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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욘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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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창모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 2001.5.6 주일설교 |
"유대인은 소화가 되지 않는 민족이다." 이 말은 수천 년 동안 외국에서 약소 민족으로 살아오면서도 자신의 뿌리와 정신을 상실하지 않은 채, 다시 나라를 건설한 유대인들의 끈질긴 민족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로부터 유래된 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지고, 큰 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게 되었는 데도 그는 소화되지 않은 채로 토해져 나온 것처럼, 세계의 많은 열강들이 여러 차례 유대인들을 삼킬 수는 있었으나 그들을 결코 소화해 내지는 못하였다는 말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어디서 살아가든지 유대인으로서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히틀러에게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될 때도 그들은 그들의 가슴에 노오란 다윗의 별표를 달고 다녔다. 그만큼 이들은 혈통과 민족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다.
소화되지 않는 민족
선지자 요나는 욥바 항구를 통하여 다시스로 도망갔었다(욘 1:3). 요나는 당시 이스라엘의 적대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그 성이 40일 후에는 멸망한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스페인의 다시스로 도망하는 배를 욥바에서 탔다. 그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1:9)라는 멋진 고백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공해(公海)'상으로 나가면 피할 수 있는 대상쯤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또는 결코 자신의 하나님은 자신만을 위한 존재로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풍랑을 만나 지중해에서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요나의 삶이 끊임없이 '내려가는( )' 삶이라는 사실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하려고 욥바로 내려갔으며(1:3a), 배를 타기 위해 포구로 내려갔다(1:3b). 그리고 배를 타고 배 밑으로 내려갔으며(1:5b), 결국 바다에 빠져 고기 뱃속에 들어가고 말았다(2:17). 자신의 신념체계와 지식세계에 갇혀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노아가 세운 도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도시 가운데 하나인 욥바는 전설에 의하면 노아가 세운 도시다. 홍수 이후 노아의 아들 야벳( )은 바로 이 항구의 이름인 욥바, 즉 "아름답다(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와 그 어원을 같이함으로써, 그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정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것이다.
욥바는 밋밋한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갑자기 이룩된 높은 돌기에 세워져 있어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특히 고대 도시 욥바와 독립 이후 새롭게 건설된 이스라엘 제 일의 도시 텔 아비브가 만들어 내는 새 것과 오래된 것과의 환상적인 조화는 출렁이는 지중해의 파도와 함께 언제나 장관을 이룬다. 욥바에는 박물관, 미술관, 공예 전시장, 해변가의 멋진 식당과 까페, 각종 문화 행사 등이 낮과 밤에 걸쳐 화려하게 펼쳐져 여행자들의 안식처로서도 최적의 장소로 꼽히고 있다.
'시몬 피장의 집'이란 문패를 단 사람
한편, 신약성경에서 이 도시는 베드로의 선교지였으며, 예루살렘으로부터 이곳으로 내려온 그는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병들어 죽자 그녀를 다시 살려냈으며(행 9:36∼41), 시몬이라 하는 피장(제혁업자)의 집에서 머물기도 하였다(행 9:43; 10:6). 이곳에서 베드로는 기도하던 중 환상을 보았으며, 그 결과 가이사랴에 있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였다(행 10장).
오늘날까지 욥바에는 스스로 시몬 피장의 집이라 일컫는 옥상이 있는 집이 있어, 순례객들에게 몇 푼의 돈을 받고 지붕에 올라가도록 하고 있는 한 페르시아로부터 온 아랍인이 살고 있다. 매우 뚱뚱하고 퉁명스럽기까지 한 그는 자신의 집이 베드로 사도가 기도하던 바로 그 집이라고 주장하며 문패(門牌)까지 커다랗게 달아 놓았으며, 아무도 그가 주장하는 바를 믿으려 드는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요나와 베드로의 공통점
구약의 욥바의 요나와 신약의 욥바의 베드로와는 그 신학적 의미가 매우 상통하는 점이 많다. 우선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부름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즉, 요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유대인으로서 이방 도시, 그것도 적대국의 수도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지구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탔으며, 베드로 역시 기도하는 중에 하늘에서 각종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담겨 있는 큰 보자기가 내려오며 이르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으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며 거절하였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은 이방인들과 접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결한 몸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음식도 철저하게 가려먹는 관습이 엄격히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조상들의 전통과 습관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우선 시 했다. 아니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옳은 길이라 믿었다.
까다로운 유대인의 음식법
카슈룻( )이라 일컬어지는 유대인의 음식법은 매우 까다롭기 이를 데 없어, 이방인과 함께 식탁을 같이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그렇지 못한 음식조차 엄격히 가려져 있다. 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하더라도 음식을 요리하는 모든 과정이 이 법에 저촉됨이 없어야 한다. 물론 같은 음식이라도 예를 들면 육류(肉類)와 유제품(乳製品)은 절대로 섞어 먹어서는 안 된다. 이를 담아 먹던 그릇도 섞어 사용하거나 같은 장소에 보관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음식과 식사에 관한 법규만 해도 한 권의 책이 될 정도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채식(채소와 곡식, 과일)만을 허락하였다(창 1:29).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노아의 홍수 이후 육식이 허락된다. 육식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가 불가피하게 따르므로 신중함이 요구되었으며, 육식을 위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소위 '거룩한 음식법'이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유대인은 피 먹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레 17:11)는 사상에 근거하여 인간이 피를 먹는 것은 다른 생명을 먹는 일로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판매되는 각종 고기는 모두 짜다. 가축을 잡을 때 피를 모두 제거하기 위해서 소금물에 얼마 동안 담아 놓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요리한 고기를 먹지 못하고 버려야 하는 경험을 한두 번쯤은 다 겪었을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유대인은 육류(肉類)와 유제품류(乳劑品類)를 함께 섞어 먹지 못한다. 예를 들면 고기와 치즈를 함께 넣은 피자는 먹을 수 없다. 성경에 "너는 염소 새끼를 어미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 23:19)는 말씀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그렇게 지키고 있다. 최소한 고기를 먹은 후 5∼6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 최고급 호텔에서조차 저녁식사 후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실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커피에 넣는 프림은 우유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햄버거 가게에서도 치즈버거를 살수가 없다. 얼마 전에 생긴 미국 햄버거 가게에서 치즈버거를 팔 수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정부와 업자들 간에 격렬한 시비가 일었던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치즈버거가 없는 햄버거 가게
물론 사용하는 그릇도 육류를 위한 접시, 포크, 나이프 등과 유제품류를 사용하는 것들이 엄격히 구별되어 있다. 유대인의 부엌이나 식당에서는 이러한 규칙이 엄격히 지켜지고 있어 싱크는 물론 그릇을 넣어 두는 장소도 각각 구별되어 있다.
또한 성경은 생선 가운데서도 먹을 수 있는 것과 금지되어 있는 것들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어류(魚類) 가운데서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들은 허락되나, 그 외의 것들은 금하고 있다. 상어·고래·미꾸라지 등은 지느러미는 있으나 비늘이 없으며, 오징어·낙지·문어·게·가재·새우·굴 등은 지느러미도 비늘도 없으므로 금지된 어패류들이다.
조류(鳥類)의 경우 가금류(家禽類) ― 닭·칠면조·비둘기 등 ― 는 먹을 수 있으나 야생 조류 ― 독수리·매·부엉이·갈매기 등 ― 는 안 된다. 육류(肉類)의 경우 되새김하는 위가 달렸으면서 동시에 발굽이 갈라진 동물만을 먹을 수 있다. 소·양·염소·사슴 등은 먹을 수 있지만, 말·당나귀·낙타 등은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하나인 짐승인 까닭에 먹을 수 없으며, 돼지는 굽은 갈라져 있으나 되새김을 하지 않으므로 역시 금지된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관습과 생각에 그렇게도 철저하여 스스로 정당하지 못하다 판단되면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거부할 수 있었던 요나와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깨달음을 받게 된다. 여기에 신앙, 아니 이데올로기의 함정(陷穽)이 도사리고 있다. 스스로의 주장을 절대시하여 결국 하나님을 상대화시켜버린 인간의 오류, 독선, 편견. 아는 것만 믿고 아는 것만 보는 인간들을 끌어 내 더 큰 세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 이 보다 더 큰 믿음은 없을 것이다.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는 바다 속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참회를 하고 니느웨에 들어가 도시를 변화시켰으며, 베드로 역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느냐?"는 핀잔을 듣고 그를 찾아 온 이방인 백부장이 머물던 가이사랴에 들어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방인으로서는 최초로 구원을 받게 하였다.
사람은 얼마나 오류(誤謬)에 빠지기 쉽고, 타락하기 쉽고, 속기 쉬운가?
옳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 과학자의 이론, 법관의 판결, 정치인의 정책, 경영자의 결정, 신학자의 교설 등 우리 인간의 생각은 언제나 잘못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것은 매우 평범한 진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평범한 진리를 자주 망각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잘못이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에도 겸허하게 인정하기를 거부하곤 한다. '무서운' 것은 바로 그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속아 산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 주신 예수님,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스로] 절대적 진리, 영원한 지식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을 인정할 때,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인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깨달음을 망각한 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 왔다. 근대 철학은 인식의 원천으로서 신적인 것,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배격했지만, 그 대신 이성(理性)이나 경험(經驗)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현대 문명은 과학(科學)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우리의 지식이 이성으로부터 기인하든지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든지 간에 모든 지식은 인간의 지식인 한 틀릴 수 있고, 그러므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위와 전통뿐만 아니라, 이성과 경험, 과학 역시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늘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지식(知識)이라고 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도 영원히 참임을 증명할 수는 없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어떤 것이 영원한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진리란 '규정적(規定的) 개념'이라기 보다는 '규제적(規制的) 개념'으로 이해된다. 지식을 탐구한다는 것은 진리를 포착(捕捉)[포획(捕獲) 혹은 소유(포세시옹)]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더욱 가까이 '접근(接近)'하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랑을 '소유'[포획]하려는 것은 사랑을 소유 가능한 어떤 규정된 물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며, 결국 사랑은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대상에 실증을 느끼고 버리고 만다. 마치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싫증을 느낀 아이처럼. '완전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행위이다. 보다 가깝게 다가가려는 것.] 진리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진보(進步)를 이루는 것이니까. '모든 위험'은 진리를 규정하는 것[닫아 놓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조금 '열어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을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고, 그 결과를 '내'가 얻으려는 생각과 행동에는 우리 주님이 참여하실 '빈 공간'이 자리하지 않게 된다. 내가 절대화되면, 주님은 계실 필요가 없게 된다. 베들레헴 여관에 '빈 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생각에 '빈 방'을 마련하고 그 문을 '열어 두는' 것, 여기에 주님이 개입(介入)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평범한 사실이지만 늘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틀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承認) 위에 '우리'가 터를 잡아야 하며, 그 터가 바로 주님이 계신 곳이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누가 보아도 합당치 않은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에 결단코 비교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 결국 지역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세계관과 신앙 의식을 가지고 있던 두 인물을 통해서 성경은 보다 우주적이고 드넓은 세계화(世界化)의 길을 터놓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팔레스타인 내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함으로써, 편협한 유대인의 사고를 부셔 뜨리는 참으로 혁명적인 사건을 이룩하신 도시가 바로 욥바 항구인 셈이다.
"바다를 담기에 지구는 너무 좁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나는 "복음을 담기에는 팔레스타인은 너무나 좁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소화되지 않는 민족
선지자 요나는 욥바 항구를 통하여 다시스로 도망갔었다(욘 1:3). 요나는 당시 이스라엘의 적대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그 성이 40일 후에는 멸망한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스페인의 다시스로 도망하는 배를 욥바에서 탔다. 그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1:9)라는 멋진 고백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공해(公海)'상으로 나가면 피할 수 있는 대상쯤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또는 결코 자신의 하나님은 자신만을 위한 존재로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풍랑을 만나 지중해에서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요나의 삶이 끊임없이 '내려가는( )' 삶이라는 사실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하려고 욥바로 내려갔으며(1:3a), 배를 타기 위해 포구로 내려갔다(1:3b). 그리고 배를 타고 배 밑으로 내려갔으며(1:5b), 결국 바다에 빠져 고기 뱃속에 들어가고 말았다(2:17). 자신의 신념체계와 지식세계에 갇혀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노아가 세운 도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도시 가운데 하나인 욥바는 전설에 의하면 노아가 세운 도시다. 홍수 이후 노아의 아들 야벳( )은 바로 이 항구의 이름인 욥바, 즉 "아름답다(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와 그 어원을 같이함으로써, 그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정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것이다.
욥바는 밋밋한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갑자기 이룩된 높은 돌기에 세워져 있어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특히 고대 도시 욥바와 독립 이후 새롭게 건설된 이스라엘 제 일의 도시 텔 아비브가 만들어 내는 새 것과 오래된 것과의 환상적인 조화는 출렁이는 지중해의 파도와 함께 언제나 장관을 이룬다. 욥바에는 박물관, 미술관, 공예 전시장, 해변가의 멋진 식당과 까페, 각종 문화 행사 등이 낮과 밤에 걸쳐 화려하게 펼쳐져 여행자들의 안식처로서도 최적의 장소로 꼽히고 있다.
'시몬 피장의 집'이란 문패를 단 사람
한편, 신약성경에서 이 도시는 베드로의 선교지였으며, 예루살렘으로부터 이곳으로 내려온 그는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병들어 죽자 그녀를 다시 살려냈으며(행 9:36∼41), 시몬이라 하는 피장(제혁업자)의 집에서 머물기도 하였다(행 9:43; 10:6). 이곳에서 베드로는 기도하던 중 환상을 보았으며, 그 결과 가이사랴에 있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였다(행 10장).
오늘날까지 욥바에는 스스로 시몬 피장의 집이라 일컫는 옥상이 있는 집이 있어, 순례객들에게 몇 푼의 돈을 받고 지붕에 올라가도록 하고 있는 한 페르시아로부터 온 아랍인이 살고 있다. 매우 뚱뚱하고 퉁명스럽기까지 한 그는 자신의 집이 베드로 사도가 기도하던 바로 그 집이라고 주장하며 문패(門牌)까지 커다랗게 달아 놓았으며, 아무도 그가 주장하는 바를 믿으려 드는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요나와 베드로의 공통점
구약의 욥바의 요나와 신약의 욥바의 베드로와는 그 신학적 의미가 매우 상통하는 점이 많다. 우선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부름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즉, 요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유대인으로서 이방 도시, 그것도 적대국의 수도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지구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탔으며, 베드로 역시 기도하는 중에 하늘에서 각종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담겨 있는 큰 보자기가 내려오며 이르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으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며 거절하였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은 이방인들과 접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결한 몸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음식도 철저하게 가려먹는 관습이 엄격히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조상들의 전통과 습관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우선 시 했다. 아니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옳은 길이라 믿었다.
까다로운 유대인의 음식법
카슈룻( )이라 일컬어지는 유대인의 음식법은 매우 까다롭기 이를 데 없어, 이방인과 함께 식탁을 같이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그렇지 못한 음식조차 엄격히 가려져 있다. 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하더라도 음식을 요리하는 모든 과정이 이 법에 저촉됨이 없어야 한다. 물론 같은 음식이라도 예를 들면 육류(肉類)와 유제품(乳製品)은 절대로 섞어 먹어서는 안 된다. 이를 담아 먹던 그릇도 섞어 사용하거나 같은 장소에 보관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음식과 식사에 관한 법규만 해도 한 권의 책이 될 정도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채식(채소와 곡식, 과일)만을 허락하였다(창 1:29).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노아의 홍수 이후 육식이 허락된다. 육식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가 불가피하게 따르므로 신중함이 요구되었으며, 육식을 위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소위 '거룩한 음식법'이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유대인은 피 먹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레 17:11)는 사상에 근거하여 인간이 피를 먹는 것은 다른 생명을 먹는 일로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판매되는 각종 고기는 모두 짜다. 가축을 잡을 때 피를 모두 제거하기 위해서 소금물에 얼마 동안 담아 놓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요리한 고기를 먹지 못하고 버려야 하는 경험을 한두 번쯤은 다 겪었을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유대인은 육류(肉類)와 유제품류(乳劑品類)를 함께 섞어 먹지 못한다. 예를 들면 고기와 치즈를 함께 넣은 피자는 먹을 수 없다. 성경에 "너는 염소 새끼를 어미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 23:19)는 말씀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그렇게 지키고 있다. 최소한 고기를 먹은 후 5∼6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 최고급 호텔에서조차 저녁식사 후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실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커피에 넣는 프림은 우유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햄버거 가게에서도 치즈버거를 살수가 없다. 얼마 전에 생긴 미국 햄버거 가게에서 치즈버거를 팔 수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정부와 업자들 간에 격렬한 시비가 일었던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치즈버거가 없는 햄버거 가게
물론 사용하는 그릇도 육류를 위한 접시, 포크, 나이프 등과 유제품류를 사용하는 것들이 엄격히 구별되어 있다. 유대인의 부엌이나 식당에서는 이러한 규칙이 엄격히 지켜지고 있어 싱크는 물론 그릇을 넣어 두는 장소도 각각 구별되어 있다.
또한 성경은 생선 가운데서도 먹을 수 있는 것과 금지되어 있는 것들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어류(魚類) 가운데서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들은 허락되나, 그 외의 것들은 금하고 있다. 상어·고래·미꾸라지 등은 지느러미는 있으나 비늘이 없으며, 오징어·낙지·문어·게·가재·새우·굴 등은 지느러미도 비늘도 없으므로 금지된 어패류들이다.
조류(鳥類)의 경우 가금류(家禽類) ― 닭·칠면조·비둘기 등 ― 는 먹을 수 있으나 야생 조류 ― 독수리·매·부엉이·갈매기 등 ― 는 안 된다. 육류(肉類)의 경우 되새김하는 위가 달렸으면서 동시에 발굽이 갈라진 동물만을 먹을 수 있다. 소·양·염소·사슴 등은 먹을 수 있지만, 말·당나귀·낙타 등은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하나인 짐승인 까닭에 먹을 수 없으며, 돼지는 굽은 갈라져 있으나 되새김을 하지 않으므로 역시 금지된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관습과 생각에 그렇게도 철저하여 스스로 정당하지 못하다 판단되면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거부할 수 있었던 요나와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깨달음을 받게 된다. 여기에 신앙, 아니 이데올로기의 함정(陷穽)이 도사리고 있다. 스스로의 주장을 절대시하여 결국 하나님을 상대화시켜버린 인간의 오류, 독선, 편견. 아는 것만 믿고 아는 것만 보는 인간들을 끌어 내 더 큰 세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 이 보다 더 큰 믿음은 없을 것이다.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는 바다 속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참회를 하고 니느웨에 들어가 도시를 변화시켰으며, 베드로 역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느냐?"는 핀잔을 듣고 그를 찾아 온 이방인 백부장이 머물던 가이사랴에 들어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방인으로서는 최초로 구원을 받게 하였다.
사람은 얼마나 오류(誤謬)에 빠지기 쉽고, 타락하기 쉽고, 속기 쉬운가?
옳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 과학자의 이론, 법관의 판결, 정치인의 정책, 경영자의 결정, 신학자의 교설 등 우리 인간의 생각은 언제나 잘못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것은 매우 평범한 진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평범한 진리를 자주 망각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잘못이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에도 겸허하게 인정하기를 거부하곤 한다. '무서운' 것은 바로 그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속아 산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 주신 예수님,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스로] 절대적 진리, 영원한 지식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을 인정할 때,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인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깨달음을 망각한 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 왔다. 근대 철학은 인식의 원천으로서 신적인 것,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배격했지만, 그 대신 이성(理性)이나 경험(經驗)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현대 문명은 과학(科學)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우리의 지식이 이성으로부터 기인하든지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든지 간에 모든 지식은 인간의 지식인 한 틀릴 수 있고, 그러므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위와 전통뿐만 아니라, 이성과 경험, 과학 역시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늘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지식(知識)이라고 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도 영원히 참임을 증명할 수는 없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어떤 것이 영원한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진리란 '규정적(規定的) 개념'이라기 보다는 '규제적(規制的) 개념'으로 이해된다. 지식을 탐구한다는 것은 진리를 포착(捕捉)[포획(捕獲) 혹은 소유(포세시옹)]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더욱 가까이 '접근(接近)'하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랑을 '소유'[포획]하려는 것은 사랑을 소유 가능한 어떤 규정된 물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며, 결국 사랑은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대상에 실증을 느끼고 버리고 만다. 마치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싫증을 느낀 아이처럼. '완전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행위이다. 보다 가깝게 다가가려는 것.] 진리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진보(進步)를 이루는 것이니까. '모든 위험'은 진리를 규정하는 것[닫아 놓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조금 '열어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을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고, 그 결과를 '내'가 얻으려는 생각과 행동에는 우리 주님이 참여하실 '빈 공간'이 자리하지 않게 된다. 내가 절대화되면, 주님은 계실 필요가 없게 된다. 베들레헴 여관에 '빈 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생각에 '빈 방'을 마련하고 그 문을 '열어 두는' 것, 여기에 주님이 개입(介入)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평범한 사실이지만 늘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틀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承認) 위에 '우리'가 터를 잡아야 하며, 그 터가 바로 주님이 계신 곳이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누가 보아도 합당치 않은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에 결단코 비교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 결국 지역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세계관과 신앙 의식을 가지고 있던 두 인물을 통해서 성경은 보다 우주적이고 드넓은 세계화(世界化)의 길을 터놓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팔레스타인 내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함으로써, 편협한 유대인의 사고를 부셔 뜨리는 참으로 혁명적인 사건을 이룩하신 도시가 바로 욥바 항구인 셈이다.
"바다를 담기에 지구는 너무 좁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나는 "복음을 담기에는 팔레스타인은 너무나 좁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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