과 사순절도 고려한 주제를 잡기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후회를 해도 때가 늦은 터라, 입학과 졸업에만 초점을 둘 결심을 하고, 말씀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찾아, 여기 저기 기웃거리기도 하고 귀를 쫑긋하게 세워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학 졸업식 때문에 교통 체증이 극심했다는 언론 보도도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남들 축하 때문에 왜 우리가 피해를 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어느 운전자의 불평도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습니다. 신문에 나는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소식, 새내기 학부모에게 하는 초등학교 입학 준비 안내도 주의 깊게 읽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 졸업식장과 입학식장에 일부러 가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근래에 보기 드믄 각별한 정경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교정 전체를 뒤덮고 있는 생기, 곳곳에서 들리는 즐겁고 행복한 웃음들, 그러면서도 무슨 의미 심장한 일을 위해 떠나는 듯한 진지한 표정들 말입니다. 분명히 그 모습은 보통의 거리와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아주 특별한 것이었으며, 바라보는 저까지 묘한 흥분으로 몰아 넣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오늘 입학과 졸업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엇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입학과 졸업은 기쁘고 신이 나는 일이지요? 자매 형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회가 깊지 않습니까? 혹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으시는가요? 저는 그랬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때의 생기, 웃음, 진지한 표정, 가벼운 흥분을 다시 한번 느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입학하고 졸업하는 젊은이들이 부럽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기, 웃음, 진지함, 흥분을 가능케 하는 뿌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얻은 단어가 희망과 자신감이었습니다. 입학과 졸업식장에 생기와 웃음과 의미심장한 표정과 묘한 흥분이 가득한 까닭은, 입학과 졸업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새로운 희망과 자신감 때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입학과 졸업은 그때까지 처했던 위치와 겪었던 경험과 나누었던 관계, 그리고 이룩했던 업적을 떠나, 새로운 위치와 경험과 관계와 업적으로 나아가는 전환점(turning point)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입학과 졸업은 교우 관계나 성격 때문에 적응이 힘들었던 사람도 변신을 꾀할 수 있게 하며, 성적이 나빴거나 문제가 많았던 학생들도 새로운 생활을 설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요 자신감이며, 바로 그러한 희망과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입학식과 졸업식에서는 우등생이건 열등생이건, 모범생이건 문제아이건 누구나 신이 나고, 웃음이 절로 나오며, 모르는 사이에 흥분도 생겨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같은 원리는 입학과 졸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일상 생활에서도, 조직체가 유지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고, 무엇이든지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으면, 어린이건, 어른이건, 교회건, 회사이건, 국가이건 생기와 웃음과 흥분과 감회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희망이 없기 때문에 매사에 짜증이 나고, 무슨 일을 해도 힘겹게만 느껴지며,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일할 의욕이 나지 않으며 문제를 타개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괜한 허세를 부리거나 공연히 남을 괴롭히는 것도 알고 보면 희망과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희망을 빼앗고 자신감을 억제하는 행위와 사람들은 개인을 불행으로 몰아 넣고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공적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조그마한 실수를 침소 봉대하여 기를 꺾고 못살게 구는 언행, 갈등과 분쟁을 부추겨 권력을 유지시키려는 집단, 정의와 원칙 세우기보다 패거리 짓기와 편법을 일삼는 무리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좌절감과 고통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분명 공적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입학과 졸업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들의 희망과 자신감을 앗아갈 공적들이 설자리가 없도록 가일층 노력하겠다는 다짐도 함께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들이 주위에 맴돌고 위세를 떨치는 한, 이들의 희망과 자신감은 금방 위축되고 손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하는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적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제재도 가하며, 압력을 가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침략과 찬탈과 유린을 숨기고 왜곡하려는 일본에 항의도 해야 하며, 국리민복과 정의 확립보다 정권 창출에만 매달리는 정치권과 하나님의 빛을 가리는 거짓 종교인들을 비판하는 것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하고 상황 개선을 위하여 노력을 한다 하여도, 가슴을 뜨겁게 하였던 희망과 자신감은 시시각각으로 부딪치는 생활속의 걸림돌에 의하여 약화되고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특히,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서러움을 당할 때, 자신이 너무나 모자라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희망과 자신감은 여지없이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실직을 하거나 사업에 실패를 하였을 때, 몹쓸 질병 때문에 고통을 받을 때, 믿었던 친구가 배신을 했을 때, 잘하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해도 실수가 반복될 때 가지는 좌절감과 무력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이같은 고통과 어려움과 모자람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베드로 할아버지의 삶을 통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나현숙 자매께서 읽은 사도행전 말씀에 따르면, 베드로 할아버지는 하루에 삼천 명씩이나 세례를 받게 하는 명설교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객관적으로 보면, 예수님 제자들에게는 희망도 자신감도 가지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라서 사회가 어수선할 뿐만 아니라, 한편에서는 예수 제자들을 제거하려는 이들이 날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 할아버지는 담대하게 나서 설교를 하였고,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으며, 그 결과 실로 엄청난 선교의 결실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담대함과 능력과 결실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성격에 따르면 그것은 성령의 충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보면, 베드로 할아버지의 주님 나라를 향한 강한 희망과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그 배경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시다 시피, 베드로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희망과 자신감이 넘치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나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고, 낮아짐으로써 복을 누리는 하늘나라 원리를 확실히 깨닫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마지막 산상 기도를 드리러 갔을 때도, 잠만 쿨쿨 잘 만큼 상황 인식도 떨어지는 분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고도, 예수님께서 잡히신 날 저녁때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정도로 이중적이었습니다. 새벽닭이 울자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현장에 가까이 가지 못할 만큼 겁이 많았고, 그 후에도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마리아 등 여성 신도들로부터 예수님 부활 소식을 전해들을 정도로 약한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분이 그 살벌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그리고 수 많은 이방인들을 향해 예수 전도에 앞장섰고, 성전 앞의 앉은뱅이를 향해 "금과 은은 내게 없어도 주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외쳐 그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까지 행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그의 희망과 자신감을 강인하게 하기 위한 예수님의 끊임없는 연단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야 어떠하든, 성경은 베드로 할아버지가 예수님으로부터 어떠한 연단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위로 걸어오도록 강요받았는가 하면, 동네에 나가 먹을 것을 얻어오도록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커다란 연단은 "사단아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질책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같으면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면 가만히 계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어도 속이 뒤집히고 육탄전이라도 치루고 싶지 않겠습니까? 좀 큰 소리로 나무라기만 해도 서운하고 관계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 할아버지는 그 힘든 연단들을 흔들림 없이 견뎌내었고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끔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는 칭찬 몇 마디에 만족하고 말입니다. 그가 받은 견디기 힘든 연단은 분명히 그를 더욱 강하게 하였고 담대하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사형을 받을 때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겠다고 자청할 정도로 든든한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우리가 자주 접하는 고통과 서러움과 모자람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나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려는,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역군으로 삼으려는 예수님의 연단이라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고통과 서러움과 모자람을 당하는 순간은 여유를 갖기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소꿉장난을 하다가 흙이나 프라스틱으로 만든 과자나 떡을 적게 주었다고 서럽게 우는 어린아이들처럼 말입니다. 당할 때는 그것이 가장 절박하고 중요하며 해결이 되지 않으면 못견딜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이 커지고 상황이 달라지면 한바탕 웃음으로 넘길 수도 있었던 것인데도 말입니다. 당면한 고통과 서러움과 모자람을 주님의 연단으로 보는 것, 그리하여 그 속에 숨겨 있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려 하고, 그에 따라 상황에 대처하려 하는 것은, 상황을 달리 바라보는 일이며, 생각을 키우는 일이고, 그만큼 희망과 자신감을 강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고통과 서러움과 모자람 그 자체를 삶의 에너지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연단이란 고통과 서러움과 모자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 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가출이나 자살의 충동과 그 실행, 사람을 미워하고 친구를 못살게 굴었으며, 경거망동했던 지난날 한때의 잘못들은 쓰레기처럼 모두 잊어버리고,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진정한 연단이란 그러한 고통과 서러움과 모자람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것, 곁에 두면서 삶의 활력소요,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서러움과 모자람을 미워하고, 없었던 것처럼 버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서러움과 모자람을 이해하거나 해결해주기 위하여 헌신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을 버리고 감추기에 급급하기보다는 다시 보고 잘 모으며 삶의 교훈으로 삼고 필요한 곳에 쓰려는 마음이 있을 때, 고통받는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는 그것들을 자녀 교육에, 청소년 지도에, 인생 상담에 활용하고, 고통받고 서러움에 복받쳐 있으며, 모자람 때문에 푸대접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돕는 자원으로 활용하면 그보다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의 설교 제목을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원"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분명, 희망과 자신감은 생기와, 웃음과 진지한 표정과 흥분을 가져다줍니다. 또한, 베드로 할아버지처럼 견디기 힘든 고통과 서러움과 모자람을 주님의 연단으로 받아들이고 이겨내면 희망과 자신감이 강화되어 더욱 담대해지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서러움과 모자람을 삶의 에너지로 적극 이용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은 더욱 귀하고 아름다운 삶의 전략이요 신앙의 지혜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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