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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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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2001.4.29 주일설교 |
평신도교회를 표방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창립 15주년을 맞은 새길교회가 이제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이라는 산하 법인단체를 출산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새길 교회로서도 매우 의미 깊은 일이며 더 넓게는 한국교회와 사회에도 더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아름다운 시작이 되기를 우리모두 간절히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때 우리가 가질 생각과 뜻, 그리고 자세가 한층 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을 한번 깊이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오늘 주제와 성서 본문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새길교회 역사나 교회내부의 상황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한국사회와 교회 그리고 신학이라는 전체적 맥락에서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자성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함께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사회는 70-80년대를 민주화와 인권확보의 과제를 생명을 걸고 투쟁하여 왔으며 90년대 이후는 문민정부를 지나고 국민의 정부에 이르면서 개혁을 통한 사회전반의 제도적 민주화 확립을 고대하고 그 실현을 시도하여 왔지만 아직도 그 길은 험난하기만 한 상황임을 보게됩니다. 경제위기의 위협은 이 어려운 개혁의 수행에 또 하나의 부담을 주고있기도 합니다. 우리사회가 개혁을 이루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은 정치권의 무능력과 혐오스러울 정도의 부패한 관행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식민지성을 탈피하지 못함과 군사독재 정권 동안에 형성된 파시즘적 사고가 정치인이나 대중이거나 간에 사회 전반에 깊이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게되는데 (우리는 그 대표적 한 예를 지난 총선에서 나타났던 극단적인 지역주의의 행태를 들 수 있겠습니다) 요즈음 이 문제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오가고 있습니다. 파시즘이란 집단주의적 사고, 전체주의적 사고 등의 의미로 이해되었는데 요즈음에는 모든 권위주의적 사고를 의미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제국주의가 강제한 식민지 규율체제, 뒤이은 분단과 냉전, 한국전쟁이 결과한 반공 규율체제, 유신독재와 1980년대 어둠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생긴 집단적 심성이 한국사회의 내면적 결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공주의, 전체주의적 심성, 위계질서를 구조화하는 언어,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학교교육, 획일적, 폭력적인 군사문화, 군사화 된 생산현장과 회사조직, 여성을 내적 식민지로 만든 가부장주의,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약자, 소수를 타자화 시키는 가부장적 혈통주의 등, 이런 파시즘이 우리사회의 집단적 심성이며 지금우리의 모습이며 그래서 그것들이 일상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또 우리가 그것에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한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한양대 임지현 교수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금 임지현 교수와 강준만 교수가 일상적 파시즘을 가지고 열띤 논쟁을 하는 내용을 여기에 옮기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우리사회나 교회가 많은 개혁의 문제를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를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바로 우리 내면 속에 있는 이 파시즘적 사고, 혹은 우리가 비판하고 극복하고자하는 문제의식들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깊이 성찰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많은 비판적 견해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는 것인지? 우리는 얼마나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보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의식을 내면화하게 하는 강력한 장소가 학교와 교회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사고를 획일화시키고 다양성과 창의성을 죽이는 곳이 학교나 교회라는 사실은 슬픈 일입니다. 최근 자녀학습 참관 일에 학교에 다녀와서 속상해하는 학부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습 참관일 날 선생님은 그 동안 열심히 학생들을 훈련시킨 대로 학습을 진행하였는데, 주제가 빨강 색과 파랑 색에 관한 것이었답니다. 선생님은 찬 것은 파랑 색, 따뜻한 것은 빨강 색으로 설명하고 중간색의 상황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한 아이가 해를 노랑 색으로 칠했고 옆의 아이가 해설을 하게되었는데 그 아이는 이 해가 빨강 색이 아니니까 지는 해라고 하였더니 그림의 주인이 나는 뜨는 해를 그렸노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뜨는 해는 강렬하니까 빨강 색이어야 한다면서 다음부터 빨강 색으로 칠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도 아이가 고1때 우연히 반장을 맡았는데 전체 반장회의에 가면서 제 딴엔 친구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여러 요구들을 들고 가서, 머리를 좀 더 길게 해달라, 더울 때는 교실에서 윗저고리는 벗어도 되도록 해달라, 선생님의 폭력을 없게 해 달라 등등 요구를 했다가 주임교사에게 머리카락 뽑히고 일주일 동안 매일 불려 다니고 반성문 쓰고 운동권으로 지목 받아 가슴 졸이며 고등학교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서태지가 부른 교실 이데아 [매일 아침 7시 30분까지 우리를 조그만 교실에 몰아넣고 전국 900만 아이들 머리 속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는 바로 이런 집단 획일주의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은 한편으로는 복종, 순응하면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이 노래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들에게는 이미 획일주의가 내면화되어 있어 어느 상황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판단과 가치를 결정하는 지배적 기준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를 한국교회에다 적용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매주일 아침부터 4부-5부 혹은 7부씩 커다란 예배당에 모아놓고 1천만 교인들 머리속에 똑같은 것을 집어 넣고 있어'... 그런데 한국교회가 넣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순종, 복종, 헌신, 희생, 봉사, 물론 이러한 덕목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정되어야 하는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교직자에 대한 평신도의, 혹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태도를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권력이라는 것에 의해 강제되는 것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 입니다.
교실이건, 교회이건 현재 우리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파시즘적 사고의 기원 서사를 이대 김은실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진행한 소위 근대화 프로젝트에서부터 기인한다고 봅니다. 경제발전은 이루었으나 민주주의 실패를 결과한 그 프로젝트는 산업화, 현대화 서구화를 가치 지향하면서 자본주의적 산업화, 공산정권인 북한에 대한 방위, 민족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국가재건의 목표아래 온 국민을 집결시키고 통일화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철저한 반공이데올로기, 군사문화, 폭력문화의 일상화, 전통 지향에ㅡ 따른 성차별의 구조화와 남성중심적 사회지향, 그리고 민족/국가주의의 집단적 가치 구현 등으로 우리 사회구성원의 의식을 지배하였습니다. 박정희 근대화의 시기 곧 1961-1979년 사이 초등학교 때를 회상하면 공장의 굴뚝, 빨간 북한, 군인아저씨, 이순신이 재현하는 군사주의와 충(忠) 사상, 신사임당의 모성으로서의 여성성, 방위되어야 하는 우리의 금수강산인 영토, 애국심, 그리고 민족/국가의 절대성 등이라고 김교수는 말합니다. 곧 서구화, 군사주의, 지켜야하는 전통, 민족주의, 가부장적 성별체계와 같은 여러 가지 이념체계가 혼재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국가건설을 위해 동원되고 이용되었습니다. 미혼여성들은 산업 생산력으로 일/노동에 동원되었고 소위 공순이라 불렸던 어린 여성들이 오빠의 공부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면서 공장으로 공장으로 동원되었습니다. 그들이 소위 여성경제활동인구로 계산되고 있지만 저임금과 단순한 노동력으로 산업화에 동원되었는데 그들을 산업역군으로 미화하여 불렀습니다. 또 기혼여성들은 국가재건의 목표를 위해 가족계획이라는 국가사업에 그들의 몸이 도구적으로 이용되어 출산력 통제를 받았습니다. 소규모 자녀만 출산하는 여성의 몸이 더 근대적이라는 정치적 담론에서 생산-자녀가 많은 여성을 우리는 야만인이라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현대적 가치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소자녀 갖는 것을 사회적 욕구라기보다는 내재화된 여성 자신의 욕구라고 생각되도록 여성에게 가치이전을 시켰습니다.
이 경제 산업화 정책에 수많은 지성들이 저항하였고 아직도 그 영향의 거대함을 보면서 비판 또한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가운데서 어느새 우리내면에 그러한 의식이 자리잡고 그 가치를 어떤 상황에서는 나의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탈북여성의 얘기를 들어보면 진보적 사고를 가졌다는 남한 사람을 만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이 북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들의 태도가 싹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독한 반공정신, 그리고 가부장적 사고와 성차별 등의 의식이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내려져 지금도 지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새로이 다가오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한 예수를 따르던 그 수많은 군중이 어느새 군사력과 저항으로 민족을 구한다는 민족주의의 편에 서서 바라바를 선택하고 있는 장면을 여기서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가 거부해야할 전통적 모순들이 또 다른 상황에서는 오히려 나의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주일 교회이데아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발전, 성장의 사회논리에 적극 편승된 교회는 한편으로는 물질적 가치관을 신의 축복으로 신학화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지배하는 보다 중요한 힘은 근본주의 신학(그리고 신 정통주의 신학)의 확립이라고 보아야합니다. 근본주의 신학과 맥을 같이하는 신 정통주의 신학은 소위 세계적으로 2차대전 후 한동안 기독교계에 확산됩니다. 이 조류는 교회 밖으로의 엑소더스를 감행하였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제로서 등장했습니다. 신 정통주의 신학은 나치즘으로 인하여 600만 유대인 학살을 경험한 교회가 그 인간주의적인 파시즘의 폐해를 떨쳐버리기 위해 하나님을 절대 타자화하는 신학을 수립한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폐쇄성을 특성으로 하는 이 신학은 결국 탈 역사적 신앙을 결과하고 이런 신앙행태가 기독교의 신앙정형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른 것은 유대인들의 절대 타자화한 하나님을 우리와 관계있고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으로 회복시킨 것이었는데 다시 근본주의적인 이러한 신 정통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절대 타자로 우리와 결별시켜 놓은 것입니다.
한백교회 김진호 목사는 이 신정통주의 신학이 극도로 발달하는 인류문명과 대결하기 위해서 그것에 대치되는 반 근대적 신앙을 강조하였다고 말합니다. 극도로 기술화되는 인간 문명 앞에서 그 문명을 극복하고 인간존재의 상실한 본향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 교회를 내세웠고 곧 교회가 이세상의 문명적 가치를 극복할 유일한 곳이라고 하여 세상과 폐쇄적인 신앙 곧 탈역사적 신앙을 부추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실제에 있어 교회는 언제나 근대적 기술 문명의 이기를 적극적으로/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문명에 위협을 느끼는 인간에게 영혼의 고향, 종교의 고향, 마음의 안식, 평안과 위로, 이러한 종교적 기능의 장소로서 교회를 인식하게 만들었고 그런 안정을 위하여 축자영감에 대한 절대적 신봉, 반문명적인 영성적 열광주의, 성직자 권위의 전근대적 가부장주의, 확대된 가족주의로서의 교회의 폐쇄적 공동체주의 등, 한결같이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힘을 추구하는 반 근대적 가치를 교회 안에서 강화하였다는 것입니다. 점차 가속화되는 근대적 문명의 질주 속에서 모든 것이 생겼다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존재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근대적 인간을 향해, 변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인간에게 교회는 태고 또는 영원에 정향된 탈시간적이고 탈 역사적인 불변하는 절대가치를 판매하는 의미의 시장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김진호 목사는 표현합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교회는 한편으로는 물질적 현세관으로 절대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이 마비된 신비적 신앙체험이나, 평안과 위로라는 심리적 안정성으로, 그리고 영성적 열광주의로 종교성을 확보하면서 근대사회 속에서 존립하는 반 근대적 공간이 되고, 그리고 탈 역사적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교회생활에 충실하던 한 여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10년간 교회에 충성을 다하고 교회프로그램에 따라 살았고 교회의 소리만 들었더니 돌아보니까 그 기간동안의 사회 속에서의 자기역사가 없어져 버렸더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탈 역사적 신앙을 주입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교회의 이 같은 신앙교육은 한국교인들로 하여금 집단적 사고를 갖게 하였고 그것이 깊이 내면화되어 치유가 어렵게 된 지경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개인의 자선은 강조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사회윤리는 부재한 불균형된 그리스도인을 양산합니다. 제가 아는 분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그 남편이 자기부인을 극히 칭찬하였습니다. 내용인즉, 뜨거운 여름에 지나가는 칼갈이 아저씨를 집에 들어오게 하고 시원한 수박을 실컷 잡숫게 하는 것을 보고 감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도 참 훌륭한 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화가 더 진행되면서 놀라운 모습을 보게되었습니다. 그 남편이 전에 언론사에 고위직으로 있었는데 그때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못했느냐고 통렬히 남편을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선적 행위와 사회윤리적 의식이 전혀 별개로 되어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지독한 반공의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근본주의적 신앙태도는 반공의식 또한 절대적 가치로 확립시켜 놓은 것입니다. 곧 70년대 한국교회의 정형화는 반공정신, 탈 역사적 신앙 등으로 사회의 파시즘적 사고와 동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 자라온 우리들이 아무리 의식이 변화되었다해도 그 의식이 얼마나 일상에서 우리를 지배하며 깊이 내면화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새길을 걷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한국교회의 정형화된 신앙 행태들에 대하여 성찰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본문은 유명한 산상설교의 내용입니다. 7장은 산상설교를 마무리짓는 부분입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은 자칫 기독교를 비판하지 않는 종교로 생각하게 하는 오해의 여지도 있습니다. 1절에서는 모든 비판을 금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석가들은 3절만 예수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아마도 예수의 세리와 창녀에 대한 태도를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지적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본문에서 마태 전체의 상황을 연결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말씀이며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있는 상황에서 심판하지 않는 형제 자매애를 가르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5장에서 성내지 말 것과 제단에 제물 바치기 전에 먼저 화해하라는 것과 보복하지 않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등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화평을 위하여 지극한 자기 성찰 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5장 20절과 연결하여 보면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고 그리고 보다 철저한 비판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5장은 소극적 자기 성찰에 의하여 비판을 하지 않는 태도를 단순히 말한다 기보다는 비판의 기준에 자기자신도 비추어 보면서 철저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은 바로 철저하게 예수의 가르침의 기준에서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예수의 제자라면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 삶에 녹아들어져 있는 그러한 차원이 되어야 하며 그래야 율법사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당시 사람들의 삶과 완전히 유리된 다른 말로 표현해서 탈사회적인 율법중심주의에 매몰되었고 그것이 이중적인 위선적 행위로 나타났으며 삶의 정황과는 상관없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셨음을 우리는 복음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공동체 내에서는 지극히 자기 성찰적 태도를 진지하게 철저하게 가져야 함을 요구함은 물론,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는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비판을 하기 위하여 자기 성찰이 요구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산상설교는 정치적 사회적 설교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사회비판을 철저하게 하시는 예수께서 소극적으로 자기성찰이 더 앞서야 하고 다른 이를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를 펴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즉 자기 성찰은 성찰이되 자신이 가진 비판의 잣대에 스스로를 비추면서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곧 바리새인들의 탈사회적 율법주의로 인한 위선적 종교행위를 너희들도 가지고 있는지 늘 성찰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는 것은 혹 내가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에 묶인 것은 아닌가를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고 저는 봅니다.
우리사회에서 한국교회라는 전체적 토양위에서 살아온 우리들에게 신정통주의적 신학에 의한 신앙 정형이 없을 수 없으며 우리 내면에 그러한 신앙행태가 깊이 자리하여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탈 역사적이거나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적 신앙태도나 또 혹은 지나친 영성적 열광주의가 나에게도 내면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런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눈에 있는 들보가 아니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신정통주의 신앙에 서 있는 교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까봐 조심하고, 그 비슷하게 보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남녀평등한 신앙전통에 선다고 하면서 얼마만큼 그것에 철저합니까? 운영위원장을 여성으로 세운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여성자신들은 얼마만큼 평등의식에 서 있습니까? 지금이대로가 얼마나 편한 것인데 무엇 굳이 여성을 내세울 것 없지 않나 싶을 때도 많을 것입니다. 한박사님이 지난 창립기념주일에 향유부은 여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탈 가부장적 전통을 계승하며 사는 것이 새길교회의 자랑스러운 면모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 속에 자리잡은 가부장적 질서들을 떨치고 일어나는 일은 고통스럽기 조차 한 것입니다. 남성들은 가끔씩 자기 어머니를 매우 고양시켜 전합니다. 사생결단으로 자식 살리려고 온갖 희생을 하시는 어머니에 대한 찬양은 참으로 숭고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성찬양이 한편으로는 여성에게 계속 희생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됨을 경험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그렇게 찬양하는 어머니의 봉양은 자기 부인의 몫으로 요구하지요). 사람이 태어나서 자립하는 것이 제이 늦은 동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입니다. 동물들은 태어나자 곧 스스로 일어서고 활동을 하지만 인간은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기를 10년 넘게 하고도 모자라고 요즈음은 결혼 후에도 아프터 서비스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감당을 어머니들이 전통적으로 해왔습니다. 만약 인간의 자립이 어려서부터 실시된다면 어머니의 희생은 훨씬 더 줄어들 것입니다. 다리미질, 밥하는 것, 청소하는 것에서 자기에게 속한 것을 어머니를 시키지만 않아도 어머니들은 훨씬 자유로울 것입니다. 남편들이 하는 것은 설거지 해주는 것, 청소 해 주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자기가 으레히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안해도 될 것이지만 자기가 해주는 것입니다. 만약 집안 어느 구석에 먼지가 쌓이면 남편들은 왜 이렇게 먼지가 쌓였느냐고 역정을 냅니다. 여성들은 누구에게 따지지 않고 그냥 자기가 청소합니다. 우리 삶 속에 깊게 들어앉은 가부장적 사고로부터 여기 앉은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살기 어려워서 평안과 위로를 구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를 따르고 사랑하며 그분과 함께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앞길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로만 진행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들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편안한 예수의 길을 따르려고 나선 것이 새길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한국교회 전체를 향하여 높은 목소리를 낼 경우도 생길지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가 '아니오'를 용기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비판하는 파시즘적 신앙에 우리가 내면화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신앙형태는 지금과는 좀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러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요구됨은 지금 시대에 변화된 신앙형태가 요구되기 때문이고 새길교회는 그 변화의 대열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제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오늘도 나에게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예수의 말씀을 다시 깊이 생각하여 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우리사회는 70-80년대를 민주화와 인권확보의 과제를 생명을 걸고 투쟁하여 왔으며 90년대 이후는 문민정부를 지나고 국민의 정부에 이르면서 개혁을 통한 사회전반의 제도적 민주화 확립을 고대하고 그 실현을 시도하여 왔지만 아직도 그 길은 험난하기만 한 상황임을 보게됩니다. 경제위기의 위협은 이 어려운 개혁의 수행에 또 하나의 부담을 주고있기도 합니다. 우리사회가 개혁을 이루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은 정치권의 무능력과 혐오스러울 정도의 부패한 관행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식민지성을 탈피하지 못함과 군사독재 정권 동안에 형성된 파시즘적 사고가 정치인이나 대중이거나 간에 사회 전반에 깊이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게되는데 (우리는 그 대표적 한 예를 지난 총선에서 나타났던 극단적인 지역주의의 행태를 들 수 있겠습니다) 요즈음 이 문제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오가고 있습니다. 파시즘이란 집단주의적 사고, 전체주의적 사고 등의 의미로 이해되었는데 요즈음에는 모든 권위주의적 사고를 의미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제국주의가 강제한 식민지 규율체제, 뒤이은 분단과 냉전, 한국전쟁이 결과한 반공 규율체제, 유신독재와 1980년대 어둠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생긴 집단적 심성이 한국사회의 내면적 결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공주의, 전체주의적 심성, 위계질서를 구조화하는 언어,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학교교육, 획일적, 폭력적인 군사문화, 군사화 된 생산현장과 회사조직, 여성을 내적 식민지로 만든 가부장주의,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약자, 소수를 타자화 시키는 가부장적 혈통주의 등, 이런 파시즘이 우리사회의 집단적 심성이며 지금우리의 모습이며 그래서 그것들이 일상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또 우리가 그것에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한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한양대 임지현 교수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금 임지현 교수와 강준만 교수가 일상적 파시즘을 가지고 열띤 논쟁을 하는 내용을 여기에 옮기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우리사회나 교회가 많은 개혁의 문제를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를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바로 우리 내면 속에 있는 이 파시즘적 사고, 혹은 우리가 비판하고 극복하고자하는 문제의식들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깊이 성찰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많은 비판적 견해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는 것인지? 우리는 얼마나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보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의식을 내면화하게 하는 강력한 장소가 학교와 교회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사고를 획일화시키고 다양성과 창의성을 죽이는 곳이 학교나 교회라는 사실은 슬픈 일입니다. 최근 자녀학습 참관 일에 학교에 다녀와서 속상해하는 학부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습 참관일 날 선생님은 그 동안 열심히 학생들을 훈련시킨 대로 학습을 진행하였는데, 주제가 빨강 색과 파랑 색에 관한 것이었답니다. 선생님은 찬 것은 파랑 색, 따뜻한 것은 빨강 색으로 설명하고 중간색의 상황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한 아이가 해를 노랑 색으로 칠했고 옆의 아이가 해설을 하게되었는데 그 아이는 이 해가 빨강 색이 아니니까 지는 해라고 하였더니 그림의 주인이 나는 뜨는 해를 그렸노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뜨는 해는 강렬하니까 빨강 색이어야 한다면서 다음부터 빨강 색으로 칠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도 아이가 고1때 우연히 반장을 맡았는데 전체 반장회의에 가면서 제 딴엔 친구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여러 요구들을 들고 가서, 머리를 좀 더 길게 해달라, 더울 때는 교실에서 윗저고리는 벗어도 되도록 해달라, 선생님의 폭력을 없게 해 달라 등등 요구를 했다가 주임교사에게 머리카락 뽑히고 일주일 동안 매일 불려 다니고 반성문 쓰고 운동권으로 지목 받아 가슴 졸이며 고등학교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서태지가 부른 교실 이데아 [매일 아침 7시 30분까지 우리를 조그만 교실에 몰아넣고 전국 900만 아이들 머리 속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는 바로 이런 집단 획일주의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은 한편으로는 복종, 순응하면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이 노래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들에게는 이미 획일주의가 내면화되어 있어 어느 상황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판단과 가치를 결정하는 지배적 기준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를 한국교회에다 적용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매주일 아침부터 4부-5부 혹은 7부씩 커다란 예배당에 모아놓고 1천만 교인들 머리속에 똑같은 것을 집어 넣고 있어'... 그런데 한국교회가 넣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순종, 복종, 헌신, 희생, 봉사, 물론 이러한 덕목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정되어야 하는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교직자에 대한 평신도의, 혹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태도를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권력이라는 것에 의해 강제되는 것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 입니다.
교실이건, 교회이건 현재 우리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파시즘적 사고의 기원 서사를 이대 김은실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진행한 소위 근대화 프로젝트에서부터 기인한다고 봅니다. 경제발전은 이루었으나 민주주의 실패를 결과한 그 프로젝트는 산업화, 현대화 서구화를 가치 지향하면서 자본주의적 산업화, 공산정권인 북한에 대한 방위, 민족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국가재건의 목표아래 온 국민을 집결시키고 통일화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철저한 반공이데올로기, 군사문화, 폭력문화의 일상화, 전통 지향에ㅡ 따른 성차별의 구조화와 남성중심적 사회지향, 그리고 민족/국가주의의 집단적 가치 구현 등으로 우리 사회구성원의 의식을 지배하였습니다. 박정희 근대화의 시기 곧 1961-1979년 사이 초등학교 때를 회상하면 공장의 굴뚝, 빨간 북한, 군인아저씨, 이순신이 재현하는 군사주의와 충(忠) 사상, 신사임당의 모성으로서의 여성성, 방위되어야 하는 우리의 금수강산인 영토, 애국심, 그리고 민족/국가의 절대성 등이라고 김교수는 말합니다. 곧 서구화, 군사주의, 지켜야하는 전통, 민족주의, 가부장적 성별체계와 같은 여러 가지 이념체계가 혼재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국가건설을 위해 동원되고 이용되었습니다. 미혼여성들은 산업 생산력으로 일/노동에 동원되었고 소위 공순이라 불렸던 어린 여성들이 오빠의 공부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면서 공장으로 공장으로 동원되었습니다. 그들이 소위 여성경제활동인구로 계산되고 있지만 저임금과 단순한 노동력으로 산업화에 동원되었는데 그들을 산업역군으로 미화하여 불렀습니다. 또 기혼여성들은 국가재건의 목표를 위해 가족계획이라는 국가사업에 그들의 몸이 도구적으로 이용되어 출산력 통제를 받았습니다. 소규모 자녀만 출산하는 여성의 몸이 더 근대적이라는 정치적 담론에서 생산-자녀가 많은 여성을 우리는 야만인이라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현대적 가치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소자녀 갖는 것을 사회적 욕구라기보다는 내재화된 여성 자신의 욕구라고 생각되도록 여성에게 가치이전을 시켰습니다.
이 경제 산업화 정책에 수많은 지성들이 저항하였고 아직도 그 영향의 거대함을 보면서 비판 또한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가운데서 어느새 우리내면에 그러한 의식이 자리잡고 그 가치를 어떤 상황에서는 나의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탈북여성의 얘기를 들어보면 진보적 사고를 가졌다는 남한 사람을 만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이 북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들의 태도가 싹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독한 반공정신, 그리고 가부장적 사고와 성차별 등의 의식이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내려져 지금도 지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새로이 다가오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한 예수를 따르던 그 수많은 군중이 어느새 군사력과 저항으로 민족을 구한다는 민족주의의 편에 서서 바라바를 선택하고 있는 장면을 여기서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가 거부해야할 전통적 모순들이 또 다른 상황에서는 오히려 나의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주일 교회이데아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발전, 성장의 사회논리에 적극 편승된 교회는 한편으로는 물질적 가치관을 신의 축복으로 신학화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지배하는 보다 중요한 힘은 근본주의 신학(그리고 신 정통주의 신학)의 확립이라고 보아야합니다. 근본주의 신학과 맥을 같이하는 신 정통주의 신학은 소위 세계적으로 2차대전 후 한동안 기독교계에 확산됩니다. 이 조류는 교회 밖으로의 엑소더스를 감행하였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제로서 등장했습니다. 신 정통주의 신학은 나치즘으로 인하여 600만 유대인 학살을 경험한 교회가 그 인간주의적인 파시즘의 폐해를 떨쳐버리기 위해 하나님을 절대 타자화하는 신학을 수립한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폐쇄성을 특성으로 하는 이 신학은 결국 탈 역사적 신앙을 결과하고 이런 신앙행태가 기독교의 신앙정형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른 것은 유대인들의 절대 타자화한 하나님을 우리와 관계있고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으로 회복시킨 것이었는데 다시 근본주의적인 이러한 신 정통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절대 타자로 우리와 결별시켜 놓은 것입니다.
한백교회 김진호 목사는 이 신정통주의 신학이 극도로 발달하는 인류문명과 대결하기 위해서 그것에 대치되는 반 근대적 신앙을 강조하였다고 말합니다. 극도로 기술화되는 인간 문명 앞에서 그 문명을 극복하고 인간존재의 상실한 본향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 교회를 내세웠고 곧 교회가 이세상의 문명적 가치를 극복할 유일한 곳이라고 하여 세상과 폐쇄적인 신앙 곧 탈역사적 신앙을 부추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실제에 있어 교회는 언제나 근대적 기술 문명의 이기를 적극적으로/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문명에 위협을 느끼는 인간에게 영혼의 고향, 종교의 고향, 마음의 안식, 평안과 위로, 이러한 종교적 기능의 장소로서 교회를 인식하게 만들었고 그런 안정을 위하여 축자영감에 대한 절대적 신봉, 반문명적인 영성적 열광주의, 성직자 권위의 전근대적 가부장주의, 확대된 가족주의로서의 교회의 폐쇄적 공동체주의 등, 한결같이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힘을 추구하는 반 근대적 가치를 교회 안에서 강화하였다는 것입니다. 점차 가속화되는 근대적 문명의 질주 속에서 모든 것이 생겼다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존재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근대적 인간을 향해, 변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인간에게 교회는 태고 또는 영원에 정향된 탈시간적이고 탈 역사적인 불변하는 절대가치를 판매하는 의미의 시장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김진호 목사는 표현합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교회는 한편으로는 물질적 현세관으로 절대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이 마비된 신비적 신앙체험이나, 평안과 위로라는 심리적 안정성으로, 그리고 영성적 열광주의로 종교성을 확보하면서 근대사회 속에서 존립하는 반 근대적 공간이 되고, 그리고 탈 역사적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교회생활에 충실하던 한 여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10년간 교회에 충성을 다하고 교회프로그램에 따라 살았고 교회의 소리만 들었더니 돌아보니까 그 기간동안의 사회 속에서의 자기역사가 없어져 버렸더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탈 역사적 신앙을 주입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교회의 이 같은 신앙교육은 한국교인들로 하여금 집단적 사고를 갖게 하였고 그것이 깊이 내면화되어 치유가 어렵게 된 지경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개인의 자선은 강조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사회윤리는 부재한 불균형된 그리스도인을 양산합니다. 제가 아는 분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그 남편이 자기부인을 극히 칭찬하였습니다. 내용인즉, 뜨거운 여름에 지나가는 칼갈이 아저씨를 집에 들어오게 하고 시원한 수박을 실컷 잡숫게 하는 것을 보고 감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도 참 훌륭한 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화가 더 진행되면서 놀라운 모습을 보게되었습니다. 그 남편이 전에 언론사에 고위직으로 있었는데 그때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못했느냐고 통렬히 남편을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선적 행위와 사회윤리적 의식이 전혀 별개로 되어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지독한 반공의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근본주의적 신앙태도는 반공의식 또한 절대적 가치로 확립시켜 놓은 것입니다. 곧 70년대 한국교회의 정형화는 반공정신, 탈 역사적 신앙 등으로 사회의 파시즘적 사고와 동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 자라온 우리들이 아무리 의식이 변화되었다해도 그 의식이 얼마나 일상에서 우리를 지배하며 깊이 내면화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새길을 걷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한국교회의 정형화된 신앙 행태들에 대하여 성찰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본문은 유명한 산상설교의 내용입니다. 7장은 산상설교를 마무리짓는 부분입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은 자칫 기독교를 비판하지 않는 종교로 생각하게 하는 오해의 여지도 있습니다. 1절에서는 모든 비판을 금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석가들은 3절만 예수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아마도 예수의 세리와 창녀에 대한 태도를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지적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본문에서 마태 전체의 상황을 연결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말씀이며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있는 상황에서 심판하지 않는 형제 자매애를 가르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5장에서 성내지 말 것과 제단에 제물 바치기 전에 먼저 화해하라는 것과 보복하지 않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등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화평을 위하여 지극한 자기 성찰 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5장 20절과 연결하여 보면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고 그리고 보다 철저한 비판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5장은 소극적 자기 성찰에 의하여 비판을 하지 않는 태도를 단순히 말한다 기보다는 비판의 기준에 자기자신도 비추어 보면서 철저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은 바로 철저하게 예수의 가르침의 기준에서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예수의 제자라면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 삶에 녹아들어져 있는 그러한 차원이 되어야 하며 그래야 율법사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당시 사람들의 삶과 완전히 유리된 다른 말로 표현해서 탈사회적인 율법중심주의에 매몰되었고 그것이 이중적인 위선적 행위로 나타났으며 삶의 정황과는 상관없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셨음을 우리는 복음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공동체 내에서는 지극히 자기 성찰적 태도를 진지하게 철저하게 가져야 함을 요구함은 물론,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는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비판을 하기 위하여 자기 성찰이 요구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산상설교는 정치적 사회적 설교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사회비판을 철저하게 하시는 예수께서 소극적으로 자기성찰이 더 앞서야 하고 다른 이를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를 펴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즉 자기 성찰은 성찰이되 자신이 가진 비판의 잣대에 스스로를 비추면서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곧 바리새인들의 탈사회적 율법주의로 인한 위선적 종교행위를 너희들도 가지고 있는지 늘 성찰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는 것은 혹 내가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에 묶인 것은 아닌가를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고 저는 봅니다.
우리사회에서 한국교회라는 전체적 토양위에서 살아온 우리들에게 신정통주의적 신학에 의한 신앙 정형이 없을 수 없으며 우리 내면에 그러한 신앙행태가 깊이 자리하여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탈 역사적이거나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적 신앙태도나 또 혹은 지나친 영성적 열광주의가 나에게도 내면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런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눈에 있는 들보가 아니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신정통주의 신앙에 서 있는 교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까봐 조심하고, 그 비슷하게 보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남녀평등한 신앙전통에 선다고 하면서 얼마만큼 그것에 철저합니까? 운영위원장을 여성으로 세운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여성자신들은 얼마만큼 평등의식에 서 있습니까? 지금이대로가 얼마나 편한 것인데 무엇 굳이 여성을 내세울 것 없지 않나 싶을 때도 많을 것입니다. 한박사님이 지난 창립기념주일에 향유부은 여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탈 가부장적 전통을 계승하며 사는 것이 새길교회의 자랑스러운 면모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 속에 자리잡은 가부장적 질서들을 떨치고 일어나는 일은 고통스럽기 조차 한 것입니다. 남성들은 가끔씩 자기 어머니를 매우 고양시켜 전합니다. 사생결단으로 자식 살리려고 온갖 희생을 하시는 어머니에 대한 찬양은 참으로 숭고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성찬양이 한편으로는 여성에게 계속 희생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됨을 경험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그렇게 찬양하는 어머니의 봉양은 자기 부인의 몫으로 요구하지요). 사람이 태어나서 자립하는 것이 제이 늦은 동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입니다. 동물들은 태어나자 곧 스스로 일어서고 활동을 하지만 인간은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기를 10년 넘게 하고도 모자라고 요즈음은 결혼 후에도 아프터 서비스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감당을 어머니들이 전통적으로 해왔습니다. 만약 인간의 자립이 어려서부터 실시된다면 어머니의 희생은 훨씬 더 줄어들 것입니다. 다리미질, 밥하는 것, 청소하는 것에서 자기에게 속한 것을 어머니를 시키지만 않아도 어머니들은 훨씬 자유로울 것입니다. 남편들이 하는 것은 설거지 해주는 것, 청소 해 주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자기가 으레히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안해도 될 것이지만 자기가 해주는 것입니다. 만약 집안 어느 구석에 먼지가 쌓이면 남편들은 왜 이렇게 먼지가 쌓였느냐고 역정을 냅니다. 여성들은 누구에게 따지지 않고 그냥 자기가 청소합니다. 우리 삶 속에 깊게 들어앉은 가부장적 사고로부터 여기 앉은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살기 어려워서 평안과 위로를 구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를 따르고 사랑하며 그분과 함께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앞길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로만 진행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들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편안한 예수의 길을 따르려고 나선 것이 새길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한국교회 전체를 향하여 높은 목소리를 낼 경우도 생길지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가 '아니오'를 용기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비판하는 파시즘적 신앙에 우리가 내면화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신앙형태는 지금과는 좀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러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요구됨은 지금 시대에 변화된 신앙형태가 요구되기 때문이고 새길교회는 그 변화의 대열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제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오늘도 나에게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예수의 말씀을 다시 깊이 생각하여 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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