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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겔3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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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권진관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1.5.27 주일설교 |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희망의 부재와 무기력감입니다. 우리가 사회 문제를 알고 있고 그것을 고치려는 의지까지는 있지만, 절대적인 역부족으로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뻔히 보이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 부정부패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선거제도가 문제가 많고 돈 많이 드는 제도라서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새만금 개발의 문제는 오늘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대적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투기나 환경파괴로 유휴 농토가 많아지고 기존의 논이나 밭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굳이 새만금 일대의 갯벌과 환경을 파괴하면서까지 농토를 만든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정부의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로 남을 것이 뻔합니다. 취임사 문건 파문으로 장관 임명후 43시간만에 사퇴한 장관이 생겼는데, 그의 아들이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는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체계적으로 발생되었고, 체계적으로 증폭된 무력감"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냉소주의이며 그것의 이면에는 현실적응적인 이기적 처세주의가 숨어 있습니다. 냉소주의는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어찌할 도리가 없으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일을 포기할 뿐 아니라,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매도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걱정하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을 사회 속에 있는 기의 흐름이 막혀 있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동학의 교주 최제우에 의하면, 시천주 (侍天主) 즉 하늘을 내 안에 모신다는 것은 곧 내유신령(內有神靈)인데, 이것은 외유기화(外有氣化)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즉, 안으로 신령을 모시면, 밖으로 신령이 다른 사물들과 작용하여 세상 속에 조화와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안으로 우주의 중심을 모신다함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이며, 다른 사람도 신령을 모시므로 우주의 중심이 되며, 이러한 우주의 중심들이 모여 평화와 정의를 이루는데 이것을 기화(氣化)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생명의 기(氣)가 막혀있어서 살아 있으나 죽어있는 상태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의 우리 사회의 무기력한 죽어 있는 모습을 마른 뼈들이 즐비한 에스겔의 골짜기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모습을 본문을 통해서 봅시다.
주의 영이 에스겔을 데리고 가서 한 골짜기에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 뼈들이 널려 있는 골짜기를 다니며 뼈들을 보았는데, 그 뼈는 아주 많았고, 그것들은 아주 말라있었다. 죽음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생명의 기(氣)가 이 뼈들 속에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를 인간의 몸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체인 몸을 보면 3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상단부인 머리 부분, 중단부인 가슴 부분, 그리고 신장을 중심으로 한 하단부가 있습니다. 하단부는 작은 의미에서 육체의 몸 전부를 가리킵니다. 육체의 이 세부분 모두는 중요합니다. 머리 즉 지성적 판단을 하는 뇌가 없으면 사람이 판단과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없으면 사람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육체를 단련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가슴으로 들어오는 숨인데, 숨이 멈추면 사람은 죽습니다. 건강하던 육체도 숨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내 죽게 됩니다. 심장과 허파 속에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을 통제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때 지성이 왜곡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 즉 도덕과 인간성이 있는 곳을 다스릴 수 있어야 지성이 진정한 것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지성은 많지만, 지식을 다스릴 수 있는 중심인 이 마음의 영역이 약하기 때문에 얄팍한 꾀나 처세술과 부정과 부패, 아부와 불의, 지성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정신적인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이 건강해야 몸과 뇌가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사회를 형성하는 3 가지의 요소들이 있는데, 사회의 육체에 해당하는 경제가 있고, 마음에 해당하는 중간부분인 시민사회가 있고, 뇌에 해당되는 국가기관이 있습니다. 사회의 육신에 해당되는 경제는 물적 토대이며, 시장과 기업,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사회의 마음에 해당되는 것은 시민사회로서 여기에 NGO들과 종교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학교, 언론기관 등이 시민사회 속에 들어 있어서 사회의 마음에 해당됩니다. 오늘날 언론기관이 왜곡됨으로 말미암아 사회 속에 생명의 기가 막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립대학에 무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집단들이 있어 파행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든지, 일류대학교가 우리 교육의 자원을 독식해버린다든지 하는 것이라든가, 공부는 안 하고 학벌만 따지고 있는 사회에서는 생명의 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뇌(지성의 자리, 즉 지적인 판단이 이루어지는 곳)에 해당하는 것이 국가가 되는데, 뇌는 몸의 전체 사령탑으로서 사회의 움직임을 통제합니다. 국가에는 국회와 행정부, 사법부가 있는데, 이것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뇌의 작용을 한다.
뇌와 마음과 육체 이 세가지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하는 것이 문제인데, 오늘날 경제지상주의자들은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고, 오늘날 정치권력에 눈먼 사람들은 무엇이 어찌됐든 국가권력이 최고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의 생명의 근원은 역시 숨입니다. 숨은 몸의 중간부분 즉 목구멍, 허파, 심장이 있는 것에 의해서 쉬어지는 것입니다. 숨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이 가슴이 있는 곳을 마음이 거하는 장소로 말합니다. 가슴(목구멍, 허파 심장의 자리)을 통해 기가 안으로 들어오므로, 이것을 통해서 우주의 생명의 기가 들어옵니다. 전체 사회가 건실하려면 따라서 시민사회가 건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민사회를 통하여 들어온 사회적 생명의 정기가 다른 곳 즉, 뇌에 해당하는 국가, 그리고 몸에 해당하는 경제 속으로 원활하게 소통되어야 합니다.
종교는 사회의 마음에 해당되는 분야입니다. 종교는 시민사회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가슴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슴을 통해서 생명의 영이 들어오듯이 종교를 통해서 생명의 영이 들어옵니다.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라고 해야 합니다. 시민사회는 전체사회의 가슴으로서 사회를 정화할 수 있고,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국가와 시장을 이끌어야 하는 원천인데, 그 원천 중의 원천이 바로 종교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전체 사회를 위해 생명의 기를 공급하는 원천은 시민사회이며, 그 중에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그 사회는 위기에 빠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이끌려간 뼈가 쌓여있는 골짜기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오눌날 한국교회와 기독교가 자기의 울타리에 갇혀서 시민사회에서 돕지 않고, 중요한 역군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시민사회의 생명력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에스겔 37장의 본문에는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영, 생기가 나옵니다. 이 말들은 모두 같은 히브리어 루아라는 말이고, 생명의 영을 말합니다. 이 루아를 신약시대에 와서 성령이라고 고백했다. 이 생명의 기운인 성령을 뼈들 속에 불어 넣으니까 마치 첫인간 아담이 진흙으로 빚어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생기인 네샤마를 불어 넣어주니까 움직이며 살아났던 것과 같이 이 마른 뼈들이 살고 근육이 붙고 일어나 움직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 생명의 영인 성령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생명의 영이 인간의 교만과 죄악 때문에 막혀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성격이 어떤 것이기에 우리 사회 전체에 생명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저는 이것을 성령을 표현하는 이름들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성령을 민중적인 성격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 민중적 속성은 무명성(無名性)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이름없는 분입니다. 성자인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도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YHWH라는 이름을 발음하기에 따라서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에게는 제인, 소피, 톰, 제임스., 샤만 등과 같은 이름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성령이라는 일반명사로 부르기도 하고 은유적으로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합니다. 성령은 어머니, 주님, 위로자인 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르기도 하고, 히브리어로 바람을 의미하는 루아(r a )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리스어로 프뉴마(pneuma), 라틴어로 스피릿의 원형인 스피리투스(Spiritus)라고 부릅니다. 빛, 물,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 등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모든 말들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명사입니다. 그러니 성령은 고유한 이름 철수와 순자와 같은 이름없습니다. 현실로 있기는 있는 존재인데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예전에 중년 여성들을 수원댁, 과천댁, 전주댁으로 불렀던 것과 비슷합니다. 또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옛날부터 누구누구의 어머니로 불리었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성령은 홀대를 받아왔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 개신교 교회는 모두 서방교회로서 성자의 교회였습니다. 성부와 성자에 성령이 종속되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무명성은 성화(聖畵)에서 잘 나타납니다. 성화들을 보면 성부와 성자 사이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비둘기만 있을 뿐입니다. 성부, 성자와 비둘기를 그 가치에 있어서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무명성은 성령의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우리보다 더 깊이, 더 가깝게 계시므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합니다. 성령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매체이며 영역이다. 그는 대상화되지 않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대하여 ber ihn 말할 수 없고 단지 그로부터aus ihm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주체로 서게 할 뿐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성부를 영화롭게 하고 그들을 향하도록 우리를 고취시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므로 이름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존재가 성령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와 실질적인 작업을 벌이는 원동력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존재방식은 민중의 역사 속에서의 존재방식과 매우 흡사합니다. 민중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지만, 역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따라서, 성령은 무명성, 힘약함, 연약함 속에서 생명력을 불러일으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모성적 위대함을 가진 존재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약함, 에스겔 골짜기에서 불었던 그 바람은 강하고 찬 바람이 아니라, 생명력을 일으키는 부드럽고, 잔잔한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약함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강함에 의해서 이끌려져왔습니다. 남성적인 힘이 이 세계의 문명을 어느 정도 발전시켜온 측면도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세계가 늘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의 흐름을 되돌리는 것이 온 인류가 직면한 과제입니다. 약함이 강함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가르쳐 주는 위대한 구원의 가르침입니다. 이제는 능동성보다는 수동성, 경직성보다는 유연함,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세계관보다는 생명적인 유기체적 세계관, 가부장적 획일적 지배보다는 여성적 다양성과 평등성, 경쟁보다는 조화, 힘의 지배보다는 겸손과 봉사, 과거에의 고착이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미래의 창조, 부유함보다는 가난함, 빠름보다는 여유와 느림이 더 높게 평가되는 세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변화를 위한 동기를 성령의 속성들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종말의 하나님의 통치는 온 인류가 하나님을 알 때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구원의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이러한 속성을 온 인류가 알고 체득하고 그것을 살 때에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철저한 민중적 여성적 존재 방식으로 세상을 위한 비전을 제시해 줍니다. 성령은 단지 매개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령이 매개하는 방식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미래상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우리를 끊임없이 새롭고 창조적인 경험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인도는 능동적이고 지배적인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수동적인 방식에 의해서 가능해집니다. 성령은 자신을 주체로 하지도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다만 다른 이들을 주체로 내세울 뿐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창조력을 발휘하여 최선의 것을 이룰 것을 기대하십니다.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을 성취하도록 지배자로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가장 창조적인 참여로 우리가 쌓아놓은 것들을 바로잡아 가도록 기다립니다.
이러한 생명의 기가 에스겔 골짜기에서 불었고, 이 생기가 마른 뼈들 속에 불어 넣어져서 그들이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이 생명의 기가 우리 사회 속에 불어넣어져서 기화(氣化)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종교가 제 역할을 하고, 시민사회단체들이 맡은 바 사명을 다하여 국가 사회를 이끌어 가고 경제를 튼튼하게 하고 바로 잡아가게 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의 골짜기에서 불었던 아훼의 영, 루아가 시민사회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 우리 사회 전체 속으로 파급해 들어가게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는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체계적으로 발생되었고, 체계적으로 증폭된 무력감"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냉소주의이며 그것의 이면에는 현실적응적인 이기적 처세주의가 숨어 있습니다. 냉소주의는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어찌할 도리가 없으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일을 포기할 뿐 아니라,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매도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걱정하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을 사회 속에 있는 기의 흐름이 막혀 있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동학의 교주 최제우에 의하면, 시천주 (侍天主) 즉 하늘을 내 안에 모신다는 것은 곧 내유신령(內有神靈)인데, 이것은 외유기화(外有氣化)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즉, 안으로 신령을 모시면, 밖으로 신령이 다른 사물들과 작용하여 세상 속에 조화와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안으로 우주의 중심을 모신다함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이며, 다른 사람도 신령을 모시므로 우주의 중심이 되며, 이러한 우주의 중심들이 모여 평화와 정의를 이루는데 이것을 기화(氣化)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생명의 기(氣)가 막혀있어서 살아 있으나 죽어있는 상태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의 우리 사회의 무기력한 죽어 있는 모습을 마른 뼈들이 즐비한 에스겔의 골짜기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모습을 본문을 통해서 봅시다.
주의 영이 에스겔을 데리고 가서 한 골짜기에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 뼈들이 널려 있는 골짜기를 다니며 뼈들을 보았는데, 그 뼈는 아주 많았고, 그것들은 아주 말라있었다. 죽음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생명의 기(氣)가 이 뼈들 속에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를 인간의 몸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체인 몸을 보면 3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상단부인 머리 부분, 중단부인 가슴 부분, 그리고 신장을 중심으로 한 하단부가 있습니다. 하단부는 작은 의미에서 육체의 몸 전부를 가리킵니다. 육체의 이 세부분 모두는 중요합니다. 머리 즉 지성적 판단을 하는 뇌가 없으면 사람이 판단과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없으면 사람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육체를 단련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가슴으로 들어오는 숨인데, 숨이 멈추면 사람은 죽습니다. 건강하던 육체도 숨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내 죽게 됩니다. 심장과 허파 속에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을 통제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때 지성이 왜곡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 즉 도덕과 인간성이 있는 곳을 다스릴 수 있어야 지성이 진정한 것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지성은 많지만, 지식을 다스릴 수 있는 중심인 이 마음의 영역이 약하기 때문에 얄팍한 꾀나 처세술과 부정과 부패, 아부와 불의, 지성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정신적인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이 건강해야 몸과 뇌가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사회를 형성하는 3 가지의 요소들이 있는데, 사회의 육체에 해당하는 경제가 있고, 마음에 해당하는 중간부분인 시민사회가 있고, 뇌에 해당되는 국가기관이 있습니다. 사회의 육신에 해당되는 경제는 물적 토대이며, 시장과 기업,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사회의 마음에 해당되는 것은 시민사회로서 여기에 NGO들과 종교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학교, 언론기관 등이 시민사회 속에 들어 있어서 사회의 마음에 해당됩니다. 오늘날 언론기관이 왜곡됨으로 말미암아 사회 속에 생명의 기가 막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립대학에 무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집단들이 있어 파행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든지, 일류대학교가 우리 교육의 자원을 독식해버린다든지 하는 것이라든가, 공부는 안 하고 학벌만 따지고 있는 사회에서는 생명의 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뇌(지성의 자리, 즉 지적인 판단이 이루어지는 곳)에 해당하는 것이 국가가 되는데, 뇌는 몸의 전체 사령탑으로서 사회의 움직임을 통제합니다. 국가에는 국회와 행정부, 사법부가 있는데, 이것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뇌의 작용을 한다.
뇌와 마음과 육체 이 세가지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하는 것이 문제인데, 오늘날 경제지상주의자들은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고, 오늘날 정치권력에 눈먼 사람들은 무엇이 어찌됐든 국가권력이 최고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의 생명의 근원은 역시 숨입니다. 숨은 몸의 중간부분 즉 목구멍, 허파, 심장이 있는 것에 의해서 쉬어지는 것입니다. 숨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이 가슴이 있는 곳을 마음이 거하는 장소로 말합니다. 가슴(목구멍, 허파 심장의 자리)을 통해 기가 안으로 들어오므로, 이것을 통해서 우주의 생명의 기가 들어옵니다. 전체 사회가 건실하려면 따라서 시민사회가 건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민사회를 통하여 들어온 사회적 생명의 정기가 다른 곳 즉, 뇌에 해당하는 국가, 그리고 몸에 해당하는 경제 속으로 원활하게 소통되어야 합니다.
종교는 사회의 마음에 해당되는 분야입니다. 종교는 시민사회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가슴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슴을 통해서 생명의 영이 들어오듯이 종교를 통해서 생명의 영이 들어옵니다.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라고 해야 합니다. 시민사회는 전체사회의 가슴으로서 사회를 정화할 수 있고,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국가와 시장을 이끌어야 하는 원천인데, 그 원천 중의 원천이 바로 종교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전체 사회를 위해 생명의 기를 공급하는 원천은 시민사회이며, 그 중에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그 사회는 위기에 빠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이끌려간 뼈가 쌓여있는 골짜기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오눌날 한국교회와 기독교가 자기의 울타리에 갇혀서 시민사회에서 돕지 않고, 중요한 역군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시민사회의 생명력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에스겔 37장의 본문에는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영, 생기가 나옵니다. 이 말들은 모두 같은 히브리어 루아라는 말이고, 생명의 영을 말합니다. 이 루아를 신약시대에 와서 성령이라고 고백했다. 이 생명의 기운인 성령을 뼈들 속에 불어 넣으니까 마치 첫인간 아담이 진흙으로 빚어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생기인 네샤마를 불어 넣어주니까 움직이며 살아났던 것과 같이 이 마른 뼈들이 살고 근육이 붙고 일어나 움직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 생명의 영인 성령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생명의 영이 인간의 교만과 죄악 때문에 막혀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성격이 어떤 것이기에 우리 사회 전체에 생명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저는 이것을 성령을 표현하는 이름들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성령을 민중적인 성격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 민중적 속성은 무명성(無名性)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이름없는 분입니다. 성자인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도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YHWH라는 이름을 발음하기에 따라서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에게는 제인, 소피, 톰, 제임스., 샤만 등과 같은 이름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성령이라는 일반명사로 부르기도 하고 은유적으로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합니다. 성령은 어머니, 주님, 위로자인 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르기도 하고, 히브리어로 바람을 의미하는 루아(r a )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리스어로 프뉴마(pneuma), 라틴어로 스피릿의 원형인 스피리투스(Spiritus)라고 부릅니다. 빛, 물,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 등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모든 말들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명사입니다. 그러니 성령은 고유한 이름 철수와 순자와 같은 이름없습니다. 현실로 있기는 있는 존재인데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예전에 중년 여성들을 수원댁, 과천댁, 전주댁으로 불렀던 것과 비슷합니다. 또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옛날부터 누구누구의 어머니로 불리었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성령은 홀대를 받아왔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 개신교 교회는 모두 서방교회로서 성자의 교회였습니다. 성부와 성자에 성령이 종속되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무명성은 성화(聖畵)에서 잘 나타납니다. 성화들을 보면 성부와 성자 사이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비둘기만 있을 뿐입니다. 성부, 성자와 비둘기를 그 가치에 있어서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무명성은 성령의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우리보다 더 깊이, 더 가깝게 계시므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합니다. 성령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매체이며 영역이다. 그는 대상화되지 않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대하여 ber ihn 말할 수 없고 단지 그로부터aus ihm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주체로 서게 할 뿐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성부를 영화롭게 하고 그들을 향하도록 우리를 고취시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므로 이름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존재가 성령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와 실질적인 작업을 벌이는 원동력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존재방식은 민중의 역사 속에서의 존재방식과 매우 흡사합니다. 민중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지만, 역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따라서, 성령은 무명성, 힘약함, 연약함 속에서 생명력을 불러일으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모성적 위대함을 가진 존재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약함, 에스겔 골짜기에서 불었던 그 바람은 강하고 찬 바람이 아니라, 생명력을 일으키는 부드럽고, 잔잔한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약함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강함에 의해서 이끌려져왔습니다. 남성적인 힘이 이 세계의 문명을 어느 정도 발전시켜온 측면도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세계가 늘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의 흐름을 되돌리는 것이 온 인류가 직면한 과제입니다. 약함이 강함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가르쳐 주는 위대한 구원의 가르침입니다. 이제는 능동성보다는 수동성, 경직성보다는 유연함,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세계관보다는 생명적인 유기체적 세계관, 가부장적 획일적 지배보다는 여성적 다양성과 평등성, 경쟁보다는 조화, 힘의 지배보다는 겸손과 봉사, 과거에의 고착이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미래의 창조, 부유함보다는 가난함, 빠름보다는 여유와 느림이 더 높게 평가되는 세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변화를 위한 동기를 성령의 속성들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종말의 하나님의 통치는 온 인류가 하나님을 알 때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구원의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이러한 속성을 온 인류가 알고 체득하고 그것을 살 때에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철저한 민중적 여성적 존재 방식으로 세상을 위한 비전을 제시해 줍니다. 성령은 단지 매개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령이 매개하는 방식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미래상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우리를 끊임없이 새롭고 창조적인 경험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인도는 능동적이고 지배적인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수동적인 방식에 의해서 가능해집니다. 성령은 자신을 주체로 하지도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다만 다른 이들을 주체로 내세울 뿐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창조력을 발휘하여 최선의 것을 이룰 것을 기대하십니다.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을 성취하도록 지배자로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가장 창조적인 참여로 우리가 쌓아놓은 것들을 바로잡아 가도록 기다립니다.
이러한 생명의 기가 에스겔 골짜기에서 불었고, 이 생기가 마른 뼈들 속에 불어 넣어져서 그들이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이 생명의 기가 우리 사회 속에 불어넣어져서 기화(氣化)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종교가 제 역할을 하고, 시민사회단체들이 맡은 바 사명을 다하여 국가 사회를 이끌어 가고 경제를 튼튼하게 하고 바로 잡아가게 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의 골짜기에서 불었던 아훼의 영, 루아가 시민사회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 우리 사회 전체 속으로 파급해 들어가게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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